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15화 – 신의 축복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신의 축복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마리안은 몇몇 친척들만이 초대된 결혼식을 조촐하게 올렸다. 비록 미란 국가 연합의 가므 의장이 예상외로 하객 명단에 올라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신분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간소한 결혼식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도, 또 그 뒤에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긴 결혼식도 축복받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홀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남편인 아리아스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은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다. 결혼 전에 아리아스가 건강이 좋지 않기에 요양을 위해 성장기를 모두 시골 에서 보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신혼여행이 끝난 후 병약한 남편을 따라 시골에 내려가서 고적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순박한 농노들에 의해 경작되는 자그마한 시골 농장, 작기는 하지만 귀족의 품위를 살린 예쁜 집, 그 집의 정원에 꽃을 가꾸고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다 보면 곧이 어 아이들이 생길 것이고, 그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차츰 세월이 흘러가리라. 그리고 그녀의 사랑도 잊혀져 가리라. 이것이 그녀가 세운 미래에 대한 설계였다.

하지만 마리안도 그녀의 아버지도 신혼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통보받고 약간 당황했다. 신혼여행 대신 그녀의 친정집에서 3일 정도 묶게 될 것이라 는 사실을 통보받고, 그녀의 아버지인 크라크 지벨리아 백작은 사위가 딸과 함께 시골로 내려갈 것이기에 서로 만나기도 힘들 테니 이쪽의 사정을 봐준 것이라고 매 우 고마워했다.

그 3일 동안 지벨리아 백작은 결혼 지참금 외에도 혼수품과 딸에게 딸려 보낼 여자 노예를 다섯 명 정도 선발해 뒀다. 그리고 시부모가 될 스와질렌 후작 부처(夫 妻)에게 보내는 혼수품도 최고급으로 장만해 뒀다. 그렇게 해서 사위가 딸과 함께 떠나는 날, 그 혼수품과 노예들을 실은 세 대의 마차가 정원에 대기하게 되었던 것 이다.

“어라? 이건 다 뭡니까?”

사위의 경호원들 중에서 대단한 덩치를 하고 있는 무사가 물어 왔기에 지벨리아 백작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상대가 스와질렌 후작 가문의 사병(私兵)이라고 하지만, 일단 사위를 호위하는 정도의 인물이니 그렇게 높은 신분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하대를 하고 있었다.

“딸아이의 혼수품이네. 왜? 너무 약소한 것 같은가?”

스와질렌 가문이라면 그래도 미란에서는 알아주는 명문이었기에 그는 그 사실이 조금 켕기고 있었다. 사위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가 유산도 막내아들이니 까 사위에게는 돌아갈 몫이 별로 없을 테고,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 봐도 말이 스와질렌 가문이지 그렇게 대단한 사위를 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벨리아 백작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하고 잔머리를 굴려 가며 장만해 둔 혼수여서 약간은 모자라는 감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 대의 대답은 완전히 그의 예상 밖이었다.

“저쪽에 아르티어스 님께서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계십니다. 말이나 마차는 필요 없으니까 마법진이 완성된 후에 짐만 그곳에 옮겨 주십시오.”

마법진이라는 말에 백작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 거창한 방법을 동원하기에 스와질렌 후작이 거처하는 저택까지는 너무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마법진이라고? 스와질렌 저택까지는 채 두 시간이 안 걸리는데 무슨 마법진을……?”

백작의 의문에 그 경호병은 흠칫하며 둘러댔다.

“그 두 시간도 아까우니까 그렇지요. 후작 나으리께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며느리를 만나 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그런가? 알겠네. 내 그렇게 지시하겠네.”

공간 이동 후에야 마리안은 자신의 결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거대한 황궁 한편에 마련된 마법진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경비병들과 노예들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화려한 복장을 한 중년인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넸 고, 그 뒤로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도열하고 서서는 일제히 예를 올렸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남편의 신분이 자신이 상상하고 있던 것보다도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고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마중 나온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황궁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거대하고 웅장한 궁전을 볼 수 있었고, 엄청나 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귀족의 여식이었기에 왕궁에서 거행되는 무도회에는 자주 참석했었다. 그렇기에 가므 의장이 거처하는 왕궁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인파들의 뒤로 보이는 화려한 궁전은 절대로 가므의 왕궁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도대체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마리안은 얼이 빠진 채 남편의 손에 이끌려 황궁으로 걸어가며 그 많은 사람들이 보내오는 인사에 정신없이 답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아찔한 것이 진짜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그녀의 옆에서 팔짱을 끼어 주고 있는 그녀 남편 덕이었다.

