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3화 – 지도에서 사라진 코린티아시

지도에서 사라진 코린티아시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사옵니다, 공작 전하.”

부하의 표정에서 이미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공작은 시치미를 떼고 부하에게 질문을 했다. 그래야지만 부하도 자신의 할 말을 하기가 쉬운 것이니까. 

“오호,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적 타이탄 10대를 파괴하고 세 명의 포로를 잡아왔사옵니다. 그런데 포로를 심문해 보니까 의외의 소득이 있었사옵니다.”

“그래, 뭔가?”

“예, 이번에 투입된 은십자 기사단은 그 보유 전력의 절반인 32대인 것을 알아냈사옵니다. 나머지는 모두 쟈크렌 요새에 남아 있다고 하옵니다. 그 외에 철십자 기 사단 3개 전대, 30여 대를 합해 봐야 타이탄 60여 대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런데 오늘 10대를 파괴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겨우 50대 남짓밖에 안 되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공작은 빙글거리며 말했다.

“아주 좋은 것을 알아냈군.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더 좋은 소식을 이미 알고 있지.”

“예?”

“코린트의 수도 코린티아가 지도 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경악하는 부하의 표정을 보며 공작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는 황급하게 표정을 감추며 죄송스런 표정을 지었다. 상관 앞에서 지나친 경박함을 보였 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작이 미소를 지은 이유는 달랐다. 자신도 그 사실을 보고받고 엄청나게 놀랐었는데, 역시 언제나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부 하도 자신의 반응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은 미소였던 것이다.

“토지에르의 보고로는 처음 두 개까지는 막아 냈는데, 세 번째 유성이 상당히 옆쪽으로 어긋나게 떨어지면서 그것의 여파가 방어 마법진에 마나를 공급하던 보조 마법진을 쓸어버렸다고 하더군. 그다음은 뻔하지 않나? 방어 마법진은 제 기능을 상실했고, 곧장 코린티아시는 박살 나 버렸지. 아마도 코린트는 제2의 도시 케락 스로 수도를 옮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더군.”

“수도가 박살 나 버리는 바람에 코린트의 타격이 엄청나겠군요.”

“그야 이를 말인가? 대충 시외로 옮겼다고 하더라도, 코린트의 타이탄 생산 시설들 중에서 거의 70퍼센트 정도가 코린티아시에 있었는데, 그것들을 잃었으니 아 마도 타격이 엄청나겠지. 한동안은 제대로 된 타이탄 생산은 힘들다고 봐야 할 거야.”

“크루마가 뜻밖에 도움을 주는군요. 지금부터 맹공을 퍼부어서 녀석들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기만 하면 본국의 승리가 확실하옵니다, 전하.”

“그야 이를 말인가? 참, 이번에 녀석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니, 다음번에는 확실하게 만회하려고 들 거야. 최소한 20대 이상의 타이탄을 동원해서 국지적인 병 력 우세를 노리려고 들 테지.”

“하지만 전하, 여유분의 타이탄이 그렇게 많지 않사옵니다.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언제 또 놈들의 타이탄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이때에 전선에서 타이 탄을 돌린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옵니다.”

“그 때문에 토지에르에게 지시해 뒀어. 내일 근위기사단 파견대가 합류할 것이다.”

공작이 말하는 근위 기사단 파견대라는 것은 정식 명칭으로 유령 기사단 근위대 파견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근위 기사단은 10대의 청기사를 보유 중이었지 만 공식 석상에서 청기사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카프록시아를 근위대에서 넘겨받은 유령 기사단이 그것들을 다시금 황궁에 파견하여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 중 이었다.

“그렇다면 카프록시아를 전선으로 돌리는 것이옵니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잖은가? 그리고 녀석들이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타이탄을 쏟아 부을지 알 수 없으니 나도 가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인원을 좀 더 엄선해서 가장 실력 있는 녀석들만 추려 둬라. 재수 없으면 50대가 모두 다 등장할 수도 있어. 알겠나?”

