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1화 – 내 아들 어디 갔어!
내 아들 어디 갔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요 근래에 꿈같은 아주 멋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무려 6년 동안에 걸쳐 뻔뻔스런 아들 녀석에게 악질적이고도 강제적인 노동 착취를 당해 오다가 드디어 잠시 동안의 달콤한 휴가를 얻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아들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을 알아챘을 때는 약간의 야속함도 느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잠시’뿐이었다. 아들이 없어진 지금 감히 아르티어스 어르신께 노동을 강요할 만큼 간 큰 놈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며 그동안 부족했던 수면을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보충했다. 그런 후에는 침대에서 잘 꾸며진 정원으로 장소를 옮 겼다. 따뜻한 햇볕을 쬐기도 하고, 햇볕이 따가울 때는 그늘에 들어가서 낮잠을 자거나, 좋아하는 주스나 포도주를 마시며 책을 읽기도 했다. 그로서는 아들이 돌아 옴과 동시에 끝장날 가능성이 농후한, 이 오랜만의 휴가를 정말이지 알뜰하게 즐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이 제발 빨리 돌아오지는 말아야 할 텐데’하던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물가에 애를 놔둔 부모처럼 아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를 색다른 곳에서 아버지가 뭘 하는지도 잊고 여행을 하고 있을 아들 생각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이런 제기랄! 얼마나 좋은 곳에서 놀고 있기에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걱정과 분노로 인해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은 다크가 여행을 떠난 후 12일째 되던 날, 황혼이 깃든 무렵이었다.
원래 보편적으로 흐르는 심리는 나쁜 일은 그냥 모르고 당하는 편이 속편하다는 게 지배적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처럼, 그 일을 당할 것은 분명히 알지만 그것을 당하기 전까지 자신을 억지로 속여 가면서, 남들은 다 당해도 자신은 절대로 그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현실 도피를 하는 것이 정신 건강상 좋으니까 말이 다.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 어르신도 이 휴가의 끝이 언제일지 아예 알아 볼 생각도 안 하고 현실 도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편이 혹시나 내일이라도 아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스릴이 있어서 좋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하루 이틀 계속되면서 스릴보다는 걱정이 점점 커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아들의 행적을 알아 보기로 마음을 바꾼 이상,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일부러 알아 보지 않고 있어서 그렇지, 알려고만 마음먹는다면 아주 간단하게 아들의 행적을 알아낼 요령과 지능 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제일 먼 저 찾은 인물은 치레아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아들의 심복(?)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이었다.
“저어…, 대공 전하께옵서는 폐하로부터 모종의 비밀 임무를 맡으시고 2주일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고 하셨습니다만…….”
아르티어스가 눈을 부라리며 질문을 퍼붓자, 불쌍하게도 다크에게 걸려 팔자에도 없는 오른팔 노릇을 어거지로 하고 있던 카슬레이 백작은 이제 망할 놈의 상관 덕분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재빨리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토해 냈다. 원래 상관을 위하는 부하라면 상대를 적당히 따돌리거나 아니면 대충 거짓말을 하며 둘 러 댈 테지만, 카슬레이 백작으로서는 다크에게 그 정도의 의리를 지킬 이유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눈동자를 희번뜩거리는 것이 카슬레이 백작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종의 비밀 임무? 설마, 그놈의 임무가 무엇인지 대공의 애비인 나한테도 발설하기 힘들다는 것이냐?”
아르티어스의 추궁에 카슬레이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랍 속에 들어 있던 편지를 펼쳐 보이면서 다급히 항변했다.
“그게 아니라, 전하의 서신에 그렇게만 쓰여 있기에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말로만 오른팔일 뿐,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카슬레이 백작이 입에서 거품을 토해 내며 한손으로 흔들어 대는 편지를 힐끗 바라본 아르티어스는 카슬레이 백작의 태도로 보건대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2주일이라 이거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 하다가 아르티어스는 그 2주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생각하며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에구구구…, 휴가가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
처음에 카슬레이 백작을 잡아먹을 듯이 추궁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르티어스는 괜히 알아냈다는 후회감에 젖으며 급히 자신의 휴양지(?)로 돌아왔다. 이제 꿈 과 같이 달콤한 이 휴가가 이틀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면 애비를 마소처럼 부려먹는 그 잔악무도한 아들놈이 ‘짠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앞 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해질 중노동에 대비해서 잠이라도 좀 더 자두는 것이 자신의 장수에 보탬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방에 다시금 꽁 박혀 버린 아르티어스는 5일 동안 아예 방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속된 날 이 지나고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 이틀째는 아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기쁠 뿐이었다. 아들이 예정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그때부터 하루하루가 특별 휴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약속된 기간으로부터 무려 4일이 경과했을 때,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또다시 살기를 가득 품고 카슬레이 백작을 족치러 두 번째 방문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카슬레이 백작에게서 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이번에는 곧장 수도인 크라레인시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쥐어짜면 아들의 행 선지를 토해 낼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몇 명 있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인시는 과거 제1차 제국 전쟁 때 크루마가 감행한 유성 공격에 의해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크로나사 지방을 점령한 크라레스 제국이 그곳을 다시 수도로
정하고 복구 작업을 감행함으로써 다시금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겨우 6년이라는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기에, 대규모의 황궁이라든지 몇몇 주요 건물만이 들어서 있을 뿐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 레인시는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새로운 수도로 선정되었기에 폐허 더미는 신속히 다 치워졌고, 그 위로 넓고 탄탄한 대로가 닦였다. 그리고 새로운 도로망의 주위 곳곳에서 수많은 건물들을 짓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0여 년 후에는 대 제국 크라레스의 수도에 걸맞은 인구와 경제 규모를 갖춘 거대한 도시로 발 전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일단 상대가 매우 부유해 보였기에 경비병은 아주 공손하게 물어 왔다. 아르티어스가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이다 보니 그 옷이 매우 고급이었을 것은 당연했다. 그 렇기에 웬만큼 부유한 상인들도 입기 힘든 최고급 옷을 입은 인물에 대해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불같이 화부터 냈던 아르티어스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비록 치레아 공국에서 는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래도 신분은 대단히 높지 않은가?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대 귀족의 아버지답게 점잖게 미소 지으며 경비병에게 말했 다. 아들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토지에르에게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 찾아왔다고 전해 주게.”
상대가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경비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 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크 라레스 제국 최고의 레벨에 속하는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옛, 급히 기별을 넣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곧이어 경비병의 보고를 받은 기사 몇 명이 뛰어 나와서는 아르티어스를 극진하게 대우하며 토지에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자신의 신분이 아닌 아들의 신분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렇듯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신의 영광보다도 그 아들의 영 광을 더욱 가슴 뿌듯하게 여기지 않던가? 그것도 자신이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아르티어스에게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공손하게 대한 것은 영지에 들어앉아 거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치레아 대공의 위세가 아니라, 과거 황궁에 서 난동을 부린 덕분에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이 기사들의 뇌리에 ‘공포’라는 이름으로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로부터 꽤 오랜 시일이 흘렀기에 경비병들 사이에서 아르티어스란 이름은 잊혀져 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