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11화

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11화

11

갈색 산맥의 분지. 바람이 불고. 풀잎은 서로를 부르며 서로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구름은 바람에 떠밀려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이는 굳은 채로 서 있었다. 레니를 안아올리려던 네리아도, 레니의 얼굴 가까이 몸을 숙이던 칼도,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길시언도, 길시언을 부축하고 있던 샌슨도, 길시언을 치료하던 제레인트의 기도소리도,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엑셀핸드도, 상처를 어루만지던 에델린도, 검을 꽉 부여잡은 운차이도, 덜덜 떨고 있던 아프나이델도, 그리고 나 역시.

후작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벌리거나 혹은 눈을 부릅뜬 채 전사들은 넥슨과 크라드메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팔짱을 낀 채 허 공을 노려보는 후작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최소한 그의 부하들처럼 겁을 먹고 있지는 않았다. 어떻 게 된 일일까? 후작을 바라보던 내 귀에 넥슨의 폭발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핫하하하!”

넥슨의 웃음소리와 함께 몸이 다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난 휘청거리는 무릎을 간신히 똑바로 세웠다. 주위에서 경직에서 풀려난 일행들은 한숨 이나 짧은 비명들을 토해 냈다. 그때 넥슨은 웃음을 멈췄다.

“성립되었다고? 성립되었어? 그래? 그럼 난 당신의 라자인가?”

넥슨의 웃음소리는 다른 장소, 다른 상황에서였다면 더할 수 없이 순진한, 그 기쁨만으로도 동조해 주고 싶은 기분이 마구 샘솟아 날 듯한 그런 웃음 소리였다. 저 순진무구한 웃음소리.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말한다! 크라드메서! 내 첫 번째 요구는 이것이다! 할슈타일 후작을 없애라!”

후작을? 난 다시 후작을 쳐다보았다. 후작을 둘러싼 전사들은 한점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으나 그 얼굴은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후작은?

후작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작은 팔짱을 풀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후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날 쏘아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의 눈빛이 내 눈을 통해 들어와 머릿속을 날카롭게 쑤셔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도대체 뭐야? 왜 후작은 저 말에 겁을 집어먹지 않는 거지? “넥슨 휴리첼. 오해하고 있었구나. 그러리라고 생각했지만.”

크라드메서는 어린애를 타이르는 어른의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은 당황했다.

“뭐라구?”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아니, 잠깐만. 저건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지. 그런데? 드래곤 라자는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지.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칼이 튕겨져오르며 외쳤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자신의 말의 여운을 귀담아 듣는 듯했다. 샌슨이 놀라서 말했다.

“예? 칼?”

“그래, 그랬어!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 드래곤 라자는 인간과 드래곤을 이어준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도 인간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었군! 할슈타일 후작이 지금껏 그 자신이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는 쉬운 방법을 무시하고 돌맨이나 레니를 노린 것은, 후작이 절대로 라자가 되지 않으려 했던 까닭은……………!”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아프나이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마무리지었다.

그거였군! 할슈타일 후작 자신이 드래곤 라자였는데, 왜 그는 오래전에 헤어졌던 레니를, 지골레이드의 라자였던 돌맨을 크라드메서에게 짝지으려 한 것인가? 왜 스스로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려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드래곤 라자는 관계일 뿐이니까!

“관계의 수준으로만 떨어지게 되니까. 관계는 둘만 있으면 되는 거야. 부부를 말하려면 남편과 아내를 말하면 돼. 다른 건 없어. 인간과 드래곤이 드 래곤 라자를 통해 관계지어진다면,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는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 드래곤 라자는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칼의 숨가쁜 말은 넥슨의 비명소리에 파묻혔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산울림은 넥슨의 경악을 희석시키며 동시에 확대시키고 있었다.

“크라드메서! 당신의 라자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인가!”

넥슨은 피를 토하듯 외쳤지만 크라드메서는 냉랭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온하게 대답했다.

“무시하는 것이다. 가련한 라자여.”

“무시・・・・・・라구?”

“넌 네가 원한 것의 본질을 몰랐다. 드래곤 라자의 말에는 원래 의미가 없다. 나는 이제 라자를 가진 드래곤으로서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라자 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비록 자신의 손발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를 사랑하기는 하겠지만, 손발이 머리를 향해 입을 열어 명령할 수는 없지 않을까.”

“무, 무슨! 그건 억지다! 나도 인간이잖아!”

“아니, 너는 드래곤 라자다. 너는 드래곤 라자일 뿐이며, 그것도 계약을 했으며 그 당사자인 드래곤이 생존해 있는 드래곤 라자다. 이제 네가 너의 숙명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려면, 계약을 취소하든지 날 죽이는 도리밖엔 없겠지. 하지만 난 계약을 취소하지 않을 것이며,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넥슨은 온몸을 뒤흔들며 계속해서 외쳤다. 저러다가 자칫하다간 팬텀 스티드 위에서 떨어지겠다.

“틀려! 틀려! 그렇지 않아! 네 말대로 난 너의 드래곤 라자다! 내가 너의 손발이라면, 그렇다면 난 바로 너다! 내 요구는 바로 네 의지잖은가!”

“넌 나인 동시에 인간이기도 하지.”

크라드메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풀들의 머리 위로 높게 솟아오른 그의 모습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풀의 파도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고 목처럼 보인다.

