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4권 – 제8부 : 인간의 무기 8화 (4권 끝)
8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앞은 캄캄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뜨거운 열기다. 난 헐떡거리며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내 머 리가 어디 있지? 다리는 또 어디에 있지? 위아래도 구분되지 않았고 내 팔이 어디에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치? 후치야.”
네리아의 목소리다. 그리고 이마를 짚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감각으로 간신히 내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위치를 통해 추측하여 난 간신히 눈 을 뜰 수 있었다.
네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네…………리아. 여긴?”
“임시 구호소야. 시청에서 만든.”
“임시…………구호소. 빌어먹을…………, 그런데 디바인……… 마크는?”
네리아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 마. 지금 시청에서 소집한 프리스트들과 도시 경비 대원들이 찾고 있어. 대규모 인원이 그 공원에 투입되었으니까 곧 찾아낼 거야.”
“아직………… 못 찾았군요. 그럼…………, 많이 죽었겠군요.”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감겨지는 눈을 힘겹게 뜨며 말했다.
“샌슨은……?”
“으응. 제레인트 씨가 다 치료했어. 지금 제레인트 씨는 이 구호소를 방어하고 있어.”
“예………. 제레인트도………… 꽤 대단한 디바인 파워를……”
“아니. 그 디바인 마크가 대단한 것인가 봐. 뭐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노고를 깎아내릴 수는 없지만, 지금 제레인트 씨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어. 이루릴도 그 렇고. 나도 이만 가봐야겠네. 후치. 푹 자도록 해.”
“예……”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녁이었다.
주위는 컴컴했다. 아마 조명에 신경쓸 사람이 없나 보다. 들리는 것은 신음소리와 간혹 찢어지는 비명소리, 그리고 울음소리뿐이었다. 뭔가 잘못된 세상에 눈을 뜬 기분이 든다.
난 몸을 일으켰다.
난 바닥에 깔린 시트 위에 있었고, 주위는 공회당인지 뭔지 어쨌든 커다란 천장과 꽤 넓은 실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넓은 실내에는 온통 시트와, 그리고 환자들이었 다.
우리 일행은 어디 있지?
약간 떨어진 곳에 몰려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붉은 머리가 보였다. 네리아였다. 난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그쪽으로 걸어갔 다.
“후치?”
이루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곧 날 돌아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네리아가 일어나서 내게 달려와 부축했다.
“이런, 왜 일어났어? 누워 있지 않고.”
“아뇨. 괜찮아요. 역시 밤에는 병이 진행되지 않는 모양이죠?”
“어? 너 어떻게…… 아참. 너 전에도 이런 일 겪었다고 했지?”
네리아는 날 부축하여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어깨에 붕대를 감아맨 샌슨의 모습과 이루릴, 그리고 초췌한 모습의 제레인트가 보였다. 제레인 트는 내게 힘겨운 미소를 지어보였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도시의 시청 관계자들이겠지.
그 모르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그러니, 당신들 말대로라면 그 디바인 마크만 회수하면 이 모든 질병이 멈춘다는 말입니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계속 수색해야 됩니다. 밤이라 어둡긴 하지만 낮이 되면 병이 더욱 심하게 확산될 겁니다. 그러니 오늘 밤중에 찾아야 됩니 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다른 사람들은 일어나 어딘가로 걸어갔다. 남은 것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난 자꾸 구겨지려고 하는 몸을 힘겹게 곧추세우며 말했다.
“아직 못 찾았구나.”
“응.”
“레니는…………, 그레이든 씨는?”
“레니는 그레이든 씨를 간호하고 있어. 제레인트 씨가 수고해 줘서 이젠 좀 괜찮아.”
제레인트는 다시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가 말했다.
“그런데… 왜 이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자이펀과 일스는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샌슨은 피곤한 듯이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젠장.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린 어쩌지?”
“응?”
자꾸 고개가 앞으로 쳐박혀지는걸. 제기랄. 난 무릎을 꽉 누르면서 말했다.
