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2화 – 브로마네스의 영토
브로마네스의 영토
죠드는 키에리가 짐 보따리를 들고 움막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기겁을 하며 말했다.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으셨는데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죠드의 말에 키에리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대충 회복되었으니 걱정 말게나. 가 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말일세.”
“어디 말씀입니까?”
“테롯사 산맥의 남쪽.”
“예에? 거기는 갑자기 왜 가시려고 하십니까?”
“그냥 가 보고 싶구먼.”
“가만…, 테롯사 산맥이라면.”
“깊게 생각할 것 없네. 자네도 제임스가 올린 보고서를 봤으면 알겠지만 그라세리안이 실종된 곳이지.”
“예, 그런데 거기는 왜?”
“그리고 우리들이 처음 그라세리안을 만난 곳이기도 해.”
“예?”
“나는 아들 녀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라세리안이 사망하거나 납치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마도 그는 또다시 은둔을 시작했는지도 모르지. 처음 그를 만난 곳과 마지막으로 그가 사라진 곳이 같다면 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죠드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야 그렇지요.”
“나는 한 번 더 그에게 부탁하려고 하네. 코린트를 위해 조금만 더 일해주지 않겠느냐고 말일세. 여기서 그곳까지는 너무도 멀지. 자네가 함께 가기 싫다면 그쪽으 로 공간 이동만 시켜 주면 돼.”
“아닙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짐이 별로 없으니까 시간도 별로 안 걸릴 겁니다.”
죠드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키에리를 은밀하게 이곳으로 모시고 와야 했기에 가지고 온 것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와중에도 가지고 온 이 작은 보따리 안에는 마법사로서 여행을 하는 데 거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들어 있었기에 그것을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마침내 운명의 그날이 찾아왔다. 크루마가 금지된 마법들 중에서 가장 악랄한 것이라고 알려진 유성 소환 마법을 쓴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유성 소환마법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정밀하고, 또 매우 힘든 마법이다. 저 머나먼 우주에 모여 있는 자그마한 혹성들 중의 하나를 끌어 와서 지구에 떨어뜨리는 이 마법은 유성이 도착하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최강의 위력을 지닌 공격 마법이었다. 저 멀리 떨어진 혹성에 힘을 가해 그것이 일 정한 궤도로 날아와서 시술자가 원하는 정확한 위치에 메다 꽂히게 만드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 날아오기 시작한 유성은 정확한 위치 파악이 불가능하기에 그걸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쯤 대충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나?”
로체스터 공작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노마법사에게 물어 유성 소환 마법의 위력을 구경하기에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기다린 것까지는 좋 았는데,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데도 이놈의 유성은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노마법사는 송구스러워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코린티아는 어떻게 되었지?”
“예, 모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사옵니다. 생각한 것보다는 혼란이 적었다는 제임스 각하의 보고였사옵니다.”
“그런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뭔가?”
“예, 인질로 잡아놨던 각국의 왕자들 중에서 일부가 그 혼란을 틈타서 탈출했사옵니다. 지금 수색 중이온데…….” 로체스터 공작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놔둬라.”
“예? 하지만……?
“대신 그놈들의 명단과 소속 국가명을 상세히 적어서 보고서를 올리도록 해라.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면 그 국가의 국왕들을 문책하면 되니까 말이지.”
“저, 하지만 그 와중에 크라레스의 왕자도 도망쳤는데요? 지하 감옥에서 꺼내어 이송하는 도중에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습니다.” 이번에는 로체스터도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왕자를 인질로 계속 협박을 했었지만 아직까지 통하는 것 같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된다면 나중에 인질로서 가치 가 없는 왕자를 공개 처형하며 귀족들의 사기를 높여 줄 생각이었는데, 그 왕자 녀석이 이걸 눈치 챘는지 도망쳐 버린 것이다.
“크라레스의 왕자가? 으음…,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지. 그놈들은 처음부터 왕자의 생사(生死)는 걱정하지도 않고 전쟁을 벌인 거니까 말이야. 왕자를 죽이겠 다고 협박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놈들인데, 그런 가치 없는 인질이 없어졌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것은 없겠지.”
노마법사는 주위를 둘러본 후, 불꽃놀이를 구경하려고 모인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기에 훔쳐 들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레 말했다.
“예, 그런데 그 왕자의 건 말이옵니다. 서거하신 키에리 전하의 명령에 의해 지하 감옥에서 약간의 세뇌 작업을 행했사옵니다. 일단 적국의 왕자이니만큼 다음에 크라레스의 국왕이 될 가능성도 크지 않겠사옵니까?”