“예, 전하.”

“오늘과 같은 승리를 한두 번만 더 거두면 남쪽에 주둔 중인 코린트의 타이탄은 전력이 거덜 나게 되어 있어.”

“하지만 전하, 코린트가 추가 병력을 파병할 가능성도 예상해야 하지 않을까요? 크루마와는 전쟁이 끝났는데, 계속 쟈크렌 요새에 대규모 병력을 썩혀 두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들의 실력을 보여 준다면 코린트 쪽에서 먼저 화해를 청해 올 가능성이 커. 본국과 싸운다고 타이탄을 대량으로 소모한다면 그다 음에는 자국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최악의 상황이 온다는 것을 모를 바보들은 아니겠지. 크루마가 아직도 건재한 이상 본국과 사생결단을 하려고 들지는 않을 거 야.”

“그 말씀을 들으니까 힘이 나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래, 격전을 벌이느라고 수고했네. 푹 쉬게나.”

“옛!”

유성 공격에서 신…. 아니 드래곤의 도움으로 쟈크렌 요새가 파괴되는 것을 피한 코린트군은 재빨리 쟈크렌 요새로 돌아왔다. 쟈크렌 요새에는 대타이탄용 방어 병기가 대단히 많은 관계로 적들도 섣불리 덤벼들기 힘든, 그야말로 요새 중의 요새였기에 그걸 크루마 쪽에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쟈크렌 요새에 짐을 푼다고 북적거리던 병사들은 하늘 위로 거대한 붉은 물체가 비상해 오르자 감탄사를 터뜨리며 구경한다고 여념이 없었다. 브로마네스가 그 거대한 덩치를 이끌고 크루마를 향해 출발한 것은 까미유가 고자질을 하고 돌아간 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무슨 일이냐?”

요란하게 경보가 울리는 가운데 허겁지겁 자신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기사를 향해 미네르바가 짜증난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코린트와의 전쟁 이 종료된 상황에서 이렇듯 난리를 피울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예,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사옵니다. 그 레드 드래곤이 이륙한 곳은 쟈코니아 산맥이온데, 그때부터 계속 추적해 본 결과 엘프리안 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이 확실하옵니다.”

“설마? 그 녀석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우연히 엘프리안이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

“예, 그것도 그렇사오나……. 실은 쟈크렌 요새에 떨어지던 유성이 정체불명의 붉은색이 나는 빛줄기에 가로막혀 하늘 위에서 대 폭발을 일으켰사옵니다. 마법사 들의 추측으로는 그것이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드래곤은 쟈크렌 요새 근처에 서식하고 있다고 지도에 기록 되어 있는 포악한 웜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일 가능성이 크옵니다.”

부하의 말에 미네르바는 아연실색했다. 얼마 전까지는 코린트라는 강적하고 아귀다툼을 벌였는데, 그게 무사히 끝나자 이번에는 레드 드래곤?

“뭣이? 그렇다면 자신의 영토 쪽으로 유성이 날아간 것에 대해 그 드래곤이 화가 나 있을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마법사들은 그쪽이 드래곤들의 집 단 서식지인데도 유성 소환 대상지로 선택한 것이지?”

“예? 그건 저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책임 추궁은 드래곤을 막아 내고 난 다음에…….”

“이런 멍청한 녀석! 웜급 레드 드래곤을 무슨 재주로 막아 낸다는 말이냐? 그린레이크를 불러라. 빨리!”