“넌 나이며 동시에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인 넥슨은 될 수 없다. 넌 드래곤에게만 속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게만 속하는 것도 아니다. 관계는 둘 모 두의 것. 그것이 너의 선택의 진실이다. 그것이 드래곤 라자의 진실인 것이다. 넥슨, 넌 드래곤 라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점에서도 너의 아버지를 닮았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고, 고개 돌려! 내, 내가 왜 인간인 넥슨이 아니라는! 너, 너에겐 드래곤 라자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야 돼! 날 무시할 순 없다구! 날 돌아봐!”

그러나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넥슨의 말을 무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무시해 버리겠다는 의미인가? 그는 그저 고개 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넥슨. 어떤 실이 엉켜 운명이라는 천에 이런 무늬가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유피넬이 정한 나의 짝이며 동시에 헬카네스의 손길이 머물러 만들어진 나의 불완전한 짝이군.”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불완전한 짝이라고? 그것은 영원의 숲에서 세 번이나 거푸 죽었던 넥슨을 가리키는 말인가? 다급하게 크라드메서를 부르던 넥슨이 갑자기 굳어버렸 다. 그의 하얀 얼굴이 눈에 잘 들어온다. 크라드메서는 계속해서 마치 혼잣말하듯 등 뒤의 넥슨에게 말했다.

“네가 왜 전체가 아닌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이제 말해 주겠다. 넌 드래곤 라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최후까지 남겨진 너의 마지막 일부까지도 파괴해 버렸다.”

‘뭐라구?”라고 말한 것 같았다.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바라본 넥슨의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 넥슨이 말했나?

“그래. 넌 이제 없다.”

“없다고?”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드래곤과, 인간과, 드래곤 라자가 있었지. 하지만 계약은 끝났고, 이제는 드래곤과 인간만이 남았다. 드래곤 라자 넥슨 휴리첼. 넌 없다. 그러니 더 이상 나로 하여금 허공에 대고 말하게 하지 마라.”

넥슨이 없다고?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난 인간과 관계를 맺겠소.”

“예?”

칼의 반문에 크라드메서가 칼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을 때, 갑작스런 후작의 외침이 들려왔다.

“당신의 복수에 나를 동참시켜 주기를 바란다!”

“할슈타일!”

길시언이 악에 받친 고함소리를 지르며 휘청거리며 달려나가려했다. 난 후작을 노려보았다. 저 교활한! 정말 빠르군, 후작! 샌슨이 다시 길시언의 겨 드랑이를 안아올렸으나 길시언은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반역자! 악취 나는 그 입을 다물엇! 쿠훌럭!”

“길시언, 길시언! 제발 진정해요. 흥분하면 독이 더 퍼진다구요!”

“독! 그래, 독! 너 이놈, 후작. 네놈은 독이야앗! 쿠르・・・・・・ 쿨럭쿨럭!”

길시언은 내장을 다 쏟아낼 듯이 기침을 토했지만 후작은 길시언의 외침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후작은 크라드메서를 바라보며 빠르게 말 했다.

“크라드메서, 당신이 잃은 것을 기억하라. 드래곤은 인간이 받은 축복은 받지 못했다. 넌 잊을 수가 없는 존재다. 그러니 21년 전의 너의 감정은 어 제의 감정처럼 생생할 것이다. 당신은 라자를 잃었다.”

“당신 때문이잖아!”

이번엔 레니를 무릎 위에 놓아둔 네리아가 외쳤다. 후작은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네리아를 노려보았다. 네리아는 바닥에 앉은 채 고래고래 외쳤다. “후작 당신이 그 불륜을 고자질해서 카뮤가 죽도록 만들었잖아! 뻔뻔스럽게! 카뮤 휴리첼은 당신 때문에 죽은 거잖아!”

“닥쳐랏, 더러운 암캐 !”

곧 네리아의 눈썹이 하늘로 올라갔다.

“뭐야?”

곧이어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네리아는 참신한 시각과 독특한 비유 능력을 기반으로 한 풍부한 비속어 구사 능 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몹시 붉히며 네리아를 외면했으며 제레인트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척했다고만 말하겠다. 한참 후에야 후작은 음산하게 말했다.

“입이 더러운 계집이로군.”

네리아는 당장 말하지는 못하고 다만 숨을 씨근거리며 후작을 노려보았다. 욕설을 너무 많이 내뱉어 숨이 가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후작과 네리아의 설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크라드메서만을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가 라자를 가지자마자, 그렇게 되자마자 우리는 그와 관계를 맺기 위해 또 싸우는 것인가?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크라드메서는 여전히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서 있었다. 땅을 향한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떠 있던 넥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핏줄의 아버지를 잃었고, 자라나서 다시 키워준 아버지를 잃었고, 영원의 숲에서 자신의 5분의 3을 잃은 넥슨이, 이제 최후로 드래 곤과 계약함으로써 다 없어졌단 말인가? 왜 이 모양이지? 왜 넥슨은 오로지 파괴되어 온 것이지? 그러고 보니 나와 우리 일행들도 그의 것을 파괴했 군. 우리는 그의 길드를 파괴해 버렸지. 왜 그는 저토록이나 파괴된 후에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일 이것이 유피넬이 정한 것이 라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넥슨은 말도 제대로 못 꺼낸 채 그저 망연히 크라드메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식이 담긴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크라드메서를 보고 있었지 만 초점이 맞지 않는다. 죽은 자에게도 살아 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살아 있을 때의 감정, 추억, 그의 얼굴에 남겨져 그가 지내온 세월을 증명하 는 세월의 풍상. 하지만 넥슨의 얼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텅 비어버린 얼굴.