노마법사의 말에 로체스터는 크게 흥미를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역시 그것이 얼마나 비밀을 요하는 사안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세뇌를 했는데?”
“예, 아예 바꾼다면 표시가 날 테니까 조금만 수정했사옵니다. 기억을 약간 왜곡시켰고, 또 본능을 조금 자극해 놨사옵니다. 그리고 자제력을 조금 억제해 놨구요. 사실 성장이 끝난 인물에게 이런 방식을 쓴다면 별로 큰 영향이 없겠지만 성장기의 인물은 다르지요. 지금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엉뚱한 인물로 변해 버릴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래? 대충 언제쯤 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지?”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쯤 후면 결과가 나올 것이옵니다. 아마도 지독하게 호색하고 게으른, 욕심덩어리에 부하들을 못 믿는 그런 희한한 인물이 되어 있겠죠.” “크크크, 5년이라… 그때까지 크라레스가 멸망하지 않고 남아 있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천천히 인성이 변해야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겠죠. 어쩌면 왕좌를 빨리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할지도 모르구요.”
“글쎄, 그건 그때가 되어 봐야 알겠지. 그건 그렇고 저기 오는군.”
불현듯 로체스터 공작이 시퍼런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자, 노마법사는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몇 군데 조각구름이 떠 있기는 했지만, 밤도 아니고 이런 대낮에 유성을 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예? 어디에 말이옵니까?”
“참, 자네 눈에는 안 보이나? 저 멀리 하얗게 빛나면서 떨어지는 것이.”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노마법사의 눈에도 하얗게 빛나며 떨어지는 작은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엄청나게 큰 유성이었기에 눈에 보인 것이다. 유성은 정확히 쟈크 렌 요새 위쪽은 아니었지만 대충 그 부근쯤에 떨어질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법서에 기록되어 있는 위력의 절반 정도만 낸다고 해도 쟈크렌 요새는 먼지로 화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쟈크렌 요새의 오른쪽에 위치한 산들 중의 하나에서 붉은색의 빛줄기가 하늘 위로 치솟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 는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폭발음. 하늘 위에는 새로운 태양이 탄생한 것처럼 거대한 빛의 덩어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른 붉은색 빛줄기가 가지는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그 폭발에 따른 충격파까지 몽땅 다 하늘 위로 날려 버 린 듯 아래쪽에서는 엄청나게 밝은 빛 무리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로체스터 공작이 물었지만, 노마법사 역시 모르고 있었다.
“저, 그건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혹시 드래곤이 뭔가 일을 벌인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사옵니다.”
“호오, 그렇다면 잘되었군. 모두 다시 쟈크렌 요새로 불러 모아. 그 공백을 틈타서 크루마 놈들이 쟈크렌 요새를 점령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지. 그 천혜의 요새를 크루마에게 넘겨 줄 수는 없지 않겠나?”
“전하, 그것을 잠시만 미룰 수 없겠사옵니까?”
“왜 그러나? 모든 게 잘 끝나지 않았나?”
“그게 아니옵고, 아마도 빛줄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짐작컨대, 저쪽은 웜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의 영토이옵니다. 웜급의 레드 드래곤이 자신의 영토를 향해 날 아온 유성 때문에 분노했다면…, 그렇다면…….”
이제야 노마법사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 뭔지 눈치 챈 로체스터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큰일이군.”
노마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 궁리 저 궁리 한다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오,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예,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옵니다. 재빨리 브로마네스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푸짐한 선물과 함께 그의 둥지 위로 떨어지는 유성을 어떤 녀석 이 만들었는지 넌지시 알려 주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크루마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브로마네스의 분노를 받아 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겠지요. 어떻사옵니 까?”
로체스터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답했다.
“좋아, 그 의견이 매우 마음에 드는군. 까미유를 불러라.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브로마네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일을 해내겠지.”
“예, 전하.”
하얀빛을 뿌리며 일어난 대 폭발. 다크의 능력도 엄청나게 뛰어났지만 아르티어스의 막강한 방어 마법 덕분에 그들은 로체스터 공작과는 달리 크라레인시에서 고 작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매우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유성이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었다.
이것보다 더 대단한 불꽃놀이는 구경하기 힘들다는 아르티어스의 꾐에 넘어간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그들의 주위에 둘러쳐 놓은, 열 겹이 넘는 방어 마법진의 한가 운데에서 마법과 대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이 경이로운 폭발을 구경할 수 있었다.
