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권 11화 – 고수의 출현

고수의 출현

그로부터 3년간 묵향은 별일 없이 평안한 생활을 했다. 그는 그동안 끊임없이 강기를 수련했고, 드디어는 완전히 강기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적수공권(赤手空 拳)으로도 강기를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의 문자도 틈틈이 익혔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내어 유백으로부터 여러 가지 잡기들을 배워 자신의 교양을 채 워 나갔다. 끊임없이 무식한 놈이라는 말을 들으며…..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상당한 고수로서 10장 내에 다가오기 전까지 기척을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는 정중히 유백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유백 어르신?”

“오… 자네가 웬일인가? 이봐! 향아, 이 어르신은 장양(張楊)이란 분이다. 인사해라.”

“안녕하십니까? 후배, 묵향이라 합니다.”

“상당한 고수로군. 유 선배님, 확실히 후배 교육시키는 실력은 대단하십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 제자겠군요. 그런데 왜 한 명만 교육시키십니까? 여러 명을 가르 치시면 본교로서도 더욱 이익일 텐데…….”

“글쎄, 나는 이 녀석만 교육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네. 나도 나이가 있으니 봐준 거겠지. 덕분에 편하게 교육시켰어. 그런데 어쩐 일인가?”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묵향에게 볼일이 있어섭니다.”

“묵향에게?”

“예. 이것 받게나.”

장양은 묵향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서신에는 낙양에 있는 분타에 가서 일을 도와주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부분타주로 임명한다는 말과 함께 서신 안에는 부분 타주의 명패와 부임 서류가 들어 있었다. 장양은 옆에서 힐끗 부분타주의 명패를 보더니 축하해 줬다.

“묵 형제, 축하하네. 자네 출세가 빠르구먼, 벌써 부분타주라니. 그것도 낙양은 상당히 중요한 곳이라 꽤 많은 교도(敎徒)들이 있는 곳이라네. 요즘 들어서 그곳에 고수들이 계속 파견되고 있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조심하게나.”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 떠나려나?”

“오늘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출발 준비를 하고 내일 떠나려고 합니다. 언제 출발하라는 지시가 없는 걸 보니 화급을 요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럼, 위에는 그렇게 전해 두겠네. 수고하게나. 그리고 선배님도 안녕히 계십시오.”

그날 묵향은 여행 준비를 간단히 마치고 늦은 시각까지 유백과 술을 마시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 날 새벽 그는 부임지를 향해 출발했다.

묵향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낙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그는 될 수 있으면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가 검을 뽑은 것은 시시한 산적 다섯 명 이 길을 막았을 때뿐이었다. 그는 유백의 가르침대로 단칼에 그들의 목을 잘라 죽이고 유유히 갈 길을 재촉했다.

그가 행로에 오른 지도 벌써 13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약간 이른 시간이기는 했지만 계속 길을 간다면 노숙을 할 게 뻔했으므로 여관을 잡아 투숙 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저녁시간이 되자 묵향은 1층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쭉 둘러봤지만 자리가 보이지 않아 위로 올 라갔다가 나중에 내려올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사람들이 많으면 주워듣는 것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점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요, 나리.”

“자리가 있나?”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는뎁쇼. 합석이라도 상관없습니까요?”

“부탁하네.”

점원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손님들에게 의사를 묻더니 곧 묵향이 있는 곳으로 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리.”

묵향이 간 자리에는 나이 많은 남자 한 명과 젊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본능적으로 묵향은 그 젊은이가 여자임을 알아챘다. 둘 다 패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 아 무림인인 것이 확실했다. 묵향 또한 짧은 검을 차고 있기에 점원은 무림인들끼리 앉게 한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은 칼을 차고 있는 무림인들과 합석하는 것을 별 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묵향이 다가오자 묵향을 힐끗 쳐다봤다. 그들의 눈은 묵향이 비스듬히 허리 뒤쪽으로 차고 있는 검에 순간적으로 머물렀다가 다시 묵향을 바라봤다. 묵향 의 검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도(刀)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묵향이 강기를 익히자 유백이 묵혼의 손잡이를 줄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여 여섯 치 정도로 짧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의 반월형으로 휘어진 검집을 보고 약간 짧은 도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모양의 도를 사용하는 사람 중에 유명 한 도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내심 긴장을 풀었다. 묵향은 그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하자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자리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남자가 답례를 했다.

