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13화 – 점령지를 다스리는 고도의 계략
점령지를 다스리는 고도의 계략
“전하, 보고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뭔가?”
“예, 오늘 새벽에 트루비아가 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들었사옵니다.”
베르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트루비아는 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강력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으음, 트루비아? 가만있자……. 트루비아라면 본국에 흡수되었다가 6년 전의 전쟁에서 크라레스의 도움으로 독립한 그 작은 왕국 말인가?”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레티안에게 물었고, 그녀는 언제나 그러하듯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전하. 바로 그 왕국이옵니다.”
“으음, 거기가 맞다면 토리아 왕국을 침공할 여력 따위는 없을 텐데….”
침중한 어조로 말하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베르딘은 확신에 차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벌써 트루비아가 움직인 원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그 점을 수상하게 여기고 조사해 본 결과 6년 전 전쟁에서 크라레스 편에 서서 전투를 벌였고, 그 덕분에 노획물에 대해서 일정량 할당을 받은 모양이옵니 다. 그것을 이용해서 크라레스에서 동맹국에만 판매하고 있는 테리아라는 고성능 타이탄을 몇 대 구입한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사옵니다.”
“추정 수량은?”
“정보에 의하면 5대에서 8대 사이로 추측되옵니다.”
“8대라……. 겨우 그 정도 타이탄만을 가지고 침공할 수 있을 정도로 토리아 왕국은 만만한 국가가 아닐 텐데?”
“예전에는 그랬지요. 6년 전에 본국을 도와준다고 기사단을 파견했다가 10대의 타이탄을 상실한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옵니다. 그리고 테리아라는 타이탄에 대해 서 조사해 본 결과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을 알아냈사옵니다.”
“뭔데 그러나?”
“예, 첩자들의 보고로는 거의 카프록시아급에 맞먹는 파워를 지니고 있다고 하옵니다.”
베르딘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대단히 놀랐다. 카프록시아급이라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근위 타이탄으로 사용하고 있는 타이탄과 같은 성능이었기 때문이다. 그 것을 트루비아가 수입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사실이었다.
“카프록시아급이라고? 카프록시아급이 8대 정도라면 우습게 여길 전력이 절대로 아니지. 그래…, 그 정도라면 약해진 토리아 왕국을 침공할 만도 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베르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사옵니까? 일단은 철십자 기사단에 출동 대기 명령을 내려 두었사옵니다만…….”
아무리 베르딘이 정보부를 통괄하고 있다고 하지만, 기사단을 출동시킬 정도의 권력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각 기사단에 출동 대기를 명령할 권 한은 있었다. 기사단이 출동을 하려면 그 인원이나 장비를 챙겨야 했고, 또 그들이 움직이게 될 마법진도 준비해야 했기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베르딘은 기사단이 투입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판단되면 출동 대기 명령을 내린 후 총사령관에게 보고한다. 그러면 총사령관이 기사 단의 출동을 명령했을 때 그 기사단은 벌써 출동 준비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 안에 그곳에 투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십자 기사단은 제1차 제국 전쟁 후 대대적인 개편이 가해졌다. 코린트는 구형 타이탄을 모두 다 없애 버리고 그것들로 신형 타이탄을 만들었기에 철십자 기사단 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금십자와 은십자 기사단이 정원을 채우게 되자 다시금 편성되어 새로 생산되는 타이탄을 지급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보유 타이탄은 38대였고, 계속해서 한 대씩 아주 천천히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보유 전력이 타이탄 38대라고 하지만 철십자 기사단이 지닌 전력은 과거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모든 타이탄은 현재 코린트의 신형 주력 타이 탄인 미노바-P2형이었기 때문이다. 1.5의 출력을 지니는 이 강력한 타이탄 38대를 토리아 전선에 투입한다면 곧장 결판이 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토리아의 동맹국이 코린트인 것처럼, 트루비아는 크라레스라는 동맹국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다.
