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9화

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9화

9

시오네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다시 뒤로 더 물러났다. 고함을 지를까? 일행을 깨우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시오네는 검을 뽑아들지 않았 을 뿐더러 뽑아들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난 잠시 당황해서 그녀의 얼굴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핏기 없는 푸른 입술은 물이 말라버린 강바닥처럼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병자처럼 하얀 볼. 눈 은 퀭하게 들어가 으시시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망할 꼬마놈.”

시오네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마치 습관적으로 나오는 듯한 그런 어투였다. 감정을 전달하는 기능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시오네는 계속해서 그 런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진 말아. 해를 끼치진 않을 테니까.”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는걸. 난 그녀의 초점 없는 눈을 피해 약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날 어떻게 했던 거죠?”

“알려줄 의무가 있나? 신경 쓰지 마. 이미 망쳤으니.”

“그럼 이렇게 묻지요. 뭣 때문에 우릴 찾아온 거지요?”

시오네는 갑자기 몸을 돌려 우리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괜찮다면 좀 떨어진 곳에서 말하고 싶군.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할 곳에서.”

“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시오네는 왼손으로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의 끝자락을 잡아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러자 왼쪽 허리에 찬 레이피어가 눈에 잘 들어왔다. 이건 뭐지? 지 금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러나 시오네는 왼손을 그냥 늘어뜨리더니 낮게 말했다.

“네게 해를 끼치진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약속이 깨지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다는 것은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감스 럽다는 말 대신 놀랍다거나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써야 되겠죠?”

“말장난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 꼬마!”

시오네는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너희 일행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있어! 잠자코 내 말을 따라. 그렇지 않겠다면!”

갑자기 시오네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제길! 너무 떨어졌어! 좀더 가까이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난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시오네 가 더 빨랐다.

화르르르!

시오네의 들어올린 손바닥 위에 붉은 화염의 공이 생겨났다. 저건 뭐지? 파이어볼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상체를 앞으 로 숙였다. 아무 소식이 없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시오네는 손바닥 위에 불의 공을 띄워둔 채로 말했다.

“잠자코 따라오지 않겠다면 이걸 곧장 던지겠어.”

빌어먹을! 난 바스타드를 거세게 검집에 꽂아넣은 다음 팔짱을 꼈다.

“좋아요. 됐어요? 이제 그거 치워요.”

너무 빨리 대답했나? 시오네는 눈을 조금 깜빡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녀가 손을 내리자 화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오네는 그 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 어리석은 짓 말고.”

좋아, 따라가지. 이 어두운 밤, 뱀파이어의 등 뒤를 따라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간다, 이 말이지? 음란한 느낌이 드는군 그래.

다행히도 시오네는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그래서 잡다하면서도 음란 무쌍한 상상은 그다지 오래 진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 리 일행들에게서도 별로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하지만 조용히 말을 나누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내 어깨는 건 드리면 ‘우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나갈 만큼 긴장해 있었다.

시오네는 망토를 들어올리더니 길 옆의 가파른 사면에 대충 주저앉았다. 흐음. 예의상 마주앉아 주지 않을 수는 없군. 난 무례하다는 말을 듣지는 않

을 정도로, 하지만 최소한 팔 두 개 거리는 떨어진 거리를 두면서 시오네와 마주앉았다. 오우, 젠장. 이 수상쩍기 그지없는 밤에, 수상쩍기 그지없는 고개에서, 수상쩍기 그지없는 뱀파이어와 마주앉아 있다니! 내일 아침엔 내 머리에 구멍이 일곱 개에서 아홉 개로 늘어날지도 모른단 말이야. 목에 이빨 자국이……………, 잠깐. 목은 머리에서 제외되나?

온갖 상상을 다 해보다가 난 시오네의 첫마디를 놓쳤다.

“뭐라구요?”

시오네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데 왜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지지?).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네가 이런 식이라면 간단하긴 글렀군.”

“아, 미안해요. 착실하게 듣지요.”

“좋아. 도와줘.”

“좋아요. 잠이 잘 안 오나요? 자장가의 레퍼토리는 좀 약한 편이지만 그래도 듣기 괴롭지 않을 정도론 불러줄 수 있어요.”

“……그게 아니야.”

“그래요? 아,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 알았어요. 망봐드리죠. 어서 가서 해결하고 오세요. 이런 캄캄한 밤에, 게다가 산속인데 누가 훔쳐볼까 무서워하다니. 오래 참았어요? 얼굴빛이 안 좋네.”

쉬이익! 레이피어가 빠르게 다가왔지만, 그 정도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내가 이 바스타드를 휘두른 것이 벌써 얼마인 줄 알아? 샌슨류 중단 막기! 챙!

시오네는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바스타드에 걸린 레이피어를 옆으로 천천히 밀어내며 말했다.

“내 입장이 되긴 어렵겠지만, 생각해 봐요. 이 멋진 보름달밤에 뱀파이어와 마주앉아 있으면서 농담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난 벌써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을지도 몰라요. 아시겠어요?”

여기서 기름 젓기로 변형하면 그럴듯할 텐데. 그러나 시오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피어를 빠르게 회수했다. 우리 둘 모두 앉은 자리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시오네는 갑자기 움직이느라 흐트러진 머릿결을 뒤로 쓸어넘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말했다.

“꽤 발전했군.”

“동료들이 좋으니까.”

“후. 농담은 이제 그만해. 용건을 말하겠어.”

“듣지요.”

“도와줘. 넥슨을 구하고 싶어.”

난 바스타드를 빼어든 김에 그대로 들고 있기로 결심했다. 바스타드를 아래로 내리는 동작이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면서 난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 다.

