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10화 –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여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여

크라레스의 군대는 코린트의 크로나사 지방을 완전히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겉모양만 그렇다는 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점령지에서 게릴라들이 날뛰고 있 었기에 완전히 점령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이 10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고, 또 크라레스에서 모집한 용병 사단 1개가 추가로 투입되기는 했지만 점령한 영 토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병력은 턱도 없이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물론 본토에서 긴급히 투입된 2백여 명의 그래듀에이트 덕분에 어느 정도 숨을 돌리고 있었고, 또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할 이유는 없었기에 차츰 나아질 테지만 현 실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하.”

“무슨 일인가?”

“포로를 심문하던 중에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였사옵니다.”

“뭔데 그러나?”

“예, 게릴라들을 통괄 지휘하는 곳이 어딘지 알아냈사옵니다.”

“뭣? 그게 사실인가?”

“예, 바로 미투랑 요새이옵니다.”

“미투랑 요새라. 그곳은 크로나사 지방이 아닌데?”

“예, 그렇사옵니다. 전쟁 전에는 몬스터나 상대한다고 건설한 것이온데, 그곳이 지금은 본국과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주둔 중인 병력은?”

“예, 1개 여단이 주둔 중이옵고, 몬스터 토벌을 위해 건설된 만큼 대타이탄용 방어 병기는 없다고 하옵니다. 그 외에 은십자 기사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 20 대, 그리고 철십자 기사단에서 보유한 타이탄 30대가 존재하옵니다. 포로의 말로는 은십자 기사단의 절반이 왔사온데, 얼마 전 10대를 상실했다고 하더군요.” “흐음…, 정보의 정확도는 어떤가? 혹시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옵니다. 정보부에 문의해 본 결과 타이탄의 수가 현재 이쪽에서 추정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옵니다. 그리고 포로에 대해서도 마법까지 동원해서 철저하게 조 사했사오니 그가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는 한 정확할 것이옵니다.”

“심문한 놈은 믿을 수 있나?”

“예, 이번에 잡아온 마그레인 백작은 이 일대를 관할하던 핵심 인물이옵니다. 그는 마법사까지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대단히 큰 세력을 떨치던 인물이온데, 이번 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마법 통신망을 매우 잘 써먹은 녀석이죠. 그는 미투랑 요새와 직접 마법 통신으로 명령을 전달받은 후 또 다른 게릴라들에게는 전서구를 이 용해서 연락을 주고받았사옵니다. 이번에 그가 잡히면서 굉장히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사옵니다.”

“흐음…, 그래도 그 한 명의 말만 듣고 움직인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예, 그래서 본국에 연락해서 전에 잡았던 은십자 기사단 소속 기사들을 심문해 보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탈진해서 의식이 없었던 관계로 심문을 거의 못 했었는데,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심문해서 얻은 정보와 마그레인 백작의 자백이 일치하옵니다.”

“흐음, 좋아. 그렇다면 이번에 그곳을 박살 내면 되겠군.”

“예, 그곳에 있는 다리엔 후작이 남부집단군 총사령관이라고 하옵니다. 일단 포로의 진술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사온데, 한번 보시겠사옵니까?”

“그러지.”

“여기 있사옵니다.”

공작은 초상화에 그려진 둥글넓적한 인물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정말 자신을 이 지경까지 고생시킨 상대를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듯했던 것이다. 크로 나사 평원을 놓고 멋지게 총력전을 한판 한다면 설혹 패한다고 해도 속이 시원할 텐데, 이런 끝도 없는 소모전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망할 녀석은 정말 눈에 보 이기만 하면.

“으드드득! 이놈이 우리를 그렇게 애먹이고 있는 놈이라고?”

공작은 이빨을 갈며 말을 이었다.

“통통한 몸매를 보아하니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예, 문관 출신이라고 들었사옵니다. 그로체스 공작이라고, 이번에 키에리가 전사한 후 갑자기 권력의 핵심에 등장한 인물이 있사옵니다. 그 공작의 심복이라고 하옵니다.”

“기습 작전에 투입할 병력은 어느 정도가 좋을까?”

“놈들의 전력이 전력인 만큼 모든 테세우스를 거느리고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미가엘이나 로메로는 만일을 대비해서 여기에 놔두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

옵니다.”

“좋도록 하게. 그리고 본인도 갈 것이야.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타이탄 전투는 이것으로 끝이겠지. 적의 본거지를 박살 내고, 코린트 남부집단군을 와해시킨 후에 휴전 교섭에 들어갈 테니까 말이야.”