“우리가 남는다고 해서 디바인 마크를 찾아준다거나 할 수는 없어. 칼라일 영지에서는 펠레일이나 사만다가 있어서 쉽게 찾았지만, 여긴 넓은 도시야. 우리가 뭐 도 움 될 것이 없는걸.”
샌슨은 대답없이 묵묵히 바닥만 쏘아보았다. 난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내일 출발하는 거야?”
“레니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렵겠지. 위중한 아버지를 두고 떠나라는 말은 듣기 어렵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 말을 하고 싶었어. 레니를 설득해야 되지 않을까?”
샌슨은 다시 말없이 바닥을 쏘아보았다. 시야가 너무 흔들거리는군. 난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여전히 시야는 어지러웠다. 내 입김이 너무 뜨거운걸.
“레니는 어디 있지?”
“이봐, 후치. 지금은 조용히 있자.”
“샌슨.”
“일단………….., 일단 그 디바인 마크를 찾으러 간 사람들이 그걸 찾아내기를 기다리자. 그렇게 된다면 그레이든 씨도 곧 나을 테니 말하기 쉬울 거야. 지금은 기다리자.” “으음…….”
다음날 새벽, 공원으로 떠났던 사람들은 기어코 그 디바인 마크를 찾아왔다. 사람들의 떠드는 말을 들어보니 공원 전체를 파헤치다시피해서 찾아온 모양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사람들은 우리를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곧 불안한 얼굴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긴장감 속에서도 마침내 동쪽 하늘에서 는 어김없이 해가 떠올랐고, 건강한 사람들은 재빨리 자신의 친지와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불평을 터뜨렸다. 아마 그들은 해가 뜨면 환자들이 다 나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샌슨은 힘겨운 얼굴이었지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디바인 마크 를 회수했으니 더 이상 병이 진전되지는 않게 된 것이며, 따라서 환자들도 열심히 치료하면 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불평 섞인 시선이었지만 그래도 고개 를 끄덕였다.
우리는 힘든 몸을 이끌고 레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레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이러신데, 떠날 수는 없어요.”
난 막막한 시선으로 그레이든 씨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기절할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입술을 깨물며 기도에 들어갔다. 레니는 놀란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손에서 빛을 내더니 곧 그레이든 씨를 치료했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우리는 그를 눕히고는 그레이든 씨를 살펴보았다.
그레이든 씨는 한결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 나으신 건가요?”
“예.”
“……아버지는 말했어요. 제가 가지 않으면 대륙이 위험해진다고.”
“맞는 말씀입니다.”
레니는 처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같이 떠나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아버지와 날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시급하시죠?”
“예.”
“그럼, 지금 떠나야 되나요?”
“그래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았어요. ……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나요?”
“갈아입을 옷만 몇 벌 준비하면 됩니다.”
“예. 그럼 일단 집으로 가야겠군요.”
그렇게 말하고도 레니는 한참 동안 그대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조바심내면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레니는 허리를 굽혀 그레이든의 뺨에 키스하고는 일어났다.
“가지요.”
혼수상태에 가까운 제레인트와 부상당한 샌슨, 그리고 밤을 세워 환자들을 간호하느라 힘이 쭉 빠져버린 이루릴과 네리아, 그리고 병에 걸렸다가 겨우 나은 나. 아주 초라한 일행이었다. 멋지도록 초라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에 걸리는 것은 가면이라고 착각될 정도로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걸어가는 레니의 모습이었다. 델하파의 시청이나 여기저기서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 출발했다. 레니는 네리아와 함께 말에 탔다. 그녀의 짐보따리는 처량하도록 작았다.
“전 외출을 할 일이 없어서 아무런 옷이 없어요. 평상복뿐이죠.”
“아, 예.”
더이상 지체하다간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우리 스스로도 이 도시에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이유를 모른다. 우리는 물론 그 범인을 알고 있지만 이 것은 국제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 스스로도 전모를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황급하게 델하파를 빠져나왔다. 모두들 힘들었지만 델하파에서 충분히 떨어진 다음 쉬기로 했다. 제레인트는 몇 번이나 나귀에서 떨어질 뻔했고 샌슨 은 부상 때문에 몹시 힘겨운 표정이었다. 나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고.
