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19화 – 다시 불붙은 제국 전쟁
다시 불붙은 제국 전쟁
이제 바야흐로 탄벤스 공국에서의 전쟁은 당사국인 탄벤스 공국과 트루비아 왕국을 뒷전으로 해 두고,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로 흘러가고 있 었다.
증원부대와 함께 도착한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은 쟈므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에게 상황 보고를 들었다. 대패라고는 하지만 타이탄 전투 직후 적들은 패주하는 쟈므 란 백작의 기사단에 대해 추격전을 펼치지 않았기에, 타이탄 부대의 피해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다. 대신 후퇴하는 타이탄 부대를 뒤따라 재빨리 전장을 이탈하 지 못한 트루비아 정규군이 입은 피해가 막심했던 것이다.
“시드미안 경.”
“예?”
“귀국 군대는 30킬로미터 뒤쪽으로 좀 빼 주십시오. 이제부터 벌어지게 될 전쟁은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를 상대로 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병이나 기병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또, 전쟁 중에 그들까지 신경 쓰면서 싸울 수는 없지요. 이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라테민 백작.”
“예.”
같은 전대장급이라고 해도 그 연륜이나 지위로 봤을 때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나 아르곤이나 코린트의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는 1, 2, 3, 4전대장들은 6년 전 제국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매우 노련하면서도 우수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에 비해 스바시에나 크로나사 서부, 혹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5, 6, 7, 8전대는 제국 전쟁 후에 새로 창설되어 배치된 부대들인 만큼 그 지휘관들은 새로이 지 휘관으로 임명된 신출내기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제국 전쟁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독립 부대의 지휘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어떻소?”
“예, 26대를 잃었습니다. 각하.”
“26대라……. 어려운 전투가 되겠군.”
한참 고심하고 있던 크로아 후작은 시드미안을 향해 말했다.
“시드미안 경,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어쩌면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보유하고 계신 타이탄 전력만으로 군대를 보호할 수 있 으시겠습니까?”
“예, 아직도 10여 대가 남아 있으니 그런대로 충분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경은 기사단과 함께 트루비아군을 보호하는 데 치중하십시오.”
크로아 후작은 노련한 인물답게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적들은 천천히 이동해 오면서 이쪽을 압박해 오고 있었기에 기습 공격을 가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의 주력 부대를 라테민 백작과 쟈므란 백작이 각각 지휘하는 좌, 우익 부대가 적의 서쪽과 동쪽을 맡고, 크로아 후작이 거느리는 주력 부대 가 남쪽을 맡는다. 상대는 매우 천천히 이동해 오고 있으니 기습전(奇襲戰)에 있어서 서로 간의 시간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크로아 후작이 북쪽에 대해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적들이 일단 치고받다가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배려였 다.
다음 날 오후, 새롭게 코린트 파견군의 사령관이 된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은 정찰조로부터 적의 주력 부대가 30킬로미터 전방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접 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 전에 트루비아군이 대패를 했던 전투와 같이 트루비아군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가 10킬로미터쯤 접근해 들어가서 밤을 지새운 다음, 다음 날 아침 무렵에 상호 간에 진형을 갖춰 격전을 치르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확실히 서로의 체면이 걸린 싸움이라서 그런지 매우 신사적으로 싸운단 말씀이야. 전번 전쟁에서는 정규전은 거의 없고, 계속 게릴라전만 펼쳤었는데…….” “후작 각하.”
탄벤스 공국의 전령이 급히 말을 달려오며 크로데인 후작을 찾았다. 그것을 보고 후작의 경호 기사 한 명이 그쪽으로 달려가 그를 후작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무슨 일인가?”
“예, 공왕 전하께옵서 이쯤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진격을 하자고 말씀하셨사옵니다.”
크로데인 후작은 태양을 살짝 바라봤다. 이제 겨우 정오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오늘 저녁에 야영하기로 정한 목적지까지 겨우 17킬로미터 남짓 남았으니 느긋하 게 식사를 하고 행군을 해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을 듯이 생각되었다. 또 내일 아침에 있을 전투를 생각한다면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사와 휴식 이 필요할 것은 분명했다.
