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5화 – 풀줄기와 검의 대결
풀줄기와 검의 대결
밤하늘 저 멀리서 크르르르릉하는 괴수의 포효 소리가 들려오자 죠드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의 이 행동이 같이 모닥불을 쬐고 있는 상대에게 얼마나 실례되는 행동인지를 깨닫고는 쭉 어깨를 폈다. 그의 앞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인물은 오우거(Ogre)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뛰어온다 해도 눈도 깜짝 안 할 강자였기 때문이다.
“이곳이 맞습니까?”
키에리는 상대의 말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며 대답했다.
“흐음…, 내 기억에는 이 근처인데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먼.”
“그때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으음, 그때 코타스하고 만난 것은 정말 운이 좋았었지. 예전에는 리사, 까뮤, 나 이렇게 셋이서 자주 여행을 다녔어. 이 근처를 여행하고 있을 때, 이 일대에 블루 드래곤이 산다는 것을 얻어들을 수 있었지. 그걸 듣고 리사가 드래곤을 한번 보고 싶다고 우기기 시작했지. 그래서 몰래 구경하는 것쯤이야 어떻겠나 싶어서 레어를 찾아간 거야.
하지만 사흘 동안 뒤졌는데도 레어를 찾을 수 없었지. 그 당시 우리들은 그 큰 드래곤이 사는 레어라면 엄청나게 거대한 입구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찾았 지만, 그런 곳은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때 코타스를 만났지. 처음에 그는 우리를 아주 수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았었는데, 나중에는 우리들과 친해졌고 같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어. 나중에야 그는 자신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어떤 괴짜 마법사에게서 수련을 했고, 그와 헤어진 후 이 근처에 처박혀서 마법 시험을 하고 있는 마법사라고 소개했지. 그와 함 께 여행을 하면서 그의 마법 실력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놀라웠지.”
“그렇다면 코타스 전하의 거처에는 가 보시지 않으신 겁니까?”
키에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자신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함께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그대로 여행을 떠났으니까 말일세.”
“그건 참 이상하군요. 일부 고급 마법들의 경우 마나를 절약하기 위해 특별한 시약을 쓰기도 하는데, 그런 시약을 준비하지도 않고 곧장 여행에 따라나서다 니…….”
“허허…, 그렇지 않아. 그는 이미 7사이클의 마스터였는데 뭐가 더 필요해서 시약을 가지고 다니겠나? 검객이 검술을 계속 익히다 보면 나중에는 검이 필요 없는 경지까지 올라가게 되지. 나를 보게나. 몇몇 의례상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잖아. 검이란 것은 덩치도 크고 들고 다니기도 불편하거든.”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전에 전하에게 부상을 입혔던 그 상대를 기억하십니까?”
그 거대한 타이탄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드러났던 소녀의 모습을 키에리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서 고수다운 면모를 찾아볼 수 있었다 면 몰라도 도저히 자신을 이길 거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꼬맹이를 보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키에리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죠드는 재빨리 말했다.
“그렇다면 그 상대가 풀줄기를 들고 싸우고, 전하…, 아니 발렌시아드님이 검을 들고 싸웠다면 결과가 똑같았을까요?”
키에리는 가만히 생각해 봤다. 제법 시간이 지난 만큼 자신과 소녀의 차이를 냉정하게 분석해 본다면 물론 검술 실력이나 마나를 부리는 데 있어 소녀가 한 단계 앞서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그 외형으로 봤을 때 실질적인 파워는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마나로만 구동되는 타이탄에 타고 있었기에 소녀의 그 막강한 실력과 마나가 모두 다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검만을 가지고 싸운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타이탄의 역할을 해 줄 것은 이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가 될 것이고, 그 육체의 성능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이 소녀의 그 나약한 것보다 월등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소녀가 풀줄기를 잡고 있었다면….
키에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글쎄. 그런 식으로 한번 붙어 봐야 확실한 걸 알겠지만, 아마도 내가 이길 확률은 훨씬 더 높아지겠지. 풀줄기로 검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은 상당한 마나가 필요 하니까 말일세.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마법도 그와 같습니다. 시약을 사용했을 때는 마법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심한 경우에는 거의 80퍼센트까지, 보통의 경우 30~50퍼센트의 마나를 절약할 수 있 습니다. 그러니까 7사이클의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 사용되는 마나의 양이 1백만 기간트라라면 50만 기간트라만 가지고도 마법의 구동이 가능하다는 말입 지요.
