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5화 (7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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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들 사이로 희뿌옇게 물결치던 안개들은 다 사라졌다. 이렇게 높은 곳이 미치도록 더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미치도 록 덥다. 햇살은 무자비할 정도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일까?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은 계속해서 셔츠 앞섶 을 적셔왔다.
하지만 거의 똑같은 비율로 추위가 우리를 유린하고 있었다(왠지 누군가가 잘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바람 때문에 코나 입술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마디로, 개판이다.
그 지독한 더위 및 추위만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것은 아니다. 전방으로 나섰던 칼잡이들은 모두 그리폰의 부리와 발톱에 할퀴고 찢겼으며 날개에 맞아 멍도 좀 든 상태였다. 이제부터 내 앞에서 ‘깃털같이 부드러운………….’ 어쩌고 하는 친구가 있다면 난 그 친구를 그리폰 깃털로 작신작신 두드려줄 용의가 있다. 그리폰의 쇠망치 같은 날개에 맞았던 머리가 아직도 쑤신다. 머리 안 찌그러졌나? 제레인트가 킬킬거리며 물어왔다.
“죽을 만해?”
“삶은 아름다워요.”
내 대답이 끝나고 나서 제레인트는 곧장 내 가슴과 배의 상처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폰의 발톱은 가죽 갑옷을 버터처럼 갈라놓았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내 뱃가죽이 비슷한 경우를 당했겠군, 젠장.
“아아아악! 잘못했어요!”
저쪽에서는 네리아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네리아의 어깨를 맞추고 있던 에델린은 이 불가해한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잘못했다는 거야? 그러나 에델린은 다시 그 강력한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네리아의 탈골된 어깨를 맞추었고 네리아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다 가 샌슨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말았다.
“갈색 산맥의 몬스터들 전부가 꽃다발이라도 들고 위문 오기를 바라는 거야앗!”
“이잇! 아파서 눈물이 찔끔거리는 사람한테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뭐야?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데 그런 일이 없다구!”
“이 계절엔 꽃이 없어!”
샌슨은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칼잡이들이 모두 늘어진 김에 자연스럽게 휴식 시간이 되었다. 칼은 화살들을 주워모으며 투덜거렸다. “벌써 정오가 가까운데 반도 못 왔어. 겨울철에 무슨 몬스터들이 이렇게 많은 거지?”
땀을 닦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대답했다.
“크라드메서 때문이 아닐까요?”
“크라드메서 때문에?”
“예. 그의 활동기가 다가오면서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것 아닐까요? 드래곤 피어는 꼭 물질적인 거리와 시간의 차원에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드래곤의 웨이크닝을 감지하고 몰려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계절에 이렇게 많은 몬스터라니요. 게다가 그리폰들이라니. 전 이놈들을 생전 처음 봅니다. 아, 제가 견문이 어둡긴 합니다만………….”
그러자 방패를 손질하면서 숨을 고르고 있던 길시언이 대답했다.
“난 대륙의 이곳저곳, 사람들 발길 드문 곳도 제법 많이 돌아다녔지만, 그리폰을 실제로 보고 싸워본 것은 이게 처음입니다. 첫 번째로 만났을 때 강 한 동료들이 있으니 나도 썩 운이 좋은 편이군요.”
일행들은 잔잔하게 웃었지만 곧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대략 대여섯 시간 예정을 하고 온 길인데 새벽에 출발해서 정오가 될 때까지 전체 여정의 반도 못 왔다. 산에 익숙하지 못한 레니나 아프나이델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초겨울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난폭하게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때문이다. 세상에, 그리폰 떼라니!
칼은 화살 하나를 손에 들고 이마를 톡톡 치면서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잠시 어지럽게 흩날리는 가운데 그는 씩 웃었다. “힘드시죠?”
길시언도 피식 웃었다.
“우리가 여기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그런 말도 나올 듯하군요.”
칼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왜 이러고 있죠?”
바람이 분다. 산등성이가 바람에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오네의 말대로, 파멸하기 전에 뭐라도 이루면 그만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럼 우리가 왜 이러고 있죠? 왜 산등성이를 타고, 언덕을 넘고, 계곡을 가로지르고,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겁니까?”
“산등성이가 있고, 언덕이 있고, 계곡이 있고, 몬스터가 있고…………… 그리고, 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제레인트는 추위 때문에 두 팔을 로브 자락에 파묻으며 말했다.
“간단하고 품위 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대륙을 구하기 위해. 멋있지 않습니까?”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호감이 가진 않지만 사실이니 부정할 수도 없군요. 농부는 밭을 갈아 대륙을 구하고, 어부는 고기를 낚아 대륙을 구하니까.”
제레인트는 입을 쩍 벌렸고 그 다음엔 벌쭉 미소를 지어버렸다.
“그렇죠,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하하.”
도대체 뭐가 저리들 즐거운지 모르겠군. 당연한 말을 하며 즐거워하는 취미는 없어. 난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요! 아직 길은 먼데, 걷지 않고 짧아지게 만들 방법은 없으니까.”
일행들은 각자 웃으며 일어났다. 우리는 다시 갈색 산맥의 봉우리들 사이로 난 좁은 계곡과 능선을 가로질렀다.
가을 동안 쌓였던 낙엽들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헐벗었지만 그래도 숲은 울창했고 그 사이로 길 비슷한 것은 없었다. 짐승의 길 은 몇 개 보였지만 그건 사람이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낙엽 더미 속을 걸어가거나, 겨울이라 물이 말 라버린 강바닥을 건너거나, 커다란 바위를 기어오르느라 낑낑거렸다. 때론 완전히 노출된 고원 위를 힘겹게 걸어갔다. 사방 어느 산봉우리에서 바라 보더라도 곧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인원이 많아서 우리들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산에 사는 짐승들 은 대개 무리를 크게 짓지 않는 법이니까.
