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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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 비명, 기합소리. 어쨌든 별의별 소리를 다 질렀지만 폭포 소리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별별 말을 다했던 모양이고 말들도 제각기 취향대로 푸르릉거렸을 듯하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폭포 위쪽의 절벽 위로 올라가게 되자 우리는 모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샌슨의 거친 호흡소리가 제대로 들려왔다. 후우, 여기 위로 올라오니까 폭포 소리가 좀 줄어드는군. 말들도 모조리 땀으로 범벅이 되어 몸에서 김을 올리고 있었다. 네리아는 역시 몸이 가벼운지라 별로 피곤한 표정도 아니었고 이루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그대로 땅에 드러누워 버렸다.
“헤엑, 헥! 하늘 색깔이 원래 저러했던가?”
“간혹 그렇게 바뀌기도 한대요.”
“응, 그래? 후욱, 후우우. 어느때?”
“주로 죽을 때가 가까울 때 그렇대요.”
“안 돼! 허억! 아직 키스도 못 해봤는데.”
“……당신 프리스트 맞아요?”
“프리스트는 입술이 없냐?”
그러자 네리아는 웃으면서 쓰러져 누운 제레인트의 위로 허리를 굽히고는 ‘내 눈엔 대단한 의미가 담겨져 있지요?’ 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다. 제레인트는 헛바람 을 삼키며 얼굴을 급격히 감쌌고 그래서 사레가 들려 고생했다. 제레인트를 그런 지경에 빠뜨린 네리아는 킥킥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봐!”
“안 봐! 고개 돌릴 힘도 없어!”
샌슨은 그렇게 말했지만 역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절벽 위의 넓은 평지였고 저 끝쪽의 산봉우리와 맞닿은 곳에는 건물의 폐허가 서 있었다. 무너진 담장과 잔해 사이로 힘겹게 서 있는 기둥 등 이 보였다. 그리고 몇 개의 방은 아직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위로는 덩굴풀들이 잔뜩 덮여 있었다.
비록 무너져 볼품없었지만 그 남아 있는 잔재만 보아도 원래는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이었던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땅바닥엔 건물의 기초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리저리 꺾인 직선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직선은 우리들이 주저앉아 있는 곳 근처까지 뻗어 있었다. 그 말은, 원래 절벽 바로 위에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이 서 있었 다는 말이로군?
칼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원래는 얼마나 큰 건물이지?”
“굉장했겠는데요? 웬만한 성곽과 맞먹었을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성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뒤쪽은 절벽으로 막혔으니 성곽으로 괜찮긴….. 잠깐. 하지만 이런 숲 속에 뭐하러 성을 짓지요?”
“성을 지을 필요가 없는 곳이잖아. 마을도 없고 도로도 없고. 이런 끝도 없는 숲에…………. 아!”
칼은 갑자기 제레인트를 돌아보았다.
“침버 씨. 이곳이 원래는 숲이 아니었다고 하셨지요?”
“예? 아, 300년 전에는 그렇습니다.”
그러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는 300년 전 할슈타일 가문의 성일 가능성이 높군.”
우리는 갑자기 장엄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갑자기 저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가 질풍처럼 말을 달리며 꿈을 노래하던 시절로 돌아가 버린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바로 300년 전 할슈타일 공이 있었던 곳이구나. 그리고 아마도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패퇴당한 드래곤 로드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겠지. 그때는 이곳이 숲이 아 니었을 것이며, 크게 상처 입은 드래곤 로드는 힘겹게 이곳 천애의 성곽으로 옮겨졌겠지. 마법의 가을을 넘기고 그 해의 첫눈이 내려 루트에리노 대왕은 끝내 이곳까 지 추적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나 300년이 지나고, 비록 쫓는 대상은 다르지만 우리는 마침내 이곳까지 도달했군.
우리는 잠시 그 무너진 성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이곳에서 지독한 고통과 무한한 복수심을 다스렸겠지. 하늘에서는 아마도 눈이 내리고 있었겠 지. 그는 저 남쪽을 노려보며 불타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겠지. 이 끝없는 폭포의 위쪽에서.
칼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자, 일어나세나. 레니 양을 찾아야지. 세레니얼 양?”