“글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동맹국이니까 도와주는 것이 좋겠지만, 이게 상황이 아주 미묘해. 트루비아는 크라레스의 동맹국이란 말이지. 본국에서 기사 단을 투입한다면 크라레스도 군대를 투입할 수 있는 찬스를 가지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 잘못하면 토리아 전선에서 크라레스의 정규 기사단과 일전을 벌여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토리아는 포기하는 것이옵니까?”
베르딘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장시간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기사단을 투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의 생각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그만큼 토리 아 전선에 기사단을 투입하는 것은 미묘한 국제적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결심을 내린 로체스터 공작은 시선을 부하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자네는 그쪽 전쟁터에 첩자를 몇 명 파견해서 혹시나 그 전쟁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관여하고 있는지 철저히 조사해라. 만약 그 녀석들
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라면 그 즉시 병력을 파병하여 응징해야 해. 그러나 이것이 만약 트루비아의 독자적인 움직임이라면 그냥 놔두자구. 괜히 가만히 있는 크 라레스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이지.”
“예, 명령대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로 첩자들이 트루비아를 철저히 조사했지만 크라레스가 그 일에 관여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잡을 수 없었다. 타이탄이 동원된 전투가 벌어진 결과 트루비아가 코린트의 예상보다 2대 많은 12대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이 밝혀졌지만, 거기에 탑승하고 있던 기사는 트루비아인이었고, 또 타이탄 또한 완벽한 트루비아 정규군 소속이었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코린트는 토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을 단순한 국지전 정도로만 판단하고 철십자 기사단에 대한 동원 준비령을 해제해 버렸다.
트루비아는 엄청난 속도로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여 일주일 만에 토리아 왕국의 수도를 점령했고, 토리아 왕국은 트루비아 왕국 토리아령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번 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재빨리 전쟁이 종결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트루비아 왕국이 코린트 제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살아남은 방법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는데, 이것 은 매우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트루비아 왕국은 전 영토가 코린트에 함락되었다고 하더라도 국왕이 살아 있다면 국가가 절대로 멸망하는 것이 아님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얻은 체험을 이번 전쟁에서 십분 활용하여 상대국의 국왕과 그의 가족들을 잡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토리아 기사단을 전멸시킨 후 거의 쉬지도 않고 그 여세를 몰아 수도를 포위했고, 포위 작전과 동시에 수도 함락 작전도 함께 수행되었다. 기사단이 전멸당한 후였 기에 토리아 왕국은 타이탄을 앞세운 트루비아 군대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거의 순식간에 수도가 함락되었기에 왕족과 귀족들이 거의 대부분 생포되었던 것이 다.
왕이나 왕족을 처형했다고 하더라도 국왕의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고 반정부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도 허다했기에, 침공군 사령관인 그라 드 시드미안 후작은 아주 빨리 움직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수도 외곽을 포위했고, 또 국경을 봉쇄했다. 그런 후 철저하게 수색하여 모든 귀족들을 남김없이 잡아들였다. 그리고 여태 껏 모든 점령 국가들이 그래 왔듯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몽땅 다 처형해 버렸다.
“우리가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짓고 있는 것 같구려.”
시드미안의 충고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점령지를 방문한 젊은 국왕은 처형장에 쌓여 있는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며 한 줄기 이슬을 뿜어내듯 말했다.
“전하, 최대한 빨리 점령지를 안정시키려면 이 방법 외에는 없었사옵니다. 하지만 이 피 값은 전하가 아닌 제가 모두 짊어지겠사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일주일 후 에 이곳에 방문하시어 점령지를 피로써 장악하고 있던 저를 총독직에서 파면하시고 다른 인물을 세우시옵소서. 그런 후 선정을 베푼다면 그 전의 억압은 시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것이옵니다.”
“그렇게 된다면 경의 명성에 누가 될 텐데.”
“소신의 하찮은 명성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사옵니다. 하지만 전하의 위치는 절대로 흔들리면 아니 되십니다. 그 점을 명심해 주시옵소서.”