“알겠다. 공왕 전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따르겠다고 말씀드려라.”
“옛, 각하.”
탄벤스 군대는 상관의 명령대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나 저녁 식사의 경우 든든한 방어진이 설치되기에 그래도 격식을 갖춘 식사가 장만되어 배급된 다. 하지만 이렇듯 휴식을 겸한 점심때의 식사는 빵과 고기포, 그리고 물만으로 간단히 넘어가게 된다.
적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칠 리 없는 노련한 크로아 후작의 군대는 그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가했다. 서로 간에 진형을 짜고 흰 깃발을 들고 상 대를 설득하거나 엄포를 놓기 위한 전령 따위를 보내야 하는 정식 전투가 아닌 기습 공격인 만큼, 크라레스의 64대나 되는 타이탄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적진을 향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랏! 적 타이탄을 막아라. 탄벤스 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 줘랏!”
크로데인 후작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기사단뿐이었다면 재빨리 적이 공격해 오지 않는 북쪽으로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탄벤스 공국의 군대 와 함께 이동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도망치면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전멸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 공왕이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파견되었던 코린트 기사단과 그 형편없는 기사단을 동맹국에 파견해 준 코린트의 명성은 땅바닥에 패대기쳐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공왕 전하를 피신시켰!”
삼면에서 육박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기병과 보병들이 섞여 우왕좌왕하는 혼란의 극치를 이뤘다. 이 전투에서 크로데인 후작 이 지휘하던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는 탄벤스 공국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지원해 주기 위해 크라레스군과 본의 아니게 사생결단을 벌였다.
하지만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코린트 파견군에게 남은 것은 전력의 반 이상이나 상실한 참패, 그리고 그 혼란의 극치를 이뤘던 전장의 어느 구석에서 어떻게 죽 었는지 모르지만 공왕이 전사했다.
“대패를 했다고 하옵니다.”
베르딘 후작 대신에 로체스터 공작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는 붉게 충혈되어 있는 로체스터 공작의 분노에 타오르는 눈동자와 마주하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뿌드드득’하는 이빨 갈리는 소리와 함께 ‘우지끈하는 로체스터 공작이 앉아 있던 의자 팔걸이가 무의식적인 그의 손아귀 힘에 의해 부서 져 나가는 소리까지 함께 들려오자, 마치 자신이 대패를 당하고 보고하는 당사자가 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새파랗게 질려있는 마법사를 향해 드디어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멍청한 녀석! 그냥 싸우는 척하다가 슬쩍 후퇴하는 것도 못 한단 말이냐? 그 녀석의 목을 당장 잘라 버렷!”
베르딘은 기사단이 대패했다는 그 보고를 접하면 로체스터가 발광 할 것이 분명했기에 슬그머니 부하에게 팔밀이를 했고, 보고서를 대신 들고 온 마법사가 경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듯 화를 내는 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그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말했다.
“전하, 이렇듯 이성을 잃으시면 될 일도 아니 되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로체스터 공작은 그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까미유 쪽으로 돌렸다. 마법사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로체스터 공작의 이 붉게 충혈된 눈은 분노 때문이 아니라 격심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이놈의 전쟁이 벌어진 후에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책 회의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한 것이다. 잠을 못 잔 탓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는 그런 보고가 없었다고 하 더라도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붓고는 불을 당겼으니 로체스터 공작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내가 고정하게 됐어? 탄벤스 공국을 도와주라고 보내면서 꼭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어려운 주문을 한 것도 아니잖아? 상대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 슬쩍 후퇴하는 그것도 못 한다는 말이야? 그러면서 탄벤스 공국의 공왕까지 전사했단 말이다. 이렇게 되면 본국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병신 같은 놈들은 나를 탄핵해 올 것이 분명한데?”