“넥슨을? 왜냐고 물어도 될까요?”

“말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이상해요. 당신은 자이펀의 간첩으로서 넥슨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도와주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넥슨은 이제 별볼일 없게 되었는 데. 그걸 모르나요?”

“그래서?”

“뭐. 당신 입장을 이해해 보려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난 넥슨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걸요. 그 사람의 옛날 일은 이 제 다 잊었어요. 그 사람은 바이서스의 왕가를 싫어할 이유가 있더군요. 이해는 하지만 동조할 수는 없고, 따라서 넥슨에게 감정을 낭비하진 않겠어 요. 게다가 아직 새로운 우정이 생겨난 것은 더더욱 아니니까.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내가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봐.”

“뭐라구요?”

시오네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한 다음 들어줄 테니까.”

“계약을 하자?”

“그래.”

“그쪽 조건을 말해 봐요.”

“후작 일행을 교란시켜 줘. 그 동안 내가 넥슨을 구할 수 있도록.”

시오네는 내 태도와 똑같이, 그러니까 아무런 수식어도 감정도 없이 말했다. 재미있군. 이것도 그런 대로 재미있는데? 어디 보자.

“당신 정도면 간단하게 넥슨을 구할 수 있지 않아요?”

“30명이 넘는 전사들은 감당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모두 깨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우리들이 솜씨를 부려서 지금 저쪽에는 부상자들이 꽤 될 텐데. 무슨 이유가 있는 거죠?”

시오네는 이제 끔찍스러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눈빛을 보내어왔다. 하아. 마음을 가라앉히자. 되도록 굽히지 않는 자세로 있고 싶었지만, 난 어느 새 시선을 돌려 시오네를 외면하고 있었다.

“난 저기서 힘을 쓸 수 없다.”

시오네는 맥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시오네 맞나? 난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레브네인 호수를 바라 보고 있었다.

“힘을 쓸 수 없다고요? 저기서는? …다레니안의 영토에서는?”

“그래.”

“그럼 내일 하죠?”

“내일은 늦어.”

“왜 늦지요?”

갑자기 시오네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로 추정되는 표정이 보였다. 미소를 짓는다고? 이건 무슨 의미인 거지?

“후작 일행이 너희들을 쫓아오는 줄 아나?”

뭐야? 이게 무슨 말이지?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맞아.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야. 후작은 그 계집애를 원하고 있으니까. 후작의 준비성은 정말 대단해.”

“맞아요. 대단해요. 그럼요!”

내가 야유하는 태도로 동조하자 시오네는 한쪽 눈을 찌푸리며 미소를 거두었다.

“무슨 뜻이었죠?”

시오네는 갑자기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일이 되면 돌맨 할슈타일도 이 갈색 산맥에 도착할 거야. 난 어제와 오늘 새벽에 걸쳐 그들을 감시했지. 그들은 정확하게 드워프의 통행로를 향 해 다가오고 있어. 내일이 되면, 너희들이 드워프의 통행로에 도달하게 되면 너희들은 돌맨 할슈타일과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만나게 돼.”

그래? 그렇다고?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인데? 시오네는 내 얼굴에서 멍한 표정만을 발견하게 되자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멍청한 꼬마. 후작은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예정일에 맞추어 돌맨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거야. 아미앙스 수도원에서 돌맨이 프리스트들과 함께 비밀리에 출발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야. 그들은 이미 사흘 전 사우스 그레이드를 빠져나왔다.”

“그래서…………,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맺게 한다? 그것이 후작의 계획입니까?”

“그래. 제법이군.”

“그래요? 흐음. 고마운 정보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뭐라구?”

“우린 사실 누가 라자가 되든 상관없어요. 라자만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죠. 이왕이면 저 고약하기 짝이 없는 할슈타일 가문의 사람은 피하고 싶어 요. 그건 후작을 즐겁게 만드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여건이 안 좋다면 그쪽 사람이라도 할 수 없죠. 우리는 크라드메서가 발광한 채 활동기에 접어드 는 일을 막으려는 거예요.”

시오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날 바라보았다.

“할슈타일은 상관이 없고? 그가 크라드메서라는 힘을 가지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니?”

“뭐, 좋진 않겠죠. 하지만 미친 드래곤보다는 아무래도 인간 쪽이 감당하기 쉽겠죠.”

“감당하기 쉽다고? 하핫!”

시오네는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크게 웃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오네는 한참 동안 그런 자세로 어깨를 들썩거리더 니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 같으니.”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 초 만들 줄 알아요?”

“시끄러워. 꼬마야. 불쌍해서 알려주마. 후작이 감당하기 쉬울 거라고? 저 할슈타일 후작이?”

“……놀랄 준비는 끝났어요. 그럼, 이제 놀랄 말을 해봐요.”

“후작에게 왜 라자가 필요하지?”

“예?”

“후작 자신이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데 왜 라자들을 모아들이려 하는 거지?”

“그거야 라자의 혈통을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죠.”

“멍청하긴! 크라드메서의 이야기를 하는 거야. 크라드메서를 손에 넣기 위해 후작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 10년도 더 전에 잃 어버린 딸을 찾고, 드래곤을 가지고 있는 돌맨에게 계약을 파기하게 했어. 그걸 모르나?”

“알고는 있는데…….”

“왜 그래야 하지? 후작 자신도 라자다. 잠깐, 그걸 몰랐나?”

뭐야? 어, 후작이? 음. 그렇긴 하지. 언젠가 후작의 저택에서 넥슨의 문서를 훔쳐내려고 했을 때다. 내가 부끄럽게도 후칠리아로 변장했을 때 후작은 내 손을 잡아보고는 내가 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자가 라자를 알아보는 거니까, 그렇다면 후작은 라자라는 말이네?