일행의 모습은 봐줄 만하다. 모두 옷 몇 군데 찢어지지 않은 곳이 없는데다가 칼잡이들은 곳곳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다. 그리고 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땀에 푹 절어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별말 없이 꾸준히 걸어갔다. 땀을 뻘뻘 흘려대며, 감아둔 붕대가 풀어져내리는 것을 다시 묶으며, 고행 이랄까?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바닥에 빨간 융단이 깔린 길이 있기를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기대한 것은 가혹 한 역경과 고난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원정이자 귀향이고 도전이자 해후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다.
귀를 아무리 곤두세워도 풀벌레 소리 하나 들을 수 없었지만, 설령 어느 미친 벌레가 겨울의 찬가를 불러젖힐지언정 장대한 바람 소리에 묻혀 하나 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황량하고 거친 산의 노래만이 들려온다. 오르고, 내려가고, 굽이쳐 돌아, 앞으로 걸어간다. 산 과 우리들뿐.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간다.
그렇게 능선 하나를 타고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운차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네리아의 목소리. 뭐지?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는 제자리에 서서 먼 곳에 눈을 주었다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눈살 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말했다.
“날 부른 것 같은데.”
순간 나와 제레인트, 그리고 샌슨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네리아가 또 화를 바락바락 낼 것인가? 그러나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들어올 려 먼 곳을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뭘 본 것 같은데, 좀 봐줘. 저어어기.”
운차이는 고개를 돌려 트라이던트의 방향을 따라갔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산봉우리들이 겹쳐 쌓이며 사열하듯 길게 늘어선 방향이었는데 우리들이 걸어가는 방향에서 분수령과 만나게 되는 산맥이었다. 운차이는 잠시 후 말했다.
“붉은 로브.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다.”
일행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멈춰 섰다. 갑자기 몸을 숨기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하늘이 너무 넓어 칼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라구요? 얼마나 멉니까?”
“꽤 멀군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저 앞의 분수령에서 저 친구들과 조우하게 될 것 같다는 점이오.”
“아, 그래요.”
길시언은 팔에 감아둔 붕대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방해해 올까요?”
“십중팔구 그럴 것 같습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운차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볼 수 있을까, 운차이?”
“저 프리스트들도 너희들과 시력이 비슷하다면 보긴 어렵겠지.”
“아, 그래. 그럼 다행이군…………. 혹시 동작도 알아볼 수 있나?” “어렵다.”
칼은 턱을 쓸어만지다가 말했다.
“만나게 된단 말이지.”
우리는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노려보았다(사실 노려보고 있는 것은 운차이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보이는 척하는 것이겠지). 칼이 갑자기 말 했다.
“저쪽에도 라자는 있지요. 그리고 우리들도 라자를 가지고 있고.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의 만약을 생각해서, 레니 양이 혹 거부될 경우를 생각한다 면 돌맨이 필요해질지도 모르지요. 만일 우리가 먼저 갔는데 거부되었다면 돌맨 할슈타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돌맨이 먼저 도착해서 성공한다면? 그것 참 판단하기 쉬운 일이 아니군요.”
목 뒤에 가득한 땀을 닦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후우, 후우. 판단하기 어렵다고요?”
“우리가 먼저 도달하기 위해 속력을 높여야 하는가, 아니면 뒤에 도달하도록 속력을 떨어뜨려야 하는가. 그 둘 중에서 말입니다.”
“어, 글쎄요? 먼저 가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부될 경우가 문제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두 가지 조건이 결합된 네 가지 상황이 되는 건가요? 우리가 먼저 크라드메서를 만나는 경우, 레니 양이 선택되면 우린 성공, 선택되지 않으면? 그럴 경우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을 대상으로 활동기에 들어간 기념식을 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다음번으로 돌맨이 시도해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우리는 이미 죽었겠지. 으으윽. 칼은 계속 말했다.
“저쪽 일행이 먼저 크라드메서를 만나는 경우, 돌맨이 선택되면, 어쨌든 크라드메서는 안정되겠지만 할슈타일 가문의 죄악을 단죄하기가 힘들어지 겠군. 따라서 절반의 성공. 그러나 돌맨이 실패하는 경우? 우리가 두 번째로 시도할 수 있겠지요.”
흐음. 그렇긴 해. 우리에겐 레니가 있지만 저쪽엔 돌맨이 있지. 돌맨은 역대 최악의 드래곤 라자라고 들었는데, 레니는 과연 어떨까? 그러고 보니 레 니의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 건지를 모르겠군. 분명 돌맨이 우리들보다 앞서 성공해 버리면, 그 가문을 건드린다는 것은 확실히 어려워지겠지. 전 쟁통이니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속한 가문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쯤은 나도 짐작할 수 있다구.
샌슨은 잠시의 짬이 나자 곧 바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길시언은 스피어 하나를 지팡이처럼 짚고 섰다. 두 사람은 짐도 많이 들고 온 데다 그리폰들 과 싸우느라 제법 지쳐 있는 상태였다. 칼은 일행을 주욱 둘러보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
“우리 안전만 생각한다면 난 저 일행을 먼저 보내버리고 싶군요. 저 친구들이 성공하면, 크라드메서는 안정되겠지요. 하지만 저 친구들이 실패하면 그 다음에 우리가 시도할 수 있겠지요. 꽤 이기적으로 들리죠?”
아프나이델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런 말이 대개 그렇듯이,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만 동시에 솔깃하게 들리는군요.”
칼은 쓰게 웃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솔깃하군요.”
그럼 발걸음을 조금 늦추는 것이 좋을까?
그렇잖아도 그리폰들과의 전투 때문에 피로한 상태다. 제레인트와 에델린이 있어 부상은 거의 치료되었지만 피로감은 남아 있었다. 상처에 감아둔 붕대엔 피와 땀이 배어 굳어버려서 거북하기 짝이 없었고. 좀 쉬었으면 좋겠군. 저 녀석들이 먼저 간다면, 절반의 성공 아니면 절반의 실패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간다면 완전한 성공 아니면 완전한 실패. 따라서 굳이 앞서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겠지.
순간 나는 몸이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논리라니? 아니,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냐. 감정의 문제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건 헬턴트식도 아니야!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난 칼을 노 려보았다.