다음 날 새벽, 미투랑 공격대는 공작의 인솔 하에 출발했다. 청기사 1대와 테세우스 49대로 이루어진 강력한 타이탄 부대와 그들을 서포트하기 위한 20명의 그래 듀에이트, 여섯 명의 마법사로 이루어진 막강한 기습 부대였다.

이렇듯 대 부대를 거느리고 갈 정도로 미테랑에서 행해질 전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중요한 회전에 다크와 아르티어스는 빠져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 둘은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망할 녀석이 잔꾀를 부린 덕분에 자신이 세운 계획이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젠장,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 자식을 없애 버릴 수 있었는데…….”

그런데 ‘그놈’이 자신만 고이 죽지 않고 추잡스럽게도 미네르바까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을 박살 내 버리겠다고 공언한 광 폭한 드래곤의 주문은 아주 많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주문은 수도가 박살 나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한 가지만 빼고는.. 가장 곤란한 주문은 아르티어스라는 골드 드래곤을 초대해 와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주문을 이행하기가 불가능해진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에게 팔밀이를 하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그는 일의 중대성을 황제에게 역설한 후, 아르티어스를 꾀어내는 데 가장 적임자는 크루마 최강의 고수이자, 전번에 벌어졌던 ‘초록 도마뱀’ 작 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미네르바뿐이라고 설득했던 것이다.

그러고 난 후 황제의 칙명이 내려왔고, 그녀는 이렇듯 사지(死地)를 향해 걸어 들어가야 하는 최악의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상대는 이제 그 이름도 공포스러운 에인션트급을 바라보는 웜급 드래곤이었다. 워낙 포악한 상대라서 협상을 하기도 힘들 것이지만, 일단 칙명을 받은 이상 이 일 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고약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 일을 그녀가 처리하면 당연히 엘프리안은 건재하게 될 것이니, 그린 레이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처리하지 못하면 그린레이크를 그녀의 소원대로 처형장에 보낼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황제 폐하가 칙명까지 내려서 맡긴 일을 소화해 내지 못한 미네르바도 공동 책임을 져야만 했던 것이다. 처형장에 가야 할 그린레이크가 미네르바의 무능 때문이 라고 걸고넘어지면 그녀로서도 할 말이 없어지게 되는 매우 고약한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이 “협상하러 왔소”하면, 제대로 협상을 받아 주는 온순한 드래곤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린레이크를 따라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기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놈의 망할 드래곤은 웬 소녀와 함께 쑥덕거리다가, 그린레이크가 협상하자고 말을 건넴과 동시에 엄청난 마법을 퍼부어 댔다고 하지 않던가?

그 덕분에 마법의 공격권에서 재빨리 몸을 빼지 못했던 세 명의 기사들과 일곱 명의 마법사들이 먼지로 화해 버리고 말았을 정도였다.

“우선 레어 앞에다가 선물을 풀어 놓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일단 그 드래곤은 선물을 먼저 보게 될 테고, 자신에게 이렇듯 훌륭한 선물을 하는 의도를 궁금해하지 않 을까?”

“전하, 선물과 함께 친구인 브로마네스가 레어 입주 기념식을 한다고 청하더라는 쪽지도 함께 놔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런 다음 아르티어스가 나오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

미네르바는 부하의 의견을 일언지하에 묵살해 버렸다. 그녀도 자존심 높은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닥쳐라. 아무리 드래곤이 무섭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야. 대국 크루마의 제1기사로서의 명예가 있지. 어떻게 말도 붙여 보지 못하고 도망칠 궁리부터 한단 말이냐?”

“하지만, 전하. 위험 부담이 너무 크옵니다.”

“너희들은 선물만 놔두고 뒤로 빠져 있거라.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뿐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가시겠사옵니까?”

“지금. 곧장 달려 들어가서 레어 앞에다가 선물을 놔둔 후 너희들은 먼저 철수하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하지만…….”

“내가 결정한 일에 더 이상 말꼬리를 붙이려고 들지 마라. 자, 출발!”

미네르바가 초조하게 서 있을 때, 역시 먼저 여기 왔던 부하들의 증언대로 산의 한쪽 귀퉁이가 사라지더니 높이 4미터가 될 듯 말 듯한 자그마한 레어의 입구가 드 러났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뭔가 중얼거리는 음성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미네르바가 청력을 한껏 돋워 그 소리를 주워듣자 그것은 그녀로서는 정말 기가 막힌 내용들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간 큰 놈이 들어왔지?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지?”