도대체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간신히 한발 한발을 내딛은 끝에 우리는 겨우 델하파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레니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것이 불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산도 숲도 들도 나무도 그녀에겐 모조리 낯설었고, 마음대로 하 라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 아버지에게 달려가 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레니는 네리아의 허리를 꽉 붙잡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네리아는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간혹 레니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포기해 버렸다. 무슨 말을 걸어도 레니는 시큰둥한 반응만 보여주었다. 네 리아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삐를 늘어뜨리고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루릴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간혹 안쓰러운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았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빠진 우리는 많이 걷지도 못하고 오후 중간쯤에 멈춰 서게 되었다. 모두들 피곤해서 점심이고 뭐고 관두라는 심정이었고, 그래서 서로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채 무거운 손으로 시트를 끄집어내어 바닥에 대충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샌슨은 불침번을 서려고 했지만 이루릴이 조용히 그를 눕히고 대신 나무에 기대 어 앉았다.
난 모포 속에 몸을 틀어박고는 날씨와 아직 남아 있는 병기운 때문에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고 애썼다. 그런 내 귀에 이루릴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이루릴은 별 피곤한 기색도 없이 조용히 말했다.
“레니 양. 피곤하지 않아요?”
그리고 조금 후 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예. 괜찮아요. 그런데………….”
“그런데?”
레니는 한참 기다린 다음에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지만………… 대륙을 구하는 여행이 아니라 무슨 초라한 유랑민 같아요.”
“그런가요?”
킥, 키긱! 유랑민이라. 하긴 온통 아픈 사람에 지친 사람들, 게다가 후다닥 달아난 사람들이다. 멋스러운 점은커녕 비장한 점이나 그럴듯한 면도 없다. 이런 우리가 지금 대륙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대륙에서 가장 소중한 소녀를 호송하는 영웅들인가? 푸헷헤헤!
갑자기 제레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생은 그렇게 멋있는 것도, 영웅 서사시 같은 것도 없어요. 특히 자신의 인생은.”
“그런가요?”
레니가 대답했다. 난 모포에서 눈만 꺼내어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힘든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잠들기 전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우주를 구한다고 해도, 당신의 인생이 다른 수많은 인생보다 특별히 가치 있어지진 않아요. 그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시시하게 산다고 생각하지 요. 하지만 틀려요.”
“틀리다고요?”
“모두들 똑같이 고귀해서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다는 것이지, 모두들 시시해서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 유랑민 같은 여행도? 푸훗.”
“하하. 오히려 지금의 이 상황은 모험중인 영웅들에게 어울리는 고난 아닌가요?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로드에게 패해 달아날 때는 이보다 더 심했지요.”
난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정말 못 말리겠군.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모험이라는 말에 정이 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난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우두둑, 뚜둑!
“아, 아이고 뼈다귀야.”
레니는 감탄한 얼굴로 몸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레니의 관심 대상이 되어버린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곤 팔다리를 휘둘러 잠기운을 모두 몰아내기 시작했다.
샌슨도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안색이 한결 나았다. 샌슨은 행복한 잠에 취했던 멧돼지처럼 모두에게 미소를 지어주곤 곧 내게 이빨을 들이대었다. “밥!”
“악! 악! 악!”
난 투덜거리며 물통을 뒤적거리고 돌을 모았다. 레니가 다가왔다.
“저, 야외에서 요리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준다고요? 고맙지요. 거기 앉아서 나 하는 것 잘 본 다음에 다음번 식사 준비 때 그대로 해요.”
“예? 아, 예.”
“아, 그리고 말 놓지? 난 17살인데.”
레니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내 나이는………….”
“비슷하겠지? 됐어.”