칼은 걸음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제자리에 서서 침울하게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번에는 길시언을 노려보았다. 등을 보여 주는 나의 왕이여, 당신은? 그러나 길시언은 내 시선은 알아채지도 못한 채 묵묵히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 으면서. 길시언은 말했다.
“운차이 덕분에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군요. 먼저 보낼까요?”
당신이 당신이 다른 사람의 등을 보면서 걸어가겠다고? 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순간 알아차렸다.
맙소사, 크라드메서가 우리를 표백시키고 있어! 크라드메서에게 다가갈수록, 거리가 줄어들고 접촉이 다가올수록 우린 우리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 고 있는 것인가? 나마저도 그게 솔깃하게 들려온다구! 돌맨 따위, 죽든 말든! 돌맨이 성공하면 어쨌든 절반의 성공, 실패하면 알 바 아님! 레니가 성공
하면 완전한 성공, 실패하면 우리는 사망. 돌맨을 먼저 보내버려! 젠장!
“그럴 순 없어요.”
내 입이 지금 뭐라고 말했나? 에이, 설마? 이런 시점에서 함부로 열릴 정도로 내 입은 제멋대로가 아닐 텐데. 그러나 일행들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음. 내 입은 제멋대로였군.
“그냥 가요.”
얼씨구, 잘한다! 요 망할 놈의 입! 길시언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꺾은 채 날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후치?”
“글쎄요. 제가 똑바로 알고 있는진 모르겠는데, 우린 방해자나 경쟁자에 대해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달려왔던 것 같아요. 더군다나 마지막 순간에 양보하기 위해 지금껏 달려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목숨이 위험하니까? 설마요. 그랬다면 우리 여정은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일 텐데요.” 칼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길시언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봐.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걸어왔고 우리가 피곤하면 멈췄어요. 다른 사람이 시켜서 달린 적도, 그리고 눈치를 봐가면서 멈춘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우리 스스로만을 한계로 생각해 왔으니까, 남은 여정도 끝까지 우리 자신만을 한계로 생각하며 걸어가고 싶어요. 그런 데 난 아직 내 한계에 부딪히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러니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걸어가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험한 곳에 다른 사람 먼저 들이미는 거 보기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내 입은 미쳤어, 쳇.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주위의 일행을 둘러보았다.
“혹시 한계에 부딪히신 분 계십니까?”
잔잔한 미소뿐, 다른 대답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길시언은 기대고 있던 스피어를 발끝으로 톡 걷어차서는 한바퀴 빙글 돌려 어깨에 메었다. 상쾌 한 동작이다.
“그럼, 후치의 말대로 지금껏 걸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걸어갑시다.”
길시언이 미소를 남기고 몸을 돌렸을 때다.
길시언은 갑자기 멈칫했다. 그리고 일행들도 모두 멈추었다. 뭐지?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그때 운차이가 말했다.
“바람이 없다.”
바람이 없어? 어, 어라? 그러고 보니 이런 고지대에서 바람이 없다니? 주위는 고요하다. 말할 수 없이 고요하다. 그리고 그 고요 사이로 내 심장 박 동이, 옆에 있는 레니의 가느다란 호흡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적.
꽈르르릉!
“끼아악!”
레니! 옆사면으로 굴러 떨어지려던 레니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나도 균형을 잃었다. “이런, 제기랄!” 나와 레니는 허우적거리다가 서로 겹쳐서 쓰러져버렸다. 콰당! 윽. 부드럽고도 물컹한 느낌. 레니, 어쩔 수 없었잖아? 왜 이리 난동을 부리는 거야? 그러나 내 아래에 깔린 레니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순간 레니가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설마? 샌슨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땅이 흔들린다!”
“뭐라도 잡아! 앉아! 엎드려!”
쿠르르릉! 아프나이델은 다리를 희한하게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모든 것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린다. 두두두두두! 우두 두두두! 난 머리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말도 안 되는! 산봉우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좌르르르, 좌르르르! 오오옷, 제기랄! 돌멩이들 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꼼짝 마!”
난 레니의 머리를 가슴에 움켜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세상이 캄캄해지면서 내 턱에 떨고 있는 레니의 이마가 닿았다. 레니, 내가 샌슨보다 열심히 지켜줄게. 퍽!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젠장, 머리를 더 숙여야겠는데. 머리에 맞았다간 그대로 골로 가시겠어?
두두두두! 갈색 산맥 전체가 끓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격렬한 진동. 퍽! 퍼벅!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어깨와 등을 치고 지나갔다. 사지가 제멋대 로 춤을 추는 가운데 충격이 올 때마다 레니를 더욱 바싹 끌어안는다. 아래에서 기어코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 후치야? 후챠?” 그러나 아래 에 깔려 있어서 레니의 목소리는 숨차고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시작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흔들림이 멈췄다. 좌라락. 좌락.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잠시 조용해지자 난 머리를 들었 다.
일행들은 모두 나동그라져 있었다. 땅이 거칠게 흔들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길시언은 나와 레니가 있던 곳 조금 위까지 미끄러져 내 려와 있었고 샌슨은 우리 발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다. 네리아는 땅에 트라이던트를 박아넣고 그것에 의지하여 앉아 있었다. 모두들 먼지를 덮어쓰고 군데군데 돌멩이에 맞아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프나이델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레인트의 외침소리도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괜찮습니까? 이런, 부어오르는군요. 잠시.”
“아, 아뇨. 제레인트 괘, 괜찮습니다.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는 법. 제가 대충 손을 보지요.”
“허어, 이런!”
다른 사람들은? 에델린은 돌멩이 몇 개 맞는 것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얼굴로 칼과 엑셀핸드를 가리고 앉아 있었고 그 둘은 에델린의 가슴에 안 겨 있었다. 모자상 ·차라리 욕을 해라. 운차이는 놀랍게도 허리를 조금 낮춘 채로 두 발로 서 있었다. 날렵하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넘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 눈길을 따라 나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과 바위가 마구 흘러내린 것뿐만이 아니다. 차라리 고지대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아래쪽 저지대와 계곡들 쪽에서는 먼지 구름이 자욱하 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얗게 일어나는 먼지 구름은 산등성이를 향해 거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부터 원래는 상당히 날카로웠겠지 만 지금은 조금 둔하게 들리는 충격음들이 들려왔다. 쿠르르르릉. 조금 가까운 곳에서는 뿌리째 뽑혀 흔들거리는 나무들도 보였다. 난 레니가 일어나 도록 비켜앉았다.