“알겠소. 하지만 그대에게 너무 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구려.”
“소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젊은 왕은 눈물을 머금고 이 우직한 무사의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후 젊은 왕은 외형적으로 봤을 때 시드미안을 ‘숙청’했다. 그의 죄목은 필요 이상 으로 점령지를 탄압했다는 것이었다. 점령지의 주민들은 이 잔인무도한 기사를 숙청한 후 인자하면서도 노련한 인물로 총독을 교체한 젊은 왕을 칭송했다.
원체 지독한 탄압을 받았다가, 살기 좋은 방향으로 풀리자 주민들의 불평은 급속도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와 함께 젊은 왕은 현명한 군주로서 점령지의 주민들에 게 각인되게 된다. 한 충성스런 무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역시 트루비아를 잘 선택한 것 같군. 순식간에 토리아를 점령해 나가는 것을 보니 과연 토지에르 경의 말대로 대단한 저력을 지닌 국가로다. 그가 짐의 곁에서 떠 난 후에야 그의 소중함을 한층 깊이 깨닫게 되는구먼.”
황제의 한탄에 루빈스키 대공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폐하, 그런 말씀은 너무 이르옵니다. 토지에르 경이 죽은 것도 아니고.. 며칠간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제 생사의 고비는 넘겼다고 하지 않사옵니까? 이제 조 만간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폐하의 앞에 나타날 것이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전에 찾아갔을 때, 너무나 안색이 창백하고 초췌하여 그를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겼던 것은 사실이라네. 그대와 토지에르 는 짐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야. 그대도 이번 일을 밑거름 삼아 매사에 조심하게나. 토지에르 경도 소중하지만, 그대를 잃는다면 짐은 도저히 이 나라를 이끌어 나 갈 수 없을 것이야.”
“소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짐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네. 감사할 필요까지는 없지.”
“폐하, 그건 그렇고 트루비아에서는 대사를 파견하여 노획한 타이탄 15대를 테리아로 바꾸고 싶어 하옵니다. 몇 대나 주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잠시 궁리를 하던 황제는 루빈스키에게 되물었다. 원래가 황제의 상담역은 토지에르였지만, 그가 없는 지금 루빈스키에게 상의하고 있는 것이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황제의 물음에 루빈스키는 자신이 부하들과 장시간 상의해서 준비한 대답을 말했다. 토지에르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황제의 상담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7대 정도만 주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10대 정도 주고 싶사오나 그렇게 한다면 누가 봐도 본국에서 트루비아를 지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옵니 다. 이쪽에서도 약간의 이익을 남기면서 판매하는 듯한 인상을 줘야 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좋겠군. 경의 판단대로 하게나.”
“예, 폐하.”
“2단계 작전은 언제 시작할 예정인가?”
“예, 일단 트루비아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난 후 탄벤스 공국(國) 쪽으로 진격시킬 예정이옵니다. 탄벤스 공국이 무너지고 나면 그다음은 리비아나 왕국의 차례가 되겠지요. 그리고 미란 국가 연합에서도 테리아를 수입하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1차분으로 10대를 원하고 있사온데, 그쪽에 납품할 것도 생산하라고 지 시해 뒀사옵니다.”
“미란도 장차 쓸모가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수출해 주게나. 토지에르 경이 자리를 비웠으니, 타이탄 생산에도 차질이 클 거야. 자네가 그쪽에도 신경 좀 써 주게 나.”
“예, 폐하.”
“그건 그렇고 트루비아에서만 전쟁을 벌인다면 코린트가 의심할 가능성도 크지 않을까?”
“예, 그것 때문에 다른 왕국들과도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하지만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이, 그것도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상대로 벌어진다면 코린트가 눈치를 채겠지요. 그 때문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있사옵니다.”
“알겠네. 그건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나. 근위 기사들의 교육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경은 최선을 다하여 코린트가 힘을 키우지 못하게 막아야 할 것이야.”
“옛,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