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권 15화 – 영전

영전

그렇게 평화스런 하루하루가 지나가던 여름의 어느 날 문득 방 대인이 수련실에서 무공수련을 하고 있는 묵향을 불렀다. 묵향이 서둘러 가 보니 방 대인은 흑의(黑 衣)를 입은 중년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중년인은 상당한 고수로 은근한 마기를 풍기고 있는 걸로 보아 아마 총단에서 온 인물인 모양이었다.

“대인(大人)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묵향이 의례적인 인사를 하자 대인은 기겁을 한 듯이 놀라 도리어 인사를 했다.

“대인의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어리둥절해서 묵향이 자리에 앉자, 흑의를 입은 중년인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총단에서 연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번에 성취하신 공적에 대해 총단에서 대단히 만족해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읽어 보시지요.”

서신을 뜯어 보니 그 안에는 총단으로 돌아오라는 명령과 함께 천랑대(千狼隊)의 백인대장(百人隊長)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과 그 명패가 함께 들어 있었다. 천랑 대라면 몇 년 전 진급한 마교 서열 12위 천리독행(千里獨行) 철극광(鐵極光)이 지휘하는 단체다. 묵향이 오랜 시간 수련과 또 외부 일로 나가 있는다고 거의 30여 년을 처박혀 있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교체되었다. 많은 노고수들이 죽기도 했고, 은퇴하기도 했기에 벌어진 결과였다. 정확히는 6년 전 천랑대의 대주가 된 철영 (鐵營)은 천 리 길을 혼자 달릴 수 있다 하여 외호가 천리독행이었다. 그는 자를 극광(極光)이라 붙였을 정도로 경공술의 달인이다.

천랑대는 엄청난 1천여 명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에는 십인대장과 백인대장의 직책이 있다. 천랑대는 마교가 자랑하는 다섯 개의 강력한 무력 단체 중 의 하나인 만큼 그 안에 소속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며 그 권한과 힘도 막강하다. 그중에서도 백인대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니 분타주보다도 그 서열은 까마득히 높은 것이다. 앞의 두 사람이 묵향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언제까지 총단에 가면 되나?”

“여러 가지 정리할 것도 있으실 테니 두 달 이내로 오시면 됩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묵향은 편지를 품속에 갈무리하고 일어섰다.

“그럼 총단에서 보기로 하세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 타주.”

“예.”

“지금 돈이 여유가 좀 있나?”

“뭘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내가 돌봐 주는 모녀를 독립시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그리고 돈은 얼마나 들까?”

“모녀에게 가장 안전한 방법은 땅을 많이 사 주고, 그 땅을 소작에 붙이는 겁니다. 소작료를 받아서 생활하면 되죠. 지금 있는 곳도 괜찮지만 마음에 안 드시면 치 안이 좋은 곳에 한 채 새로 장만하면 될 겁니다. 별로 돈도 안 들구요.”

“그렇게 하기로 하세. 자네가 알아봐 주겠나?”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묵향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 보니 소연은 망아지를 타고 밖에 놀러가고 없었다. 작은 집에 살기는 하지만 풍족한 살림이었다. 소연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묵향에게 매달려 귓속말로 소곤소곤 부탁하곤 했다. 부탁하다 엄마에게 들키면 잔소리를 듣기 때문에 애교를 부리며 귓속말을 하면 그녀의 소원은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묵향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사서 표사를 시켜 집으로 보내 줬으므로 소연은 초 가집에 살았지만 걸치고 있는 옷은 대갓집 아가씨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소연이 해질녘이 되어 돌아오자 셋은 방에 모여 식사를 했다. 소연의 어머니와 묵향이 같이 산 지 3년이 흘러 둘의 사이는 밤에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과 언제나 ‘나으리’로 부른다는 것만 빼면 거의 부부와 마찬가지였다. 오래간만에 식사를 하면서 모녀와 같이 늦게까지 정담을 나눈 묵향은 잠자러 가는 소연에게 말 했다.

