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24화 – 해골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사나이

해골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사나이

아르곤 제국의 저 깊은 밀실에서 주교들의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인물은 20여 명. 이들이 현재 아르곤의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물론 아 르곤 제국에는 교황이라는 최고 지도자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유명무실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이 주교들이 꼭 쥐고 있었다.

주교들이 교황을 제치고 모든 권력을 쥐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아르곤이 종교 국가가 되었을 때는 성기사의 권력도 엄청났었다. 원래가 성기사는 전쟁이 벌어지면 최전선에 나가서 싸워야만 하는 존재들인 만큼, 내전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과도기를 거쳐 온 이상 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중앙의 전쟁터에서 패배한 무리들을 뒤쫓아 저 변방에서 잔당들을 소탕한다고 분주할 무렵, 전쟁을 할 줄 모르기에 수도에 교황과 함께 남게 된 주교들은 권력이라는 금단의 사과가 가져다주는 단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주교들은 전쟁 때는 꼭 필요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냥 없는 듯이 숨어 있는 편이 좋은 성기사들에게 종교의 교리를 들어 고행과 순종, 그리고 인내를 강요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을 수련이나 하게 만들어 놓고 보니 매우 다루기도 편할뿐더러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아주 큰 보탬이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황이 죽자,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 선대 교황의 유언에 따라 그다음 교황은 성기사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 선택의 기준이 문제였다. 이미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던, 주교들의 집합체인 주교원은 패기만만한 교황이 선출되어 자신들의 권력을 뺏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교황 을 실력이 아닌,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장 순종적이고 인내심 강하고, 또 신앙심이 깊은 인물로 선택해 버렸다.

이게 몇 대를 이어 오다 보니, 자연히 교황의 권력은 더욱 축소되었다. 물론 교황의 권력은 아르곤에서는 거의 신에 필적할 정도로 막강했다. 다만 그것을 쓰지 않 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쓰지 않는 것은 쓰지 못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듯 주교원이 아르곤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형제들, 코린트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동맹군을 청하더군요.”

“코린트가 왜 동맹군을 청한다는 것입니까? 코린트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데 말입니다.”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형제. 사신의 말로는 크라레스가 너무나도 강력하기에 구원을 청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럴 수가……. 크라레스는 이제 갓 태어난 신흥 강국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코린트와 겨룰 힘이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 말이오. 오늘 코린트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오.”

그 말에 모두들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부터 코린트는 탄벤스를, 크라레스는 트루비아를 도우면서 그곳 국경에서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형제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얼마 전 그 둘이 평화협정을 한다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전투가 확대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크라레스의 기사단 일부가 탄벤스에 주둔 중이던 코린트의 기사단 을 기습하여 전멸시켰다고 하더군요.”

“기습을 당한 것을 보면 파견되었던 기사단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제가 전해 듣기로는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 전체였습니다, 형제.”

상상외로 규모가 큰 대 부대가 전멸당했다는 것을 알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둘을 합치면 타이탄만 130대가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스는 신흥 강국으로서 자기들의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습니다. 코린트와 크루마 간의 전쟁에 편승하여 국토를 엄청나게 넓히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치 레아를 기지로, 알카사스와 아르곤의 중개 무역을 하여 막대한 재화를 긁어모으고 있지요. 거기에다가 치레아의 대공이라는 작자는 일개 공국의 주인인 주제에 크 라레스를 등에 업고 뻣뻣하게 나오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기회에 물을 흐리고 있는 그 미꾸라지를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치레아를 차지하고 앉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은 처음 총독 자리에 앉았을 때는 아르곤과의 충돌을 될 수 있으면 피했다. 하지만 6년 전 전쟁이 끝난 후 치레아 대 공으로 임명되고 나자 간덩이가 커지기 시작해서 충돌을 회피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아예 한판 벌이자는 듯 시비까지 걸어 오고 있었다.