“흔적을 찾아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숨을 좀 돌리세요.”
그리고 이루릴은 곧 날렵하게 걸어갔다.
나는 무너진 성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수해를 바라보았다. 지평선이 있는 곳까지 모두가 나무들이었다. 노출된 흙도 보이지 않았고 바
위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푸른 나뭇잎들뿐이었다. 아마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이 아니라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없을 듯했다. 저렇게 많은 상록수라니. 마 치계절이 거꾸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영원의 숲이라.
“여기 나무들은 죽지도 않는가 보지요. 어디 한 군데라도 땅이 제대로 보이는 곳이 없어요.”
제레인트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답했다.
“영원의 숲이니까. 아! 그렇지.”
제레인트는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의 일 말입니다. 제가 영원의 숲에 들어온 사람은 점점 사라진다고 말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제레인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요? 여기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은 자신을 의심할 때마다 점점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은 낱낱이 흩어져 파편이 되고 마침내 사라 져가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예. 그런데 우리는 이루릴 양의 도움으로 다시 우리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숲에서 나가도 아무런 일이 없는 것 아닐까요?”
“허허. 예. 그렇게 된다면야 정말 좋겠지요. 확실한 증거가 없는 마당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테페리께서 우리를 사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들 중에 엘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많이 불안하셨겠군요.”
“예. 여기 들어와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저니까요.”
“아아……, 괜찮습니다. 우리는 레니 양을 구출하기 위해 자의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마운 말씀입니다. 하하하.”
샌슨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곧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음.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 다행이야. 우리들 중에 이루릴이 있 어서 정말 다행이군.
그때 이루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무너진 성벽들 사이에 서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번 해볼까?”
“네가 아니라 진짜 오거 열 마리가 와도 이건 어렵겠어.”
하긴 그렇겠다. 이런 엄청난 바위라니.
우리는 무너진 성의 지하실쯤으로 짐작되는 곳에 서 있었다. 원래부터 지면보다 낮았을 테지만 무너진 돌들과 300년의 세월이 그 위에 쌓여 지하실은 거의 묻힌 상 태였다. 그런데 이루릴은 바로 여기서 흙먼지 사이로 나 있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곧 엄청난 바위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바위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고 원래 건물의 일부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석재들도 가득 쌓여 있었 다. 그 높이는 사람 키의 몇 배였다. 아무래도 이 아래에 어떤 구멍이 있었고, 누군가가 거기로 들어간 다음 그 위로 건물의 잔해와 바위가 무너져버린 모양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돌들은 무너진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무너지면서 바위에 생긴 흠집들, 하얀 흠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군요. 아무래도 넥슨의 일행이 이 아래에 있는 어딘가 로 들어갔고, 그때 뭔가 충격이 일어나면서 위쪽의 담장과 건물의 잔해가 무너진 모양입니다.”
칼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면서 말했다.
“큰일이군요. 이 아래까지 다 무너졌다면 그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겠는데.”
이루릴은 잠시 눈을 감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후 말했다.
“실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바위들 틈으로 들어가 본 실프의 말에 의하면 이 아래에는 상당히 넓은 공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공간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이 위쪽만이 그냥 막혀버린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음. 그렇다면 일단 압사당하지는 않았겠군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올 출구가 없다면 이 아래에서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위는 도저히 치울 방법이 없겠군요. 마법을 써서 바위를 파괴한다면 아래쪽이 너무 위험합니다. 아래쪽이 붕괴되어 버릴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바위가 너무 크고 많아서 파괴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입니다.”
하긴 그래. 이게 도대체 뭐야? 거의 산이구먼. 우리는 답답한 표정으로 그 바위를 노려보았다. 이걸 다 안전하게 치우려면 수백 명의 일꾼을 불러다가 몇 년 동안 공 사를 해야 되겠는데?
할 수 없이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른 입구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쯤 후 우리는 다시 바위더미 앞에 모여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풀이 죽어버렸다.
그때 네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저 아래의 폭포!”
“응?”
“저 아래의 폭포는 땅속에서 나오는 거잖아? 아마 틀림없이 이 지하의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을 거야. 그런 세찬 폭포라면 아마 꽤 거대한 공간이 있어야 될 테니까. 폭포 구멍으로 들어가 보자.”