“알아요. 할슈타일 후작도 라자지요.”

“알고 있군. 그런데 왜 후작 자신이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지 않는 거지?”

“예?”

놀랄 준비를 해두었지만, 너무 놀라게 되니까 준비가 소용없어지는데? 이건 정말 생각 못해 본 문제다. 후작도 드래곤 라자다. 그런데 왜 후작 스스 로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지? 왜 레니를 찾고, 왜 돌맨을 불러들이는 거지? 왜 그러는 거지?

시오네는 갑자기 몸을 돌려 다시 레브네인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어. 어쨌든 내일이 되면 저 일행에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더해진다. 그렇게 되면 난 도저히 침투할 수 없게 돼. 따라서 기회 는 오늘 밤뿐이다.”

“……”

“이봐, 듣고 있어?”

“잠시 기다려요! 당황했단 말이에요. 좀 침착해질 시간을 가지고 싶다구요!”

“뭐야?”

“젠장. 어이가 없네. 간단한 문제인데 생각해 보질 못했어. 으으음. 당신 말이 맞아요. 왜 후작은 직접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지 않으려는 거지요?” 시오네는 불만스럽게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너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날 도와주지 않겠다면 너희 일행에게 잠든 채로 죽을 수 있는 행운을 선사하겠어. 빨리 대답해.”

이익! 이 괴물이 지금 날 협박하고 있단 말이지? 내가 너 따위 뱀파이어의 협박에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아?

“어떻게 도와주면 되죠?”

사람은 모름지기 둥글게 살아야 하는 법. 으으윽.

쳇. 신세 한번 고약하군. 이 밤중에 뱀파이어의 협박 때문에 산책을 나서야 되다니.

달들은 이제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지만 밤하늘은 여전히 파르스름하다. 우리가 불을 질렀던 마차와 통나무들의 불길도 이젠 사그라들고 있었 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불길은 내게 좋은 목표가 되어주었다.

여기가 우리 고향의 사바인 계곡이라면 이까짓 산길, 눈 감고도 내려갈 수 있어. 하지만 여긴 우리 고향에서 터무니없이 멀고, 우리 제미니에게서도 터무니없이 먼………….

콰당! 너 때문이야, 제미니. 아이고, 무릎이야.

“조용히해, 멍청한 꼬마놈.”

그게 후작 일행들에게 들킬까 봐 비명도 못 지른 채 조용히 속으로만 투덜거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야?

“한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당신을 멍청한 뱀파이어라고 부르겠어요.”

시오네는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걸어가 버렸다. 난 무릎을 문지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꽤 많이 내려왔네? 내려오는 길이라서 퍽 빠른 모 양이군.

산등성이는 이제 호숫가의 평지를 만나 갑작스럽게 경사를 잃고 있었다. 호수의 반짝이는 물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다레니안. 오늘 참 당신의 영토 에서 여러 번 소란을 부리게 되어 죄송하군요. 먼 산의 봉우리들이 감싸고 있는 수면은 달빛을 받아 희게 번뜩이고 있었다.

“어서 와!”

시오네는 낮게 윽박질렀다. 저 여자 골탕 좀 먹여줄까 보다. 젠장.

불타고 있던 마차와 통나무들의 잔해가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오네는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좋아. 여기서 헤어지자.”

“왜요? 더 들어가지 않고?”

시오네는 맹렬하게 쉬잇거렸다. 꽤나 화가 난 모양인데.

“투구걸이로도 못 쓸 머리 같으니. 이 이상은 다레니안의 영토다. 들어가기 위해 허락을 구하고, 하늘로 광선을 쏘아 올라가게 해서 저 녀석들이 눈 치채게 만들자는 거냐?”

아, 그래? 그런데 그건 당신 사정이야. 내 사정은 아니지. 난 어깨를 으쓱인 다음 말했다.

“신호는?”

“그런 건 없어. 속으로 300까지 센 다음 시작해.”

“아, 문제가 있는데. 난…….”

“100이 넘어가면 못 센다는 말이냐?”

어라? 시오네가 어떻게 농담을 알아듣는 거지? 난 눈이 동그래져서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시시껄렁한 농담 따위 집어치우고 어서 시작해.”

“좋아요, 뭐. 잘해봐요.”

“너나 잘해.”

시오네는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잠시 후 난 저편 후작 일행의 횃불 빛이 비치는 곳으로 날아가는 박쥐 한 마리를 보며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넷, 일곱, 스물아홉. 젠장. 백이십구, 삼백.”

다 셌지? 그럼 좀 쉬어볼까. 난 바닥에 주저앉아서 은빛 양탄자처럼 보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에게 뭐라고 귀띔이라도 하고 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시오네는 그런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넥슨을 구해? 으음. 마음이 무겁지는 않다. 하지만 유쾌한 기분도 아니다. 저 멍청한 넥슨은 왜 할슈타일에게 덤벼든 것일까. 그가 원한을 가진 것은 바이서스 왕가가 아니었던 가? 그리고 그 따위 원한 때문에 얼마 남지도 않은 자신을 저렇게 마구 다루다니.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복수에 몸을 태운다는 것인가? 부나 비의 화려한 최후.

쳇. 그러고 보면 바이서스 왕가라는 것에 대한 원한도 참 그렇군. 까마득한 자신의 조상을 배신한 것에 대한 원한이라는 말이지. 그래. 핸드레이크는 핸드레이크 휴리첼이라고 했지.

어라?

