드래곤 라자 4권 – 제8부 : 인간의 무기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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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4권 – 제8부 : 인간의 무기 6화

6

나도 놀랐지만 샌슨은 정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레니의 뒤통수 쪽에서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며 소리없이 환호를 보내었고 그 얼굴을 보느라 난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다. 네리아는 환한 얼굴이 되더니 이루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이루릴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하! 그녀는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아까부터 말하려 했던 것이군.

난 기운이 펄펄 나서 질문했다.

“아, 미안합니다. 아까 저기 저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예. 진짜 아버지는 아니에요. 저분이 절 맡아서 키워주셨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아, 그럼 레니 양의 친부모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저도 잘 몰라요. 전 어릴 때 이 항구에 어떻게 들어왔대요. 어디서 나타난 여행자가 절 데리고 왔대요. 그 여행자도 제 부모는 아니었는데, 어머, 죄송해요. 제 이야 기를 늘어놓았군요.”

“아뇨,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예? 아, 예.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걸요. 그 여행자는 이 펍에 절 맡겨놓고는 배를 타고 떠났대요. 그러곤 돌아오지 않았어요. 헤헤. 흔한 이야기지요?”

레니는 자신의 우울한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단단한 아가씨로군. 바닷바람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레니라는 이름은, 그럼?”

“그 여행자가 절 그렇게 불렀대요.”

여행자라…………. 도대체 어떤 여행자인 걸까? 흠. 어쨌든 이젠 확인의 순간이군. 샌슨과 네리아는 누가 보면 우리들에게 덮쳐들려고 작정하고 있다고 판단할 정도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짐짓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저, 레니 잠시 실례 좀 해도 될까요?”

“예? 무슨 말씀이죠?”

“사실, 우리는 어떤 소녀를 찾고 있어요. 고아 소녀지요. 우리는 여기 엘프분의 말을 듣고 바로 당신을 찾아왔어요.”

“예?”

레니는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놀라지 말아요. 우리는 어쩌면 당신이 우리들이 찾던 그 소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저, 저를요?”

레니는 크게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진정시켜야 되지? 에라, 그냥 밀고 나가자.

“우리는 절대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소녀를 꼭 찾아야 되는 임무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소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붉은 머리이고, 10대 후반이며, 그리고 고아라는 겁니다.”

“저, 저랑 같네요?”

“예. 그래서 이 머나먼 일스 공국까지 찾아온 겁니다.”

“저, 왜 그 소녀를 찾는데요?”

“그건 지금으로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은 당신이 그 소녀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럼, 그럼 어떻게 절 확인하실 거죠? 전 어릴 때의 기억 같은 것은 없어요. 뭔가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난 제레인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계시지 않습니까.”

제레인트는 놀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가 다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 역시 날 바라보았다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내겐 너무 우습게 보였지만 난 엄숙하게 말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께서 그 디바인 파워로 당신을 확인하실 겁니다.”

제레인트는 먼저 레니에게 좀 어설픈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날 쳐다보았다.

“어, 후치. 그러니까 뭘 확인하면 되는 거지? 이 소녀가 너희 일행이 찾는 그 소녀인지를 확인하면 되는 거야?”

“예. 그래요.”

그때 레니가 재빨리 말했다.

“저, 설마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지요? 무슨 준비를 해야 된다거나……………….”

그러자 제레인트는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런 것은 없습니다. 벌써 끝났으니까요.”

“끝났다고? 벌써?”

네리아가 놀라서 외쳤다. 레니도 놀라는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어요.”

“뭐라고?”

이건 샌슨의 놀라는 목소리다. 나도 놀란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주점의 다른 손님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들의 관심사로 돌아 갔다.

제레인트는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데요? 아마 당신들의 질문이 잘못된 것 같아요.”

“질문이 잘못되었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당신들은 정확하게 어떤 사람을 찾고 있지요? 붉은 머리 소녀, 10대 후반, 고아의 소녀라면 내게 물어볼 것도 없이 확실하게 이 소녀가 맞아요. 테페리께서 날 통해 확인할 필요도 없지요.”

샌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지요.”