유성 소환 마법의 특성상 오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르티어스는 자신들의 머리 위에 유성이 직격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력한 방어 마법진을 친 것이었는데, 정작 유성은 그들로부터 5킬로미터, 크라레인시로부터는 3킬로미터 정도쯤 벗어난 위치에 떨어졌다.
“정말 장관이지?”
유성이 떨어지면서 벌어진 대 폭발은 둘째 치고, 그에 따른 강력한 충격파에 3킬로미터쯤 떨어진 크라레인시가 박살 나는 것을 보고 입이 떡 벌어져 있던 다크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 그렇네요.”
얼빠진 아들의 모습에 대단히 만족한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법의 힘이란 것은 저렇게 위대한 것이란다. 겨우 검술 따위 아무리 익혀도 저 정도 위력은 죽었다 깨어나도 낼 수 없지. 어때? 이제 다시 마법을 배워 볼 의욕이 솟아 나오지 않냐?”
“아뇨, 저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강력할 수가 있죠? 저런 위력이라면 쓸데없는 희생자만 생기는 것 아니에요?”
“뭐,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싸울 필요는 없지. 우연히 저 근처에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놈들은 그날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그런 놈들까지 생각한다면 무술도 익 힐 수 없는 것 아니겠냐? 예를 들어 검을 던졌는데, 맞으라는 녀석은 피하고 그 뒤로 지나가던 행인이 맞을 수도 있는 거잖아. 우연히 지나가던 호비트 한 마리가 죽 으나 1만 마리가 죽으나 똑같은 거 아니냐?”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동의를 구하고자 한 말이었지만 아들의 대답은 완전히 그의 기대에서 어긋났다. 그녀는 오히려 아르티어스의 정신 상태가 의심된다는 듯 새 초롬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르죠. 아버지는 숫자 관념이 그렇게 없어요? 하나하고 1만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구요.”
“내 생각에는 별로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야. 개미구멍 근처에 앉아서 한 마리를 죽이는 거나 1백 마리를 죽이는 거나 똑같은 거야. 둘 다 무료할 뿐이지.”
“뭐, 아버지야 종족이 다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만약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한 마리가 죽으나 1백 마리가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그야 당연하지. 나약한 놈들이 죽어 봐야 별것도 아니야. 평소에 수련을 안 한 탓이지. 그 기나긴 시간 레어에 틀어박혀서 마법이나 익힐 일이지, 낮잠이나 퍼 잤 으니 죽어도 싼 거라구.”
“그런 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뭐 할 말 없죠.”
아르티어스는 유성의 폭발로 생긴 거대한 구멍과 완전히 박살 나 버린 크라레인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 이제는 어떻게 할 거냐? 또다시 날아올 유성은 없는 모양인데…….”
“뭐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돌아가죠. 이제 시체 더미 보는 것도 질렸으니까.”
“흐음.. 그러니까 감히 내 영토에다가 유성을 떨어뜨린 놈들이 크루마의 마법사들이라는 거냐?”
그야말로 잡티 하나 안 섞인 찬란한 금발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용모의 사내. 바로 이 사내가 바로 유성을 간단하게 소멸시킨 웜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였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투기(鬪氣)와 살기(殺氣) 덕분에 까미유와 함께 왔던 짐꾼들은 모두들 파랗게 질려서 한쪽 구석에 모여 눈치만 힐끔거리고 있었지 만, 까미유는 브로마네스 앞에서도 차근차근 침착하게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주 치졸한 놈들이죠.”
“훗! 아무리 호비트 따위가 간덩이가 커져도 그렇지 감히 내 영토에?”
“호비트가 아니라 엘프일 것이라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추리일 겁니다. 크루마에는 엘프들이 아주 많이 살거든요.”
브로마네스는 앞에 서 있는 젊은이를 꽤나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레드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렇듯 침착하게 말하는 호 비트는 처음 봤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 광폭한 눈길을 그대로 받아 내는 호비트 또한.
“엘프들이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그들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썼다는 것은 좀 의외로군. 그런데 네 녀석은 누구냐?”
갑자기 자신이 누군지 묻자 까미유는 상대의 저의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순순히 답변을 했다.