난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예. 잠시 기다려요, 네리아. 지금부터 열심히 언덕 위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할게요. 저녁 무렵이면 아마 내 겨드랑이에 틀림없이 날개가 돋아나겠지요. 폭포 위로 비상하는 한 마리 아름다운 새가 되어…………….”
“이런, 살펴나 보자구!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내 생각엔 저 아래의 폭포 구멍에도 무슨 길이 있을 것 같아. 기둥 쌓고 기타 등등 손본 것 봤잖아?”
칼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살펴본단 말이오?”
네리아는 신나게 짐을 뒤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우리는 절벽에 몰려서게 되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폭포가 쏟아지는 구멍 바로 위쪽에 섰다. 샌슨과 내가 한참 동안 티격태격하다가 조금 왼쪽이야!’ ‘아냐! 여기라구!’ ‘눈이 비뚤어졌어?’ ‘지금 누 구 이야기를 하는 거야!’이루릴의 조용한 말에 의해 위치가 정해졌다. “조금 오른쪽이에요.”
그리고 네리아는 밧줄을 내게 건네었다. 나는 밧줄을 허리에 묶고 나머지는 둥글게 말아서 한 손에 쥐었다. 밧줄의 반대쪽 끝은 네리아의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그 리고 샌슨과 제레인트, 칼 등이 내 몸을 붙잡았다. 이루릴은 혹시 네리아가 추락할 때를 대비해서 절벽 옆에서 마법을 준비한 채 서 있었다.
“그런데 왜 네리아가 내려가지요?”
“내가 가볍잖아?”
네리아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곧 밧줄을 붙잡았다. 그녀는 잠시 절벽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입술을 오므렸다.
“휘익!”
그리고 네리아는 곧 밧줄을 붙잡고 절벽에 매달렸다.
“자, 됐어. 후치! 줄 풀어.”
그리고 네리아는 절벽을 놓았다. 난 밧줄을 단단히 붙잡고는 조금씩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네리아의 무게는 거의 두레박 늘어뜨리는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 았다. 하지만 자칫하면 큰일이 난다. 난 신중하게 밧줄을 풀었다.
이루릴은 절벽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천천히. 네. 조금만 더……………. 방향은 정확해요. 네. 그대로,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그리고 잠시 후 이루릴은 손을 들어올렸다. 난 밧줄을 그대로 감아쥐고 멈추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내가 지루해져서 뭐라고 물어보려고 할 때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루릴은 다시 손짓을 했다.
“올리세요. 천천히.”
난 밧줄을 끌어당겼다. 네리아도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올라오는지 굉장히 빠르게 올라왔다. 잠시 후 절벽 끝에서 네리아의 얼굴이 올라왔다. 그녀는 올라오면서 바 로 말했다.
“으와, 추워서 얼어죽는 줄 알았네.”
네리아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녀의 바지는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방울 때문에 젖어 있었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절벽에 바람이 엄청나지? 물보라도 대단했을 테고.”
“으으, 그래. 얼어죽는 줄 알았네. 어쨌든 다행이야.”
“뭐가?”
“아래에 길이 있어. 물이 흘러나오는 수로 양옆으로 약간 높게 선반처럼 길이 나 있던데. 안은 캄캄해서 안 보였지만 길 모양새를 봐서 확실히 꽤 멀리까지 뚫려 있 는 길인 거 같아.”
“그래? 그렇다면 됐군!”
이 아래의 공간이 얼마나 거대할지 알 수가 없다. 절벽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봐선 도시 하나를 넣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공간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연료로 쓸 장 작개비를 주워모았다. 혹시 이 안에서 굶어죽을지도 모르니까.
그 다음은 말들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도 간단히 처리되었다. 이루릴은 래셔널 셀렉션에게 다가가 말했다.
“친구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기다려요. 하지만 내가 부르면 다시 달려와 줘요.”
래셔널 셀렉션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우리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제레인트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말이 말을 알아듣다니! 나는 말의 말을 모르는데!”