과거 치레아 왕국과 스바시에 왕국은 동쪽의 아르곤 등의 국가들과 서쪽의 알카사스 등의 국가들의 중개 무역을 행했다. 그렇기에 이 두 국가는 그 왕성한 상업 활 동을 통해 부를 축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옛날 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상식이 통했던 시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운업을 발달시킴으로 인해 싼 운송료로 승부했 을 뿐, 상대국에 부당한 불이익을 줘서 강제적으로 틀어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치레아가 공국으로 탈바꿈한 후, 치레아 공국은 말토리오 산맥의 연장선상인 미르시엔 열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점을 내세웠고, 그 점을 이용하여 그 일 대의 모든 해상 통로들을 영토로 선포했다. 그런 다음 타국의 선박들에 대해 거액의 통행세를 요구했던 것이다. 통행세를 내기 싫으면 저 멀리 미르시엔 열도를 돌 아서 이동하든지 아니면 통행세를 내고 열도를 통과해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는 치레아나 스바시에 상선들과 운송 단가 면에서 그야말로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다.

아르곤에서는 이것을 몇 번이나 항의했지만, 치레아 대공이란 자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치레아나 스바시에의 상선들에게 보복 통행세를 물리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르곤의 내륙에서 나오거나 들어갈 화물들이 운송료가 비싼 해로를 통하지 않고 치레아와 아르곤을 가로막고 있는 말토리오 산맥 끝자락의 산세(山勢)가 비교적 약한 육로를 통해서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르곤 내륙의 수출품들의 경우 과거에는 아르곤의 항구들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선박을 통해 치레아를 거쳐 서쪽으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그 역 방향으로 수입품이 배급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르곤의 동남부의 경우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운송되고 있었지만, 북서 내륙 지방의 운송로는 많은 변화가 생겨 버렸다. 그것들은 곧 장 육로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말토리오 산맥을 넘어 치레아로 보내진다. 그런 다음 치레아에서 해로로 서쪽으로 수출되는 것이다.

이래저래 치레아의 해운업만 발전해 가는 구도로 되어 가고 있었다. 협박이나 항의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아르곤의 주교원은 점점 불만이 쌓여 가고 있는 중 이었다. 그러다가 치레아가 말토리오 산맥을 가로지르는 대로에다가 세 개의 작은 요새를 건설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타이탄 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요새를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해 볼 테면 나중에 한번 해 보자 하는 무언의 선전 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형제들! 전능하신 신을 받드는 우리들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끌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치레아는 크로노스교에 대해 예로부터 나쁜 감정이 없는 국가입니다. 로니에 사제가 그곳에서 중책을 맡고 있지 않던가요? 그를 통해서 잘 타협해 보면… 하지만 그런 평화적인 의견은 간단하게 묵살되어 버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지금 치레아에는 다섯 명의 형제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빈민 구제나 뭐 그런 권력과는 무관한 쪽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크로노스교를 인정하는 듯하지만, 보이지 않게 탄압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몇십 년이 더 지나더라도 치레아는 나아질 것이 없을 겁니다. 처음에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발톱을 숨기고 있더니, 지금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있어요. 이건 그자가 그만큼 본국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표결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설왕설래해 봐야 귀중한 시간만 흐를 뿐이지요.”

모두들 그것이 좋겠다고 했기에 곧이어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전쟁이었다. 원래가 구세력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잃기를 원하지 않 는다. 그것 때문에 신진 세력이 성장하기 힘이 들듯, 신생국도 마찬가지였다. 신생국이 편안하게 성장하도록 기존의 대국들은 그냥 묵인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눈에 들어온 가시마냥 뽑아내려고 안달이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니까.

“일단 전쟁은 해야겠지만, 이 기회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어 내야만 합니다. 치레아를 전리품으로 얻어 내든지,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미르시엔 열도라도 받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국가에 크로노스교를 전파할 수 있는 권리도 얻어 내야 합니다. 코린트는 그것을 약속해 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코린트의 최신형은 안 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로 강력한 엑스시온부터는 본국에서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내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토의가 오고 갔다. 원래가 대규모로 전쟁이 벌어지고 나면 각국의 세력 구도가 많이 바뀌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아르곤은 이번 전쟁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 판도를 더욱 넓힐 심산이었다.