크라드메서의 말보다, 나는 넥슨의 얼굴을 봄으로써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죽었다.

그리고 넥슨을 바라보았기에 난 시오네의 행동을 볼 수 있었다.

“넥슨, 조심해!”

발악같이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카아알! 아프나이델! 누구든지 시오네를 쏴요!”

순간 고개를 들어올리는 크라드메서. 누군가가 터뜨린 비명소리. 혼란. 난 위만 보고 달려가다가 풀에 다리가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땅에 호되게 부 딪히고, 별이 깜빡거리는군. 몸을 다시 일으키는 순간, 크라드메서의 파랗게 굳어버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넥슨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치 영원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은 그를 붙잡으려 드는 것 같았고 땅은 그를 피하려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를 아래로 내리밀고 있었다. 넥슨은 몸부림 한 번 없이 고요히 떨어졌다.

털썩! 넥슨은 내 바로 앞, 크라드메서와 우리 일행, 그리고 후작 일행이 만들고 있던 삼각형의 중앙에 떨어졌다. 몸이 한 번 거칠게 요동하다가 그는 똑바로 누웠다.

“꺄아아아악!”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난 벌벌 떨면서 넥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높지 않은 위치에서 떨어졌음에도 그의 몸은 기괴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죽었다. 절대로 살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의 입에서 피거품이 비어져나오는 것이다. 꾸 르르륵. 넥슨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몸 주위로 흘러나오는 붉은 피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의 마지막 희 망까지도 스스로가 파괴해 버렸다는 절망감 때문일까? 그의 몸은 뼛조각 하나까지 박살나 버린 듯했다. 피칠갑을 한 얼굴에서 하얀 눈동자가 희한하 게 번들거린다. 눈물이 흐르고 있나? 죽어서 우는 것인가?

뒤로 튕겨지듯 일어나며 하늘을 본다.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시, 시오네엣!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팬텀 스티드 위의 시오네는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삐를 한 손에 몰아쥐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넥슨을 찌른 그 대거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제야 끝났군. 그때 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기 어려웠겠지. 고맙다, 꼬마.”

“이, 이, 배, 뱀파이어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 하는 거야!”

시오네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대거가 그녀의 입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오네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대거를 핥기 시작했 다. 대단히 느린 속도로 대거가 그녀의 혀 위를 미끄러진다. 넥슨의 피가 시오네의 혀를 타고 그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느껴졌다. 허리를 숙이고 확 토해 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시오네는 대거를 다시 품안에 집어넣더니 먼곳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러곤 여전히 먼곳을 바라보면서 한가롭게 말했다.

“후치. 머리가 좋은 꼬마로 알고 있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맺게 하고, 그의 라자를 눈앞에서 죽이는 것. 어렵 지 않잖아?”

“오, 맙소사!”

제레인트가 헐떡이며 말했다. 난 입을 열었으나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힘들게, 너무나 힘들게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크라드메서를 본다. 크라드메서는 하얗게 굳어 있었다.

대마법사에게 딸들이 셋 있었네.

마법사가 잠시 한눈판 사이에

싸늘한 죽음이 그녀들을 찾아왔지.

누가 있어 그 죽음을 애도할까?

갑자기 시오네는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호흡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독한 고요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바스락거리듯 떨리며 울려퍼졌다.

처음엔 불성실한 맏딸이,

그 다음엔 돼먹잖은 트롤 차녀가.

풋내나는 막내딸은 가장 마지막에.

차례차례 죽어갔지. 태어날 때처럼.

크라드메서의 하얀 얼굴과 시오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낀다. 트롤 차녀는 에델린이고 막내딸은 레니를 말하는 것인 가? 그렇다면 맏딸은? 시오네는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랫소리도 점점 가늘어졌다.

맏딸의 이름은 바이서스.

드래곤에게 잡혀가서 콱 깨물렸지.

트롤 차녀의 이름은 에델린.

폭풍의 신이 그녀를 데려가 콱 깨물었지.

막내딸의 이름은 레니.

어느 뱀파이어에게 콱 깨물렸지.

하이호오. 웃자. 무덤 주위를 돌고.

관 위에는 시든 꽃잎을 뿌리자.

애도의 종소리 땡땡땡.

한숨은 길고 태양은 진다.

대마법사에게 딸들이 셋 있었네.

마법사가 잠시 한눈판 사이에

싸늘한 죽음이 그녀들을 찾아왔지.

싸늘한 무덤만 세 개 남았네.

시오네는 이제 회색빛 구름이 머리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버렸다. 맏딸의 이름은 바이서스. 핸드레이크가 만들어내다시피한 이 나라. 드래곤에 게 잡혀가서 콱 깨물렸다고?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맺게 하고, 그의 라자를 눈앞에서 죽이는 것. 어렵지 않잖아?’

크라드메서의 눈앞에서 그의 라자의 죽음을 보여준다고? 라자를 잃은 드래곤은 어떻게 되더라? 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에는 한가닥 희망을 담은 채 크라드메서를 바라본다.