“옛,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레이크가 마법을 이용해서 우아하게도 ‘날아서’ 도착했다. 미네르바나 그린레이크는 둘 다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법사인 그린 레이크보다는 소드 마스터인 미네르바가 한 단계 위였기에 그린레이크는 그녀의 호출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네르바는 슬쩍 그린레이크의 얼굴을 바라봤다가 재빨리 엘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짙은 녹색의 길게 기른 머리카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린레이크의 얼굴은 모든 엘프들이 그러하듯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3백 살이 넘은 나이인 만큼 그 미모는 한 꺼풀 수그러들고 있었지만, 중년의 나이치고는 엄청난 미남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가 문제가 아니라, 그린레이크의 표정이나 그 성격을 미네르바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린레이크는 보통의 엘프 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강력한 힘과 자부심, 그리고 오만한 자신감을 숨기지 않고 표정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다가 자신이 이 세상에 열 명도 존재하지 않는 7사이클급의 대마법사라는 사실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을 만만하게 보는 경향도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미네르바를 어린애 취급했다가 혼찌검이 난 후에는 그래도 미네르바 앞에서는 조심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저 얼굴 표정에 가득히 떠올라 있는 자부심과 자만심 은 미네르바 따위가 자신의 위에 있다는 것이 참기 힘들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를 지긋한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찾았소? 지금 바쁜 일이 있으니 빨리 끝내 주면 좋겠소.”

미네르바는 오만한 말투에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지만 겨우 참았다.

“알겠소, 그린레이크 공작. 본인도 그대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소. 그대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보고를 받았겠지?”

“물론 보고받았소. 레드 드래곤 한 마리가 이리로 날아오고 있다고 하더군.”

“이번에 행해진 유성 소환 마법의 사용 결정은 내가 없을 때 결정된 것이라고 들었소. 그리고 유성 소환 대상지도 마법사들이 일방적으로 정했고 말이오. 내가 잘 못 알고 있는 점이 있소?”

“그대가 알고 있는 그대로요.”

“그런데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왜 드래곤의 영토 주위에 유성 소환을 감행해 가지고 드래곤을, 그것도 웜급에 이르는 강력한 레드 드래곤을 자극했느냐 하는 것 이오.”

“하! 이 바쁜 때에 책임 추궁을 하고 싶은 모양인가 본데, 그렇게도 할 일이 없소?”

그린레이크는 꼭 어린애를 다루듯 간단하게 질책한 후, 미네르바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브로마네스나 그라시안이 간섭해 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었소. 유성이 정확히 쟈크렌 요새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면 그 둘의 영토 경계점이니만큼 녀석들이 간섭할 가능성은 없었소. 하지만 보고들은 바에 의하면 운이 없게도 유성은 브로마네스의 영토 쪽으로 떨어졌다고 하더군. 그래서 브로마네스가 뛰쳐나

온 것이었고 말이오. 물론 유성 소환 마법의 특성상 오차가 아주 크기에 둘 중 한 드래곤은 뛰쳐나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소. 하지만 유성을 브레스로 박살 내 버리고 이쪽으로 올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소.”

오는 말이 별로 곱지 못한 관계로 가는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네르바는 한껏 비꼬는 어조로 그린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호오, 예상을 하고 있었다구? 그렇다면 분노한 레드 드래곤을 막을 방법 또한 생각해 뒀겠군. 엘프리안시에 처져 있는 방어 마법진으로 웜급 레드 드래곤의 브레 스를 막을 수 있소?”

하지만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의 비꼬는 어조를 간단하게 무시했다.

“떨어져 내리는 유성까지 박살 내는 브레스인데, 방어 마법진으로는 물론 막을 수 없지. 대신 그것 때문에 준비해 둔 것이 있소. 진귀한 선물을 한다면 드래곤은 그 깟 일은 간단히 잊어버리고 돌아갈 거외다.”

그린레이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그 기발한 착상에 미네르바는 경악했다.

“뭐야? 도시 하나쯤은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수 있는 유성이 자신의 둥지 주위에 떨어졌는데 그 정도 선물만 받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을 하다니, 당신 제정신이 야?”