두터운 해골 모양을 한 특수한 재질의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이 로체스터 공작과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공작이 자리를 잠시 비운 지 세 시간 후의 일이었다. 모 두들 수상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코린트의 용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따르면 지금 현재 그에게 부하가 한 명도 없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대륙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유명한 용병들이나 용병 기사들을 모집하여 그의 지휘 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여러 유명한 용병대에 그들을 고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발표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쯤에 용병들을 대량으 로 모집하는 경우는 비일비재(非非再)했기에 부하들은 공작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크라레스 쪽에서 허겁지겁 사신이 와서 협상을 다시 시작할 것을 원한다는 부하의 보고가 들려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상대의 꿍꿍이를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기에 한동안 궁리를 하다가 일주일 후에 협상을 재개하자고 통보했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저 비열한 크라레스를 상대로 일주일 후에 협상을 다시 시작 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상대가 먼저 이쪽의 코털을 건드린 만큼, 놈들의 속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먼저 기습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그 준비가 갖춰지는 것은 용병대가 모이는 때가 아닌, 크루마, 알카사스, 아르곤이 방향을 정했을 때가 될 것이다.

코린트가 이렇듯 이빨을 갈면서 회심의 카운터펀치를 준비하는 줄도 모르고 크라레스의 황궁에서는 조촐한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오늘의 승전을 축하하는 황제와 루빈스키 대공 둘만의 작은 파티였다. 황제는 포도주를 루빈스키의 잔에 가득 따라주며 말했다.

“그쪽에서 회답이 왔네. 일주일 후, 전에 그곳에서 다시 회담을 하자고 하더군.”

“그래도 다행이옵니다, 폐하. 상대가 섣불리 행동에 옮기지 않고 회담에 응해 준 것은 아주 잘된 일이라고 봐야 하겠사옵니다.”

“허허헛, 그것은 벌써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 앞을 바라보는 토지에르 경의 안목이 옳았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놈들이 섣불리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습 전을 감행하다가 들켜 버렸기 때문일 것이야. 자신들의 추잡한 행동이 발각된 데다가, 기습 부대마저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 이래저래 그들로서는 화해에 응하는 길밖에 없겠지.”

황제가 미소를 띠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보면서 루빈스키는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말했다. 상대의 피해가 작다면 모르겠지만, 치레아 대공은 너무 일을 크게 벌 여 놓았던 것이다. 상대방 기사단을 완전히 박살을 내놨다는 호기스러운 보고를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레아 대공의 보고로는 은십자 기사단을 거의 전멸시켰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상대에게 너무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옵니다.”

“하하핫, 그런 걱정 하지 말게나. 예로부터 강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지. 이쪽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줬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치레아 대공이 기대 이상 의 활약을 해 준 것이 고마울 뿐이지……. 녀석들이 회담에 응한 이상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전하, 그때 회담 장소에서 이쪽의 행동을 보고받던 크로데인 후작의 행동으로 봤을 때, 그는 이쪽을 불시에 기습하려다가 도리어 기습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사옵니다. 아무래도 너무 성급한 행동이 아니었나 하는…..”

“허허헛,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놈들이 병사들까지 대규모로 무리해서 이동시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습을 하려 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런 기밀사항의 경우 될 수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 회담장에 나가는 크로데인 후작에게 그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황제는 포도주를 쭉 들이켠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자네는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이야. 협상 때 이쪽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할지, 또 놈들이 어떤 조건을 제시해 올 지그런 것도 예상을 해 둬야 하지 않겠나? 아마도 놈들이 일주일이라는 시간 여유를 둔 것도 다 그 때문이겠지.”

“옛,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