“뭘요, 사해가 동포라 했으니 어려울 때 도와야지요. 앉으시오.”

“예. 이봐, 오리탕하고 만두 약간, 그리고 죽엽청을 주게나.”

“예, 나리.”

묵향은 그의 앞에 놓인 녹차를 마시며 주변에서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대부분 오가는 대화는 그에게 쓸모없는 것이었다. 이때 나이 많은 사람이 물 었다.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가?”

“예, 천양으로 갑니다.”

“오오…, 천양에는 어쩐 일로 가는가?”

“예, 천일루(泉溢樓)에 들를까 해서요.”

“호오, 이번이 무림에 초출이신 모양이군.”

“하하, 몇 번 무림에 나온 적은 있는데, 그때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무림초출은 꼭 들른다는 천일루에 가 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여유가 있어 한번 가 보려고 합니다.”

“그리로 가는 길이면 노부와 같이 갑시다. 길동무도 될 것이고……. 저 아이도 이번이 초출이라 그곳에 가서 노부가 한턱내려고 하는데, 젊은이의 의향은 어떻 소?”

“좋지요. 저는 묵향이라 합니다. 선배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묵향? 특이한 이름이군. 노부는…, 그냥 노백(老伯)이라 부르구려. 그리고 저 아이는 무령(武玲)이라 부른다네.”

묵향은 이 40대 초반 혹은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둘러댄다는 것을 눈치 챘다. 노백이라 함은 일가를 이룬 우두머리를 말함 이니 무림의 선배임은 확실하고……. 또 저 젊은이의 이름이 령(玲)이니 여인임이 분명했다. 노백은 그 기도로 볼 때 상당한 고수임이 확실했으므로 약간 꺼림칙한 면도 있었으나, 그는 자신도 신분을 알려 줄 필요가 없기에 이들과 그냥 어울리기로 하고 이것저것 쓸데없는 말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이 근처에 천령산이 경치가 좋으니 그쪽으로 둘러서 구경하고 가요.”

“자네는 어떤가? 시간이 나겠나?”

““저도 이 근처에는 와 본 적 없으니 선배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의 사문(師門)이 어떻게 되나?”

“하하,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선배님도 안 밝히시는데, 후배 또한 밝힐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밝히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단하군.”

“뭐가 대단하다는 거예요? 할아버지.”

“소협의 스승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기재를 배출하다니, 대단한 명문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러자 무령은 깜짝 놀란 듯이 한번 자세히 묵향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칭찬하시기는 이번이 처음이네요.”

“아마 자네가 무림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최고인 것 같군…. 노부의 생각으로는 노부도 이기기 힘들 정도야. 소협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 “소협이랄 것도 없습니다. 이제 마흔셋입니다.”

“이런, 내가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미안하구만. 자네 얼굴을 보니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정도라 생각해서 실수를 했네. 주안술을 익혔나?”

묵향은 주안술을 익힌 적은 없지만 공력이 높은 데다 산골에서 적막하게 생활하다 보니 감정에 치우칠 일이 거의 없어 아주 젊게 보인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자신 의 실력이 너무 상대에게 노출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예, 젊었을 때부터 주안술을 익혔고, 산골에서 적막하게 생활하다 보니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어 보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흠…, 주안술이란 것이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만 너무 그것에 빠져들지는 말게나. 외모로는 젊게 보이지만 실지로는 공력의 소모가 따르고, 또 자신도 근골이 늙 어가는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는 게 좋지.”

“약간의 공력 소모야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자식은 있나?”

“없습니다. 동자공을 익힌 덕분에 결혼은 꿈도 못 꾸죠.”

묵향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자 노백이 약간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동자공은 정말 익힐 게 못 되는데, 자네 같은 젊은이가 후손이 끊기다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군.”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무령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할아버지 동자공이 뭐예요? 대단한 무공인가요?”

노백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손녀에게 동자공을 설명해 주려고 생각해 보니 막막해서 약간 얼굴을 붉혔다.

“동자공은 공력 상승이 큰 심법이지만 약점이 많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익히지 않는단다.”

“약점이 뭔데요?”

손녀의 궁금증에 할 말이 없어진 노백은 벌컥 화를 내면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건 험험…,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테니 지금 여기서 묻지 마라. 소협과 얘기하고 있는데 왜 자꾸 끼어드느냐?”