“물론 제정신이오.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유성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엄청난 위협이 되겠지만, 드래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게 어떤 타격도 주기 힘들 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그들에게는 아무런 생명의 위험이 없었으니까, 솔직히 사과하고 선물을 준다면 조용히 물러갈 거요. 드래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따위 도시 하나 박살 내는 것보다 선물을 받는 편이 훨씬 더 득일 테니까.”

“젠장! 그렇게 자신 있으면 말리지 않을 테니 좋을 대로 해 보시오!”

“알겠소. 그럼 나는 가 보겠소.”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그 거대한 몸매를 과시하듯 1킬로미터도 안 되는 상공을 유유히 날아왔다. 그는 일단 자신이 파괴하고자 마음먹은 동쪽 대륙에 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도시 엘프리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놓기 위해 엘프리안시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그런 다음 브레스로 잿더미를 만들어 놓 은 후에 다시 한 번 더 돌면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황궁 위쪽을 날아가고 있을 때 자신이 보기 쉽게 매우 큼직하게 써 놓은 글자들을 볼 수 있 었다.

「브로마네스 님을 환영합니다.」

브로마네스는 천천히 고도를 낮춘 후 황궁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어 있는 방어탑들 중의 하나를 골라잡고는 그 위에 내려앉았다. 탑의 상부 구조물이 갑작스런 불청객의 무게 덕분에 허물어졌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브로마네스가 내려서자 엘프 몇 명이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에서 짙은 녹색 머 리카락을 길게 기른 엘프가 정중하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브로마네스를 향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는 티란 엘 그린레이크라고 합니다.”

<크흐흐흐…, 나는 브로마네스라고 한다. 내 방문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은 아닐 텐데, 애써 미소 지을 필요 없다. 그래, 나를 부른 이유는?>

그린레이크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자신 있게 말했다.

“예, 호비트의 도시 하나를 파괴하시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사실상 남는 것 또한 없지 않습니까? 이 도시를 구하고자 하는 대가로는 너무나 약소하 지만 이것을 받아 주시고 이번 일은 용서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원래는 제가 직접 찾아뵙고 사죄를 드렸어야 옳지만, 위대한 분께서 이곳까지 먼저 왕림하셨기에 순서가 약간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린레이크는 뒤쪽에 커다란 상자를 들고 서 있는 엘프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엘프들은 그 자리에 상자를 내려놓은 후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금 은보석 따위로 만든 번쩍거리는 세공품들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드워프가 만든 최고의 예술품들이었다.

사실상 드래곤이란 것은 이미 최강의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기에 힘이 깃든 물건, 즉 마법검이라든지 마법 도구 따위의 선물은 받아 줄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이런 세공품들이라면 매우 좋아할 것이라는 것이 그린레이크의 추측이었다.

브로마네스는 고개를 아래로 한껏 내려서는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자세히 바라본 후 갑자기 고개를 위로 쳐들며 포효를 터뜨렸다. 물론 브로마네스는 그 세 공품들이 탐나기는 했지만, 저 엘프 녀석이 공포에 질리지 않는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쿠오오오오오오오~~~~!>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복종시킨다는 드래곤 로어는 그 굉음을 터뜨린 당사자가 거의 4천 년 이상이나 된 레드 드래곤이었기에 그 파괴력에서부터 엄청났다. 브로마네스를 기점으로 거의 반경 2킬로미터 내의 모든 유리창들이 박살 나 버렸고, 황궁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절해서 넘어졌다. 같이 왔던 두 명의 엘프는 기절해서 넘어졌지만, 그린레이크는 간신히 마법 방어막을 쳤기에 무사히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약간이지만 그 지독한 굉음을 들어야만 했기에 그의 다 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제 상대의 얼굴에 약간 공포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브로마네스의 기분은 슬슬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짐짓 화가 난다 는 듯 외쳤다.

<감히 이따위 물건으로 내 분노를 삭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이 어리석은 녀석아!>

그린레이크는 예상 밖이었지만 그래도 초인적인 노력으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겨우 이 정도의 물건은 마음에 차지 않으실 거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10톤의 황금과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멋진 레어를 하나 선사하겠습니다. 물론 뒤처리는 드워프에게 위탁할 것이구요.”