“한 번 실수를 했다고 해서 뛰어난 부하를 죽일 수는 없사옵니다. 일단 사령관 직책의 해임과 동시에 본국으로 소환하시옵소서. 그런 다음 투옥해 놓고 나서 천천 히 그의 처리를 궁리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최대한 억눌렀다. 까미유의 말대로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잘못을 가지고 부하를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
“좋아, 경의 의견대로 처리하기로 하지.”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래, 승리한 후 적의 동태는 어떤가?”
“그것이 이상하게 그 여세를 이용해서 몰아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퇴각했다고 하옵니다.”
“승리한 후에 국경을 넘어 퇴각했다고? 이런 괘씸한 놈들! 자기들만 대승을 거두고 후퇴하면 끝인 줄 알아? 당장 국경을 넘어 추격하여 놈들을 박살 내 버렷!” “전하,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옵니다. 어제도 밤을 새우셨지 않사옵니까? 조금 쉬신 후에 다시금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붉게 충혈된 피로한 눈을 들어 까미유를 바라봤다. 의지가 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탄벤스 공국에서 전쟁이 벌어 진 후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내외의 사정도 어려운 데다가 정적(政敵)들의 모략도 막아야 했고, 또 그들의 모략에 대응할 수 단까지 짜내다 보니 무지막지하게 피로와 짜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고 보냈던 부하가 자신의 믿음을 완전히 배신한 꼴을 연출했으니 그가 이성을 잃은 것도 당연했다.
“경의 말대로 조금 쉬는 것이 좋겠군. 두 시간만 자고 올 테니까 대응할 작전을 구상해 보게.”
“옛, 전하.”
방문을 나서면서 로체스터 공작은 투덜거렸다.
“젠장, 키에리가 존경스럽군. 어떻게 예전에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면서 정적들까지 억눌렀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두 시간 후 로체스터 공작이 아직도 충혈된 눈으로 나타났을 때, 까미유는 결정된 사항을 보고했다.
“일단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지금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적을 막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아마도 은십자 기사단에서 타이탄을 30대 정 도 빼내서 보내 준다면 괜찮겠지요. 그리고 이쯤에서 크라레스와 협상을 통해서 서로 간에 끝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쓸데없이 변방에서 소모전을 펼치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협상이라…….”
“옛, 녀석들도 이번에 대승을 챙겼으니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놈들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 중일 테니 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참, 기사단을 이용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협상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전면 전쟁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놈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올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30대가 아니라 은십자 기사단 전부를 다 집어넣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무력시위는 규모가 클수록 효과 또한 크지 않겠사옵니까?”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좋아, 그건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지. 자네가 협상을 해 주겠나? 자네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군.”
“옛, 전하.”
“고맙네. 자네라면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치하에 까미유는 고개를 수그렸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이제 한 가지 일이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또 다른 일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은 들인 공에 비했을 때 정말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이 다.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뭔가를 확보해야만 했다. 탄벤스에서 잃어버린 타이탄의 보상은 받아 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탄벤스 공국은 이제 주인 없는 나라가 되겠지? 공왕도 전사했고, 막대한 수의 군대와 뛰어난 장군들도 많이 죽어 버렸어. 이 기회에 본국이 탄벤스에 더욱 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향력을 확실하게 행사하시려면 다음 공왕을 우리 쪽 인물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전하.”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좋겠지. 다음 공왕은 누가 될 예정이지?”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서 질문을 하자, 레티안은 잠시 생각을 한 후 답했다.
“예, 여태껏 탄벤스 공국에서 공왕이 선출되었던 전례를 따져 본다면 다음 차례는 아크레니아 가문에서 공왕이 나올 것이옵니다.”
“으음…, 하지만 정식적으로 공왕이 선출된다면 이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힘들어. 탄벤스 공국의 경우 공왕이 되기 위해서는 30세가 넘어야만 한다는 조건 이 있지 않던가? 그 정도 나이라면 자신의 주관이 벌써 정립되어 있는 나이니까 조종하기 힘들지. 어떻게 한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로체스터는 의자의 손잡이를 탁하고 치면서 말했다.