아차! 시오네에게 그걸 물어볼걸! 핸드레이크가 누구냐고 물어봤어야 되는데. 아깝다. 어디 보자. 그럼 시오네는 자신의 스승의 멀고먼 후손을 구하 려는 건가? 음. 맥락은 맞아떨어지지만 개연성은 부족한걸. 사제 관계의 의리란 말이지?

타이번은 드래곤에게 마법을 쓰는 것은 사조에게 덤비는 꼴이 되기 때문에 싫다고 말했지. 그렇다면 시오네도 스승의 후손이라서 넥슨을 구하려는 걸까? 으. 이 가설이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려면 비약을 꽤나 심하게 해야 될 것 같은걸.

300쯤 되었을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다레니안께서 나와의 우정을 기억하시는지 알아볼 차례로군.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으 니 아직까진 기억하시겠지?

난 천천히 호숫가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달빛 참 좋군. 모래가 아니라 은가루를 밟는 것 같은데. 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나온 발자국은 검게 그늘이 져서 길게 이어지고 있 었다. 호수는 조용했다.

다레니안께서는 허락 없이 들어오면 붉은 광선은 저절로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말은, 다레니안께서 날 보고 계시는 거겠지? 좋아. 한마디 하지. 난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향해 선 채 말했다.

“페어리퀸 다레니안.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찾아왔습니다. 절 기억해 주시고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혼자서 터덜터 덜 걸어와서 참 의아하게 생각되시죠? 하지만 부탁이니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호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혹 물고기가 튀어오르는지 퐁당!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수면에 작은 파문이 그려지는 것 외에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 다.

“감사합니다. 사실 전 저기 할슈타일 후작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후작에게 참으로 긴요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어날 지도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이 걱정되는군요. 염치 없는 부탁입니다만, 절 좀 지켜주시겠습니까?”

다레니안의 우정을 믿었기에 난 거리낌 없이 시오네를 따라나설 수 있었다. 다레니안은 나와 제레인트를 페어리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지.

“만일 절 지켜주시겠다면 그 허락의 뜻을 어떻게 표현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저기 후작 일행에게는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요.”

난 잠시 기다렸다.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 아래를 내려보자 작은 파도가 모래벌판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파도가 다시 호수로 물 러가고 나자 젖은 모래벌판에 글자가 씌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도와줄게.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렴, 요정의 친구여.’

난 활짝 웃으며 호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레니안.”

좋아! 이젠 됐군. 그럼 후작에게 참으로 긴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되는 건가? 그러나 난 후작 일행의 모닥불이 비치는 곳까지 걸어가는 대신 제자 리에 서서 두 다리를 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조용한 밤이야.

“하아알슈타아아일 후자아악!”

후자아악…… 후자아악………… 메아리도 멋진걸? 아이고 목이야, 켈록켈록. 난 기침을 좀 한 다음 눈에 힘을 주면서 모닥불빛이 비치는 곳을 쏘아보았 다. 과연 모닥불 옆에 작은 불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횃불에 불을 붙인 거겠지?

“들려주우울 마아알이 있다아아!”

있다아아………… 있다아아………… 메아리 정말 멋있어. 그런데 갑자기 새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며 메아리의 끝부분이 지워져버렸다. 에이, 아쉽네.

꺅꺅꺅꺅! 새들은 이제 정말 불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래고래 지저귀고 있었다. 음? 말이 좀 이상하군. 고래고래 지저귄다고?

“크라드메서의 비밀을 알려주마!”

숨이 가빠서 말을 길게 못 끌겠군. 그래서 대신 짧게 끊어서 강하게 말하기로 했다. 메아리와 새들의 비명소리가 어우러져 호수 주변은 굉장한 소란 이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도 아스라하게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우리 일행들이 내 고함소리에 기겁 해서들 일어나는 모양이다. 아아, 이런. 피곤할 텐데 잠을 깨웠군.

“크라드메서는 사실 드래곤이다!”

난 참 놀라운 사실을 잘 말한다니까. 내 입이 자랑스러워. 그런데 다레니안께서는 지금 내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얼이 빠져 계시지 는 않을까?

“또한 헬턴트 마을의 파라핀 양초는 개당 5퍼셀이다! 파라핀 양초 하나로 우리 영주님의 땅을 몽땅 사버리고도 4퍼셀이 남는다구!”

횃불들은 이제 꽤 많은 수로 불어나 있었고 좀 웅성거린 다음 그들은 고갯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도 더욱 커졌다. 새들은 이제 다 날아올라 하늘에서 떠들고 있었다.

“이 정도로 놀라지 않겠다면! 놀라 넘어질지도 모르는 비밀을 알려주마! 성밖 물레방앗간 처녀의 실명이 오늘 여기서 공개된다! 그 처녀의 이름 은…….”

“그거 말하면 넌 다 살았다고 샌슨이 전해 달라는군!”

윽. 운차이의 그 굉장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운차이는 고함을 지르긴 질렀지만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모양인지 아주 기이한 고함소리를 내었다. 그건 그렇고 저건 내가 매일 하던 역할이었는데 오늘은 역할이 바뀌었군 그래.

횃불들은 주춤거리면서 달려왔다. 거리가 꽤나 멀긴 하지만 그래도 아까 산 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보니 횃불들 하나하나가 무시무 시하게 보였다. 검은 산에 살짝 찍어둔 점처럼 보이던 것들이 불꽃 모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보이니까. 하지만 저 녀석들은 이 호수 근처에 함 부로 들어오지 못하겠지. 버텨보자.

“네놈은 누구냐!”