그리고 내려갈 준비다. 이게 어려운 부분이었다. 내려가려면 밧줄을 묶어야 되는데 주위는 공터여서 밧줄을 묶을 장소가 없었다. 멀리 떨어진 숲에 있는 나무에 묶으 려니 밧줄의 길이가 모자랐다. 난 잠시 한숨을 쉬고는, 손가락을 좀 꺾은 다음, 근처 숲에서 나무를 꺾어와 말뚝으로 만들어서는 절벽 위에 꽂아놓았다. 제레인트는 나의 인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말뚝의 단단함을 확인하기 위해 샌슨이 몸을 들이박고는 비명을 좀 질렀다. 그 다음엔 밧줄을 단단히 감아매고는 아래로 늘어뜨렸다. 샌슨은 밧줄을 바라보며 한숨 을 푹푹 쉬었다.
“이 밧줄이 끊어지면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군. 젠장.”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밧줄이 있는 이상 우리는 언제든 저 아래에서 나올 수 있겠군.”
우리는 서로에게 씨익 웃음을 지어주었다. 먼저 네리아가 밧줄을 허리에 묶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는 절벽에 늘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가볍게 통통 튀듯이 아래로 내려갔다. 절벽을 내려가는 것인지 평지를 걷는 것인지. 음. 대단하군. 그대로 폭포 속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 순간, 네리아는 절벽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밧줄이 풀렸다. 제대로 내려간 모양이군. 그 다음 칼, 이루릴, 제레인트의 순서로 내려갔다. 그 순간까지도 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 를 살폈다. 샌슨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전을 던질까?”
“관둬. 내가 내려갈 테니.”
난 밧줄을 허리에 묶고는 나머지를 절벽에 늘어뜨렸다. 그러곤 밧줄을 단단히 붙잡고 절벽으로 내려섰다. 절벽을 차면서 밧줄을 번갈아 쥐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중 력 때문에 거의 힘을 쓸 필요도 없이 쉽게쉽게 내려갔다. 다만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폭포의 굉음 때문에 목덜미에 털이 곤두서는 것이 기분 나빴을 뿐이 다.
왼손을 놓고, 오른손의 아래 부분을 쥐고, 오른손을 놓고, 왼손의 아래 부분을 쥐고, 발로는 가볍게 절벽을 차면서 충돌하지 않도록, 이윽고 귀가 멀어버릴 듯한 폭포 의 굉음이 바로 아래로 들리고 세차게 뿜어나오는 물보라가 바지를 적셨다. 그리고 눈앞에는 거대한 동굴이 입을 벌렸다.
동굴의 가운데로는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지만 그 양편에는 확실히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먼저 내려간 일행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칼의 손을 붙잡고 간단히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왼쪽으론 무서운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저 미소를 지어주고는 밧줄을 풀었다.
밧줄은 슬금슬금 올라갔다. 음. 이제 샌슨만 내려오면 되는군. 우리는 귀를 틀어막고는 샌슨의 모습이 보이길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샌슨의 모습이 나타 나지 않았다.
난 궁금함을 참다 못해 동굴에서 몸을 내밀어 위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이제야 절벽 끝에서 조금 내려온 상태였다. 고함을 질러주려고 해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테니 소용이 없다.
샌슨은 철저히 안전하게 내려오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발을 한 번 디디는 데 1분씩 걸릴 지경이었다. 손을 바꾸는 데도 거의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좀 적당히 하라 구!
기나긴 기다림 끝에 간신히 샌슨은 동굴 앞에 몸을 나타내었다. 난 샌슨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난 샌슨에게 굉장한 분노의 표정을 지어주었지만 곧 관두고 말았다. 샌슨은 파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미리 준비한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러곤 내가 그것을 들고 앞장섰다.
폭포수가 뿜어나오는 수로는 상당히 곧고 길었다. 한참을 걸어가도 굉음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하긴 절벽 전체가 울릴 테니 절벽 안에 있는 우리가 조용해지긴 어렵 겠지. 그래도 한참 안으로 걸어들어가자 간신히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난 먼저 샌슨에게 말했다.
“이봐요, 퍼시발 군. 도대체 왜 그렇게 시간을 끈 거야?”