삐쩍 마른 샌님 스타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이 나약한 남편은 자그마한 정신적인 힘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그녀는 남편에게 이끌려 붉은 양탄자 위를 정신없이 걸어가서 거대한 홀로 안내되었다. 그 거대한 홀에는 높은 단상이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30대 후반, 많이 봐도 4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묵직해 보이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앉아 있었다.

좌우에서 쑤군거리는 나이 많은 사내들의 속삭임을 통해 그녀는 그가 ‘황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개가 낀 듯 희뿌예진 그녀의 머릿속으로 황제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일 수 있는 군주는 몇 명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코린트, 크루마, 크라레 스, 타이렌 등 정말 엄청난 국력을 지닌 나라들만이 감히 황제라는 칭호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물거리는 시선으로 올려다보니,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홀의 한쪽에 마련된 높직한 단상에 그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그 의자의 좌우에는 거대한 덩치의 타이탄 두 대가 서 있었다. 생김새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남자의 오른쪽에 서 있는 타이탄은 한 손에는 원형의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검을 가지고 당당하 게 서 있었고, 왼편에 서 있는 것은 검집에 넣어 둔 검을 왼손에 들고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언제라도 달려들 것 같은 용맹함을 나타낸다면, 왼쪽의 것은 필요 할 때만 검을 뽑겠다는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과연 황제로서의 모든 위엄과 현명함을 두루 갖춘 일국 황제의 자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저런 황제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온 것을 보면 자신의 남편은 정말 대단한 신분임이 확실했다. 아마도 엄청난 귀족의 자제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실의 가까운 친척인지도 몰랐다. 그런 엄청난 신분의 남자를 오점이 있는 육체와 정신을 지닌 자신이 감히 남편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밝혀진다면 자 신도, 자신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자신의 옛 애인도 모두 다 죽음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는 식은땀까지 흘려 대며 남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이 미덥지 못한 가녀린 남편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을 거라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 았던 것이다. 그런 불안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슬쩍 이끌어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인물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던 것이다.

“아버님…….”

그녀의 귀에는 아버님이라는 말 외의 다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버님이라는 그 말에 그녀의 섬세한 정신은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끊어졌던 것이다. 왕자의 부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여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신의 축복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악마의 장난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의 비밀이 발각되는 날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자매들도, 사랑했던 연인도,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일가친척들까지도…….

“어떻게 된 일인가?”

첫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어왔던 며느리가 갑자기 쓰러지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좌우에 늘어선 중신들이 당황해서 웅성거리는 가운데 황제는 근엄하게 앉아 있다가 황좌에서 허둥지둥 단상 아래로 내려와서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노마법사에게 물었다. 노마법사는 이리저리 살펴본 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예, 몸에 다른 이상은 없으신 것 같사옵니다. 에…, 아마도 뭔가 다른 이유로 혼절하신 것 같사옵니다.”

“이런 변이 있나. 갑자기 며늘아기가 혼절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황제는 여기까지 말한 후 한참 동안 궁리를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렇군! 너는 며늘아기에게 네 신분에 대해서 말해 줬느냐?”

황제의 물음에 아리아스는 머뭇거리다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죄송하옵니다, 아버님. 아직 말하지 못했사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한 황제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쯧…뭐, 지나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 아이를 방으로 옮겨서 간호해 줘라.”

“옛, 폐하.”

시녀들이 기절한 며느리를 엎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둘째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별종으로 놀더니만 며느릿감마저도 별 종을 구한 것 같아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이 왕자라는 것을 안다면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환호할 것이다. 기뻐했으면 기뻐했지, 저렇듯 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기쁜 감정 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절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극소수의 여자가 자신의 며느릿감이 되었느냐 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황제는 짜증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에잉, 며늘아기가 저렇게 되었으니 오늘 환영식은 취소하기로 하지. 모두들 물러가라.”