그러자 레니는 모은 무릎 위에 턱을 얹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커다란 돌멩이를 모아 불을 지피고 물 끓이고, 프라이팬 꺼내어 휘파람 불며 닦고. 네리아는 자신의 태도를 대단히 정확히 했다. 그녀는 요리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고 식사에 대해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단순 명쾌한 논리로 편안하게 모포 속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루릴은 생긋 웃더니 우리 일행에 생물은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말들을 살펴보러 갔다. 제레인트는 내 옆에 쪼그려앉아서는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전혀 성직자답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 다. 그것은, 에, 은근슬쩍 프라이팬에 손을 뻗어 팬케익 훔쳐가려다가 튀는 기름에 데고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테페리를 부르고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쭉쭉 빤 다든가 하는 그런 거…………. 아이고. 정말 요리할 분위기 만들어주는군.
결국 한 시간 후, 우리는 한손에 커다란 팬케이크(먹고 목이나 메어버리라는 심정으로 프라이팬이 넘치도록 만들어준 특대형이다)를 들고 말에 올라탄 샌슨의 인도를 받아 출발 하게 되었다.
“가자. 실키안 레이크로 온통 물뿐인 나우르첸으로 가자.”
우리는 한참 동안 이상한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먼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온통 물뿐인………… 같은 말이라도 좀 품위 있게 못하니?”
그리고 내가 말을 받았다.
“그렇지. 은색의 대지, 그 푸르른 수면에 고고히 서 있는 저 나우르첸으로 우리의 지향을 보내자.”
“그것도 괜찮고. 수면으로 떠올라 수면으로 사라지는 태양빛이 하루 종일 머무는 아름다운 나우르첸으로.”
샌슨은 볼이 미어져라 팬케익을 쑤셔넣더니 말했다.
“그래서? 품위가 없다고 안 갈 거야?”
“가야지, 뭐.”
흠. 역시 제레인트의 말대로 인생은 그렇게 멋있는 것은 아니군. 그래도 걸음은 앞으로 나가고, 시야는 높이 두는 것이지. 가자구.
“온통 물뿐인 나우르첸으로.”
일스 공국의 수도 바란 탄으로 간 칼 일행은 일스 대공을 접견한 다음 나우르첸으로 돌아와 우리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나우르첸 성으로 향했다. 레니가 익숙지 않은 여행에 자주 피곤해했지만 그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단 하나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제레인트가 멋모르고 자신이 가진 디바인 마크는 대단히 값비싼 것이라는 말을 꺼낸 이후로 간혹 네리아가 눈을 번뜩이게 된 것뿐이랄까.
어쨌든 드래곤 라자 소녀도 찾았고, 우리 임무는 깨끗이 완료다. 바란 탄으로 떠난 칼이야 별로 걱정되지 않고, 이제 레니를 데리고 갈색 산맥까지 돌아가면 되는군. 에구, 기나긴 여정이었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어제 오늘 다르게 쌀쌀해진 바람을 맞는다. 산등성이를 돌아 올라갈 때는 겨울로 넘어가는 숲의 신비로운 죽음들. 그리고 산기슭에서 내려다보 니 멀리 끝없이 펼쳐진 호수가 보인다.
“실키안 레이크다.”
샌슨은 말했고 네리아의 등 뒤에 있던 레니는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저게 호수예요? 저, 저쪽의 저 바다와 연결된 거 아니에요?”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했다.
“호수야. 너희 나라의 유명한 호수인데, 모르니?”
“집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응. 그래. 그럼 잘 봐둬. 늙었을 때 손자 손녀 모아놓고 이야기할 거리는 있어야지.”
레니는 입술을 샐쭉거렸다.
“난 시집 안 갈 거예요.”
푸흑! 난 어이가 없어서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도대체 뭐야? 애도 아니고. 저런 유치해서 귀여운 말이라니. 샌슨도 어이가 없어서 레니를 바라보았다. 보라구. 저 오 거도 놀라잖아.
네리아는 해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빠하고 살 거야?”
“어떻게 알았어요?”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우리는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목적지가 눈 앞에 보이게 되면서부터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호수에 어리는 햇살의 눈부심이 갈수록 강렬해지고, 그리고 우리는 나우르첸 성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 서 있던 문지기들은 우리들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어왔다.
“돌아오셨군요. 칼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칼이 벌써 돌아왔어요?”