“…….”

노백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자 무령은 낮게 콧방귀를 뀌면서 외면했다. 아마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자네는 동자공 때문에 그렇게 나이가 적게 들어 보이는 모양이군. 하지만 동자공이 깨지면 대단히 위험하니 언제나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예.”

묵향은 노백과 함께 술과 음식을 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여관을 나선 일행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노백은 동행이 된지 3일 후 무령이 자신의 손녀라는 것을 밝혔다. 강호에는 갖가지 거친 일들 이 많기에 변장을 하고 여행을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노백은 상당한 수준의 고수였고, 또 손녀인 무령 역시 그런대로 실력이 있어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과 동행한 지 15일이 지나 일행은 천일루에 도착했다. 천일루는 3층이나 되는 거대한 주루(酒樓)로, 강변에 세워져 있었으며 주변의 경관이 빼어났다. 역시나 이곳에는 무기를 휴대한 강호인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선배인 듯한 사람이 같이 와서 초출을 축하해 주고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이나 강호의 정세 등을 일러 주며 술을 권하고 있었다. 일행은 3층에는 자리가 없어 2층에 자리를 잡았다. 2층에서 보는 주변의 경치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그들은 몇 가지 안주와 술을 시키고는 둘 러앉았다.

“이곳은 정말 경치가 아름다워요, 할아버지.”

“아무렴. 그러니 이곳에 강호인들 말고도 많은 일반인들이 경치 구경을 하러 오는 거란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갑자기 옆의 탁자에서 시비가 붙었다. 옆의 탁자에서 세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옆쪽에 앉았던 남자가 시비를 건 것이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여기서 유명한 한서삼귀(寒暑三鬼) 나으리들을 뵙다니. 너희들 같은 사파 놈들이 어딘 줄 알고 여기로 굴러 왔냐?”

묵향이 고개를 돌려 보니 저쪽 탁자에 앉아 있는 자들은 여덟 명으로 이쪽보다 개개인의 무공이 강한 것이 확실했다. 다섯 명의 남녀가 여덟 명의 남자들에게 모욕 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묵향은 처음엔 모른 척하려고 생각을 했으나, 사파의 마음은 사파가 안다고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대신에 앞에 앉은 노백에게 부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노백 선배, 저들을 좀 도와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흠흠, 내 도와주기 어려운 것은 아니나……. 좀 사정이 있어 나서기가 힘드네. 저따위 녀석들이 정파라고 깝죽거리다니, 세상이 말세로군.”

“그래도 선배께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도와줄 순 있잖습니까?”

“힘들어. 세 녀석은 표 안 나게 제압할 수 있지만 저 다섯 명은 얘기가 다르지. 저들은 자칭 무산5웅(巫山五雄)이라고 하는 녀석들인데, 모두 상당한 무공 실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행패가 심해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저들을 벌할 사람이 없는 형편이야. 노부도 저들과 맞붙는다면 2백 초가 넘어야 결판이 날 텐데……. 거기다 저 들이 아무리 문파에서 따돌림을 받는 녀석들이라 하지만 저들을 죽이면 무당파에서 묵인을 할지 그것도 미지수고. 현재 9파1방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은 무당이니 아무도 무당과 원수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자연 저 녀석들이 더 설치는 거겠지. 노부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군.”

잠시 묵향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모른 체 넘길 수는 없었다. 따끔한 맛을 보여 놔야지 사파에 대한 정파의 푸대접이 약간은 식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는 시비를 거는 녀석들 중의 한 명에게 말을 건넸다.

“어이, 형씨.”

새파란 녀석이 불러대는 것을 보고 무산5웅 중의 한 명이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를 불렀냐?”

“그렇소. 너무하는 것이 아니오? 근처에 많은 손님들이 있는데 조용히 해 주시는 게 어떻겠소?”

“이런 빌어먹을 녀석이…, 헛소리하지 말고 어르신들 하는 일을 구경이나 하거라.”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시오. 그냥 조용히 있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 필요가 있소?”

“무슨 헛소리, 모르면 닥치고나 있어. 이 녀석들은 냄새나는 사파의 녀석들이란 말이다. 이런 자식들이 옆에 앉아 있으면 구린내가 나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내려 가질 않는다구. 네 녀석은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닥치고 앞에 놓인 음식이나 퍼 먹고 꺼져.”