그러나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본 순간,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희망까지도 사라져버렸다.

바위에 눈 코 입을 달아놔도 지금의 크라드메서의 얼굴보다는 훨씬 인간미가 있을 것이다. 크라드메서는 그저 한없이 하얀 얼굴로 넥슨을 내려다보 고 있었다. 넥슨의 몸에서 번져나오던 피가 이제 거대한 원을 그렸다. 크라드메서는 걷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철퍽철퍽철퍽!

크라드메서는 넥슨의 피를 밟으며 점점 빠르게 걸어왔다. 마지막 순간 그는 거의 미끄러지듯이 넥슨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날아 오른다. 단숨에 크라드메서의 무릎 아래가 피에 젖어든다.

천천히 움직인 크라드메서의 손이 넥슨의 볼에 닿았다.

“넥슨?”

넥슨의 볼을 만지던 크라드메서는 흠칫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눈앞까지 들어올렸다.

“눈물?”

크라드메서의 손가락 끝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크라드메서는 자신의 손을 보더니 다시 얼굴을 숙여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 눈물을 흘리는 거야? 살아 있는 것인가? 그렇지?”

크라드메서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깊이 숙여 넥슨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느끼는 것이군. 넥슨?”

크라드메서는 이제 머리를 천천히 움직여 넥슨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크라드메서는 넥슨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넥슨? 넥슨…………, 넥슨?”

“으흑!”

네리아가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무릎에 엎드린 레니의 등 위로 몸을 던졌다. 네리아는 레니를 그러안으며 울기 시작했다. “크흑!” 제레인트 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 보였다. 목 안이 왜 이다지도 답답한 것이지? 그리고 이 뜨거운 것은 도대체 뭐지?

“넥슨………….”

크라드메서는 더욱 낮게 속삭였다. 산들바람 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 그러나 넥슨은 흰자위를 보인 채 죽어 있을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왈칵거 리며 피가 흘러나온 순간 나는 그가 살아 있는 것인 줄 알고 고함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라드메서가 넥슨의 가슴을 짚은 것 때문이었다.

크라드메서는 넥슨의 가슴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크라드메서는 숨 쉴 사이 없이 넥슨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넥슨의 가슴을 흔드는 그의 손길도 점점 강해졌다. 넥슨 은 이제 팔다리를 흉하게 휘저으며 들썩거렸다. 그의 몸이 들썩임에 따라 바닥의 피웅덩이가 질퍽거렸다. 핏방울이 튀어올라 크라드메서의 상반신을 물들였다. 크라드메서는 피에 젖은 채 외쳤다.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

크라드메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아아아…………… 으어어……………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그의 목이 그대로 뒤로 꺾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젖혔다. 그는 하늘을 향해 고함질렀다.

“으와아아아! 으와아아아앗!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악……!”

목이 터져나갈 듯이 지르던 크라드메서의 비명이 갑자기 멎었다. 크라드메서는 넥슨의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넥슨의 가슴에 얹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한껏 젖혀진 그의 얼굴도 그대로였다. 입은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고 두 눈은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하늘을 쏘아보 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 아냐. 붉은색이다. 핏빛 눈물.

피눈물.

크라드메서의 눈에서 흘러나온 두 줄기 붉은 피는 하얗게 굳어 있는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 곁을 지나 턱선에 이른 핏물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던 핏물이 몰리면서 핏줄기는 잠시 멍울져 커지다가 툭 떨어지듯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핏줄기는 이제 목으로 흘러내렸고 빠

르게 그의 갑옷 속으로 사라졌다.

크라드메서는 절규하는 모습 그대로 조각이 되어버린 듯했다. 눈꺼풀도, 그의 입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의 눈에 서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크, 크, 쿠르, 크으…….”

크라드메서의 입에서 의미 없는 말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후작이 외쳤다.

“뒤로 물러낫!”

망연히 고개를 돌려 후작을 본다. 후작은 이미 등을 보인 채 줄달음질치고 있었고 그 전사들도 하나둘 걸음을 떼기 시작하더니 곧 굉장한 속도로 달 려가기 시작했다.

“칼? 계속 여기에…………….”

샌슨이 평소 목소리보다 반음 정도 낮아진 음색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가세!”

칼은 그렇게 말하며 곧장 몸을 돌렸다. 네리아가 부둥켜안고 있던 레니가 몸부림을 쳤다.

“안 돼요, 비정해요옷! 어떻게 내버려두고………….”

“살아야 하오!”

칼은 그렇게 외치며 곧장 나와 샌슨에게 눈짓했다. 샌슨은 레니를 달랑 들어올렸으며 나는 길시언을 들어올렸다. 제레인트는 에델린의 지팡이라도 되어주기 위해 황급히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쳤지만 에델린은 팔을 빼며 스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 다음 순간 우리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크라드메서와 넥슨의 시체만을 남겨두고.

그리고, 많이 달려가지도 못했다.

“크라라라라라라!”

“으아아악!”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길시언을 어깨에 둘러멘 채 달리던 나는 다리가 풀려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운차이가 재빨리 날 부축했다. “정신 차려!”

운차이는 거칠게 외치며 날 부여잡았다. 하지만 자꾸만 다리가 휘청거린다. 입을 열어 외친다.