어? 이상하다. 여기서 바란 탄까지의 거리는 델하파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고 듣긴 했지만, 게다가 우리는 델하파에서 하루를 지체했지만, 그래도 칼은 대공 전하를 만나러 간 것이라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알았는데?
우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성 안에 들어갔다. 레니는 감탄한 얼굴로 성을 둘러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성을 구경할 수 있도록 네리아와 함께 남겨놓고는 먼저 칼 을 만나러 들어갔다.
성 안으로 들어서서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쓰던 방으로갔다. 칼과 스카일램이 그 거실에 앉아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왔는가?”
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칼은 먼저 샌슨의 부상을 보고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레인트를 보았다. 칼은 알겠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은 테페리의 프리스트이신가 보군?”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들었습니다. 칼 헬턴트 님이시죠? 전 제레인트 침버라고 합니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반갑소. 어서 오시오.”
스카일램 트리키도 대충 인사를 나눴다. 그 동안 칼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저, 네리아 양은? 그리고 그 소녀는…………, 못 찾았는가?”
샌슨은 웃으며 베란다를 가리켰다. 우리들 모두 베란다로 걸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네리아와 함께 성의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칼은 소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소녀의 이름은 레니이고, 제레인트 씨가 확인한 바로는 바로 드래곤 라자입니다.”
“다행이군!”
칼은 크게 기뻐하는 얼굴이 되더니 다시 레니를 내려다 보았다. 그때 네리아가 위쪽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야호! 칼 아저씨!”
레니는 놀라서 위를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네리아의 뒤로 돌아가 버렸다. 네리아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레니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우리들에게는 들리지 않았 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이렇게 빨리 돌아오시다니요.”
칼의 얼굴에 문득 어두운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칼은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건 천천히 설명함세. 자네들 모두 긴 여행길이었나 보군? 그리고 이 상처는 또 웬 건가? 아무래도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먼저 푹 쉬고 들려주게나.”
샌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다시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씻고, 갈아입고, 먹고, 좀 자고, 그러고 우리는 저녁 식사 후에 다시 거실에 모였다. 네리아와 레니는 방 안에 틀어박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나와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레니가 낯선 곳에서 힘들어할까봐 네리아가 붙어다니는 모양이다. 그래서 거실에 모인 것은 칼과 나, 샌슨, 이루릴, 스카일램, 그리고 제레인트였다. 먼저 칼 이 이야기했다.
“그래, 자네들 이야기를 들려주게.”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시작했다.
“예. 먼저 테페리의 신전에 들러 제레인트 씨를 만나고, 그리고 델하파에 가서 레니를 만났습니다. 제레인트 씨는 레니가 드래곤 라자임을 확인했고, 그래서 레니의 보호자였던 그레이든이라는 분의 동행 허락을 얻어 돌아오려던 참이었지요. 아, 저 그레이든 씨는 레니를 15년이 넘도록 길러오신 분으로 친딸과 같이 생각하시더군 요. 하지만 크라드메서의 위험을 이해하시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후 레니의 거취에 대해서는…… 아니, 이 점은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예. 그런데 그 출발일 아침, 갑자기 델하파의 항구가 세이크리드 랜드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이크리드 랜드!”
칼과 스카일램이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를 쳐다보았다. 샌슨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예. 저희는 그날 아침이 바로 세이크럴라이즈의 첫날일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도시의 중심부를 찾아갔습니다. 거 왜, 칼라일 영지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까?” “맞아, 그렇지. 그래서?”
“예. 그런데 도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공원에서 넥슨 휴리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칼의 반문은 극히 낮았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제레인트는 그날 아침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지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나도 소름이 돋는데. 샌슨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전 그와 싸웠습니다만 세이크리드 랜드에서의 싸움이라 제대로 싸울 수가 없던데요. 정말 아쉬웠습니다만 그래도 전 그 녀석이 물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혔습니다. 젠장. 그놈도 OPG를 가지고 있어서 저에게 이 멋진 상처를 남겨주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무승부가 되고 녀석은 달아나버렸습니다.”