“옛, 폐하.”

모두들 웅성거리면서 홀의 문을 나서는 가운데 황제는 뒤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하는 한 소녀를 불러 세웠다.

“치레아 경!”

“예?”

소녀가 뒤로 돌아서자 황제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무사히 일을 잘 끝내서 다행이야. 사흘 후에 왕자의 결혼식이 거행될 텐데 와 줄 수 있겠나?”

이미 미란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왕자가 미란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말만으로 중신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혼식은 마리안 의 부모를 위한 결혼식이었을 뿐, 정식으로 황실의 예법에 따른 결혼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아리아스 왕자 내외는 크라레스의 황궁에서 신하들을 모두 모아 놓고 거창한 결혼식을 다시 한 번 더 치를 예정이었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이번에 오랜 시간 나가 있었던 관계로 일이 상당히 많이 밀려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사실상 치레아에서 마법진으로 오면 되니까 몇 시간 정도만 시간을 할애하면 될 것인데도 이렇게 거절하는 것은 다크가 원래 이런데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는 황제를 뒤로하고 문을 나서려던 다크는 다시 뒤로 돌아서며 황제에게 물었다.

“혹시 토지에르 경에게 무슨 일을 시키셨습니까?”

“응? 그…, 그건 왜 묻나?”

갑작스런 다크의 물음에 황제는 당황했다. 다크가 여기에 잡혀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토지에르 때문이었다. 토지에르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 다크가 어 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것을 잘 알기에 황제는 당황한 자신을 숨기며 일단 시간을 끌기 위한 물음을 더듬거리며 던졌다.

“토지에르가 모두 다 모이는 자리에 없었던 적은 오늘이 처음이니까요. 이리로 오기 전에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갔더니 자리에 없다고 하던데요?”

황제는 다크가 토지에르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는데도 그의 행방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신께 감사드렸다. 하지만 일단 감사는 나중이고 빨리 이 곤경 부터 넘기는 것이 중요했다. 황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머리를 급회전시키며 뭔가 둘러댈 말을 지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급조하려니 말이 더듬거려 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 그건 내가 시킨 일이 있어서 아주 멀리 갔다네. 그러니까… 그…, 토지에르 경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비밀스런 일 때문에 아주 멀리… 멀리… 그래, 거기! 알카사스에 가 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가 거기에 가 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코린트나 크루마에서 자객을 보낼 수도 있어. 그러니 자네도 그냥 모른 척해 주게. 알겠나?”

황제의 태도에 다크는 조금 수상쩍은 눈길을 보냈지만, 일단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토지에르가 공무 수행차 알카사스에 갔다는데 뭐라고 반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 폐하.”

“젠장! 끝내는 크루마까지 왔군…..

“이보시오, 그럼 그대들은 크라레스인들이오?”

“아닙니다.”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이오?”

“그건 아실 필요 없습니다.”

“만약 크루마도 아니라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요?”

“그다음 강대국인 크라레스를 뒤져야겠지요.”

노마법사의 의도를 눈치 채고 우두머리는 일부러 확정적으로 말했다. 사실 그들의 모국이 크라레스이니 크라레스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가 말 한 이유는 크루마가 범인일 가능성이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없다면?”

“건너뛰었을지도 모르니 다시 알카사스부터 시작해서 한 바퀴 돈 후에 타이렌 제국으로 넘어가야겠지요.”

“그냥 타이렌 제국으로 안 가고 왜 한 바퀴 돈다는 말이오?”

“타이렌 제국은 본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 암살을 시도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잘못 알고 건너뛰었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하겠지요.” 여기까지 말한 후 우두머리는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나가서 정보를 좀 얻어 와라. 크루마의 키메라 생산을 위한 연구소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아 보란 말이다.”

“옛.”

우두머리는 밖으로 달려 나가는 부하들의 뒷모습을 보며 크루마도 아니라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노마법사부터 정신 마법을 사용해서 그 밑바닥까지 훑어내겠다 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저 영감탱이가 알고 있으면서 능청을 떨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드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