“소용 없어요! 도망가 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크라드메서에게서 도망을………….”

“닥쳐!”

운차이는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어딜 당겨? 길시언만 아니었으면 당장 당신 턱을 날려버렸을 거야!

“어차피 인생의 경기장에서는 아무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순 없다! 그건 그 경기의 규칙이야! 규칙을 수용하고 끝까지 달려!”

난 멱살이 잡힌 채로 발악했다.

“젠장, 고상하게 죽자구요! 그 경기장의 최후의 우승자는 결국 죽음이잖아요! 경기는 끝났어요. 승자에게 경의를 표하자구요! 패자의 자존심은 지키 겠어요!”

운차이는 순간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핏발 선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괴상하다. 운차이의 눈빛이 흔들 렸다.

순간 크라드메서의 포효가 다시 분지를 가로질렀다.

“크라라라라라!”

나와 운차이를 앞서 달려가던 다른 일행들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고개를 돌리는 일행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이건 아무 의미도 없 는 짓이야. 달려가 봐야 뭐하겠어. 살아야 한다고? 물론이지. 죽는 순간까지 내 뜻대로! 난 머리를 거칠게 당겼다. 운차이는 내 멱살을 놓쳤다. “난 크라드메서를 보겠어요! 최소한 뒤통수에 브레스 맞고 죽진 않겠다고요! 내 눈으로, 내 죽음을 마주보겠어요!”

운차이의 무시무시한 눈길은 내 몸을 후벼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빌어먹을, 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난 살아난다!”

운차이는 그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운차이?” 샌슨의 말이 들려왔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길시언을 내려놓았다.

“길시언? 난 달아나지 않겠어요. 죄송합니다만 데려다드릴 수가………….”

“네 곁에 있겠다.”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 길시언의 얼굴은 이제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길시언은 갑자기 격한 기침을 쏟으며 주춤거렸고 난 그를 부축했다.

“아샤스여………….”

길시언의 시선을 따라간 내 눈에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비춰졌다.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분지가 언제 이렇게 좁아졌지? 저 산이 왜 저렇게 낮아진 거야? 크라드메서는 긴 목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려 우리들에게 붉은 턱을 보여주고 있었 다. 선홍색의 거대한 몸과 기다란 목, 그 목을 타고 흐르는 검은 줄이 그대로 크라드메서가 흘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크라드메서는 한 그루의 붉은 나 무처럼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

갑자기 그 나무의 가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검은 가지, 차츰 붉은 부분이 드러난다. 크라드메서는 양쪽으로 날개를 활짝 폈다. 뒤의 산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아, 아니다. 아직도 펼치고 있는 중 이다. 내가 다 펼쳤다고 느꼈을 때 크라드메서는 그 날개의 절반도 펴지 않은 것이었다. 맙소사, 드래곤을 보살피시는…………, 드래곤을? 잠깐, 그러고 보니 드래곤의 신은 없잖아?

“크라라라라라!”

이제야 크라드메서는 300큐빗은 족히 넘을 그 날개를 모두 펼쳤다. 목을 타고 흐르는 검은 선은 날개로 이어져 점차 복잡해졌다. 마치 나뭇잎의 옆 맥처럼 복잡해지던 검은 선은 날개의 끝부분을 칠흑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그의 몸은 터무니없이 거대한 날개를 간신히 받치고 있는 가느 다란 검날처럼 보였다. 검날? 그러고 보니 가느다란 목은 검신이고, 가슴은 가드, 그리고 모아선 앞다리는 손잡이처럼 보였다. 칼날에서 거대한 불꽃 이 일렁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밤하늘 속에서 타오르는 홍적색의 검…………. 크라드메서였다.

“숨 쉬는 자! 숨을 멈춰라!”

으아악! 크라드메서의 포효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와 길시언은 한덩어리가 되어 뒤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오우, 제기랄!” 땅을 뒹굴면서 무수히 많은 풀들이 세상을 뒤덮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정신 없이 뒤섞여 흐르는 초록색 풀의 모습뿐. 풀들의 아우성소리와 미친 듯한 바람소리. 수십 명 이 한꺼번에 날 때리는 것 같다.

“크으으윽!”

얼마를 뒹굴었는지도 모르겠다. 턱을 사납게 땅에 부딪히며 나는 간신히 굴러가던 것을 멈췄다. 죽을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보니 앞으로 몸을 숙인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폭풍우를 정면으로 받는 사람처럼 왼팔을 얼굴 앞에 들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니, 진짜 폭풍이 불고 있 었다. 제레인트의 머리가 모조리 떠올라 뒤로 날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억지로 뜨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땅을 걷는 자! 걸음을 멈춰라!”

주루룩! 맙소사, 저건 말이 안 돼! 제레인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 그대로 뒤로 세 발짝 정도 미끄러졌다. 콰당. 기어코 제레인트는 앞으로 쓰러 졌다. 손을 땅에 짚는 동안 다시 뒤로 미끄러졌다.

“이익!”

제레인트는 풀을 그러쥐며 미끄러지는 것을 멈췄다. 난 옆의 풀을 잡아채며 다른 팔로는 길시언의 허리를 붙잡았다. 길시언은 기침도 제대로 토하지 못하며 헐떡였다. “수, 숨을 쉴 수가아…….” 빗발처럼 날아다니는 풀들이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어댄다.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혀나가는 기분이 든 다. 눈을 뜨기조차 힘든 바람 속에서 주위를 힘겹게 돌아본다. 모두들 풀이나 서로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오, 맙소사.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엉터 리야!