“헬파이어도 안 통하면 이제는 어떻게 하려고요?”

“글쎄다. 괜히 강력한 마법을 써 봐야 내 아까운 영토만 가루가 되니까, 몇 놈 잡아다가 시범 삼아 먹어 버릴까?”

“우와, 그럼 드디어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는 걸 볼 수 있는 거예요?”

“으이그……. 아무래도 그건 정서 교육상 안 좋을 것 같고, 그냥 대충 빨리 죽여 버리는 편이 좋겠군.”

그러면서 두 사람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미네르바는 일찌감치 도망치려다가 아직 트랜스포메이션하지 않은 상태의 드래곤이라면 상대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기에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놈이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안에서 걸어 나오는 두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라?”

“어? 미네르바 아니야? 여기에는 웬일이지?”

“다, 다크……. 너야말로 여기에 웬일이지? 그리고…….?

미네르바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상대. 전에 한 번 다크와 함께 행패 부리러 와서 칼부림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음식을 먹고 있던 그 청년……. 이제야 미네르바는 그때 그 청년이 왜 그렇게 겁도 없이 앉아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전에 소개해 주지 않았었나? 내 아버지…, 아니 아빠. 그리고 여기는 우리 집이지. 그런데 무슨 일로 왔지?”

미네르바로서는 입이 쩍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미네르바가 아무 말이 없자 다크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다시 말을 건넸다.

“며칠 전에 왔던 그 녀석들도 네가 보냈던 거였어? 그리고 저기 놔둔 것들은 뭐야? 제법 번쩍번쩍하는데?”

“선물…이지. 부탁이 한 가지 있어서.”

“부탁? 무슨 부탁?”

“1년 후에 브로마네스의 레어 입주식이 있을 건데, 거기에 참석해 달라고.”

얼빠진 듯한 미네르바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무슨 일인지 짐작하기가 힘들었지만, 일단 자신의 친구인 브로마네스의 이름이 나왔기에 질문을 던졌다.

“브로마네스의 레어 입주식이라고? 브로마네스는 지금 쟈코니아 산맥에 살고 있을 건데, 새로 레어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냐?”

“예, 드래곤이시여. 이번에 일이 있어서 브로마네스의 분노를 산 일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 이쪽에서 사죄하고 브로마네스의 조건을 들어주는 것으로 무마할 수 있었는데, 그의 조건이 문제지요. 새로운 큰 레어를 하나 지어 줄 것. 그리고 아르티어스라는 친구를 그 레어에 들어가는 그날 초대해 줄 것.”

미네르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브로마네스의 저의가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왜 나를 초대한단 말이지?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자기가 찾아오면 될 것을 가지고 왜 너를 보낸 건지 모르겠군. 내가 호비트의 청 따위는 들어주지도 않 고 죽여 버릴 것을 잘 알고 있는……

말을 하다 보니 아르티어스는 브로마네스의 저의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브로마네스란 녀석이 사실은 아르티어스가 그날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말이 다. 그런데 아르티어스로서는 괘씸하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나쁜 녀석. 자기 일에 귀찮게 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를 끌어들여?”

“드래곤이시여, 제발 청을 들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미네르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흔쾌히 대답했다.

“오냐, 좋다. 들어주지. 브로마네스 녀석의 계책이 괘씸해서라도 가 주마.”

미네르바로서야 이유가 어떻게 됐든, 아르티어스가 와 준다는 데야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때려잡아서 가져가기에는 상대가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여.”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드래곤이라는 것들은 조건을 붙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미네르바가 물었다.

“무엇이십니까?”

“좋은 포도주를 한 상자 다오.”

“예?”

“도저히 레드 드래곤은 입맛에 안 맞으니까 포도주를 가져오라니까?”

아르티어스가 말하는 레드 드래곤이 드래곤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술 이름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미네르바는 둔하지 않았다. 상대가 겨우 포도주 한 상 자에 와준다는데 반론을 제기할 이유가 있겠는가? 미네르바는 상대가 말을 바꿀 시간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황급히 대답했다.

“예, 그러죠. 즉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부하들이 집결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돌아가려고 하는 미네르바의 뒤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봐, 기왕이면 강한 술도 한 상자 부탁해. 레드 드래곤을 거의 다 마셔 버렸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