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13화 – 마스터들의 협상
마스터들의 협상
“전하,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왔사옵니다.”
노마법사의 표정이 매우 밝은 것에서 공작은 한 가지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의 영토를 집어삼킨 크라레스로서는 이제 휴전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드디어 녀석들이 휴전 제의를 해 왔는가?”
“옛, 전하. 휴전 협상을 위해 사신을 파견한다고 하옵니다.”
“오오, 드디어 녀석들도 이 지긋지긋했던 전쟁을 끝내려고 하는구먼. 그래, 누가 파견되어 온다고 하던가?”
“예,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 다섯 명의 협상단을 거느리고 온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까미유 드 크로데인이라……. 코린트의 유명한 무가(武家) 크로데인 가문의 태생이라면 상당히 실력이 있는 인물이겠군. 그래 그 인물에 대해 조사는 해 봤나?”
“예, 전하. 전쟁의 신전에 알아 본 바로는 7년 전에 그래듀에이트 시험을 통과한 뛰어난 인물이옵니다. 추정나이 42세,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의 아들이옵니 다.”
“뭐? 이번에 전사한 소드 마스터인 리사를 말하는 건가?”
“옛, 전하.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 전사했기에 후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것이죠.”
“으음, 생각 외의 거물을 보내오는군. 상대가 크로데인 가문의 적자(嫡子)라면 예의상 이쪽에서도 그에 걸맞은 인물을 보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예, 그것 때문에 토지에르 각하께서는 그를 전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하고 연락을 보내왔사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협상 장소는 어딘가?”
“예, 국경에 위치한 라벤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틀 후에 할 것이옵니다.”
“좋아, 준비는 자네가 책임져 주게.”
“옛, 전하.”
협상 당일이 되었을 때, 라벤트 마을 주위에는 유령 기사단 인원 절반이 쫙 깔려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라벤트 마을은 작은 마을이었기에 마을 공회당이라든 지그런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가 없었기에, 술집을 징발하여 이용했다. 테이블이나 의자, 양탄자까지도 본국에서 가져왔기에 술집 내부는 꽤 근사한 협상 장소로 바뀌어져 있었다.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보고하는 병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후 10분 정도 지나서 문제의 인물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등장했다. 천천히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술집 안으로 들어서는 젊은 이를 보며 루빈스키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삼켰다. 과연 코린트 최고의 명문인 크로데인 가문의 적자(嫡子)다웠기 때문이다. 까미유 후작의 자신감 넘치는 눈동자를 쏘아보며 루빈스키 공작은 상대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욱 대단할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먼 길에 수고하셨소.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예, 반갑습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는군요.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라고 합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 높은 크로데인 가문의 기재(奇)를 만나게 되어 나야말로 영광이지요.”
적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이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지만, 까미유는 서둘러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사는 이쯤에서 마치고, 그래 그쪽의 조건이나 먼저 말해 보시오.”
“으음, 협상을 제의해 온 쪽은 그쪽으로 알고 있는데요. 귀하가 먼저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지?”
상대는 과연 나잇값을 하는 능구렁이라고 생각하며 까미유는 즉각 준비해 온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좋소. 우선 국경선부터 확정짓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지요. 본국에서는 지금 현재 양국의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까지를 그대들의 영토로 인정해 주겠소. 그리고 서로 간의 전쟁 배상금이니 뭐니 복잡한 것은 붙이지 맙시다. 우선 휴전부터 하기로 하고, 이 조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합시다. 5년 단위로 다시 만나 조약을 갱 신하기로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다가 서로 간에 신뢰가 더욱 쌓이고 나면 종전 협정이나 아니면 불가침 협정으로 확대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상대의 의견을 듣고, 공작은 상대가 속임수가 아닌 진짜로 휴전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코 무리가 없는 조건이었고, 또 휴전 시에 꼭 논의해야만 할 필 요한 사항만을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구태여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겠소? 그냥 휴전 협정으로 하고, 휴전하기 싫다면 어느 한쪽에 그 사실을 통보하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물론 통보는 전쟁이 벌어지기 최소한 3일 전에는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말이오. 5년마다 한 번씩 만나서 협상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기 때문이오.”