“세상을 보는 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휘몰아치던 바람은 멎었다. 허공에서 갈가리 찢기고 있던 풀잎들은 꿈속에서 떨어지는 물체처럼 고요히 떨어져내렸다. 늦은 봄 떨어지는 꽃잎처럼 초록의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제레인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주위를 살폈다.

“바람이…………… 그쳤다?”

“후치! 길시언! 모두들 괜찮아요?”

샌슨이 뒤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체구가 커서인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밀려나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선 네리아가 땅에 박아둔 트라이던 트를 뽑아내고 있었다. “영차!” 저기에 매달렸던 모양이지? 제레인트는 뒤집어진 로브를 바로 입느라 정신이 없었고 에델린은 그 광경에서 점잖게 눈 을 돌리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때 칼이 외쳤다.

“레니 양?”

레니? 레니가 어디 있지? 뒤를 아무리 돌아봐도 레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바람에 날아가버렸나? 풀에 가려서 안 보이는 건가? 난 제자리 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때 길시언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반대쪽이다.”

반대쪽? 난 다시 고개를 돌려 크라드메서를 향했다.

레니는 크라드메서 쪽을 향한 채 똑바로 서 있었다. 레니는 바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지? 그때였다. 레니가 갑자기 주 저앉았다.

“레니?”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갔다. 크라드메서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왜 저러는 걸까? 레니의 어깨를 짚었다. 순간 레니

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이크! 너무 세게 짚었나? 그건 아닌데? 난 기겁하면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는 혼란에 빠진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니?”

레니는 내가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크라드메서의 눈치를 보면서 레니에게로 다가왔다. 레니는 멍 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고마웠어.”

“응?”

“고마웠어. 후치. 다른 여러분들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몸이 굳어버렸다. 걸어오던 네리아는 레니의 말을 듣는 순간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레니는 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모두 죽을 거예요.”

그 순간 크라드메서는 날개를 치기 시작했다.

풀의 파도 속에 드문드문 서 있던 일행들은 모두 꼼짝도 하지 않고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펄럭, 펄럭. 저 거대한 날개가 움직이다니. 델하파의 항구에서 보았던 범선들의 돛은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날개가 어떻게 움직인단 말이야. 하지만 크라드메서의 날개는 우아하게 움직였다.

비상은 순식간이었다.

날개치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싶더니 어느새 크라드메서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눈은 크라드메서의 비상을 바라보면서 머리는 수많은 생각들 에 내어준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모두 드래곤에게 잃게 되셨어요. 어쩌면 당신께서도 그렇게 되시겠죠. 제미니, 정말, 정말 지금 누군가가 날 너의 곁으로 옮겨주고 이야기를 건넬 시간을 더도 말고 5분만, 아니 1분만 준다면 그에게 내 무엇이라도 줄 텐데. 이루릴. 이 세계 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크라드메서에 의해 파괴된 땅에는 엘프의 손길이 필요할 거예요. 제기랄! 왜 꼭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 사람들은 주위에 없는 거지?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우리 머리 위로 엄습해 들어왔다.

“크라라라라!”

하늘을 날던 크라드메서가 갑자기 거세게 날개를 휘저으며 속도를 늦췄다. 난 크라드메서의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눈은 보석처 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입 안에서는 불길이 일렁거렸다. 이제 최후인가? 그냥 서서 죽다니 조금 싱겁군. 이런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17년을 살아왔는 가? 고개를 돌려본다. 제레인트는 뭔가 빠르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캐스팅하는 모습도 보였다. 길시언은 힘겹게 프림 블레이드를 들어올리고 있었고 칼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고 있었다. 그래. 이왕 죽을 거, 손에 칼을 쥐고 죽자.

“그래도 내 인생은 괜찮았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든 순간 하늘이 새하얗게 바뀌었다.

백색. 하늘을 가득 메운 백색의 섬광 때문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 귀는 너무 높은 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완전히 먹어버렸다. 그래서 완전한 고요 속에서 난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그저 하얗기만 한데?

그때 하얀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날아갔다. 날아가는 듯했다. 내 눈이 본 것은 그저 하얀 빛이 사라지며 검붉은 무엇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라라라라라!”

빠르게 움직이던 것은 크라드메서였다. 속도를 늦추며 브레스를 쏘려던 크라드메서가 갑자기 속력을 높이며 우리 머리 위를 그대로 지나친 것이다. 곧 그의 뒤를 따라오던 바람이 거세게 나를 덮쳤다. 그러나 난 바람에 밀리면서도 눈앞의 광경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믿을 수 없는 대파괴의 모습이었다.

검게 타버린 땅. 저 자리에 풀이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풀 한 포기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타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땅은 수백 큐빗 에 걸쳐 파헤쳐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우리 앞쪽으로 저런 자국이 생긴 거지? 그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리는 순간 이번에는 푸른 것이 머리 위를 휘익 지나쳤다. 그러고 나서 이번엔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나와 길시언은 한덩어리가 되어 앞으로 쓰러졌다.

“으으윽!”