물론 그런 방식으로 7사이클급 마법사가 8사이클의 마법을 구동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마나가 절약됨으로 인해 한 번 쓸 마법을 두 번 이상 쓸 수 있죠. 그런데 왜 그런 기회를 포기하셨을까요?”
“글쎄? 그건 내가 코타스가 아니니까 알 수가 없군. 나중에 코타스를 찾으면 그에게 물어보게나.”
후방이 든든해지기 시작하자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또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크라레스군의 진격에도 코린트군은 결전을 회피하는 식으로 대처하
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로체스터 총사령관에게 구조 신호를 보낸다면 로체스터 공작은 곧장 휘하 기사단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다리엔 후작의 지휘권을 박탈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후 여태까지의 패전 책임을 물어 다리엔 후작을 즉각 숙청해 버린 후 자신은 기사단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적을 일거에 몰아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로체스터 공작이 승리를 거둔다면 여태껏 지지부진하게 대처했던 다리엔 후작은 물론이고, 다리엔 후작을 지지했던 그로체스 공작의 기반까지 위태 로워질 수 있었다. 아마도 폐하는 그로체스 공작의 퇴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역시 군무(軍務)는 예전처럼 기사들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다시금 생각을 굳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수정 구슬을 통해 들려오는 그로체스 공작의 힐책에 다리엔 후작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예, 공작 전하.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리엔 후작의 모습을 그로체스 공작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자네의 힘에 부치는 것은 아닌가?”
다리엔 후작은 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만약 그로체스 공작의 신임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미래는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니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사온데, 갑자기 10개 사단급의 병력이 새로이 파병되는 바람에 상당한 차질이 왔사옵니다.” 그 말은 예상대로 그로체스 공작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사실 다리엔 후작도 그걸 알아냈을 때 매우 놀라지 않았던가. 그것은 약소국으로 생각되던 크라레스가 투입할 수 있다고 예상한 병력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개 사단이라고? 그렇다면 크라레스가 지금까지 투입한 병력이 거의 20개 사단을 넘어선다는 말인가?”
“송구하지만 그렇사옵니다, 전하. 적이 예상외로 대 병력을 투입하고 있는지라 보급로 차단에 상당한 차질을 겪고 있사옵니다. 크라레스에 갑자기 그렇게 많은 추 가 병력을 증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턱이 없는데도 그 많은 병력이 증파된 것은 아무래도 크루마가 암암리에 뒤를 봐 주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흐음, 크루마 녀석들이?”
“옛, 전하. 크루마는 지금 본국과의 접전을 끝낸 후 병력에 다소 여유가 생기지 않았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이 거느린 본국의 기사단 주력이 쟈크렌 요새에 주둔 하고 있는 이상, 기사단을 빼기는 힘들겠지만 병력을 빼기는 쉬웠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흐음,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불찰이었군.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기사단끼리의 접전에서도 패배를 했다고…….”
“예, 그때 미네르 10대를 잃었사옵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기사의 보고에 따르면 적은 12대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 같사온데, 전멸당한 것으로 보 아 적의 기사단 전력은 소문대로 엄청나게 강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적은 몇 대나 타이탄을 잃었나?”
“예? 여섯 대를 파괴한 것으로 보고받았사옵니다.”
다리엔 후작은 적 타이탄을 단 한 대도 파괴하지 못했다고 보고할 수는 없었기에 살짝, 아니 엄청나게 부풀려서 보고했다. 만약 한 대도 못 부쉈다고 곧이곧대로 보고한다면 공작은 다리엔 후작의 어려움을 인식하기보다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으음, 적이 그렇게도 강하다는 말이냐?”
“예, 적의 타이탄이 두 대 정도 더 있다는 것도 작용을 했사오나, 적의 실력은 예상 밖이었사옵니다. 크라레스 기사단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거의 1백 대가 넘는 타 이탄을 거느리고 있사옵니다. 그에 비해 소신이 지닌 타이탄은 50대가 조금 넘는 실정이옵니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상황 타개가 불가능하오니, 기사단 전력의 충원을 좀 더 부탁드리옵니다.”