“참, 이번에 전사한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에게는 혈족이 없나? 그놈을 왕위에 올린다면 명분도 설 것이고, 이용해 먹기도 편할 텐데 말이야.”
두 번째 질문에도 레티안은 곧이어 대답을 했다. 정말 엄청난 암기력이었다.
“예, 있사옵니다.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사온데, 그 장자(長)의 나이는 이제 열세 살이 된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열세 살이라……. 이용하기에 꼭 좋은 나이로군. 안 그런가, 까미유?”
“그렇사옵니다, 전하.”
까미유도 찬성하는 것을 보며, 레티안은 방금 떠오른 계략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전쟁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뛰어난 중신들도 많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탄벤스 공국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이번 전쟁에서 탄벤스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사옵니다. 이것을 기회로 탄벤스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군대를 한 5개 사단쯤 파병하여 완전히 틀어쥐는 것이옵니다. 그런 다음 꼭두각시 왕을 한 명 세운 후 귀족들을 차례로 숙청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본국의 속국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레티안의 조언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군. 그런 다음 그 어린 왕까지 없애 버린 후 아예 본국의 공국(公國)으로 편입시키면 아주 재미있어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다른 나라들의 비난을 사 지 않을까? 동맹국을 집어삼켰다고 말이지.”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을 세우고, 충신들을 차례차례 없애 나간다면 탄벤스는 머지않아 완전히 무법 지대가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가 나중에 일거에 그들을 쓸어버리면서 전면에 나서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어린 공왕은 폐위시키고 누구 한 사람에게 권해서 두 번
째 꼭두각시 공왕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 후 그 공왕을 협박해서 짐은 혼자서 왕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코린트의 품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노라’하고 선언하게 만들면 되옵니다. 그놈에 게 대공의 작위를 내린다면 그다음부터 탄벤스는 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좋겠군. 그게 좋겠어. 탄벤스를 본국의 영토로 흡수할 수 있다면 이번의 실패를 만회하기에 충분하겠지. 입만 살아 있는 그놈들도 군소리를 하지는 못할 거야. 안 그런가?”
“그럴 것이옵니다, 전하.”
협상을 해 보자는 코린트의 제안은 크라레스에 의해 즉각 받아들여졌다. 크라레스 쪽의 입장으로 봤을 때 탄벤스 전선의 마지막을 대승으로 장식했기에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대 승리를 통해 설사 적이 코린트라고 하더라도 동맹국을 위해서는 검을 뽑아 들고 맞서 싸워 주는 의리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에서 상실했던 타이탄을 보충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노획품도 챙겼던 것이다.
코린트에서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 협상 책임자로 나온다는 것을 통보받고 크라레스에서는 그와 격을 맞추기 위해서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을 그 상대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협상 장소는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 선택되었다.
“오랜만에 뵙는구려, 크로데인 후작.”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6년 만인가요?”
“허헛,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려. 그대를 볼 때마다 그대와 같은 훌륭한 후진들을 거느리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이 부럽소이다.”
“과찬이십니다.”