그대로 땅을 한 바퀴 굴렀다.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 저편으로 까마득하게 사라지는 크라드메서의 뒷모습이었다. 그럼 반대쪽에서 날아오던 것은 뭐였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하늘 반대편으로 까마득하게 사라지는 푸른 물체가 보였다.

“쿨, 쿨럭! 저건?”

“맙소사……, 맙소사!”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던 푸른 몸체는 거대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늘에 반경 수천 큐빗에 달하

는 원호를 그리며 다시 우리 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똑같은 원호를 그리며 날아오는 크라 드메서의 모습이 보였다. 저 둘이 만들어내는 원은 혹시 갈색 산맥 전체를 뒤덮지 않을까?

“크라라라라!”

크라드메서가 거칠게 포효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도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아!”

네리아의 얼굴은 볼만했다. 그녀의 얼굴엔 공포 반, 그리고 기쁨 반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정신 없이 움직이며 더 듬더듬 말했다.

“벼, 벼, 벼…… 벼락 드래곤?”

“지골레이드다!”

“어떻게 된 거야? 지골레이드가 여기 웬일이지?”

고개를 돌려보니 샌슨이 얼빠진 얼굴로 지골레이드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지골레이드는 거대한 날개를 모조리 펼친 채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미끄러져오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크라드메서가 미끄러져내리고 있었다. 어라? 이, 이런!

“길시언. 나 지금 몹시 좋지 않은 처지에 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모종의 행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요?”

길시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나서 달리자는 말을, 쿨럭. 너무 길게 하는군.”

이런, 제에엔장! 크라드메서와 지골레이드가 맞닥뜨리게 되는 곳은 바로 우리 머리 위잖아?

“우와아아앗! 달아나아!”

샌슨이 목놓아 외치자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어,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달아나? 달아나야 돼. 조금 전까지야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말이야. 이제 지골레이드가 왔잖아? 그리고 크라드메서를 공격하고 있다. 내 인 생은 그런 대로 괜찮았고, 아직 마침표는 찍지 않아도 될 거 같다. 그러니까…………, 그런데! 이 광활한 분지에서 어디로 달아나야 되지? 그때였다. “이쪽으로!”

무시무시한 목소리.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지.

“운차이? 안 달아났어요? 거기서 뭐해요?”

멀리서 운차이가 손짓하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다. 다음 순간 난 운차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길 시언을 어깨에 둘러멘 채 달려가고 있었다. 곧 등 뒤에서 일행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와아아! 드래곤들의 싸움이라니!”

“제레인트! 정신 차려요! 달리라구요! 그렇게 뒤돌아 보지 말고!”

“아, 예……………. 우와….? 굉장하다?”

“아프나이델! 저 녀석 엉덩이에 불 좀 붙여라!”

“에, 엑셀핸드 님. 지금은 달리기도 바빠…………….”

“정말…………, 멋진……… 으악! 무슨 짓입니까, 네리아!”

“빨리 안 달리면 또 찌를 거예요! 어서 달려욧!”

“좋았어! 잘했어요, 네리아 양! 계속 찔러욧!”

“카아아알!”

음. 고개를 돌려보자 거꾸로 쥔 트라이던트로 소 몰듯이 제레인트를 몰아오는 네리아의 모습과 그 옆에서 박수를 치며 달려오는 칼이 보였다. 다시 운차이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엎드려!”

“이런, 길시언! 날 욕해도 좋아요!”

난 또다시 길시언을 밀어넘어뜨리며 함께 나동그라졌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쓰러지는 거지? 그 순간 머리끝이 곤두서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앗!”

“크라라라라라!”

뭔가가 충돌하는 굉음, 그리고 격렬한 날갯짓 소리. 누운 채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반대편 하늘로 날아가는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보

였다. 그런데 지골레이드는? 지골레이드 역시 반대편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행이 아주 이상했다. 비틀거리며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힘겹게 날아 올라가는 것이었다. 운차이가 이를 갈며 외쳤다.

“제길! 날개를 당했어! 모두 일어나 달려! 어서 이쪽으로!”

두 드래곤이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동안 우리들은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나는 길시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고 길시언 역시 짐짝 취급을 당하면서 몸에서 힘을 쭉 뺐기 때문에 그를 들고 뛰는 것은 쉬웠다. 크라드메서와 지골레이드가 하늘을 돌아 반전하는 동안 우리들은 거의 분지 끝까지 달렸 다.

분지 끝에는 절벽이 보였고 그 가운데 약간 갈라진 곳이 보였다. 운차이가 발견한 것이 저건가? 운차이는 그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다른 생각할 여유 없이 절벽 틈으로 뛰어들었다. 왠지 고양이와 개 싸움을 보고 도망치는 쥐가 되는 기분이야. 지금 들어가는 곳도 꼭 쥐구멍 같고.

마지막으로 제레인트와 네리아가 뛰어 들어옴으로써 일행들은 모두 절벽 틈에 숨었다. 절벽 틈은 좁은 입구에 비해 볼 때 꽤나 깊숙했다. 여긴 인간 은 들어오겠지만 드래곤은 못 들어오겠군. 됐어! 일행들은 모두 숨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주저앉았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집어던지더니 펑펑 울 면서 운차이에게 안겼다.

“와아아앙! 운차이!”

운차이는 쓴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바위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후우, 후우우. 도망치던 것 아니었나?”