그로체스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전쟁 때문에 은십자 기사단의 전력이 감소되었다고 해도, 그 전력의 반이나 줬는데도 크라레스 따위에게 밀리다니. 처음부터 크라레스를 너무 만만 하게 보고 시작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로구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좋다. 내 폐하께 상소하여 좀 더 많은 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해 보겠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다리엔 후작은 그로체스 공작의 모습이 수정 구슬에서 사라진 후 통신을 주관했던 마법사에게 나가 보라고 지시했다. 마법사는 후작에게 인사를 한 후 수정 구슬 을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다리엔 후작은 부하 앞이라서 침착함을 가장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지만 속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로체스 공작의 휘하에 들어간 후 이렇듯 질책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고, 자신이 이렇게 질책을 받게 만든 놈은 그 잘난 은십자 기사단이었다. 어떻게 3류 기사단도 하나 해치우지 못해 파견대 전체가 전멸을 당할 수가 있나? 그러면서 어떻게 대 코린트 제국에서 정예 기사단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가? 다리엔 후작은 허 공에 대고 괴성을 질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저리 같은 놈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분이 덜 풀리는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애꿎은 화병을 집어 던져 버렸다. 꽤 비쌀 것 같은 화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 지만, 다리엔 후작은 소기의 목적인 화를 조금 가라앉히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경비병들이 후작의 방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침입자가 들어온 줄 알고 급히 달려왔을 것이라고 후작은 생각했다.
“아아, 아무 일도 아니다. 물러가라.”
하지만 경비병은 물러가지 않고 문을 살짝 열었다. 후작이 돌아보니 문을 연 인물은 이 성의 성주(城)였다. 그는 살짝 방 안의 풍경을 훑어본 후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하녀가 필요하겠습니다요, 후작 각하.”
그런 성주를 보고 후작은 짜증 어린 목소리로 질책했다.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성주는 미소를 지으면서 넉살 좋게도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서 그렇게 짜증을 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이유가 없어? 군대는 제 몫을 하고 있는데, 기사단이라는 것들이…….?
성주는 실례되는 행동이지만 더 이상 후작이 말을 못 하게 말을 가로챘다. 물론 들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혹시나 일이 잘못 꼬일 수도 있었다. 언제 나 칭찬은 말로 하는 것이 좋지만, 남에게 욕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말로 뱉지 않는 것이 최고였다. 특히 후작과 은십자 기사단들 간에 묘한 갈등이 보이고 있는 이 때는 서로가 조심하는 것이 좋다.
“후작 각하, 오우거 사냥을 해 보셨습니까?”
갑자기 성주가 뜬금없이 몬스터 사냥 얘기를 꺼내자 후작은 성주를 찬찬히 바라봤다. 성주는 비쩍 마른 데다가 별로 볼품없게 생긴 위인이었다. 군인 스타일이라 고 보기도 어렵고 마법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한 번씩 왜 이런 멍충이가 여기 성주로 와 있는지 궁금증이 생길 때도 있었기에, 후작은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후작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성주는 즉시 말을 이었다.
“오우거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혼자서 조용히 돌아다니지요. 그리고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기에 만나기도 정말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 우거를 사냥할 때는 먼저 오우거의 서식 지역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다음 오우거가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서 그놈을 꾀어 들입니다.
오우거는 거의 4미터나 되는 당당한 덩치를 가지고 있기에 혼자서 사냥할 수는 없습니다. 몇십 명이 덤벼도 오히려 사상자만 내고 놓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놈 이 나타날 만한 곳에 함정을 파고, 강력한 활들을 준비해 놓았을 때 녀석이 나타난다면 잡을 수가 있죠.”
다리엔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러니까 자네 말은 크라레스의 기사단하고 우연히 만나기를 바라지 말고 미리 함정을 판 다음 유인하라는 것이냐?”
다리엔 후작의 말에 성주는 질색을 하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후작 각하. 저는 사냥 얘기만 했을 뿐이지요. 사소한 사냥 얘기 안에서 그런 멋진 계책을 찾아내신 것은 각하께서 영민하신 것이지, 소인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내의 말투에서 다리엔 후작은 성주가 상당히 술책에 능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런 인물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자신은 뒤로 빠지면서 딴 사람을 올려 준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은 그 뒤에서 안전하게 진급해 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띄면 당연히 출세는 빠르겠지만, 그만큼 적도 많 이 만들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알겠네, 대신 성공했을 때 내 자네를 잊지 않겠네.”
“제가 뭐 한 게 있습니까? 나중에 높은 권좌에 앉으셨을 때, 저를 잊지나 말아 주십시오.”
“그래서 말인데, 함정 준비를 자네가 해 주겠나?”
“예? 그렇게 중요한 일을 어떻게 제가 감히…….”
“그렇게 자신을 낮출 필요 없네. 그래,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겠나?”
“최소한 2주일은 주셔야 합니다. 대타이탄용 전투 병기들을 옮기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지요.”
“좋아. 모든 준비 작업을 자네에게 일임할 테니 잘해 보게.”
“옛, 후작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