이루릴은 손을 들어 레니를 가리켰다. 레니는 움찔하면서 불안한 눈으로 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레니를 가리킨 채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테페리의 지팡이, 그 지팡이를 쥔 자의 권능에 의지하여 묻겠으니, 이 소녀에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있나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난 잠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분명히 대답했다. ‘예.’.

환호를 올려야 되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되나? 그러나 샌슨은 싱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군요, 그럼.”

네리아는 멍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샌슨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박수를 딱 쳤다.

“뭐가 그리 간단해! 됐네! 그럼 레니가 바로 그 소녀구나!”

샌슨도 그제야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하. 그렇군. 다행이군.”

이루릴도 미소를 지었고 나도 멍청한 웃음을 지었다. 레니는 아직 뭐가 뭔지 몰라서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우리들 모두가 웃고 있는 것을 보다가 레니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자, 잠깐만요. 드래곤 라자라니요? 제가요?”

샌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이 바로 우리들이 찾던 드래곤 라자입니다.”

“드래곤 라자면…… 드래곤을 부리는 그 드래곤 라자 말인가요? 제가요? 말도 안 돼요!”

레니는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제가요? 제가 드래곤 라자라고요?”

주점의 손님들이 다시 우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속해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레니의 입에서 나온 드래곤 라자라는 말에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바 쪽에서는 주인도 놀란 얼굴이 되어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난 당황해서 말했다.

“잠시만요, 레니. 설명할게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보세요. 천천히 설명을 들어보면 이해가 될 거예요.”

레니는 어쩔 줄 모르고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대로 뒤로 돌아 달아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레니 양.”

“예, 예?”

“당황스럽겠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앉아보세요.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설명하겠습니다. 그 다음 우리들의 설명이 합당한지 판단해 보세요. 그러니 먼저 우리들에 게 설명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레니는 한참 동안 이루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 주춤거리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자 손님들은 의아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고개를 돌렸 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들쪽으로 비상한 관심을 쏟는 것은 확실했다.

그때 바 쪽에 있던 주인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만. 난 그레이든이라 하오.”

“아, 반갑습니다. 그레이든 씨. 난 샌슨 퍼시발입니다. 그렇잖아도 주인장께도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거기 좀 앉으시지요.”

그레이든은 역시 의자를 끌어오더니 레니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말했다.

“댁들은 바이서스 분들이지요? 그런데 드래곤 라자라는 것은 무슨 말이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레니 양이 드래곤 라자라고 생각합니다.”

레니는 마치 치한이라도 만난 소녀가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듯이 그레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레이든은 마치 딸을 보호하는 아빠처럼 레니 쪽으로 몸을 기울이 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여기 계신 테페리의 프리스트께서 확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레이든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의 확신은 곧 테페리의 확신입니다. 레니 양은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레이든은 불안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는 애처로운 눈으로 그레이든을 바라보았고 그레이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가……………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레이든은 샌슨을 도전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도대체 뭣들 하는 사람들이오?”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폭풍과 코스모스의 에델브로이의 총본산 그랜드스톰에서 의뢰를 받고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소녀를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엔 제레인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우리나라에는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약속되는 가문이 있습니다.”

그레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할슈타일 가문 말이지?”

“아시는군요. 그 할슈타일 가문에서 과거 언젠가 어떤 소녀가 실종되었습니다. 우리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그 소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도중, 마침내 이곳까지 이르러 레니 양이 바로 그 소녀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나와 네리아는 감탄한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의젓하다니. 음. 멋있는데? 확신에 찬 샌슨의 음성은 도저히 반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그레이든 은 이마를 짚었다가 말했다.

“그럼, 레니가 할슈타일 가문의 딸이란 말입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든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 두세 명의 남자들에게 고함질렀다.

“이봐! 오늘 장사 끝이다. 어서들 일어나.”

남자들은 모두 그레이든에게 불평 섞인 시선을 보내었지만 그레이든은 완고한 표정을 지었고 남자들도 별말 없이 일어났다. 그들이 술값을 치르고 나가자 그레이든 은 술집의 문을 닫아버리고는 다시 우리들 쪽으로 걸어왔다.

“이제 조용하니 터놓고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말대로라면 레니는 할슈타일 가문의 후손으로, 그러니까 당신 나라의 귀족이라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맙소사…………, 레니. 멋지군, 그래?”