“예, 저는 코린트의 기사인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입니다. 이번에 유성이 떨어진 것 때문에 브로마네스 님께서 열 받으…, 아니 진노하셨을 거라는 추측 때문에 그걸 사용한 사람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려 드리라는 로체스터 공작 전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까미유는 얼마 전 어머니가 전사함으로 인해 그녀의 작위를 이어 받아 명실 공히 후작으로서 ‘각하’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2근위대의 대장이라는 중책을 떠맡고 있었다. 그런 까미유의 대답을 듣고 브로마네스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요 근래 밑에서 투닥거리던데, 이번 일을 기회로 내가 크루마에다가 복수해 주기를 원해서 온 것은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상대의 말에 까미유는 헤실거리며 대답했다.
“헤헤…, 그런 마음도 물론 있죠. 하지만 브로마네스 님의 진노가 피해자인 코린트 쪽에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게 우선입니다.”
브로마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꽤나 정직한 놈이군. 그래 네 녀석 말은 잘 알았으니까 가 보거라.”
“예. 저…,
그런데…….”
상대가 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자 브로마네스가 말했다.
“왜? 또 다른 용무가 있느냐?”
“예, 이왕에 여기까지 온 김에 한 가지만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뭐냐?”
“혹시 검술을 극한까지 익힌 헤즐링이 진짜로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뭐라고? 검술을 익힌 헤즐링이라고? 그런데 그 질문을 하는 저의가 뭔지 궁금하군.”
“저, 그건 다름이 아니라…….”
까미유는 여태껏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상세하게 브로마네스에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브로마네스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게 변해 갔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호비트의 말을 들어 보니, 그의 추리에도 일리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까미유보다 더 많은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코린트의 대마법사인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가 사실은 광포하기로는 레드 드래 곤을 앞서간다는 블루 드래곤이라는 것이라든지, 호비트와 호비트로 트랜스포메이션한 드래곤이 겉모양은 같더라도 마나를 구동시키는 내부가 다르기에 절정의 검술은 익히기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 등이었다.
“흐음, 네 추리도 그럴듯하다마는 아마도 그 호비트 계집아이가 드래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그 아이를 따라다닌다는 아버지는 드래곤일 가능성이 매우 크 겠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상 호비트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였던 드래곤은 꽤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호비트이고, 드래곤이 양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군.”
“그렇다면, 코린트 최강의 고수이셨던 키에리 발렌시아드 전하를 패배시킨 그 꼬마 계집애가 인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 나이에 그런 검술을 익힌다는 사실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한데도 말입니까?”
까미유의 말에 브로마네스도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말에 상당히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냥 여자도 아니고 꼬마 여자 애라고?”
“예, 15세 정도……. 아무리 많이 봐 줘도 18세는 힘들죠. 마법사들에게 물어봤지만 그렇게 어린 몸을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로체스터 전하께 서도 절대로 그런 몸으로 검술을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가 검술을 익히다 보면 근육도 붙는 것이고 최고의 경지로 올라가면 육신도 젊 어지긴 하지만, 어려지면서도 그렇게 가냘픈 몸매로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죠.”
“호오, 그렇다면 뭐냐? 호비트는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냐?”
“예, 그래서 내린 결론이 드래곤이었습니다만……. 드래곤은 원래 성체가 되면 독립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가 따라왔으니 헤즐링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죠.”
“아주 재미있는 문제로군. 글쎄…, 그건 내가 좀 더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일 다 끝났으면 가 보거라.”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그 젊은이를 따라 짐꾼들이 허겁지겁 산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브로마네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진짜 헤즐링인가? 그래도 호비트들의 검술을 제대로 익힌 드래곤은 나하고 아르티어스뿐인 줄 알았었는데, 누가 그 헤즐링에게 종족의 특성을 뛰어 넘어 서 고급 검술을 가르쳤지? 나나 아르티어스도 그걸 익히지 못했었는데……. 어쨌든 둘이 어울려 다니던 그때가 좋았지. 그 녀석이나 나나 그때는 젊었으니까, 흐헤 헤헤.”
그렇게 말하면서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고풍스런 멋을 풍기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검은 아르티어스가 자신에게 선물 한 것이었고, 자신은 그 대신 자신의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아르티어스에게 선물했었다. 레드 일족과 골드 일족은 원래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브로마네
스와 아르티어스는 여행 도중에 만나서 매우 깊은 우정을 나눴었다.
그때 서로 간의 변치 않는 우정을 상징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적색에서 황금색으로 바꿨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황금색에서 적색으로 바꿨고…..
“참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게 아니잖아. 감히 내 머리 위로 유성을 떨어뜨릴 생각을 한 녀석들부터 손봐 준 다음, 그 궁금증은 천천히 해결하기로 하지. 흐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