별로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잘 울려서 놀랐다. 샌슨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녀석아! 난 밧줄타기가 항상 서툴단 말이야. 제기, 고향에서 훈련할 때도 항상 밧줄타기에서 부하 녀석들에게 조롱을 받았는데.”
하지만 곧 샌슨은 자랑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놈들도 지금의 날 보면 그런 조롱은 못할걸? 그 녀석들 중에 누가 이런 엄청난 폭포 위에서 밧줄을 탈 수 있을까.”
“여기 그런 일을 한 사람 많아. 자랑할 거 없어.”
샌슨은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다란 동굴은 우리들이 걸어감에 따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다. 차츰 우리 옆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들어온 입구 는 이미 손톱만 하게 작아져 있었다.
칼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거 엄청난 동굴인가 본데.”
그 말의 울림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말없이 걸어갔다.
동굴의 윗부분은 거의 자연석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걷는 길과 양쪽의 벽은 확실히 가공이 되어 있었다. 들어간 부분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지만 튀어나온 곳은 깎아 내고 다듬어두었다. 그래서 한참을 걸어도 계속 동굴은 곧기만 했다.
이제 수로의 유속은 거의 잔잔한 시냇물 정도였다. 꽤 오랫동안 걸어온 모양인데. 하지만 그 시커먼 물은 꽤나 깊을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먹물 같은 물 을 바라보고 있자니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난 앞만 보면서 걸어갔다.
조용히 아무 말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걷자니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앞쪽에서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을 때는 크게 놀랐다. 길 앞쪽에 쌓여 있는 돌 무더기가 나타난 것이다.
“이게 뭐지?”
돌무더기라고 말한다면 좀 이상하고, 원래 무슨 구조물이 있다가 무너진 자취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바닥에서부터 시작되는 몇 개의 작은 돌기 둥과 벽에 나오는 몇 개의 돌기둥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역시 원래는 잘 다듬어졌던 것이 분명한 돌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이 원래는 무엇이었을 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의 반대편 길, 그러니까 수로의 왼쪽 길에는 거의 원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칼은 그것을 곰곰이 바라보다 가 말했다.
“돌 격자로군.”
음. 돌로 된 격자였다. 아마 원래는 길 양쪽을 다 막고 가운데 수로에도 돌 격자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처럼 보인다. 칼은 말했다.
“아무리 단단하게 설치된 돌 격자라도 수백 년 동안 계속된 이 빠른 물의 흐름을 견디기는 어려웠겠지. 그래서 먼저 가운데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충격으로 가장자 리까지 무너지게 된 모양이군.”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오른쪽으로 들어와서. 그런데 그렇다면 여긴 원래 통행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보이는군. 하지만 길을 막던 돌 격자가 무너졌으니, 한번 끝까지 가보세나.”
무너진 돌 격자를 넘어서자 다시 아까와 똑같이 죽 곧은 길, 그리고 어두운 길이었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고 나서 칼이 다시 말했다.
“이상하군. 우리가 걸어온 거리를 봐서는 이미 위쪽 폐허에 있는 그 입구를 지나쳐왔을 텐데. 갈림길 같은 것이 전혀 안 보이는데.”
그리고 제레인트가 말했다.
“예. 그리고 이 수로를 만든 솜씨,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않군요. 할슈타일 가문이 강대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엄청난 공사라니.”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네리아의 말이었다. 네리아는 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동굴이 300년이 넘은 동굴처럼 보이나요? 아, 아까 무너진 돌 격자가 있기는 했지만 나머지 다른 벽들은 모두 정말 깨끗한데요?”
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아무래도 여기는 거기인 것 같소.”
“맞아요. 그리고 거기는 여기고요.”
내 대답에 칼은 피식 웃으며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대미궁인 것 같지 않소?”
제레인트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영원의 숲 안에 있는, 게다가 할슈타일 저택의 폐허 아래에 있는 이토록 큰 동굴이라면 그것 이외엔 생각하기가 어렵겠군요.” “허억?”
샌슨은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다가 결국 말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여기 어딘가에 드래곤 로드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횃불 빛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드래곤 로드 역시 드래곤이니 그 수명은 말도 못하겠지. 300년은 인간의 세대로는 몇 세대가 지나갔겠지만 드래곤에겐 그다지 긴 세월이 아니겠 지.”