“후치야, 후챠! 괜찮아?”
레니는 곧장 내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난 손을 들어 흔들어주려다 어깨가 뻐근해서 대신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의 표정 아냐? “어, 어.”
“……그런데 허락도 없이 내 몸 함부로 만지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러고도 레니는 한참 내 몸을 군데군데 더듬었다. 쳇.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여어! 칼! 괜찮아요? 운차이는? 샌슨, 일어나 봐!”
저 아래까지 굴러 떨어져 있던 샌슨이 끙, 하는 신음을 토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머리를 험하게 좌우로 흔들더니 그대로 옆으 로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는 계속 흔들리던 머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너무 세게 흔들었나 보군.”
“머리 괜찮아?”
샌슨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당신 누구시죠?”
·괜찮은 모양이네.”
운차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약삭빠르게 넘어져버려서 아프나이델 외에는 별로 다친 사람이 없었다. 아프나이델은 넘어질 때 손을 잘 못 짚었는지 손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마법사는 운동 신경이 느려서 큰일이라는 엑셀핸드의 투덜거림에 아프나이델은 씩 웃었다. 그는 손목을 휘 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나더니 말했다.
“엑셀핸드. 당신은 넘어질 때도 다른 사람보다 다칠 일이 적지 않습니까. 하하하.”
칼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여기가 지진이 많은 곳입니까?”
“아니, 난 이곳에서 지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네.”
“그렇다면………….”
아프나이델이 칼의 말을 받았다.
“크라드메서겠죠. 아마 곧 일어날 모양입니다. 잠버릇이 깔끔하다고는 못하겠군요.”
모두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칼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갑시다.”
그리폰들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에다 흙먼지가 더해져 일행들의 몰골은 초췌하기 짝이 없다. 길시언의 회색 머리카락은 먼지를 뒤집어써서 거의 백발 비슷하게 바뀌어 있었고 엑셀핸드의 하얀 턱수염은 먼지를 덮어써서 회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희한하네. 네리아는 어깨를 마구 털어내리며 말 했다.
“점점 가까워져오는데.”
네리아가 말하기 전에도 일행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른편으로 멀리 떨어진 능선을 걷고 있던 붉은 복장의 무리들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있 었다. 지금 저들과 우리들의 직선 거리는 약 1500큐빗? 저쪽 무리와 우리 일행은 똑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평행선이 아니다. 저쪽 무리가 걷고 있는 능선과 우리들이 걷고 있는 능선은 같은 분수령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걸어갈수록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들도 이미 늦어버렸다고 생각하여 뻔뻔스러우리만큼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지만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간의 직접적인 공격 거리는 안 되지만 모습은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길을 걸어가고 있자 니, 이젠 정이라도 붙일 수 있을 지경인걸.
서로간에 아무런 말은 없었지만 만날 것은 전제되어 있었다. 우리가 시험 삼아 속력을 조금 높이면 곧 저쪽에서도 속력을 높여온다. 그리고 속력을 조금 늦추면 저쪽 역시 속력을 늦춘다. 서로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거리에서 매복이나 암습 따위는 눈감고 아웅하는 짓이 된 지 오래라 이미 고려
대상도 안 되고 그렇다고 경쟁적으로 달려가기엔 산길이 너무 험하다.
“만나게 된단 말이지. 싸우게 될까.”
제레인트의 혼잣말에 칼이 대답했다.
“무익한 싸움인 것은 저쪽과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해보고 싶은데요.”
길시언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에는 우리를 종말 처리하고 싶은 상당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예…………. 우리가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할슈타일 후작에 대한 고발은 당연. 그러므로 저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 인적 드문 갈색 산맥 안에서 할슈타일 후작에 대해 으르렁거리는 폐태자와 그의 졸개들을 처리해 버리고 싶은 유혹이 있겠지요.”
칼은 차갑게 말했고 곧 샌슨이 콧김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먼저 가자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먼저 저 분수령에 도달하여 위치를 잡고 다가오는 저 친구들을 성대하게 맞이해 주는 겁니다. 저 산꼭대기의 지형은 괜찮은 편입니다.”
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꽤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퍼시발 군. 마치 지형이 유리하니까 싸움을 벌이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싸움의 이유가 먼저 명확해야 되지 않겠는가? 물론 인간들은 이길 수 있 으면 이유엔 신경 쓰지 않고 동족을 공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미안하네. 내가 좀 피로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어쨌든 지금으로선 저 일행들과 싸우고 싶은 욕구는 없네. 저 친구들과 우리들이 상 반되는 목적으로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경쟁자의 입장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세. 저 프리스트들도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니. 우리와 똑같은 속도로 걷고 있지 않는가.”
샌슨은 조금 투덜거린 다음 다시 입을 다물고 걸어갔다.
이윽고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우리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엑셀핸드는 도끼를 가볍게 들었고 길시언 역 시 등에 지고 있던 방패를 손으로 바꿔 들었다. 저쪽의 일행들은 특별한 변화 없이 그냥 걸어왔다. 우리들쪽이 조금 빨리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 리들은 그대로 아무 말없이 산 정상에 서서 다가오는 프리스트들을 기다렸다.
모두들 빨간 로브를 입고 있는 가운데 한 명만이 가벼워보이는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정도에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이채롭다. 등에는 롱소드를 메고 있었고 두 다리뿐만 아니라 손까지 이용해서 산을 걸어오고 있었다. 돌맨 할슈타일인가. 나머지 프리스트들 은 모두 빨간 로브 아래에 갑옷을 받쳐 입었는지 어깨와 가슴이 상당히 거창해 보였다. 그리고 간혹 로브 자락 사이로 검 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 는 모습도 보였다.
“프리스트들인데…………, 갑옷에 검까지 가지고 있군요?”