과연 횃불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온 것은 호수를 아직도 한참 남겨놓은 거리였다. 대략 대여섯 개 정도 되는 횃불들은 고갯길을 중간쯤 내려오기는 했지만 호수에서는 수십 큐빗이나 남겨놓은 위치에 멈추어선 채 고함을 질러왔다. 난 피식 웃고는 고개 중간쯤을 향해 마주 고함질러 주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지금까지 누구 뒤를 쫓는지도 모르면서 쫓아온 것은 아니잖아!”

횃불들 쪽에서 잠깐 대답할 말이 막혀버린 모양이다. 그때 횃불들 가운데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네드발!”

후작의 고함소리는 단숨에 짜내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꽤나 살벌하게 들리는 목소리인걸. 그런데, 고요한 호수의 넓은 수면 위로 고함소리가 오가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썩 좋은 밤입니다. 후작 나리!”

확실히 그래. 난 허리에 손을 짚고 선 채 유쾌한 기분으로 횃불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참 바보 같은 꼴로 고개에서 웅성거리고 있었고 난 다레니 안의 보호 아래 완전히 안전하다. 이 정도면 내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멍청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 화살꽂이가 되고 싶냐!”

운차이의 고함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한 내 콧대를 무참하게 뭉개버렸다. 아이고, 맙소사! 그 생각을 못했다! 난 황급히 뒤로 물러나서 불빛이 비치는 거리에서 물러났다. 젠장, 그러고 보니 아직도 불기운이 남아 있는 장작더미 옆에서 내 모습을 다 드러내놓고 있었잖아.

횃불들 가운데서 하나가 고갯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건 뭐하는 거지? 그때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지금 내려오고 있는 것이 할슈타일 후작 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레니안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군! 그래서 저 호수 속에 틀어박힌 멍청한 요정이 우리들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고, 오만가지 종족들 이 모인 떨거지들, 거기 그대로 있어라. 혼자 내려가겠다!”

이것 봐라? 입이 꽤나 거칠군. 지금 다레니안에 대해 뭐라고 말한 거지?

“이것 봐! 내가 달빛 아래 만나고 싶은 것은 절세의 미녀지, 내일 아침 당장 저승꽃이 필지도 모르는 중늙은이는 필요 없다구! 내려오실 필요 없어!”

내 대답을 듣고 칼은 아마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후작은 어떤 표정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 횃불은 여전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혼자서 내려오고 있네? 어디, 대화라도 나눠보겠다는 건가? 좋지. 해줄 말은 무궁무진하거든. 난 알싸한 긴장감을 느끼며 당당하게 섰다. 그때 뒤쪽에선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들이 달려 내려오는 것인가?

그러자 후작은 잠시 멈추어 섰고 고갯길 중턱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작의 부하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작은 곧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난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혼자 내려가는 것이다! 호수의 요정이든 떠돌이 거렁뱅이 왕자든 짖어대지 말고 잠자코 기다려!”

뭐야? 얼씨구? 이젠 정말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데? 후작이 외친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선 샌슨의 짓눌린 고함소리도 들려왔다.

“이놈! 입을 조심해! 이랴아!”

그런데 정작 떠돌이 거렁뱅이 왕자라고 불린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하도 기가 막혀서 그러는 것인가? 타가닥, 타가닥! 경사진 길을 내려오 는 말들은 불규칙적인 발자국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 후작만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저 소악당이 이제야말로 가면을 벗어던지고 흉악한 본심을 드러내겠다는 건가? 이상하군. 지금껏 그렇게도 안전하게 행동해 오던 작자가 말이야. 도대 체 왜 저러는 거지? 이제는 가면을 벗을 시기가 되었다는 것인가?

이힝힝힝! 아이고, 깜짝이야! 목 바로 뒤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려서 기겁하는 줄 알았다. 곧 정수리 쪽에서 달갑지 않은 충격이 느껴졌다.

“이 자식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샌슨이었다. 난 참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샌슨을 돌아보았다. 젠장. 협박을 당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바드들이 먹고 사는 이유가 뭔지 알아?”

“뭐야?”

“세상엔 단순한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거든. 그래서 노래가 필요한 거야.”

“후치…….”

“좋아, 좋아! 젠장. 설명은 나중에 반드시 하겠어. 그리고 지금은 한 가지만 생각해 줘.” 난 지을 수 있는 한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신뢰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샌슨이 아는 후치는 앞뒤 없는 일을 하는 멍청한 소년인가?”

“물론 그래.”

“샌슨, 제발!”

샌슨의 옆으로 길시언과 운차이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제각기 날렵한 동작으로 타고 온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에서 뛰어내린 운차이의 손에는 어 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신기하네. 내리면서 검을 뽑아든 것인가? 샌슨 역시 롱소드를 뽑아들면서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눈앞의 상황이 급하니 잠시 기다리지. 후치 네드발! 하지만 넌 나중에 설명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난 나중에 치도곤을 안겨줄 작정이라는 것은 기억해 둬.”

“좋아, 좋아.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야. 지금은 조용히 있자구.”

길시언이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자 가슴이 저릴 정도로 맑은 소리가 ‘스르릉!’ 하고 울렸다. 그는 프림 블레이드를 늘어뜨린 채 내게 다가왔다. 그 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내 얼굴을 흘긋 바라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후치 네드발.”

“예, 길시언.”

내 대답이 불안에 젖어 있지 않았다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자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 좋겠어. 거리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표정을 마주하니까 불안하잖아. 길시언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이 고약한 사태에 대해 설명은 나중에 듣지. 하지만 한 가지는 지금 당장 감사해야겠군.”

“감사라구요? 뭐지요?”