칼은 그렇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샌슨은 그러한 칼의 태도에 당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들어가서 ‘식사 대령이오.’ 이렇게 말해야 됩니까?”
“우리가 뭐 먹을 게 있겠나. 어쨌든 레니 양을 찾아야 되니 별 수가 없지.”
그때 이루릴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넥슨은 크라드메서가 아니라 드래곤 로드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요?”
“예?”
“레니 양은 드래곤 라자입니다.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과 인간을 연결시켜 줄 수 있지요. 넥슨은 레니 양을 이용하여 드래곤 로드와 자신을 연결짓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허헛.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렇지 않다면 그는 왜 갈색 산맥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일까요?”
그러자 칼은 대답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칼은 이루릴과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아무리……………. 그가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리는 없을 텐데.”
네리아는 동그래진 눈으로 칼을 보면서 말했다.
“칼 아저씨. 그게, 어, 가능하기는 하나요?”
“말도 안 되오. 네리아 양. 드래곤 라자의 권능은 드래곤 로드가 주는 것이오. 그 권능을 거꾸로 드래곤 로드에게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오.”
“하지만 드래곤 로드도 결국 드래곤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이거 참! 그게 어떻게 말이 되는지. 이봐요, 네리아 양. 각 영지의 영주들은 사실 국왕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오. 그런데 영주가 그 권한 으로 국왕을 다스릴 수가 있소?”
“그건 안 되는 것 같네요. 음. 하지만………….”
그리고 이루릴이 말했다.
“그것은 인간의 경우지요.”
칼은 다시 할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역시 비유란 위험한 거다. 그는 관자놀이를 심하게 문지르면서 말했다.
“안 되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돼. 여러분! 걸음을 재촉합시다. 넥슨이 정말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가 드래곤 로드를 만나기 전에 따 라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걸음을 바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기다란 동굴 속엔 우리들의 발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식의 접근은 좋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기겁한 다음 다시 발소리를 죽여 천천히 걸어가게 되었다.
쏴아아아.
앞쪽에서 다시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우리는 그 물소리 때문에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걸어가면서 샌슨은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미궁이란? 쭉 곧은 길인데.”
“곧아서 불만이야? 난 길을 잃을 염려가 없어서 정말 기쁜데.”
“하긴 그렇군.”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횃불 빛이 도저히 닿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우리는 지하의 거대한 공동 속에 들어와 있었다. 굉장히 넓은 이 암흑의 공간은 횃불 빛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있었다. 양 옆으로 둥글게 돌아가는 길이 보였고 정 면에는 거대한 지하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의 물이 우리들이 들어온 수로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맞은편에서는 규모가 좀 작은 폭포가 보였다. 그것은 맞은편의 벽에서 쏟아져나와 지하 호수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호수의 물이 다시 우리가 들어왔던 수 로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모양이다. 우리들이 다가오면서 들었던 물소리는 바로 저 지하 폭포의 소리였다.
이루릴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주위가 잘 보이지 않겠군요. 후치? 횃불을 높이 들어요.”
그리고 이루릴은 캐스트를 시작했다. 부아아아. 내 손에 들려 있던 횃불이 갑자기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거세게 불타올랐다. 장작개비 하나에서 나오는 불빛이 아니 라 거대한 장작더미에서 나오는 불꽃 같았다. 난 갑자기 내 키의 두 배는 될 정도로 커져버린 횃불에 놀라서 자칫 횃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머리카락이 그슬릴 것 같 은 기분이 들어 난 횃불을 최대한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하에 숨어 있던 엄청난 비경이 순식간에 우리 눈앞에 폭로되었다.
주위의 공간은 거의 완전할 정도로 둥글었고 까마득한 위쪽은 둥그스름한 것이 돔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 돔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종유석들이 보였다. 주위의 벽 들은 각양각색의 종유석들이 이리저리 쌓여서 형성되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불을 켜둔 양초처럼 종유석들이 켜켜로 쌓여 있었다.