난 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약간 뒤쪽에 서 있던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니까. 저 친구들은 성직자라기보다는 전사 쪽에 가깝다고 들었어. 교리 연구나 경전 봉독보다는 체력 단련과 검 술 훈련을 더 많이 한다지.”
“그래요? 흐음. 성직자 같진 않군요.”
“뭐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어. 입으로 하는 기도만이 기도는 아니야. 신 앞에 우리 사는 모습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바로 기도라 할 수 있어. 그러니 검술훈련과 체력 단련도 기도라 할 수 있겠지.”
제레인트의 말에 네리아와 레니가 탄성을 질렀다. 길시언은 피식 웃더니 등에 매고 있던 스피어 하나를 꺼내어 지팡이처럼 짚고 섰다. 그리고 샌슨 은 롱소드를 뽑아들고 검집을 배낭과 함께 뒤에 팽개쳐둔 가벼운 차림으로 내 옆에 섰다.
운차이는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아무 말없이 서 있었고 그의 발치 바위에 네리아가 앉아 있었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짧게 쥐고 는 날 부분을 한가롭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트라이던트의 날 부분만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아래에서 다가오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에 대 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목소리로 말해서 무리 없이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칼이 입을 열었다.
“황량한 산 위에서 의외의 만남이군요. 여행자들에게는 그것이 일상이던가요. 칼날 위에 실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름의 영광에 의지하여.”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별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조용히 멈춰 섰다. 사실 당황했다면 더 웃기는 광경이 되었겠지. 아까부터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으니 까. 이제 우리들은 아래쪽의 프리스트들보다 대략 10큐빗쯤 높은 위치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리스트들 중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바싹 자른 짧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 들어가고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하얀 머리에 비교할 때 그슬린 얼굴은 유달리 시커멓게 보였다. 짧은 목과 넓은 어깨가 인상적인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리 없이 그 얼굴에 연결지을 수 있는 텁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외? 웃기시는군. 창조가 닿을 수 없는 미를 찬미하며.”
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프리스트를 영접하기라도 하듯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지나치게 앞으로 나서지는 않은 위치에서 칼은 말했다.
“칼이라고 부르십시오.”
“귀하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소. 현명함의 기사 칼 헬턴트 공. 난 레티의 보잘것없는 검 중의 하나요.”
“반갑습니다.”
어라? 이름이 저건가? 레티의 보잘것없는 검? 그때 제레인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름이 없어요. 파괴신을 섬기는 자가 자아를 구축할 수는 없다는, 뭐 그런 복잡한 의미가 있지 요.”
아, 그래?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꽤나 불편하겠군. ‘어이, 눈가에 별 모양의 점이 있는 형제가 속이 좋지 않다는군. 초조해지면 코 후비는 버릇이 있 는 형제를 불러다주게. 그 형제가 사팔뜨기에 말버릇이 이상한 형제를 치료했었지? 난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그 이름 없는 프리스트들을 내려다보 았다.
칼은 돌맨 할슈타일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레티의 보잘것없는 검 중의 하나에게 말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레티의 빛나는 검들이 하나의 검광으로 모여들어 이 황량한 갈색 산맥을 여행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무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 말은 우리가 여기서 낯짝을 드러내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는 것 같은데. 맞소?”
“……의미를 말하라면, 그렇군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거리는 집어치웁시다, 현명함의 기사.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우리는 크라드메서에게 드래곤 라자를 연결짓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거요. 돌맨 할슈타일 공을 말이오.”
어라, 꽤나 말투가 무례하군. 저게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화법인가? 난 칼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들려온 칼의 목소리에 나는 상당한 불안감을 느꼈다.
“투미한 저의 식견에도 불구하고 제 짐작이 맞다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군요.”
칼은 온화하고도 화려하게 말했다. 큰일이다, 젠장! 산을 많이 타서 피로해진 나머지 짜증이 났나 봐. 저쪽의 백발 프리스트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그쪽도 우리와 마찬가지 아니오? 비록 수단이 서로 다르지만.”
“명민하신 지적입니다. 레티의 영광이시군요.”
“좋소. 깨놓고 이야기합시다. 우릴 방해할 거요?”
“제 동료들의 의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전 평소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덕망과 명성에 대해 깊은 호의를 가져왔던 자올시다. 제가 레티의 프리 스트들의 행동을 방해해야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로군요.”
레티의 보잘것없다는 검께서는 잔인하게 웃었다.
“하하하! 좋은 관점이오.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칼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아, 골치 아파! 샌슨의 얼굴을 돌아보자 그 역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눈썹을 치켜뜨고는 의 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프나이델은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량을 베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그쪽의 드래곤 라자의 신병을 우리가 맡게 해주시오.”
길시언의 입에서 이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레니는 파랗게 질렸고 네리아가 그녀의 어깨를 감았다. 그러나 칼은 한점 표정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저희들과 함께 있는 드래곤 라자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크라드메서가 라자도 없이 활동기에 접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잖소.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돌맨 할슈타일 공께서 실패하거든 다른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이리 보내시오.”
“글쎄요…………. 저희들이 모셔가면 되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모셔온 것도 우리니까.”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수고했다고 말씀드리지. 그러니 나와 흥정 따위 할 생각은 마시오! 우리 앞에 있는 것이 뭔지 모른단 말이오? 크라드메서 요!”
칼은 더욱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알기는 뭘 알아! 입으로 아는 것? 머리로 아는 것? 닥치시오. 국왕께 명예의 호칭을 받았다고 기고만장하지 마시란 말이오. 드래곤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고 말 엉터리 모험가 주제에 함부로 중요한 일에 끼어드는 법이 아니오. 대륙의 위기라는 말, 말로서는 상상해 볼 수 있겠지만 과연 당 신들같이 서녘의 오지에서 달려나온 촌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우리 모두가 서녘의 오지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자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눈이 멈춘 곳은 길시언이었다. 그는 길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그래. 당신은 길시언 폐태자의 일을 말하시고 싶은 모양이군. 왕자와 함께하는 일행이라는 말인가 보지? 왕자여! 말해 보시오. 당신은 국가 수호의 의무를 팽개치고 달아난 자요. 당신의 어깨에 메어진 의무를 저버리고 들판과 산의 야만스러운 아름다움에 취해 달려간 자요. 당신이 과연 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할 자라고 말할 수 있소?”