길시언은 고개를 휙 돌려 고갯길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숲의 나무들에 가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내려오던 횃불은 이제 고갯길을 다 내려와 호 숫가의 길로 접어든 채로 서 있었다. 후작은 지금 우리들의 인원이 늘어난 것을 보고 망설이는 것인가? 길시언은 그 횃불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저놈이 마각을 드러내게 해준 것. 이제 저놈은 더 이상 바이서스의 왕가를 섬기는 자로 남지 않겠다고 공언한 셈이지. 이제 난 저놈을 반드시 벌하 겠다.”

“길시언을 돕겠습니다.”

“음.”

난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스르르 옆으로 다가온 운차이는 아무 말 없이 태평한 자세로 섰다. 난 샌슨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있는 거야?”

샌슨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어. 하지만 칼이 알아서 더 내려올 것인지 결정할 거야. 말이 얼마 없어서 여기까지 내려오면 달아나기가 빡빡하거든.”

“아, 그래?”

“그래. 이 자식아. 쓸모없는 충돌은 피해야 할 거 아냐! 저쪽 인원은 많이 손상되었다지만 아직은 위험할 정도야. 피를 보지 않으려고 지금껏 달아나 고 있었는데, 그래, 네가 이 밤중에 나서서 싸움을 걸어? 네가 도대체 정신이 있는 녀석이야, 없는 녀석이야? 너 혹시 몽유병 아니야?”

“이유가 있다니까!”

“젠장. 그 이유는 꽤 거창해야 될 거야. 틀림없이.”

샌슨은 그렇게 말을 뱉어내더니 길시언에게 말했다.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후치도 안전하니 이대로 물러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다레니안을 무서워해서 쫓아오지 못할 겁니다.” 길시언은 지그시 앞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저렇듯 내려왔으니…………. 예상치 못한 일인 데다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어쨌든 기회는 기회요. 이야기는 몇 마디 들어봐야겠소.”

프림 블레이드가 꽤나 잠잠하군. 이 긴장되는 분위기에선 프림 블레이드도 입을 다무는 것인가? 후작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봐, 다시 말한다. 싸우려는 것이 아니며, 혼자서 내려가겠다! 공격하지 말도록!”

“공격하지 않겠으니 내려왓!”

길시언은 패악스럽게 마주 고함질렀다. 그러나 호수 끄트머리까지 다가와 있던 후작은 더 이상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고함을 질렀다. “기사의 명예로 맹세하겠나!”

“네게 기사의 명예는 과분해! 나의 검의 명예에 걸고 맹세하지!”

길시언의 대답은 우리들로 하여금 웃음을 참기 힘들게 만들었다. 프림 블레이드의 명예라고? 저런 태연한 얼굴로 그런 말을 참 잘도 하시는군. 그러 나 후작은 자신의 검에 걸고 맹세한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다.

“좋아. 지금 내려가겠다. 너희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대기해라!”

뒤의 말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외치는 말인 모양이다. 어쨌든 그 말을 던지고 나서 잠시 후 후작은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샌슨은 갑자기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이봐. 너 눈 좋지. 혹시 몰래 따라내려오는 녀석 없어?”

“없어. 후작뿐이다.”

“그래? 음. 후작뿐이라구. 배짱이 좋은걸.”

우리 쪽으로 곧장 걸어오고 있던 후작은 호수가 눈앞으로 펼쳐지자 갑자기 멈춰 섰다. 다레니안에게 허락을 구하려는 건가?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 온 말은 우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호수의 다레니안! 또다시 붉은 광선 따위를 쏘아올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집어치우시오! 이건 인간끼리의 대화요. 그러니 체통을 생각해서 잠자코 있으시오! 요정 주제에 인간사에 끼어들어 저런 떨거지들을 보호하느라 나와 내 사람들의 통행을 부당하게 가로막았으니 체통이랄 것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맙소사. 저 인간이 완전히 돌았구나! 우리 네 명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호수로 돌아갔다.

호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레니안이 화를 내는 것인가? 순간 등 뒤로 후다닥 물러나는 발소리. 뭐지? 운차이의 짓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미련한 곰들 같으니. 호숫가에서 물러섯!”

“뭐어?”

울림소리.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울림소리. 그것도 도저히 울릴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성이라든지 산 같은 거대한 것들이 저 뿌리부터 울리는 듯한 소리. 흔들린다! 발이 흔들려! 그리고 레브네인 호수를 둘러싼 산 전체가 울리고 있었다.

콰콰콰콰아앙!

위아래 턱이 부딪혀 깨지는 기분이 든다. 콧구멍이 막혀버리는 느낌. 샌슨의 알 수 없는 고함소리에 귀가 터져나가는 것 같다. 길시언은 호수를 바라 본 채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기어코 넘어지는 길시언. 그는 다시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 세상에!”

시뻘건 광선이 호수 전체에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호수 수면 전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껏 보던 붉은 빛다발이 아니었다. 호수 전체가 마치 거울이 되어 햇빛을 반사하듯이 직경 수천 큐빗의 붉은 광선이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마치 화산이 터지는 듯한 섬광. 호수 주변은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져버렸고 옆을 돌아보니 샌슨의 얼굴은 핏 빛이었다. 아니, 찌푸린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핏빛으로 백열하고 있다.

대지는 오늘 그녀 자신의 일부분을 파괴해 버리려는 옹골찬 결심을 해버린 모양이다. 산들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쩌엉! 쩌엉! 맙소사, 산이 갈라지려는 것인가! 그릇처럼 생긴 호수 주변의 지형은 울림소리를 수 배로 증폭시키고 있었다. 쩌엉! 쩌엉! 그리고 호수에서는 말도 못할 정도로 거 대한 빛이 쏘아져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위아래로 너무 흔들려 멀미가 나려고 한다. 샌슨은 무릎을 꿇은 채 검을 위로 들어올리고 뭔지 모를 용서의 말을 마구 외치고 있었다. 대개 “으악!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도의 수준이라 듣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이기 때문에(샌슨이!) 새겨들을 말도 아니고, 주위의 혼잡스러 운 상황은 새겨들을 상황도 아니다. 길시언은 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주저앉은 꼴불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백열하는 땅 위로 그의 등 뒤로 끝 없는 그림자가 늘어진다. 그때 운차이가 날카롭게 말했다.