“흠, 나도 사파니 참견을 안 할 수가 없어서 그러오.”

“흐흐흐, 그래? 그렇다면 네 녀석도 이곳에서 꺼져 줘야겠군.”

묵향이 사파라는 말을 하자 앞에 앉은 노백과 무령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그것을 묵향은 놓치지 않고 봤다. 아마 그들도 사파에 대해 약간의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군. 실력 행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뭐? 네 녀석이 실력 행사? 흐흐흐,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그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뽑았다. 그걸 보면서 묵향은 주위를 향해 외쳤다.

“여기 이 녀석들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오. 공연히 목숨을 날리지 말고. 만약 셋을 셀 때까지 남아 있는 자들이 있다면 같은 패거리로 생각하 고 공격하겠소. 혹시 사파의 분들이 여기 있다면 같이 물러나시오. 동도를 저세상으로 보내기는 싫소.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오.”

그의 내공이 실린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네 개의 탁자에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무산5웅과 그 옆 자리에 앉은 여섯 명의 남자들, 그리고 사파인 당사자들, 묵향의 동행이었다. 무산5웅은 그의 내력이 실린 목소리를 듣고 움찔 하는 것 같았지만 다수를 믿는지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도 상관없는 자들이 남아 있었으므로 묵향은 그들에게 충고했다.

“노백 선배님과 무령 소저도 잠시 나가 주십시오. 같이 싸울 게 아니라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쪽 다섯 분도 나가 주시오. 당신들이 있 어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오.”

그가 한 말이 거슬렸는지 다섯 명의 흑도인들은 묵향을 노려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노백과 무령도 밖으로 나갔다. 무산5웅 패거리들도 상대의 숫자가 줄어 드는 것이므로 묵향과 같이 있던 두 사람이 나갈 때까지 손을 쓰지 않고 기다렸다. 그들이 나가자 열네 명의 거한들은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묵혼이 뽑혔다. 묵향은 노백에게 들은 말도 있고 또 유백의 당부도 있었기에 처음부터 강공(强攻)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묵향이 검을 뽑자마자 주위로 달려들던 거한들의 몸이 강기의 회오리 속에 말려 들어갔다. 그중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럴 수가… 모두들 조심해라, 검…….”

챙챙챙.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병기가 부딪치는 소음 속에서 끊어졌다. 그리고는 거의 동시에 열네 명의 몸이 토막이 났다. 사방에는 두 토막이 난 그들의 무기 와 몸체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경악과 불신의 빛을 띠고 있었다. 죽어 가면서도 도저히 자신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묵향은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밖으로 몸을 날려 마구간으로 가서 자신의 말을 타고 낙양으로 달려갔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어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재수 없으면 관원들이 뒤쫓을 수도 있었다. 원래 대부분의 경우 관원들이 무림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무림인이 묵향을 고발하면 귀찮은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지체하면 할수록 그의 얼굴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게 되어 무당파와 시비가 붙을 가능성도 있었다.

2층이 조용하자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올라왔다. 그들이 본 것은 열네 구의 시체였다. 시체는 아주 깨끗하게 뼈째로 토막이 나 그들을 벤 사람의 실력 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손님의 상당수가 무림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시체와 무기 조각들을 보면서 이들이 어떤 무공에 의해 주살되었는지 각자 추리하기 시작했 다. 그중에는 노백과 무령도 있었다. 노백은 토막 난 시체의 잘린 부분을 주의 깊게 보면서 손녀에게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아주 깨끗이 잘렸어. 여기를 봐라. 그 녀석의 섬세하면서도 비범한 솜씨가 보이지 않냐?”

그러자 손녀는 역겹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보기에는 정말 끔찍해요. 할아버지, 무기들이 이 정도로 토막이 나 있는 걸로 봐서 보도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요?”