길시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입을 다물고 그저 묵묵히 프리스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드워프의 위대한 노커여. 당신의 땅굴과 당신의 망치에 경배를 보내지. 하지만 당신은 말할 수 없을 것이오. 당신이 광산과 대 장장이의 일 외에 어떤 것에 식견을 갖추고 있는지.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일에 손대는 것은 당신처럼 오랜 세월 동안 위명을 쌓아온 자에겐 어울 리지 않는 일이오. 드래곤의 일은 당신네 광부 족속이 담당할 일이 아니오.”
엑셀핸드는 씨근거리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먼저 레티의 프리스트가 말을 해버려서 엑셀핸드는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들 집도, 명예도, 지위도 갖추지 못한 떠돌이들 아닌가? 우스운 일 아니오, 헬턴트 공? 이런 방랑자 무리가 대륙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나서다니.”
칼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역시 말귀가 통하는군. 그러니 드래곤 라자를 우리에게 넘기고 당신네들은 천천히 우리 뒤를 따라오시오.”
“뒤를 말씀입니까?”
“그렇소. 당신네들이 얼마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 손을 댔는지 알 수 있도록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겠소. 당신네들이 보는 것이 당신들 을 가르치게 되겠지. 알았다면 즉시 내가 말한 대로 시행하시오.”
칼은 인자하게 웃었다. 아아아, 이제 끝장이야!
“귀하의 엉덩이가 얼마나 멋있는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댁의 엉덩이를 감상해 주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군요.”
엑셀핸드가 혀를 깨물고는 끔찍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네리아는 볼을 잔뜩 부풀리더니 곧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하!” 레니 와 아프나이델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배를 잡고 뒹굴 준비를 갖추었다.
레티의 백발 프리스트는 잠시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렸다. 대략 다섯 호흡쯤? 레티의 보잘것없는 검께서는 대략 그 정도 시간을 끌고 나서야 간신히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칼은 두 팔을 정열적으로 펼쳤다.
“참으로 복된 만남이올시다!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는 돌대가리는 만나기 진귀한 것이지요.”
“너 이놈! 뚫린 입이라고 감히 …………….”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혀 있는 그 귀를 잘 판 다음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지, 레티의 보잘것없는 칼토막 선생.”
백발 프리스트는 그야말로 입이 콱 막히고 말았다. 아마 저 나이 되도록 이렇게 험악한 말은 처음 들어보셨을 테지. 뒤쪽에 있던 레티의 프리스트들 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로브를 차례대로 등 뒤로 넘겼다. 그러자 곧 갑옷과 번쩍이는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모두들 검 손잡이를 쥐었다. 칼은 또박또박 말했다.
“먼저, 난 당신 뒤를 따라가며 엉덩이 감상해 주고 싶은 생각 전혀 없어. 둘째, 그쪽의 드래곤 라자를 우리에게 보내준다면 숙식 제공하고 안전하게 크라드메서에게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제의하지. 셋째, 당신네들은 신을 섬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할슈타일 후작을 섬기니까 후작에게 전해 주시오. 지은 죄에 대해 준비되어야 할 벌이 너무 많아서 간추리는 작업이 필요해질 지경이니 좀 도와줄 수 없냐고. 받고 싶은 벌을 우선적으로 줄 수 도 있거든.”
세상이 모두 발 아래로 보이는 바위 위에 꽂꽂이 선 채, 칼은 내용상 험담이지만 어조상으로는 험담이 아닌 말을 험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발 프 리스트는 울림이 꽤 많이 섞인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싸우고 싶다는 게냐?”
칼은 피식 웃었다.
“성직자 주제에 세상의 일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진 것만 해도 고약한 경우거늘 그에 더불어 폭력 성향까지 갖추고 계시는군.” “뭐라구?”
“이 답답한 작자, 잘 들으시오. 성직자란 무엇이오?”
백발 프리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레인트와 에델린은 모두 움찔하면서 칼을 바라보았고 칼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알기로 성직자는 만인의 종복이라고 아는데? 신은 만인의 어버이, 인간은 신의 아들, 그리고 성직자는 인간의 종복 아니었던가? 신께서 성직자 들이 만인의 지도자 노릇 하기를 바라신 적은 없겠지. 신께서 성직자에게 바라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서 만인을 섬기는 것 아니오?”
백발 프리스트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늘어서 있던 다른 프리스트들의 얼굴에선 갑자기 불안한, 그러면서도 불만족스
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잘 정리된 고요함은 그대로였지만 왠지 그 표정들에서 수군거리는 듯한 분위기가 풍겨나왔다. 칼은 말했다.
“성직자가 신의 선민을 섬기길 거부하고 그들을 지배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오. 언사를 주의하시오, 레티의 프리스트! 싸우고 싶냐고? 양치기가 양에게 화를 내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단 말이오?”
제레인트와 에델린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통해 칼의 말이 꽤나 옳은 이야기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 프리스트들은 로브만 입었다뿐 이지 사실 칼잡이에 가깝다며? 백발 프리스트는 험한 눈으로 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 다했소?”
“다했다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레티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당신 말을 취소할 기회를 주겠소. 어쩌시겠소?”
이건 정말 칼잡이 중에서도 저질 칼잡이로군. 칼의 말을 전혀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데. 칼은 차라리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백발 프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까? 모욕이라고?”
“명백한 모욕이오.”
“어째서 그런지 말씀해 보시오.”
“우리들을 만인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싶어하는 성직자로 치부하지 않았소! 물론 우리는 신 앞에서만 허리를 굽히지만, 그렇다고 만인을 다스릴 생 각을 한 적은 없소! 게다가 레티가 아니라 할슈타일 후작을 모신다고 말씀하셨소. 성직자에게 그런 모욕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이곳에 오신 이유는?”
백발 프리스트는 눈에서 불길을 뿜어내면서 말했다.