루빈스키 공작의 말에 까미유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절차를 간소화시키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3일 전에 통보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소? 상대의 병력 이동 상황만 봐도 전쟁을 벌일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소. 그런데 구태여 상대에게 쳐들어갈 것이라고 선전포고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또 일단 휴전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중요 할 뿐이지, 다음 전쟁의 시작이 그렇게 중요하겠소? 어떻게 협약을 맺어 둔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그것을 지킬 마음이 없다면 이건 휴지 조각일 뿐이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지요. 그렇게 봤을 때 귀국은 본국에게 상처를 많이 준 것은 사실이오. 갑자기 동맹국이었던 본국을 기습 공격해서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코린트 를 믿기는 참으로 힘든 노릇이지요.”
루빈스키 공작의 말에도 까미유는 침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요? 본국이 크루마와 전쟁 중일 때를 틈타서 귀국이 선전 포고도 없이 뒤통수를 친 것 또한 사실이지 않소? 서로가 국제관례를 한 번 씩은 어겼으니 대충 비긴 것으로 하죠. 이번 전쟁을 통해 귀국은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으니 이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겠소? 그다음의 역사는 또 어떻게 쓰이 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일단 본국은 지금 이 전쟁을 지속해 나갈 여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오. 그리고 귀국 또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힘들 것이오. 그렇다면 상호 적당한 조건으로 전 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다음을 기약하자는 대목에서 까미유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보며 루빈스키 공작은 섬뜩함을 느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코린트의 기둥은 키에리, 로체스터, 리사, 그라세리안이었다. 세 명이나 되는 마스터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코린트는 모두에게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번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그들은 로체스터를 제외한 두 명의 마스터를 잃었다. 하지만 정보에 따르면 그들 외에도 마스터급은 존재하고 있었다. 키에리가 전사하 던 그 전투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미네르바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넣을 뻔했던 붉은색의 타이탄 두 대. 그것을 보면 두 명의 마스터가 더 존재한다는 것은 명약관화 (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루빈스키는 까미유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가 숨겨진 마스터들 중의 한 명이라고 확신했다.
“일단 협정을 맺기에 앞서, 실례되지 않는다면 귀공의 직책을 알고 싶소.”
루빈스키의 말에 까미유는 싱긋 웃음을 떠올렸다.
“자신부터 먼저 드러내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흐음, 나는 스바시에의 총독이며, 유령 기사단장이고, 크라레스 전군 총사령관이라는 소임을 맡고 있소.”
상대의 말에 까미유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근위 기사단장은 누구란 말이오? 혹시 로니에르 공작인가요?”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 총사령관이자 코란 근위기사단장이었듯, 모든 국가들의 경우 최고의 실력자는 근위 기사단장직을 겸하고 있었기에 물어본 말이었 다.
“근위 기사단은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이 맡고 있소.”
“그렇다면 로니에르 공작은?”
하지만 루빈스키 공작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녀에 대해서는 알 것 없고, 나는 이미 말했으니 그대가 말할 차례요.”
“현재 미흡하긴 하지만 제2근위대장직을 맡고 있소.”
“흐음, 그런가요? 그렇다면 약간의 세대교체가 있었다는 말이겠군요. 답변해 주셔서 고맙소.”
상대의 말에서 루빈스키 공작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당연히 제1근위대장에서 근위기사단장으로 진급했을 것이다. 평상시라면 빈 자리를 놔두고 권력 투쟁이 오고 간다고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그러니만큼 키에리와 리사라는 거목들이 뽑혀 나간 빈 자리를 절 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까미유가 로체스터의 제1근위대를 넘겨받지 못하고 리사의 제2근위대를 넘겨받았다는 것은 제1근위대를 넘겨받은 또 다른 한 명이 더 존재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니까 코린트가 보유하고 있는 마스터급의 검객은 모두 세 명인 것이 확실했다.