노백은 잘려진 무기 조각을 들고 손녀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그런 것 같지도 않구나. 이 잘려진 귀두도(鬼頭刀)를 봐라. 아주 두텁고 큼직한 게 아마 30근은 족히 나가는 중병(重)일 거야. 여기를 봐라, 아주 깨끗하게 잘려 나갔잖아. 이건 일격에 두부 썰듯 잘랐다는 말이지. 거기다 도신(刀身)이 은은한 보라색을 띤 걸 보니 합금으로 만든 것 같은데. 거기다 저 철봉을 봐라. 저것도 합금으로 만든 거야. 약간 검붉은 색을 내잖냐? 저것도 일격에 토막이 났어. 이것들을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도(刀)로는 아무리 보도라 해도 일격에 이것들 을 토막 내긴 힘들다. 이건 무공에 의해, 그러니까 십중팔구 강기에 의해 끊어져 나갔다고 봐야 할 거야. 거기에 모든 녀석들이 모두 일검에 죽었어. 어떤 상승도법 의 초식을 사용한 것이 아냐. 그냥 벤 거야. 그러면서도 도강을 뿜어냈다면 이건 대단한 고수다. 사람과 무기는 토막이 났으되 누(樓)의 기둥이나 벽에는 이상이 없 을 정도로 강기를 잘 제어한다면, 혹시 그 녀석이 말로는 사파라고 했지만 현문의 제자인지도 모르겠구나. 현문의 제자들만이 이 정도의 강기를 수련할 수 있지. 나 도 꽤 안목이 높다고 자신하며 그 녀석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노부가 오히려 과소평가했구나.”

“그렇다고 꼭 현문의 제자일 가능성은 없잖아요. 혈마(血魔)는 사파인데도 강기를 사용하잖아요?”

“그렇군, 혈마의 제자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혈마가 직접 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깨끗하게는 처리하기 힘들 걸. 직접 구석에서 구경을 해두는 건데.. 생각이 짧았어. 그 녀석이 이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상승의 무공을 사용해서 끝을 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강기라는 게 그렇게도 대단한 거예요?”

노부의

“아무렴, 강기를 뿜어낼 수 있는 고수는 몇 되지 않아. 설마 했는데 이 녀석은 벌써 화경에 들어간 고수로구나. 화경에 들어 삼화취정(三化頂) 오기조원(五氣造 元)의 경지에 들지 않고서는 절대로 임의로 강기를 만들어 낼 수 없단다. 그렇지 않고 검법에 의해 강기를 만들 수도 있는데, 청성파의 청월검법이라든지 남해파가 자랑하는 청룡천승검법(靑龍天昇劍法) 같이 억지로 강기를 만드는 검법과는 차원이 다르지. 그건 내공만 많이 쌓으면 시전이 가능하지만 내력의 소모가 심해 별로 경제적인 검술이 아니다. 반면 정반칠식(正反式) 같은 경우 내력의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을 해결한 뛰어난 검법이지만 아주 정밀한 공격이 가능한 대신 위력이 제한적이라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가 힘들어.”

“혹시 이게 정반칠식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다. 현재 이들의 모양을 보아하니 거의 2초의 검법에 절단 났어. 앞쪽의 무리들을 먼저 벤 다음에 순간적으로 뒤로 돌아서서 뒤쪽의 나머지들을 베어 버 린 거지. 초식도 뭐도, 아무것도 아냐. 그리고 정반칠식에는 이 정도로 강한 위력은 없어. 이 정도의 합금강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을 토막 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냐? 믿어지지 않는다면 네 검을 뽑아서 내가 들고 있는 도를 한번 쳐 봐라.”

그러면서 노백은 자신이 들고 있던 귀두도를 옆으로 들어 올려 손녀가 치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손녀는 얄팍한 2척 반 길이의 검을 뽑았는데, 싸늘한 예기를 뿜어 내는 것이 평범한 검은 아닌 것 같았다. 손녀는 모진 기합 소리와 함께 귀두도의 토막을 내려쳤다.

“얍”

챙!

무령의 검과 부딪친 귀두도의 토막에서는 불꽃이 튀면서 약간의 흠집이 생겼다. 이걸로 보아 소녀의 검이 상당한 보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손이 얼얼 해질 정도로 힘껏 내려쳤는데도 약간의 흠집만이 만들어진 것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정말 단단하군요.”

“아무렴, 내 전에도 말했지만 이들도 보통 잡졸들이 아냐. 무산5웅이란 녀석들하고 저쪽에 뻗어 있는 세 녀석은 상당한 고수라서 노부도 그들 전부를 제압하려면

5백 초는 걸린다구.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 일을 무당에서 어떻게 처리할지 그것이 문제로구나. 피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도 이걸 보고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까불지만 말고 무공연마에 힘쓰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