이렇듯 양국의 대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상 이번에 양국이 갈등을 겪게 된 것이 동맹국에 대한 파병 때문이었기에 이런 분위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현안들을 차근차근 의논하며 해결해 나갈 생각이었다. 설혹 양보를 해서 땅덩어리 하나를 상대국에게 떼 준다고 해도 그건 자국 의 영토가 아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기에 가지게 되는 느긋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이번 회의가 어떻게 결론지어질지 지켜보는 동맹국들이 있었다. 회의에서 강한 쪽이 좀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것이고, 약한 쪽이 보다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번 회의의 결과에 따라 누가 강자인지, 또는 약자인지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 얻어 내게 되는 것에 대한 혜 택이나 손해는 고스란히 동맹국인 트루비아 왕국이나 탄벤스 공국이 책임지게 된다. 그 때문에 자국의 동맹국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 주는 국가’인가가 이 한판의 회담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한판 대결을 이 좁디좁은 탁자 위에서 벌이게 된 것이다. 서로가 뒤에서 지켜보는 눈들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루빈스키 대공과 까미유 후작의 입씨름은 며칠에 걸쳐 매우 지루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까미유와 루빈스키가 평화 협상을 하고 있는 동안 코린트의 군대는 마법진을 통해서 탄벤스 공국에 입성했다. 육로를 통해 발렌시아드 공국을 경유하여 트 레보크 산맥을 넘어서 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게 된다. 로체스터 공작의 계획은 비어 있는 공왕의 자리에 새로운 공왕이 앉기 전에 코린트의 군대가 탄벤스를 장악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5개 사단, 즉 5만 명에 해당하는 방대한 병력과 은십자 기사단 전부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은십자 기사단장인 투르넨 후작은, 6년 전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코린트 남부 전선의 부사령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휘자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행동이 인정되어 아직까지도 그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투르넨 후작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던 가가린 후작은 직접 마중 나가 새로운 사령관을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령관 각하!”
“그래, 수고했네. 알프레드는 어디에 있나?”
“예, 부단장 각하께서는 지금 사택에 연금되어 계십니다.”
가가린 후작의 보고에 투르넨 후작은 역정을 냈다.
“그런 멍청한 놈에게 부단장이라는 직함을 붙이지 말게! 그놈의 직위는 박탈되었으니까 말이야.”
“옛, 죄송합니다, 각하.”
“어떻게 부단장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전에 있었던 칸테로마도 그랬고, 이번에는 알프레드까지. 젠장!”
화부터 내는 투르넨 후작을 보고 송구한 듯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가가린 후작에게 투르넨 후작은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자네가 부단장이었다면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을 텐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각하.”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지금 은십자 기사단에는 부단장이 없으니 자네가 부사령관의 직책을 맡아 주겠나?”
“영광입니다, 각하.”
“고맙구먼. 자네는 마법진을 통해 이동해 오는 병사들이 도착하는 대로 즉각 곳곳에 투입하여 우선적으로 수도를 장악하라.”
“옛.”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 사령관은 어디 있나?”
투르넨 후작은 일단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탄벤스 공국의 수도 방위군을 딴 곳으로 따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괜히 양쪽의 무력이 한 장소에 집결해 있
다가 잘못하면 칼부림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런 칼부림이 일어나게 되면 탄벤스의 동맹국으로서 이곳에 와 있는 코린트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방위군 사령관을 타일러서 수도가 아닌 딴 곳으로 보내 버리려는 계획이었다.
가가린 후작은 투르넨 후작이 묻는 의도를 알지 못해서 다소 장황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가린 후작은 아직까지 충실한 젊은 야전 군인이었을 뿐, 정치적인 의도 따위나 모략, 술수 따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충성을 다하고 있는 기사도의 나라 코린트가 동맹국을 꿀꺼덕 집어삼키려고 술수를 부리고 있는 줄 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 각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전방으로 보냈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옵서 다거스 후작을 방위군과 함께 전방으로 보내어 본국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까 지 적의 발목을 잡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상세히 설명했더니 다거스 후작은 수도 방위군 1개 사단을 이끌고 전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며칠 후 본국 군대의 도착이 완료되면 그들과 위치 교대를 하면 될 것입니다.”
가가린 후작의 말에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린 후작이 매우 일처리를 매끄럽게 해 뒀던 것이다.
“좋아, 수도 방위군이 빠져나간 빈 자리를 본국의 군대가 메운다. 공왕이 없는 때를 틈타 불순분자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수도를 확실하게 장악해야 한다. 자, 빨리 빨리 움직이게나.”
“옛, 각하.”
부하들을 이끌고 분주하게 달려가는 가가린 후작의 뒷모습을 보며 투르넨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까지 빠져나가고 없다면 일은 더욱 손쉽게 진행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 탄벤스의 수도를 장악한 후, 철없는 꼬맹이를 왕위에 올리는 일만 남았다. 물론 그 전에 반대 세력부터 없애 버려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