그레이든은 얼빠진 표정으로 레니를 바라보았지만 레니는 여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그레이든은 사나운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요?”

“예?”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찾아온 거요? 왜 지금껏 찾지도 않다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우리들을 찾아온 거요? 그렇소. 우리들이라 고 말했소. 레니와 난 피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15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온 사이오. 레니는 나에게 친딸이나 다름없소.”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 말은 간단해서 좋군. 당신들이 뭘 이해한단 말이오? 당신들이 이해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레이든의 사나운 기세에 우리는 모두 죄나 지은 것처럼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샌슨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그레이든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언제 데려갈 거요?”

“아빠!”

레니는 그레이든에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레이든은 레니의 손을 꽉 쥐었다.

“레니야.”

“싫어요! 전 안 갈 거예요! 싫어요!”

그레이든은 묵묵히 레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니야. 왜 이제껏 너에게 내 성을 주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레니는 울먹거리며 그레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든은 말했다.

“난 널 내 친딸이라고 생각하며 키웠어. 그 점만은 뱃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맹세를 할 때 거론하는 절망의 바다에 걸고 맹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널 내 친딸로 생각한다고 해서 너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넌 너의 친부모를 찾아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길지도 몰랐거든.”

레니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숙연한 표정으로 그 부녀를 바라보았고 그레이든은 레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난 네가 친부모를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 너에게 성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던 거야. 다행히도, 네가 귀족의 딸이었구나. 허허.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정말 다행한 일이야.”

“뭐가, 뭐가 다행이에요! 아빠, 아빠가 나의 아버지예요!”

레니는 울먹이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레이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많은 생각을 했다. 간혹 영영 너의 친부모를 알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생각도 했지. 그럴 경우라면 네가 고아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었기 때문에 너에게 좋지 않은 미래를 주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했었지. 정말 괴로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내 결정은 옳았어. 허허, 아마 나에게 테페리의 은총이 내렸나 보다.”

그레이든의 눈가에 굵은 눈물이 맺혔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젠 말을 높여야 되나? 레니 아가씨.”

“아빠!”

레니는 바락 고함을 지르고는 곧 일어나서 달려가 버렸다. 그녀는 고래 머리뼈로 만들어진 그 주방 입구로 달려가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그레이든은 그 뒷모습을 바 라보다가 눈을 거칠게 비비고는 다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시오. 자기 방에 올라갔을 거요.”

“아, 예.”

그레이든은 다시 제레인트를 흘깃 보았다가 말했다.

“테페리의 성직자께서 확인하셨으니, 아마 확실하겠군. 그렇다면 좋소.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인해야겠소.”

그레이든은 사나운 눈길로 샌슨을 노려보았다.

“왜 이제야 찾아온 거요? 당신들이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15년 동안 행복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이제야 그 행복을 깨는, 그런 권한까지 있지는 않을 것이오!” 샌슨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했다.

“저, 저 우리는 귀족이 아닙니다.”

“뭐라고? 어쨌든 귀족의 심부름꾼 아니오!”

“아, 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그랜드스톰의 의뢰를 받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레이든은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그는 우리들의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잠깐, 그럼 그게 무슨 말이오? 할슈타일 가문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슈타일 가문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찾아온 것이오? 그 가문과는 상관도 없으면서?”

샌슨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허, 이거 참. 그러고보니 우리 입장이 좀 이상하긴 하군 그래. 할슈타일 가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그 잃어버린 딸을 찾아왔는 걸? 그 이유는……

칼이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딸을 찾으면 안 되는 이유.

설마 이걸까? 칼은 레니가 보나마나 지난 세월 동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을 짐작했고, 따라서 지금 그녀에게 원래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 라는 것을 짐작했다는 것인가? 설마.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이유가 도대체 뭘까?

샌슨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샌슨은 조심스럽고 진지한 태도로 설명했다.

“우리나라에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이 있습니다. 그 드래곤은 언젠가 우리나라에 엄청난 해를 입혔습니다. 만일 그 드래곤에게 좀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우리나 라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레이든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어 아오. 수면기에 들어서지 않았소?”

“예. 갈색 산맥에 있는 그의 레어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갈색 산맥의 드워프들이 그 크라드메서가 다시 깨어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레이든은 숨막히는 얼굴로 말했다.