그린레이크는 이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놀라운 기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10톤의 황금이 가지는 가치도 엄청나겠지만, 황금색으로 도금한 거대한 지하 구조물을 건설하려면 엄청난 돈이 추가로 지불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어를 건설하려면 최소한 1년은 필요했고, 그만큼의 시간은 일단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혹시나 드래곤이 그 새로운 레어로 이사만 가 준다 면, 두 마리의 드래곤 영토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에 엄청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쟈크렌 요새도 그 가치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눈앞에 보이는 이 멍청한 도마뱀의 거처를 어디로 옮길 것인지의 선택권이 자신에게 반쯤은 주어지는 것이다. 이 녀석을 매우 전략적 으로 중요한 곳 주위에 살게 만든다면 천연의 방어 마법진이 되어 줄 것이 아닌가?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레어라고?”

그린레이크가 무슨 생각을 해서 내놓은 의견인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 살고 있는 자신의 주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있던 브로마네스에게 사실상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제안은 없었다. 거기에다가 저 금은보화에 황금 10톤이 추가되는 것이다.

하마터면 브로마네스는 그 제안에 응할 뻔했다. 하지만 지금 답답한 쪽은 자신이 아니었다. 산사태가 나서 레어가 무너져 내린 것도 아니고, 조금 작은 집이지만 아직은 쓸 만한 상태였기에 브로마네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슬쩍 튕기기 시작했다.

<호오, 10톤의 황금에다가 멋진 레어라고? 그렇다면 레어는 어디에다가 지어 줄 생각이냐?>

브로마네스가 약간 구미가 당긴다는 듯 묻자 그린레이크는 손가락으로 엘프리안에서 멀찌감치 보이는 아주 높은 산을 가리키며 재빨리 대답했다.

“저곳이면 어떻겠습니까?”

<흐음…, 하지만 저곳은 이런 대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 시끄럽지 않을까?>

브로마네스가 신중하게 대답하자 그린레이크는 재빨리 얼버무렸다. 만약에 브로마네스를 엘프리안 부근에 거주하게만 만든다면 그것보다 더 이상 좋은 것은 없 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호비트가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저쪽까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또 건설하는 데 재료를 조달하기도 어렵지 않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저 산 에는 크루마의 수호 신전이 있기에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일단 첫 번째 조건에 만족한 브로마네스는 그다음 문제점을 말했다.

<흐음, 레어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 생각이냐?>

이제 상대가 거의 넘어올 것 같자 그린레이크는 더욱 열성을 가지고 말했다.

“그거야 하명해 주시는 대로 성의껏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공사하는 데 1년 정도 걸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분의 입장 에서 보신다면 1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10톤의 황금은 들고 나르기도 힘드니까 새로운 레어가 만들어질 때 그 창고 안에 넣어 두겠습니다.” <흐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라. 겨우 황금 10톤과 레어 따위야 조금 귀찮기는 하겠지만 드워프들을 족친다면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지.>

브로마네스의 말에 그린레이크는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놈의 레드 드래곤은 정말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럼 뭘 더 원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브로마네스는 엘프의 얼굴이 분노로 물드는 것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내가 새로운 레어로 들어갈 때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을 초대하려고 한다. 그를 찾아서 그날 데려와라. 만약 그것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너희들이 1년 안에 레어를 만들든 그러지 못하든 간에, 나는 처음의 계획대로 도시를 박살 내 버릴 테다. 알겠느냐?>

“저, 그렇다면 친구 분의 성함이라도 알려 주셔야 저희들이 손을 쓸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아, 물론 그 정도는 알려 줘야지.>

브로마네스는 그 거대한 날개를 휘저어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초대하고자 하는 녀석은 아르티어스다. 잘 찾아보도록! 크흐흐흐흐.>

성인지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아르티어스’라는 말만 하고 브로마네스는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이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은 성질 이 자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 하지 않은 드래곤이었다.