“가운데! 가운데!”

“가운데?”

“잘 봐! 빛 가운데! 다레니안이다!”

뭐라구? 빛 가운데라니? 이처럼 거대한 빛 어디에 가운데가 있다는 거야! 빛은 그대로 하늘을 꿰뚫어버렸고 밤하늘은 미친 듯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장담하지만 이 울림소리는 최소한 바이서스 전체에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빛은, 맙소사! 바이서스 전체가 아니라 자이펀이나 헤게모니아에 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쯤 쿨쿨 자고 있을 제미니는 보지 못하겠지만, 헬턴트의 경비 대원들은 난리가 났겠지. 저 아찔할 정도의 광선은 밤하늘 을 찔러올리는 불의 검처럼 보이겠지. 쿠왕쾅쾅쾅!

다레니안이다!

볼 수 있었다. 핏빛 광선의 가운데, 수면 위에서 30큐빗쯤 떠오른 곳에서 걸어오고 있는 다레니안이 보였다. 아니,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후작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 빛 속에서 더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 주위에 엉기어 거대하게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간신히 그녀라는 것을 알 아볼 수 있을 뿐 그녀의 모습 자체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결같은 속도로 붉은 빛 속을 가로질러 후작에게 다가갔다.

후작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횃불은 이미 땅에 떨어져 타오르고 있었다. 집어던져 버린 것인가? 그의 손이 칼자루로 옮겨간 것을 보니 그런 것 같은데. 기괴한 붉은 빛으로 호수 주변은 대낮처럼 밝아져 있어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옷과 몸 전부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장 짙은 석양 속에 서 있어도 이보다 더 붉지는 않으리라.

할슈타일을 꼿꼿이 선 채 다레니안을 마주보았다. 다레니안은 할슈타일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정지했다. 불 속에서 타오르는 또 다른 불.

“할슈타일. 내게 끼어들지 말라고 했는가.”

이건…………, 맙소사, 이건 다레니안이 하고 있는 말이 아니다. 호수 전체가, 아니 레브네인 호수와 그 둘레를 둘러싼 산 전체가 말을 하고 있었다. 주위 의 모든 것들이, 저 어마어마하게 많은 호수 물과 붉은 광선, 그리고 나무와 바위, 흙, 그리고 웅혼한 산맥이 후작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작은 인간이다.

혼자서 세계를 상대할 줄 아는 인간. 그에겐 종족의 이름도 필요 없다. 드워프가 종족으로서 바위산에 구멍을 뚫는가? 하플링이 종족으로서 아름다 운 정원과 밝은 미소를 만드는가? 인간에게는 그런 것도 필요 없다. 인간은, 인간은 개인으로서 세계를 상대할 줄 안다. 그리고 후작은 후작으로서 세 계를 상대할 줄 안다. 왜냐하면 대자연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으니까. 다레니안은 안 돼. 후작은 굳이 당당해질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 인지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세계에 대한 도전. 저 간단한 긍정은 세계를 짓밟아 뭉갠 인간의 말이다. 루트에리노 대왕이여, 기뻐하시라! 당신으로부터 300년, 별들이 파괴되고 300년이 지나, 이제 저토록 비정하리만큼 간단한 한 마디가 지금 세계를 박살내고 있으니.

다레니안은 말했다.

“300년 동안 이토록 방자한 자는 처음 보는군.”

그러나 그것은 다레니안의 말이었다. 호수의 말도 아니고, 산의 말도 아니었다. 후작에 의해 다레니안은 다레니안으로 끌어내려진 것이다. 지금 그 녀가 당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전의 그녀에 비해 볼 땐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가련하게 보였다. 하늘로 쏘아져 올라가는 불꽃도 이젠 더 이상 눈을 아프게 만들고 내 모든 존재를 태워버릴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저 밝은 빛일 뿐이다.

“여기는 내 영토다. 내 영토에서 내가 주인 노릇하지 못한단 말인가.”

논리, 그래. 서툰 논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인간의 논리. 개인과 개인의 논리. 페어리퀸의 입에서 나오고 보니 그럴 수 없이 불쌍하게 들리는 논 리. 다레니안이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후작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주장하시오. 무시할 테니.”

이제 논리마저도 깨어져버렸다. 다레니안은 이제 불길을 휘몰아쳐 후작을 박살내어 버릴까? 아니면 폭포 같은 물기둥이 그를 휩쓸어가 버릴까? 다레니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떨림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네 속에도 핸이 있구나.”

길시언과 샌슨도 이제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레니안과 후작만을 바라보았다. 뭐라고도 말하기 싫은 장면이 었기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산의 울림도, 대지의 울림도 잠잠해졌다. 광폭하게 쏘아져 올라가는 광선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이제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있었다. 굳이 말 하자면 밝아서 보기 좋다는 것 정도랄까. 맙소사, 저 무지무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의 상징이었던 빛이 이제는 고작 조명이 되어버렸나? 칼, 좀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됩니까?

“네 속에도, 숨가쁠 정도로 맥박치는 핸이 있구나.”

꽤나 멀었지만 할슈타일 후작의 표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후작은 약간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핸? 핸드레이크 말이오?”