“다시 깨어난다고?”

“예. 드워프들은 그 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드래곤이 다시 깨어나게 된다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강력한 이그누스 드래곤은 대륙 전체의 위험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대처가 필요합니다. 많은 고명하신 분들의 의견 교환 끝에, 저희들은 크라드메서에게 드래곤 라자를 맺어주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이라 고 결론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레니를?”

“예…………….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륙에서 더 이상 드래곤 라자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슈타일 가문의 후손인 레니 양은 확실한 드래곤 라 자이며, 어쩌면 가장 강한 드래곤 라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레니 양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레이든은 창백한 얼굴로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성함이?”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예. 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대답을 하지 않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이 말이 진실입니까?”

“진실입니다.”

이루릴이 너무도 간단히 시인해 버리자 그레이든은 힘이 쭉 빠지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었다.

“하, 이런……. 오늘은 도대체 말싸움도 못 해볼 사람들만…………… 찾아오는군. 테페리의 프리스트에 엘프라…………, 오늘이 내 인생 최악의 최악의 날인가? 아니면 내 가…………, 내가 가장 처절한 가을을 맞이해 버린 건가? …… 이게 마법의 가을인가?”

그레이든은 혼잣말을 하듯이 띄엄띄엄 말했고 우리는 모두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든은 손을 치우더니 갑자기 바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바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더니 병째로 주욱 들이켰다. 우리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레이든은 술병을 든 채 다시 걸어왔다.

“그렇다면, 저 애를 데리고 갈색 산맥으로 그 드래곤을 찾아가는 거요?”

“그렇습니다.”

“미쳤어……………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군. 이게 핸드레이크와 페어리퀸이 나오는 옛이야기인가? 레니가, 내 주방에서 빈 술병이나 닦아가며 자라온 레니가 드래곤을 만 나러 초원의 나라 바이서스로 찾아가서, 그러곤 크라드메서를 만난다고? 최악의 이그누스 드래곤을?”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됐소! 엘프가 확신했고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확신했소! 제기랄. 여기서 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면 내가 미친 놈이겠지.”

그레이든은 다시 술병을 들이켰고 우리는 불편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레이든은 술병을 탕 내리면서 말했다.

“어떻게 되는 거요?”

“예?”

“만일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갑자기 우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샌슨은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이, 이런. 그 생각은 못 해봤는데? 샌슨은 입을 꽉 다물었다가 말했다.

“레니 양의 안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목숨을 건 기사들을 두었던 그 많은 레이디들이 죽어갔던 모양이지?”

그레이든의 비아냥거림은 왠지 칼의 그것과 비슷했다. 샌슨은 무안한 얼굴이 되었지만 다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전 기필코…………….”

“됐소! 필요없어. 그러면 저 아이는 다시 돌아오는 거요?”

“예?”

샌슨은 다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이런.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만일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니, 이건 받아들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 니다. 레니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할슈타일 가문으로 돌아가야 되나? 아니면 여기 그레이든에게로 돌아와야 되나? 난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리고 싶 은 생각이 들었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딸로서 레니를 찾는 것이 아니다. 품종 개량의 도구로서 레니를 찾는 것이다! 레니는 반드시 여기 그레이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건 확실하다.

그때 네리아가 처음으로 말했다.

“저희들에게는 레니의 거취를 결정할 권한이 없어요.”

“뭐요?”

그레이든은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우리들 모두가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레니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봐요. 그녀는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아니, 어린애라도 그런 것을 결정할 수는 있을 테지요. 아무리 어린애라도 누가 더 자신을 사랑하 는 사람인지도 모를까요?”

그레이든은 멍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알 거예요. 우리는 그녀의 결정에 따르겠어요. 당신, 좋은 기회를 잡은 거예요. 호호호.”

“뭐라고요?”

“후작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들이 찾아온 것 말이죠. 우리는 후작가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레니의 의사만 존중할 거예요. 레니가 여기로 돌아오길 원한 다면 책임지고 여기로 돌려보내 드리겠어요. 하지만 레니가 귀족 부모를 원한다면 당신도 그 뜻에 따라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실 테지요. 마음의 부담이 있었으면서 도 15년 동안이나 성을 주지 않았던 당신이니까.”