그러나 가장 아래쪽, 그러니까 우리들이 서 있는 지면 높이로 내려오면서 벽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홀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벽은 벽돌로 잘 다듬어져 있었고 둥근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횃불걸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횃불걸이들 사이로 여러 개의 통로가 보였다. 우리가 들어온 오른쪽부터 세어보니 모두 세 개의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통로들의 위치상 네 번째의 통로가 있어야 할 위치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으며 그리고 다시 왼편으로 넘어가서 세 개의 통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들어온 수로가 있었다. 따라서 통로들의 위치는 팔각형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너무너무 큰 팔각형이었지만. 아무래도 달려서도 10분은 걸려야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가운데 있는 호수는 참으로 거대했다. 닐시언 전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바이서스 임펠에 있는 궁성 임펠리아를 옮겨다가 이 호수에 집어넣 어도 다 들어가 버릴 것이다. 물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 깊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새카만 호수는 아무래도 무한히 깊어 보였다. 빠져들기라도 하면 영원히 가 라앉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새카만 수면 위로 내가 들고 있는 횃불이 길게 뻗었다. 횃불의 크기도 엄청났지만 호수의 크기는 더 엄청나서 물에 비치는 횃불은 그렇게 커보이지 않았다. 칼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 그런데 어떻게 절벽이 붕괴되지 않았을까?”
칼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 공간은 커다란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분위기랄까. 게다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칼의 목소리는 조금도 울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그저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흐음. 정말 넓기는 넓은 모양이다.
이루릴은 벽을 빼곡히 메워버린 종유석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저 차곡차곡 쌓인 종유석들이 생각 외로 튼튼한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려. 대미궁을 만들기 위해 드워프들의 노커 익시노아 크레벤이 10년 동안 설계를 했다지. 게다가 완성에는 50년이 걸렸고. 정말 대단하구려. 이건……………, 뭐라고 평해야 좋을까. 자연적인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그 공간에 완벽한 대칭미와 조화미를 더했다고 말할까? 정말 엄청난데.”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요? 어차피 우리가 온 곳이 오른쪽이라 오른쪽에 있는 통로 세 군데밖에 못 들어가긴 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 우리가 걸어온 수로는 가운데가 물살이라 건너갈 수 없었고 이 넓은 호수를 헤엄쳐 건널 수도 없다. 이 호수 주위의 길이 정말 둥글다면 저쪽 맞은편에서 왼쪽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저쪽은 또 다른 폭포로 막혀 있다. 그러니 우리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오른쪽에 있는 세 통 로로 제한된다.
“이상하군. 그렇게 서로 통행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두었을 리가 없는데. 여기 들인 노고를 보아하니 가운데 어디에 다리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저 커다란 호수에야 다리를 놓기 어렵겠지만 여기 좁은 수로 쪽에는 얼마든지 다리를 놓을 수 있을 텐데.”
정말 그런데? 왜 다리를 놓지 않았을까?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앞을 바라보았다. 칼은 별로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차례대로 들어가 보세.”
그래서 우리는 지하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둥글게 걸어 첫 번째 통로로 걸어갔다. 이루릴은 간단히 무슨 말을 중얼거렸고 그러자 10큐빗 크기로 늘어났던 횃불은 다
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첫 번째 통로까지 걸어가서 우리는 잠시 통로를 살폈다. 통로의 높이는 약 10큐빗 정도였고 넓이도 그 정도 될 것 같았다. 꽤 거대한 통로인걸. 이루릴은 통로의 입 구 위쪽을 가리켰고, 횃불을 높이 들어올리자 입구 위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네리아는 소리내어 읽었다.
“회상.”
회상이라? 무슨무슨 방, 이런 것도 아니고 그저 ‘회상’이라니? 입구 위쪽에 적혀 있을 글로는 너무 이상하게 보이는걸? 우리들은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안으로 들어 갔다.