저 격전을 거친 후 코린트는 아마도 15대 내외의 근위 타이탄밖에 남지 않았을 테니, 세 토막을 칠 수는 없었을 테고 아마도 두 토막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말이다.
“서로 간에 대충 이해관계는 정리가 된 것 같고, 나머지 세부적인 협의 사항은 수행원들끼리 처리하면 될 것이오. 서로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휴전에 합의하려고 한 다면, 구태여 서로에게 난해한 조건을 제시하여 쓸데없는 힘겨루기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오. 서로 간의 토의는 수행원들끼리 어느 정도 의견을 맞춘 후에 다 시 재개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럽시다.”
“여기에 온 김에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혹시 만남을 주선해 주시겠소?”
“누구를 말하는 거요?”
“로니에르 공작.”
“만나게 해 드리고 싶지만, 그녀는 이곳에 없소. 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그녀 또한 할 일이 많기에 이곳으로 불러내기도 어렵소. 이해해 주겠소?” 이건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까미유는 입맛을 다시며 쌍방의 수행원들끼리 토론을 벌이는 시끄러운 술집에서 나와 자신의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그래, 크라레스 쪽의 반응은 어떻던가?
“예, 그쪽도 휴전에 꽤 적극적이옵니다. 사실 양쪽 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고, 또 서로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세부 사항을 협상하는 것도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 뭔가?
“협상 장소에 나온 크라레스 쪽 대표는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으로서 스바시에 지역 총독이자 유령 기사단장, 그리고 전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대단한 인물이옵니다. 그의 실력은 직접 검을 나눠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대충 저와 동급 정도로 짐작되옵니다.”
“흐음, 로니에르 공작은 총사령관이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다면 그녀는 근위 기사단장이자 부사령관인가?”
“근위 기사단장은 외부에 알려진 대로 론가르트 백작이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유령 기사단이 뭔지를 파헤치는 것이 의문을 풀어 나가는 기준점이 되겠군.”
“예, 전하. 아무래도 제 짐작으로는, 이번 전쟁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크라레스가 지닌 여분의 전력이 모두 유령 기사단에 집결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모든 알파급과 베타급을 보유하고 있는 크라레스 최강의 기사단이 그곳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옵니다.”
“아마도 그렇다고 보는 게 옳겠지. 그런데 그가 갑자기 유령 기사단의 존재에 대해 자네에게 말한 저의가 뭔지도 생각해 봤나?”
“예? 글쎄요.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지. 아마도 전쟁이 끝나고 나면 크라레스의 기사단들은 대대적인 재편성에 들어가게 될 거야. 베타급들은 근위 기사단에, 알파급은 그대로 유령 기사단에, 그리고 새로이 재생산되는 타이탄은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령 기사단이나 제3의 기사단으로 보내지겠지. 그런 후에야 크로아 공작이나 로니에르 공작이 근위기사단장으로 나서게 될 테지.”
“하지만 로니에르 공작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없어 보였사옵니다. 그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옵니다.”
“참, 지금 언뜻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녀의 실력은 모두가 공인하는 바야. 그런데도 왜 그녀의 실력에 합당한 직위에 올리지 않는 거지? 총사령관이든지, 근위 기 사단장이든지 뭐 그런 직위를 줘야 함에도 그러지 않고 있어.”
“그거야 그녀의 나이가…….”
까미유의 의견에 공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겉모습에 드러난 나이를 믿지 않아. 그 정도 경지에 올라가려면 엄청난 세월을 검술에 바쳤다고 봐야 해. 그녀에게 그런 지위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봐야지. 자네는 짐작이 가나?”
“죄송하옵니다. 소신이 미흡하여…….”
“아닐세. 지금 떠오른 건데, 보는 시각의 방향을 약간 바꾼다면 답이 나오지. 실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뢰도로 보는 거야.”
“그렇다면?”
“크라레스는 그녀를 믿지 않아.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이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가 있어.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거겠지. 제스터가 그녀와 크라 레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빨리 알아내 준다면 그 고리를 부술 방법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때가 우리들의 복수가 시작되는 날이겠지. 안 그런가? 크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