운차이는 네리아를 천천히 밀어내며 말했다.

“나에겐 너희 북부 미련퉁이처럼 죽음 앞에서 몸에 힘이 빠지는 약점은 없다.”

“그래? 그런데 왜 돌아왔지?”

“……여길 발견해서.”

“그래, 그래! 여길 발견해서. 웅웅. 우리들 모두 살려주려고?”

네리아는 콧소리를 심하게 내었다. 운차이가 얼굴을 구기면서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앗!” 아 차, 지골레이드는? 난 길시언을 내려놓으며 다시 하늘을 살폈다. 우리 일행들은 절벽 틈 사이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드래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개 와 고양이, 그리고 쥐구멍에 숨어서 지켜보는 쥐떼들.

“저거, 위험하겠어?”

아프나이델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두 마리의 드래곤은 서로를 향해 맹렬히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골레이드의 속도는 느렸고 그 날개에선 뒤로 길게 피구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붉은 강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숨을 몰아쉬던 칼 역시 절망 섞인 탄식을 뱉었다.

“후우, 우……. 이런, 안 되겠어. 저래 가지고서야.”

그때였다. 크라드메서를 향해 매끄럽게 날아들고 있던 지골레이드의 목 뒷부분에 뭔가 하얀 빛이 엉겨들기 시작했다. 엑셀핸드가 기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후욱, 후욱. 드, 등에 저거 뭐야?”

순간 지골레이드는 날개를 크게 비틀었다.

지골레이드는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느리게 날아오던 지골레이드는 쉽게 몸을 틀었지만 크라드메서는 그대로 날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하늘 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구름이 붉게 일렁거렸다. 구름이 왜?

구름을 뚫고 불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미티어 스웜이다!”

아프나이델이 외쳤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불덩어리들은 정확하게 크라드메서의 진로 앞쪽으로 떨어져내렸다. 슝슝슝슝슝! 크라드메서의 속력 까지 계산한 정확한 공격이다. 속도를 추스르지 못하고 날아들던 크라드메서는 곧장 미티어 스웜의 비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됐어! 저 속도에선 못 피해!”

샌슨은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뻐하며 외쳤다. 그때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날개를 뒤로 한껏 젖혔다. 크라드메서의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통과할 속셈인가!”

“설마?”

크라드메서는 좌우 날개를 올렸다 내렸다하면서 불덩어리들의 비 사이를 비행했다.

콰앙, 쾅쾅쾅쾅쾅! 불덩어리들이 땅에 부딪히며 분지는 무서운 폭발로 가득차버렸다. 하늘로 치솟는 빛과 화염, 그리고 흙과 돌덩어리들. 운차이가 고함질렀다. “이런! 더 안쪽으로!” 분지에서 튀어오른 바위들이 우리가 숨어 있던 절벽을 타격했다.

쿠왕쾅! 절벽 전체가 울렸다. 그러나 크라드메서는 유연하게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불덩어리를 피하며 그 파도치는 폭발 위를 날고 있었다. 기막혔다! 200큐빗은 족히 넘을 저 몸이 찌르레기라도 된 것처럼 날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저 몸이?”

제레인트가 당장이라도 다시 분지로 달려나갈 듯이 움찔거리며 소리지르는 순간, 급격히 솟아오르던 지골레이드의 목 뒤에서 이번에는 불의 강이

뛰쳐나갔다.

푸화하하학! 폭 수십 큐빗은 되는 불의 강은 마치 하늘에 붉은 융단을 까는 것처럼 좌악 뻗어나갔다.

크라드메서는 미티어 스웜이 쏟아지는 지역을 거의 빠져나왔지만 지골레이드의 등에서 뛰쳐나간 불의 강은 바로 크라드메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됐다! 됐어! 이번에야말로 절대 못 피해!”

샌슨이 날뛰며 박수를 친 순간, 하늘을 가로지르던 크라드메서의 몸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호핑?” 크라드메서의 몸은 불의 강 바로 위에서 나타 나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이런 억장 무너지는 경우가 있나!

“샌슨! 다음에 지골레이드가 공격할 땐 조용히 있어!”

“알았어…….”

목표를 잃은 불의 강은 그대로 하늘을 가로질러 건너편 산봉우리에 작렬했다. 꽈르르릉! 산봉우리가 거대하게 울렸다. 그리고 산 전체가 불타기 시 작했다.

쿠…… 쿠…… 쿠르르릉! 천둥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불타오르던 산봉우리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불타며 파괴되는 산봉우리를 보며 말했다.

“빛의 탑의 명예를 걸고! 난 저걸 모르겠어. 저, 저건 도대체 무슨 마법이지?”

그때 같은 곳을 바라보던 칼이 펄쩍 뛰었다.

“이야아아!”

칼은 기쁨에 몸을 떨면서 괴성을 질렀다. 아이고, 맙소사. 칼! 드디어? 칼은 지골레이드를 바라보며 커다랗게 웃었다.

“으핫하하하! 내가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소! 전에 봤던 것이거든? 저건 샐러맨더와 실프의 무도회요!”

“예? 아니……!”

칼은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꼭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나 역시 입술을 벌벌 떨면서 운차이의 대답을, 그 기쁜 대 답을 기다렸다. 운차이는 지골레이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녀요.”

샌슨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루릴!”

·설마 이루릴이 이루릴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