앞쪽에 눈이 좋은 이루릴과 나, 샌슨이 섰고 그 다음 칼과 제레인트, 네리아가 섰다. 통로가 넓어서 얼마든지 세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통로는 우리가 걸어 들어왔던 수로처럼 아무런 갈림길이 없이 그냥 죽 곧게 뻗어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아서 앞쪽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우리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은 돌인지 금속인지 재질을 짐작하기 힘든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다. 불빛이 전혀 반사되지 않는 윤택 없는 모습은 돌처럼 보였지만 그 모양새나 재질은 마치 금속 처럼 매끈하면서 차가웠다. 꽤 커다란 문이었는데 사실 문이라 부르기 어려운 것이었다. 샌슨은 그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손잡이가 없잖아?”
문은 손잡이가 없이 그저 매끈하고 평평한 직사각형일 뿐이었다. 문 맞나? 그저 벽에 구멍을 뚫고는 그 구멍에 딱 맞는 돌을 끼워둔 것처럼 보였다. 샌슨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길 수 없다면 밀어보지. 모두 무기를 준비하고 약간 떨어지십시오.”
그리고 나와 샌슨이 문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와서 보아도 역시 매끈한 판일 뿐이었다. 샌슨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손을 내밀어 문을 밀었다.
잠시 후, 샌슨은 우리들에게 벽을 밀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뭐야, 이건?”
“이거 들고 있어봐. 내가 해보지.”
난 샌슨에게 횃불을 건네주고는 손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힘껏 문을 밀어보았다. 그런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가 걸려서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그런 것도 아니 고 완전히 벽을 미는 기분이 들었다. 난 손을 뗀 다음 샌슨에게 말했다.
“자, 손잡이 없는 문을 당기는 방법에 대해 토론을 시작할까?”
“크게 고함을 지른다. 문 열어!”
“그건 안에 누가 있을 경우이고.”
우리가 이런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는 동안 우리 일행은 모두 가까이 다가왔다. 네리아는 꼼꼼하게 문을 관찰했지만 역시 벽에 틀어박힌 돌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말했다.
“이 뒤가 벽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하진 않을 거 같은데?”
이루릴 역시 이곳저곳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약속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 마법으로 닫힌 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러자 제레인트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그렇지! 간단하군. 열쇠는 문제의 옆에 있지! 여러분, 잠시 비켜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제레인트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문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회상!”
제레인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문이 스르르 열리지는 않았다고 해서 제레인트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야겠다. 문은 쌀쌀맞게도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제레인트는 머 쓱한 표정이 되었다. 칼은 푸념처럼 말했다.
“이 문은 헬카네스의 율법엔 관심이 없나 보오.”
우리는 잠시 더 궁리하다가,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우리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 통로를 빠져나와서 우리는 두 번째 통로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입구로 들어서기 전에 모두 위를 살폈다. 과연 입구의 위쪽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복수’. 네 리아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회상………….., 복수…………. 뭐 공통점이나 연상되는 뭔가가 있을까?”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언혀.”
그러자 네리아는 입술을 크게 삐죽거렸다.
우리는 다시 통로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얄궂게도 거의 비슷한 깊이를 들어가자 첫 번째 통로에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문이 나타났다. 나와 샌슨은 혹시나 해서 문 을 밀어보았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레인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복수.”
그리고 우리는 몸을 돌려 통로 밖으로 나왔다.
세 번째 통로로 다가감에 따라 폭포 소리가 더욱 커졌다. 세 번째 입구에 도착하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들어 입구 위쪽을 바라보았다. 입구 위쪽에는 역 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순결’.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건 전혀 맥락이 닿지가 않는 단어들이군. 회상, 복수, 순결이라니. 무슨 공통점 같은 것이 떠오르지가 않는데.”
네리아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냐 아냐. 뭔가 서로 통하는 말이 있을 텐데, 에, 순결을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를 회상하니.
우리는 아무도 네리아를 바라보지 않았고 네리아는 벌겋게 된 얼굴로 땅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고 우리는 통로를 따라 들어갔으며, 비슷한 깊이에서 똑같은 문을 발견하게 되자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들은 모두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별로 말할 기분이 아니었는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결.”
그리고 제레인트는 바로 몸을 돌렸다. 우리들도 모두 짜증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내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잠깐, 잠깐 기다려봐요.”
일행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일행에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문을 향했다. 그러고는 별로 희망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들어줄 만한 목소 리로 문을 향해 말했다.
“그랑엘베르.”
문은 소리도 없이 밖으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