그레이든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레니가 우리와 함께 떠나야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요. 크라드메서는 너무너무 위험해요. 이건 대륙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고,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이 든 레니든 할슈타일 가문에서든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어요. 아시겠지요?”

“아, 어, 알겠소. 그렇다면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된다면?”

네리아는 한쪽 눈을 가볍게 깜빡여 보이고는 말했다.

“난 드래곤 라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 그녀는 어쩌면 크라드메서를 타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만일 그녀가 여기로 돌아오고 싶어할 경 우에 한해서.”

샌슨은 감탄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도 정말 놀랐다. 네리아가 저렇게 말을 잘하다니. 그레이든은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었다.

“알겠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 대륙의 사활이란 말이지. 허헛! 이거 정말 옛이야기로군. 정말 핸드레이크와 페어리퀸이 나오는 옛이야기야.”

“허락하시는 거죠?”

“허락하지 않을 수 있소? 레니에겐 내가 말하겠소. 언제 출발하실 거요?”

네리아는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허둥지둥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그레이든은 샌슨을 흘겨보며 말했다.

“알았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헛, 그래도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게는 해주는군.”

“아, 예………….”

그레이든은 다시 한번 삼엄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분명한 거죠? 오로지 레니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거?”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샌슨은 다부지게 말했다. 설령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 부활해서 일렬로 늘어선 채 맹세를 한다 해도 지금의 샌슨만큼이나 믿음을 주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된 다.

웨일스 본야드를 빠져나왔다. 레니는 물론 나오지 않았고 그레이든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말을 끌어내어 올라타면서 다시 한번 그 고래의 묘지를 바라보았다. 그 들 부녀가 호젓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우리는 내일 아침에 여기로 오기로 했다.

샌슨은 네리아에게 말했다.

“야, 네리아. 정말 감탄했어.”

“헤에. 그랬어? 하지만 그 이야기 그만해. 가슴이 아파.”

“그래? 음. 하지만 넌 잘 말했는데. 나도 네 말에 그대로 찬성이야.”

네리아는 샌슨을 노려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내가 한 말? 좋은 말이지. 너무너무 옳은 말이지. 하지만 그 아이에게 그런 결정을 내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아?”

“……어쩔 수 없잖아.”

“맞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그게 슬픈 일이라는 것도 어쩔 수 없어.”

네리아는 매몰차게 대답했고 그래서 샌슨의 처지는 매우 곤궁해졌다.

제레인트는 노새 위에서 참으로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기도를 올리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루릴은 반대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나는 다시 고래의 무덤을 되돌아보았다. 어쩌면 오늘 밤은 그들 부녀의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지.

갑자기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그 마지막 날, 마치 친구 집 나들이나 가듯이 가볍게 떠나셨지. 그리고 나도 그렇게 행동했고. 하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레니를 데리고 가서 크라드 메서를 진정시키고, 보석을 준비해서 아무르타트에게 가져다주면,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시는 것이다.

하지만 레니는?

“바다가 보이는 방이 없다니요! 일부러 밖에서 그런 방이 있는지 둘러보고 들어왔는데!”

“2층은 꽉 찼소.”

“3층은요!”

“그 방은 나와 우리 가족들의 방이오.”

여관 주인의 말에 네리아는 말이 막혀버렸다. 샌슨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더 돌아다니기에도 늦었다. 그냥 여기서 자지. 밤바다를 못 본다고 해서 큰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이잉. 싫어! 나가자.”

“뭐야? 이봐, 네리아.”

“언제 또 돌아올 거라고! 안 돼. 빨리 나가자.”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래서 샌슨과 내가 주인장에게 사과를 하고 나와야 했다. 밖으로 나오니 네리아는 발돋움을 하며 바다 쪽으로 창이 난 건물을 찾아보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한숨을 쉬었고,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고, 샌슨은 소리없이 투덜거렸지만, 네리아는 기어코 그런 여관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청새치의 노래’라는 좀 이상한 이름의 여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항구 한쪽에, 길게 바다 쪽으로 나 있는 곳에 위치한 여관이라 밤바다의 풍경은 확실히 아름다울 것 같았지만 건물이 너무 낡은 것 같다. 흐음. 게다가 시내에서도 꽤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네리아는 히죽거리며 여관으로 들어갔고 우리들도 더 돌아다니기에 지쳐 서 그냥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

여관 안은 그래도 꽤 튼튼해 보이는 건물이었고, 그리고 주인도 마치 이 여관처럼 겉으로 보기엔 허술한 듯했지만 꽤 야무진 눈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는 우리들을 보더니 말했다.