“장난 치는 거요? 돌맨 할슈타일 공을 크라드메서에게 안내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렇다면 그 의무나 충실히 수행하시오! 레니 양을 탐낸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고! 어떻게 우리에게 레니 양을 포기하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말이오? 레니 양은 우리의 부탁에 의해 저 먼 땅에서 이곳까지 오시었소.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서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오. 그런데 당 신은 우리에게 레니 양을 내놓으라고 말하는군. 마치 레니 양이 우리 소유의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약 지금이라도 레니 양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난 그녀를 크라드메서에게 데려갈 수가 없소. 그리고 애초에 약속했던 바대로 그녀를 다시 그녀의 고향으로, 그녀의 가족에게 로 데려다주어야 하오. 그런데 내가 어찌 당신에게 그녀를 내어주고 말고 한단 말이오!”
백발 프리스트도 이 말에는 입이 막히고 말았다. 레니는 글썽이는 눈으로 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티의 보잘것없는 검은 한참 후에야 힘 들게 입을 열었다.
“어, 그건 내 실수였소. 크라드메서의 위기 때문에 머릿속이 꽉 찬 상태였단 말이오. 그렇다면, 에, 그렇다면 레니 양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이 겠군. 그렇겠지?”
어라?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러나 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렇소. 신 아래 평등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할 당연한 자유가 있소.”
“그렇다면, 비켜나 주시오.”
백발 프리스트는 강하게 말했고 칼 역시 거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어찌나 거칠게 홱 몸을 돌리는지 나는 칼이 쓰러지는 줄 알고 놀랐다. 몸을 돌 린 칼은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는 겁먹은 눈으로 칼을 마주보았지만 칼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저 프리스트께서 레니 양에게 할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들어주시죠. 다른 말은 할 것 없고, 레니 양 스스로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길 바랍니 다.”
“저, 저, 칼 아저씨…….”
“괜찮아요, 레니 양.”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니를 위로하는 표정을 지었다. 레니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앞으로 조금 나서서 아래에 있는 프리스트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 높은 곳, 거기서도 산 정상의 바위 위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외로워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레니의 빨강머리는 힘없이 나풀거 렸다. 레니는 바지 옆의 두 주먹을 꽉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가씨가 드래곤 라자요?”
“예, 예. 그, 그렇습니다. 레니예요.”
백발 프리스트는 날카로운 눈으로 레니를 올려다보았다. 젠장, 상점에서 물건 고르는 장사치의 눈길처럼 보이는걸. 어디 안 보이는 곳에 흠집은 없 나? 어디 보수한 부분은 없는가? 갑자기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떠올랐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레니는 백발 프리스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고개 를 이리저리 꼬고 있었다. 이윽고 백발 프리스트는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누구의 딸인지는 잘 아시겠죠?”
레니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백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저의 아버님은 일스의 델하파의 항구에서 웨일즈 본야드를 경영하고 계시는 그레이든씨세요.”
좋아, 멋지다! 레니는 한번의 떨림이나 주저함도 없이 줄줄 말했다. 백발 프리스트는 당황한 눈으로 칼과 다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일행들은 야비하게도 아가씨에게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 정당하지 못한 일이야. 아가씨는 그보다 훨씬 고귀한 가문의 따님이시오.”
제레인트가 벌쭉벌쭉 웃기 시작함으로써 백발 프리스트를 의아하게 만들었다면 운차이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하품을 해버림으로써 백발 프리스트 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레니는 턱을 들어올리더니 약간 토라진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분들을 함부로 말씀하시지 마셨으면 좋겠네요.”
“뭐라구? 아가씨. 아가씨는 잘 모르고 있어요. 저 일행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 일행이 어떤 사람들이냐고? 독서가, 초장이, 경비 대장, 도망친 왕자, 전향한 간첩, 클래스 3 마스터 마법사, 가장 고귀하다는 드워프, 돈이 너 무 많아서 도둑질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지 오래된 도둑, 죽었다 살아나도 바뀐 게 없는 프리스트, 이빨이 멋진 트롤 프리스티스. 이 정도면 멋진 일행 아니야? 레니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저 일행들은 아가씨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한마디도 알려주지 않았단 말이오. 아가씨의 정당한 아버님으로부터 아가씨를 빼앗기 위해. 레니는 턱을 올린 자세 그대로 도도하게 말했다.
“설마 그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할슈타일 후작이 라자의 혈통을 위해 하녀였던 저의 어머니를 건드려 절 낳았다는 음탕한 이야기?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 크라드메서 때문에 절 되찾으려 한다는 칙칙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 “네요.”
백발 프리스트는 입을 쩍 벌렸고 그 표정은 우리들을 퍽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레니의 이야기에 유쾌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우리 일행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붉은 로브를 걸친 프리스트들 무리 가운데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숨죽여 웃는 사람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어? 웃고 있는 사람은 어린 소년, 돌맨 할슈타일이었다. 돌맨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 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백발 프리스트는 헛기침을 하더니 레니를 올려다보았다.
“그 이야기를 아시오?”
레니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지만 당당하게 대답했다.
“불행하게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잊고 싶은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백발 프리스트는 다시 기운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진실을 거부할 수는 없는 법이오. 자신의 숙명을 거부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은 일이고. 더군다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다는 것은 말 도 안 되오. 아가씨는 고귀한 혈통의 후계자요. 위대한 바이서스의 존경받는 귀족으로서의 삶이 아가씨의 권리란 말입니다. 일스 같은 곳에서 생을 마구 살아갈 필요는 전혀 없소.”
레니는 마지막 말에 눈썹을 곤두세웠다.
“전, 전 제가 감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싫어해요. 되도록이면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말을 하고 싶을 때도 되도록이면 입을 다물고 있 자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작 해야 할 말도 안하는 경우가 많아요. 손해 보는 일도 있지만, 그래도 전 제 신조를 지키고 싶어요.”
그랬나? 어째 레니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했지. 레니는 잠시 주먹으로 입을 가리더니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제 평소의 신조를 굽혀야겠네요. 프리스트께선 무슨 권한으로 일스를 그렇게 험담하시는 거죠?”
“예?”
“프리스트께서 바이서스를 위대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처럼 저도 일스를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아가씨는 일스의 국민이 아니오!”