그런 드래곤을 겨우 호비트나 엘프 따위가 이쪽까지 데려올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브로마네스는 마지막에 내놓은 자신의 조건이 결코 지켜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떠났던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새로운 레어에 입주하는 날, 그 기념으로 엘프리안시를 가루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정말 화려하고도 멋진 장관이었다.

브로마네스가 돌아간 후 그린레이크는 이 ‘아르티어스’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을 찾기 위해 며칠 동안 자료를 뒤졌다. 일단 드래곤이 친구라고 했으니 아르티어스 도 드래곤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A’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골드 드래곤 일족이었다. 드래곤들 중에서 레드 일족과 골드 일족은 매우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그린레이크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 찾아볼 만한 것은 드래곤이 최우선이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없사옵니다, 공작 전하. 혹시 드래곤이 아닌 것이 아닐까요?”

정말 곤혹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흐음, 처음부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렇다면 어디서 찾지?”

바로 이때 그린레이크의 밑에 있던 엘프 중 한 명이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라는 존재에 대해 한 가지 단서를 말했다. 그는 매우 망설이는 것 같았지 만, 그래도 일단 알려 주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았기에 조심스럽게 상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공작 전하. 알려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뭐냐?”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사옵니다.”

“뭐야? 그런데 왜 지금 말하는 것이냐?”

“저는 마법 시료를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 때문에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아르티어스 애가(哀歌)」라는 노래를 아시옵니 까?”

일단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이 나오는 말이었기에 그린레이크는 흥미를 가지고 물어봤다.

“뭐? 그런 노래도 있었나?”

“예, 여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토리오 산맥 주위에서는 흔히들 애창되는 노래이옵니다. 안젤리아나라는 여류 음유 시인이 지은 노래이온데, 교과서에까 지 나올 정도로 그 지방에서는 유명한 노래이옵니다.”

“노래의 내용은?”

“예, 지금부터 한 2천 년쯤 전에 활약한 아르티어스라는 드레곤 슬레이어를 기린 노래이온데…….”

‘2천 년 전’이라는 말에 더 이상 부하의 보고를 들을 마음이 없어진 그린레이크가 노성을 터뜨렸다.

“뭣이? 이 멍충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2천 년 전이라면 살아 있을 사람이 어디 있냐? 백골도 찾기 힘들 텐데 아무리 브로마네스가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든 다고 해도 설마하니 시체를 찾으라고 했겠냐? 사람이건 엘프건 그 외의 또 다른 뭐건 어쨌든 ‘살아 있는’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은 모조리 찾아라. 빨리!”

“옛, 전하.”

“그리고 레어 건설 건에 대해서 드워프들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엘프란 기사단에 연락해서 로투스들을 지원해 달라고 해라.”

“예? 로투스급 타이탄을 어디에다가 사용하실 예정이시옵니까? 그걸 알려 주셔야 몇 대나 지원받을지…….”

로투스급 타이탄은 출력이 0.5밖에 되지 않고, 또 크기도 작았기에 오실롯 왕국이나 라크비에 왕국과의 국경선이 되는 오실라니아 산맥에 모두 다 주둔하고 있었 다. 산악에서 돌아다니는 데는 오히려 덩치 큰 타이탄보다는 로투스 같은 소형의 타이탄이 더욱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런 작은 타이탄은 적의 유격 부대를 상대할 때나 몬스터 사냥 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부하는 그 명령을 궁금하게 여긴 것이다.

“그야 당연히 레어 만드는 토목 작업에 쓸 거지. 열 대 정도 지원받으면 충분할 거다.”

“옛, 전하.”

“그리고 나는 잠시 여행을 갔다 올 테니 그리 알고 있도록!”

“예? 어디로…….”

“너희들은 몰라도 된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