“방은?”

간단하군. 샌슨이 방을 잡는 동안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눈길을 잡았다. 흐음. 이 주인장은 아마 젊었을 적에 수레꾼이었나 보지? 그런데 저 수레바퀴는 정말 이상한데. 왜 바퀴 둘레에 촘촘하게 손잡이가 달려 있는 거지? 저래가지고서야 굴러가지도 않을 텐데?

제레인트는 내 시선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타륜이야. 아마 주인장이 젊었을 적에 조타수였나 보지.”

윽. 조용히 있길 잘했다.

어쨌든 방 두 개를 잡자마자 네리아는 이루릴을 이끌고는 욕탕으로 돌진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나 이거 참.

“밤바다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떠들더니.”

샌슨은 투덜거리며 주방장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주방장은 샌슨의 주문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먹어보라는 표정으로 4인분이 넘을 듯한 요리를 대령했 고, 샌슨은 남김없이 먹어치워 주방장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잠시 후, 취한 선원들이 우루루 여관으로 들어왔다. 선원들은 모두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몇 군데의 술집을 전전하다가 이제야 잠자리를 찾아드는 모양이었다. 우 리들은 홀이 소란스러워 술병 하나와 잔 몇 개를 들고서 방으로 올라왔다.

방은 침대가 두 개 있었는데 이층 침대였다. 허허, 그것 참. 무슨 침대를 선반처럼 저렇게 쌓아두었지? 제레인트는 우리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뭐가 잘못되 었는지 두리번거리다가 머리를 딱 치면서 말했다.

“아, 이건 배에서 사용하는 침대를 흉내낸 겁니다. 배 안은 좁아서 침대를 많이 만들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침대를 위아래로 쌓는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위로 올라갈 준비를 갖추었다. 나는 그에게 매달려 말리느라 한참 동안 애써야 했다. 도대체 저 덩치로 윗침대에 올라가겠다니!

샌슨을 말리고 나서 난 갑옷을 벗어던지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네리아가 고생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고생이었어.”

샌슨은 곧 내 등 뒤로 다가오더니 나와 같이 밤바다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시커먼 먹물, 아니,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해원, 그리고 그 수면 위로 달빛의 조각들이 부서져 떠다니고 있었다. 루미너스와 셀레나 모두 천공에 있는 시 간이라 밤하늘은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지만 바다 위에는 부서지는 달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다 표면의 달빛도 거대한 해원의 암흑에 감싸여 그 빛이 퇴색해 있었다. 마치 무의 공간처럼 보였다. 칠흑 같은 바다는 원근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오히려 바다보다 가까이 느껴져 마치 하늘이 라도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은데.”

이런 샌슨 같은! 아, 샌슨이지.

샌슨은 방 한귀퉁이에 놓여 있던 테이블을 끌고 오더니 창가에 딱 붙이고는 침대를 의자삼아 앉았다. 제레인트 역시 침대에 앉았고 난 나의 독특함을 추구하는 경향 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층 침대로 올라가 창을 굽어보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멋진 방의 멋진 밤이로군.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창밖으로 검은 것이 휘익 지나갔다. 갈매기인가?

“응? 박쥐다?”

샌슨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난 침대에서 몸을 쭉 내밀어 밖을 보려고 하다가 굴러 떨어질 뻔했다. 박쥐라고? 샌슨은 창밖을 그윽하게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좀 어떨까.”

아, 그렇군. 아프나이델. 그 박쥐가 죽어서 아프나이델은 큰 충격을 받았었지. 그 박쥐..

이루릴.

샌슨은 큭큭거리기 시작했고 나도 침대 위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제레인트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샌슨은 별 말없이 술잔만 들어올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 다. 똑똑.

“예?”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네리아와 이루릴이었다. 샌슨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네리아와 이루릴은 놀란 표정이 되었고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왜들 웃는 거야?”