“그래, 인간아. 너의 입으로 담기엔 너무나 고귀한 이름. 그러나 네 속에도 핸이 있구나.”

후작의 눈에서 순간 몸이 아플 정도로 사나운 미소가 비쳤다. 그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속에 핸드레이크가, 아니 핸이 있다고? 내게서 핸의 모습을 느낀단 말이지?”

다레니안은 고개를 끄덕였을까? 대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할슈타일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 속에 있는 핸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내 앞에서 비키시오! 그리고 날 방해하지 마시오!”

저 찢어죽일 녀석이잇! 지금 저 녀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악독한, 말할 수 없이 악독한!

다레니안은 말없이 후작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 타오르는 진홍색의 불길도 여전했지만 그녀에게서 분노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봐 요, 다레니안! 지금은 화를 내도 돼! 저, 유언할 새도 없이 죽어버려야 적당할 녀석이 지금 당신과 핸드레이크의 관계를 자기 수단으로 사용하려 든단 말이야!

“알았어.”

다레니안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오, 안 돼!

“그러면 안 돼!”

나도 모르는 새 고함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샌슨이 기겁하면서 귀를 막았지만 난 그에게 사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한발짝 발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러면 안 돼요! 저건 핸드레이크가 아니야! 저작자의 속에 있는 핸드레이크를 인정하는 것은 핸드레이크를 모독하는 거예요!”

후작은 마치 뱀처럼 민첩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다레니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후치. 난 느낄 수 있어. 어쩔 수가 없는걸.”

“어쩔 수가 없다니요! 뭐가, 뭐가 말씀이세요!”

“네가 가르쳐준 대로야. 그게 너희들이잖니.”

엑셀핸드가 어느새 내려온 것인가? 누가 도끼머리 같은 걸로 내 머리를 후려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게 우리다. 다레니안 속에 있는 핸드레이크도, 내 속에 있는 핸드레이크도, 그리고 할슈타일 속에 있는 핸드레이크도 모두 진짜. 영원의 숲에 들어 간 사람은 그 친구들도 잊어먹게 되지.

‘아직까지 그걸 모르세요? 나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이 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에 다 내가 있어요. 그것 이라구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내가 있는 거라구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그것이 인간이에요!’

드래곤 로드에게 했던 말이 단어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진짜 핸드레이크다. 그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다레니안……!”

목이 잠겨드는 듯하다. 누가 내 어깨를 짚었다. 누구지?

“후치.”

고개를 돌려보자 길시언의 침착한 얼굴이 보였다.

“네 이야기, 그리고 페어리퀸과 후작의 이야기 모두 이해하긴 어렵지만, 난 이렇게 말해 주고 싶구나.”

“길시언.”

“페어리퀸의 뜻대로 하시게 내버려두렴.”

“페어리퀸의 뜻대로…………….”

“그래. 내 듣기로, 정확한진 모르겠지만, 페어리퀸께서는 후작의 저 고집 있고 자신만만한 모습에서 300년 전, 자유롭게 태어난 모든 피조물들을 위 해 자신을 아낌없이 불태웠던 한 대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리시는 듯하구나. 그의 당당함과, 그의 자신만만함, 그리고 그의 굳은 의지를 보시는 것 같 은데…………, 맞아? 아, 고마워. 프림.”

프림 블레이드가 먼저 대답한 모양이군. 난 잠겨드는 목으로 힘들게 침을 삼키며 길시언의 붉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로선 연상하기 어렵지만, 페어리퀸께서 그렇게 느끼신다면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후치.”

“그게 옳은 걸까요?”

“페어리에겐 뭐가 옳은 거지?”

다시 뒤통수를 두드려맞는 느낌이 든다. 확실해. 어디선가 몰래 내려온 엑셀핸드가 폴짝폴짝 뛰면서 내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페어리에겐 뭐가 옳은 거지? 차원을 건너뛰고 세계를 건너뛰는 페어리에겐 뭐가 옳은 것이지?

“알 수 없지요.”

“그래. 우리 생각이나 우리 관념 같은 것을 무리하게 그녀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

“고마워요, 길시언. 당신은 역시………….”

나의 왕이에요. 뒷말은 삼켜버리고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길시언은 되묻지는 않았다.

다레니안은 이제 호수 중심부까지 물러나고 있었고 후작은 꼿꼿이 선 채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작의 부하들은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메드라인 고개에 뱀이 기어내려오는 것처럼 횃불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붉은 광선도 이제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레니안은 무슨 뜻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고맙게도 다레니안은 곧장 호 수가 울리는 그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오는 자들은 돌아가!”

꿈틀꿈틀 내려오던 횃불들은 질겁하면서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레니안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 영토 안에서 폭력을 쓰는 자는 영원히 인간 세상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이것은 양쪽 모두에게 하는 경고다. 검에서 손을 떼라!”

떼라! 떼라! 떼라! 산울림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풀이 울렸다. 길시언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예의를 담은 동작으로 정중하게 프림 블레이드를 다 시 꽂아넣었다. 그의 동작을 따라 우리들도 각자의 무기를 다시 꽂아넣었다. 모두들 정중한 동작이라서 절그렁거리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후작은 고개를 홱 돌려 호수를 한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레니안의 중재에 의해, 완전히 비폭력적인 회담을 하게 된 건가? 운차 이는 그런 회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 되더니 옆으로 걸어가서는 적당한 바위를 골라 앉아버렸다. 길시언은 다가오고 있는 후작만을 똑바로 노 려보았고 그래서 나와 샌슨은 왠지 조금 왜소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아무래도 길시언과 후작이 이야기를 나눠야 될 듯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