“아니, 전 위대한 일스의 국민이에요!”
아아, 일스여! 그대는 자랑스러워해도 좋으리라. 여기 일스의 작은 애국자가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 30명 앞에서 당당히 그대의 이름을 찬 미하고 있음이니! 쿠하하하! 레니와 마찬가지로 소금기 어린 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제레인트는 누가 건드리면 그대로 눈물이 툭 터져버릴 것 같은 얼 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일스가 바이서스의 아들 나라 같은 거라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부모라고 해서 자식을 함부로 험담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나라와 나라의 관계라면 더욱 그럴 거라고 생각되네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요? 아가씨는 할슈타일 후작의 따님으로………….”
“프리스트 님이야말로 제 말을 못 알아들으세요! 전 그레이든 씨의 딸이에요! 프리스트 님은 가지고 계시는 그 검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 “세요?”
“뭐라구?”
“프리스트 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검은 프리스트 님의 것이잖아요! 그 검을 만든 대장장이의 것이 아니라! 절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제 아버 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요. 후작님께서는 저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한 번도 주신 적이 없어요. 전 말하겠어요.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일 유
피넬과 헬카네스라 하더라도 우릴 돌보지 않는다면 인간들의 어버이가 아니에요!”
괴, 괴, 굉장하다! 레니가 저렇게 과격한 데가 있었나? 원래 조용하던 사람이 폭발하면 더 무서운 법이라는 거룩하신 상식론은 역시 진리였나? 레니 는 프리스트를 상대로 신성 모독이 될지 모르는 말을 함부로 말해 버렸다. 뭐, 내가 보기에도 전문적인 신학으로 전개될 수준의 말은 아니지만, 그래 도 저게 예사말인가?
백발 프리스트는 뒤통수를 두드려맞은 사람의 표정을 정확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손을 뒤통수로 가져가기만 한다면 정말 그럴듯할 텐데. 그는 얼빠 진 얼굴로 레니를 올려다보다가 곧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이, 이………….., 고약한 물이 들었군!”
레니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에 상처가 나지 않을까 보는 내가 겁이 날 정도였다.
“일스 따위, 해적이나 진배 없는 뱃놈들 소굴에서 짠내나 맡으며 자라났으니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을 터. 자신의 신분도 깨닫지 못한 채 막돼먹은 불신자의 소리나 지껄이다니. 개탄스러운 일이로고!”
“말씀 함부로 하시네요. 일스가 해적 소굴이라구요? 그럼 당신네들은 신성 산적떼들이에요?”
바야흐로 칼이 일행 최고의 독설가의 위치를 빼앗기는 순간이었다.
“닥쳐라!”
“내 말이 틀렸어요? 이런 산 위에서 서른 명이나 되는 칼잡이들이 지나가는 여행자를 멈춰 세우고는 ‘여자를 내놓아라!’라고 말하면 그게 산적이 아 니고 뭐예요?”
푸하하, 푸하! 아이고, 아이고 죽겠다. 레니는 깜찍한 얼굴로 백발 프리스트의 으르렁거림을 흉내냈고 레티의 프리스트들마저도 황급히 고개를 돌렸 다. 백발 프리스트는 콧김을 풀풀 뿜어내면서 자신이 간신히 성질을 억누르고 있음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네 타락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마. 레니 할슈타일!”
“자기가 이름이 없다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요! 레니예요, 레니! 할슈타일 따위, 개나 줘버리라!”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니 샌슨이 두 팔을 들어올린 채 만세를 외치려 드는 네리아를 말리고 있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살벌한 눈으로 레 니를 바라보더니 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레니는 더 이상 상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헬턴트 공, 당신! 어린 소녀에게,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소녀에게 마구잡이로 당신의 조야하고 야비한 지식을 우겨넣은 모양이군.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모르겠소?”
그러나 칼은 자신의 옛 영화를 잊지 않았다. 정통 독설가의 기본 요건. 무슨 말을 할 때든 낮고 잔인하게 말할 것. 칼은 이마에 ‘잔인’이라고 써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신의 가장 참된 선민을 백치 취급하시는군. 우린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지만, 어린이야말로 가장 신에 가깝다는 것쯤은 수련사 시절 에 충분히 배웠을 줄 아는데. 성실치 못한 수련사였던 모양이군요.”
레티의 프리스트들 가운데서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웃음소리를 재료로 삼아 나는 눈앞에 있는 백발 프리스트의 과거 수련사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 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이상 입 섞어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어! 얌전히 드래곤 라자를 내놓으시오. 강제를 동원하기 전에!”
오호라, 이제 마각을 드러내신다는 건가? 샌슨은 이를 드러내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고 운차이는 팔짱을 풀었다. 네리아는 화려한 동작으로 트라 이던트를 돌려잡으며 씩 웃었다.
“성직자를 두드리면 천벌을 받는지 안 받는지 볼까?”
“이, 이 고약한!”
그때 길시언이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티의 보잘것없는 검이여. 지금 레티의 종단 전체의 의지로서 바이서스 왕가를 치겠다는 것이오?”
백발 프리스트는 이제 자신의 피부의 매끄러움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파리가 없는 계절이라는 것이 좀 아쉬운걸. 하얗게 질려버린 저 얼굴에서 파리가 미끄러져 실족하는 광경을 보고 싶은데. 길시언은 더욱 음성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말해 보시오. 난 당신 말마따나 태자의 자리를 걷어차고 야만스러운 황야의 아름다움에 취해 버린 자이지만 왕자의 자리를 포기한 적은 없소. 그것 은, 역시 당신 말마따나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니까.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신권이 속권의 경계를 무시하고 왕가의 존엄을 침해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얼마 걸고 내기할까? 저건 프림 블레이드의 대사임에 틀림없어. 길시언은 검손잡이를 꽉 쥔 채로 느릿하게 말하고 있거든.
“기, 길시언 왕자?”
“정확한 호칭에 감사하겠소. 자, 이제 당신의 의도를 내게 말해 보시오. 레티의 검은 바이서스 왕가를 겨냥하는 거요?”
<8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