“아, 하하하. 그, 그냥 그런 일이 있어. 푸히히히!”

네리아는 이마에 가로주름을 만들더니 말했다.

“무슨 웃음소리가 그래? 어쨌든 잘 자.”

“아, 그래, 그래. 킥킥킥.”

샌슨은 네리아의 밤인사를 받으면서도 계속 웃었다. 이루릴은 우리들이 자신 때문에 웃는 것인 줄도 모르고는 그저 미소를 짓더니 나갔다. 우리는 계속 웃으며 술잔 을 비웠고, 그래서 제레인트는 우리를 매우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쾅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거야, 내 머리를 두드리는 거야? 난 머리를 마구 휘저으며 일어나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으윽. 난 이층 침대에 누워 있었지. 그래서 천 장이 꽤 가깝다. 창문을 돌아보다가 난 눈을 껌벅였다. 지독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이른 낮인가 보다? 어라? 그런데 낮치고는 햇살의 궤도가 퍽 낮은데. 겨 울이 벌써 이렇게 가까운 것인가?

“쾅쾅쾅쾅!”

“이봐! 그렇게 두드려서 문이 부서지겠어?”

난 홧김에 그렇게 말해 주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샌슨은 다리 하나를 침대 밖에 던져둔 채 잠들어 있었고 제레인트는 그와 정반대로 몸을 있는 대로 오그리고 잠 들어 있었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세요! 이봐요! 바이서스에서 오신 분들 맞아요?”

어라? 웬 소녀의 목소리………, 레니의 목소리잖아?

난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피해서 문으로 걸어갔다. 샌슨과 제레인트도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레니가 튀어들어오듯이 들어왔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와! 숙취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이봐요, 제발! 당신들 따라갈게요! 우리 아빠 좀 살려줘요! 예? 제발!”

으윽, 머리야.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야?

“자, 잠깐만요. 일스 법률에도 아마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침대에서 끌려나온 사람에겐 상세한 전후 사정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 레니 생각은 어때요?”

샌슨은 주먹을 휘둘러 내 헛소리를 막고는 말했다.

“레니 양. 그레이든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입니까?”

“아버지가 이상해요, 병에 걸리셨어요, 예, 병이오. 마구 열이 나시는데 오히려 춥다고 그러세요. 그런데 땀을 내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제레인트는 일어나다가 해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로브를 걸쳤다. 그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왜 의사를 부르지 않고……?”

“의사도 아파요!”

“예?”

제레인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니는 미쳐 날뛰듯이 말했다.

“제발요! 어서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예? 의사에겐 이미 달려가 봤어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도 중환이세요! 이 마을엔 의사가 하나밖에 없어요. 제발! 당신들은 모 험가잖아요? 그리고 프리스트께서도 계시고………….”

“아, 예. 알겠습니다. 갑시다.”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우리들도 갑옷과 무기를 챙겨들고 나섰다. 그때 네리아와 이루릴도 밖으로 나왔다. 네리아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옆에까지 다 들리더라. 어서 가보지.”

레니 덕분에 1층을 뛰어내리듯이 내려오게 되었다. 홀에는 주인장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이런, 이 바쁜 아침 시간부터 웬 졸음이람.

샌슨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여보세요. 우리 나갑니다. 여관비는………….” 콰당!

“꺄아아악!”

레니의 비명소리. 뭐야? 샌슨이 건드리자 주인장은 갑자기 의자째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레니는 스르르 주저앉았고 놀란 제레인트가 황급히 그녀를 받쳤 다. 이루릴과 내가 황급히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주인장은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빨을 딱딱 부딪히면서 떨고 있는 여관 주인장의 얼굴에는 검붉은 반점 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때 이루릴이 급하게 외쳤다.

“제레인트! 프로텍션 프롬 디바인 파워! 급해요!”

“예? 아, 예.”

제레인트는 의아한 얼굴이 되더니 레니를 네리아에게 넘겨주고는 곧 기도에 들어갔다. 제레인트가 기도를 올리자 곧 푸르스름한 막이 형성되며 우리를 둘러쌌다. 샌 슨은 질린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요?”

난 질린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엄청난 햇살이 내려쬐고 있던 그 창문을.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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