“이런…….맙소사. 그가 일스에 있었군. 그래, 자네 상처는 괜찮은 건가?”
“예. 괜찮습니다. 어쨌든 델하파 시청의 도움을 얻어 디바인 마크를 회수하고는 레니와 함께 여기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 그래. 정말 수고들 했네. 감사합니다,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역시 모험은 영웅들과 함께 다녀야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 이분들 뒤만 열심히 따라다녔는 걸요. 하하하.”
그리고 샌슨은 질문했다.
“그런데, 칼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죠?”
칼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먼저 스카일램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는 별 무리없이 바란 탄에 도착했네. 아름다운 도시였네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어쨌든 사절의 자격으로 대공 전하를 만날 수 있었네. 난 찾아간 목적을 이야기했고, 대공 전하를 설득하기 시작했지. 운차이도 사실대로 다 이야기했고, 처음엔 잘 풀려나갔어. 대공 전하는 크게 노여워했고 내 말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 “과거형이군요. 그런데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났다?”
내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바로 그 다음날, 갑자기 대공 전하는 회견 중단을 통고해 오더군. 어처구니가 없었다네. 여기저기로 알아본 결과 그날 아침, 일스 곳곳이 세이크리드 랜 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머리가 띵해지는걸? 난 눈이 튀어나올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칼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자네들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알겠군. 그 이야기가 역시 사실이었군 그래.”
“맙소사…….”
샌슨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시오네는 확실히 실험에 성공했고…………”
칼은 날 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 보게, 네드발 군.”
“예…………, 시오네는 칼라일 영지에서의 실험에 성공해서…………, 이제 어느 땅이든 디바인 마크만 묻으면 세이크리드 랜드로 바꿔버릴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만들었 군요.”
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맙소사, 그렇다면. 그런데 왜 일스를?”
사람들은 모두 긴장해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간단하잖은가? 일스 공국이 바이서스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위협한 거지.”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그렇군요!”
“그렇지. 바이서스가 일스 공국에 사절을 보냈다는 것이야 비밀도 아니지. 그래서 자이펀에서는 우리들이 일스 공국과 손잡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래서 그 무기,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될까? 질병의 무기라고 해야 될까? 어쨌든 그 무기의 최초 실험겸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일 게야.”
스카일램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끝장이군요. 자이펀에서 그런 무서운 무기를 개발했다면………… 어서 고국으로 돌아가서 방도를 찾아야 됩니다!”
“어떤 방도가 있을지 의문이오. 누구든 밤에 몰래 도시 가운데다가 몰래 디바인 마크를 묻기만 하면 되오. 그러면 그 다음날로 그 도시는 질병의 율법만이 판을 치는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는 것이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쓰러지고 나면 전투도 아닌 점령을 시작하고, 그리고 디바인 마크를 파내기만 하면 되지. 그러면 땅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정말 가공할 무기로군.”
스카일램은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맙소사. 이건 여느 무기가 아니다. 아마 스카일램도 전략에는 꽤 조예가 있겠지만 이런 황당한 무기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 을 것이다. 실내의 온도가 갑자기 한참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든다. 싸늘하군. 칼은 말했다.
“할 수 없지. 일단 돌아갑시다. 방도라고 해봐야 도시의 가운데를 경계하고 간첩을 열심히 색출하라는 것뿐이겠지만. 어쨌든 돌아가서 전하께 알리도록 합시다.”
“예. 그럼 내일 출발을?”
“그렇게 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씩씩하달 수는 없는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칼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핸드레이크라도 이런 무기에는 대책이 없을 거야. 전쟁의 룰이 바뀌는데.”
우리는 모두 무거운 얼굴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자신이 갑자기 말려든 이 거대한 이야기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인생은 굉장한 서사시는 아닐지 몰라도, 느닷없이 굉 장한 비극은 될 수 있군요. 제레인트.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자신의 두 손을 서로 꽉 쥐고 있었다.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인간은…… 마침내 신의 권능까지도 인간의 무기로 쓰기 시작했군요.”
칼은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