“내일은 모두 함께 갈 데가 있으니까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러자 소연이는 조금 과장되게 우는 소리를 하며 애교스런 투정을 했다.

“이잉, 친구들하고 약속을 했는데…….”

“어쩔 수 없어. 내일 함께 가 볼 데가 있으니 밖에 나가지 마라.”

묵향이 드물게도 엄하게 말하자 소연은 군말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집의 가장은 묵향이니까…….

다음 날 점심때가 가까워서 표국에서 표사가 뛰어왔다. 그는 두툼한 봉투와 궤짝 하나를 묵향에게 전하고 묵향과 모녀를 데리고 새로 생긴 넓은 농토를 보여 주며

소작농들과 인사를 하도록 주선해 줬다. 그런 후 그들은 낙양 시내로 들어갔다. 넷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한 후 표사의 안내로 한 기와집으로 갔다. 기와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아담하고 운치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하녀도 하나 있었다. 그녀는 방 대인이 급히 구해서 보내 준 믿을 수 있는 하녀 였다. 기와집 안을 구경하던 소연이 묵향에게 물었다.

“이게 이제부터 우리 집이에요?”

“그럼, 네가 좋은 방을 골라라. 이제 너도 다 컸으니 어머니와 한 방을 쓸 수는 없지 않겠냐?”

“와아!”

소연은 환성을 지르며 방을 고르려고 뛰어 들어갔다. 소연이 들어가고 나자 묵향은 소연의 어머니에게 두툼한 봉투를 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것은 집문서와 땅문서요. 잘 보관하도록 하시오.”

“예, 나으리.”

“옛 집에서 물건들을 가져다가 쓰든지 아니면 새로 장만해서 가구와 집기들을 들여다 놓으시오. 소작 준 땅에서 나오는 돈만 해도 충분히 살고도 남을 거요. 그리 고 소연이 시집도 보내야 하니 약간씩 저축도 해 두는 것이 좋겠소.”

“예, 나으리. 그런데 어제부터 나으리의 안색이 평상시와 다른 것 같습니다. 몸이 좀 안 좋으십니까?”

“아니오. 방은 적절히 분배해서 당신이 사용하면 될 것이고, 집 뒤편에 작은 마구간이 있으니 거기에 조랑말을 넣어 두면 되오.”

묵향은 작은 상자와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건네주며 덧붙였다.

“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이면 충분히 올해 수확할 때까지 쓸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이 상자에는 금화 세 개가 들어 있소. 이건 잘 보관해 뒀다가 소연이 결혼식 때 보태 쓰시오.”

금화 세 개는 엄청난 금액이다. 그것은 은자 60냥이니 보통 한 식구가 1년 생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은화 다섯 냥이 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액수인 것이다. 소연이 어미로서는 평생에 만져 보기는커녕 구경도 하기 힘든 거금이었기 때문에 묵향의 말을 듣고 경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으리,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나는 내일 길을 떠나오. 아마 다시는 만나기 힘들 거요. 물론 죽으러 가는 길은 아니오. 다만 외인들과 단절된 곳, 그래서 당신네 모녀들과는 같이 갈 수가 없소.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한 것이니 이 정도면 아마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거요. 당신과 소연이는 이곳에 계속 있으시오. 표국에서 초가집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이리로 보내 줄 거요. 그럼 안녕히 계시오.”

“나으리…, 흐흑.”

“소연이를 잠시 불러 주시겠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소.”

잠시 후 소연이와 그녀의 어머니가 같이 나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소연아, 이번에 오랫동안 여행을 해야 할 것 같구나. 몇 달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어머님 말씀 잘 듣고 얌전히 지내야 한다. 알겠지?”

“예.”

묵향은 원체 자주 며칠, 또는 몇 주일씩 산적 사냥을 한답시고 돌아다녔으므로, 소연이는 그가 오랜 여행을 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는 떠나는 묵향을 향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묵향도 같이 손을 흔들어 답을 하며 표국으로 돌아왔다. 표국에서 묵향은 여행에 필요한 돈과 말을 방 대인에게 받은 후 곧바로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