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움직였다고 하옵니다

“루빈스키 경은 어떻게 되었는가?”

황제의 물음에 다론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려운 고비는 넘기셨사오나, 출혈이 너무 심했기에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코린트 녀석들……. 협상을 하자고 해 놓고 기습을 가해 오다니.”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황제는 울분을 가라앉히며 외쳤다. 토지에르가 당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자신의 가장 아끼던 부하가 치명상을 입고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슬퍼할 여유조차 없 었다. 지금 크라레스는 멸망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로 최고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황제에게는 희망이란 단어가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치레아 대공이라는 마지막 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잇, 망할 자식들! 치레아 대공을 불러들여라.”

“이미 대공 전하께는 기별을 드렸사옵니다. 머지않아 도착하실 것이옵니다.”

분노를 참지 못해 씨근거리고 있는 황제를 향해 안티노스 후작이 채근했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운 때였다.

적은 정면 공격을 감행해 오고 있었고, 방어선은 깨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크라레스에게 있어서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전하, 적들은 지금 세 곳에서 물밀듯이 진격해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지금 남은 기사단은 얼마나 되는가?”

“옛, 스바시에 기사단, 치레아 기사단, 그리고 치레아에 주둔 중인 제5전대이옵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단 하루 만에 본국 전력의 태반이 날아가다니…….”

황제가 머리를 감싸 쥐고 고뇌에 차 있을 때 경비병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서 오시오, 치레아 경.”

“별로 안녕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폐하.”

다크의 인사에 황제는 메마른 웃음을 기운 없이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허허허…, 뭐 그렇지. 알카사스와 아르곤이 코린트와 손을 잡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짐의 실책이야. 경이 짐을 좀 도와주겠나?”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안티노스 경, 치레아 경에게 설명을 부탁하네.”

“옛, 폐하. 전하, 지금 적들은 세 곳에서 맹렬하게 진격 중이옵니다. 북쪽의 코린트군은 제3, 4전대를 간단히 박살 내고 수도를 향해 맹진격해 들어오고 있사옵니 다. 서쪽의 알카사스군은 제6전대가 막고 있사오나 아마 그렇게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그리고 동쪽은 제1, 2전대가 사력을 다해 아르곤군을 저지하고 있 사온데, 지금 현재는 세 곳 전선들 중에서 가장 안정된 방어를 유지하고 있사옵니다.”

“흐음…, 그렇다면 내가 제일 먼저 갈 곳은 북쪽이군.”

“예, 전하. 코린트군만 막아 내시면 될 것이옵니다. 이미 수도에 스바시에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기사단들을 불러들였사옵니다. 그들을 지휘하신다면….

“아니, 치레아 기사단만 거느리고 가겠다. 남은 기사단들은 경이 알아서 딴 곳에 투입하도록!”

“예? 금십자 기사단이나 코란 근위 기사단은 무시하지 못할 적들이옵니다. 아무래도 치레아 기사단만 거느리시고는…….”

“아아,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그럼 폐하, 저는 지금 전선으로 가 보겠사옵니다.”

“수고해 주게나.”

황제는 뒤돌아서서 당당히 걸어 나가는 다크의 가녀린 어깨가 그날따라 웬일인지 아주 듬직해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약간 기운을 차린 황제는 안티노스를 향해 말했다.

“동맹국들에게 사신을 보내라. 구원병을 보내 달라고 말이야.”

“폐하, 소신이 이미 보냈사옵니다.”

“오오, 그래. 잘했군 원군이 도착하고 난 후에 놈들에게 맛을 보여 줘야겠어. 그때쯤이면 치레아 대공에 의해 전세도 어느 정도 안정된 후겠지.”

“고양이가 움직였다고 하옵니다.”

레티안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경악했다. 자신이 가장 우려하고 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치레아 대공은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 에 있는 드래곤 때문에 정면 승부를 벌여 없애 버리기도 난처한 그야말로 최악의 우환덩어리였던 것이다.

“뭣이?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

“금십자 기사단이 있는 곳이옵니다.”

“프레드 드 알페레인 후작에게 지금 있는 그 지역에서 마법진을 이용하여 최대한 빨리 이탈하라고 지시하랏!”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이 통신실로 달려 나간 후 이제야 약간의 여유가 생긴 탓인지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이동이 최악의 변수였다. 하지만 그걸 잘 뒤집으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상대하기에 문제가 있는 적은 무조건 회피한다. 그녀 외의 딴 녀석들은 철저히 해치운다. 크라레스 제국이 그녀 혼자만의 제국이 아닌 만큼 딴 놈들을 다 해치우면 그 제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로체스터 공작은 큰 소리로 레티안을 불렀다. 통신실은 로체스터가 있는 천막의 바로 옆에 있는 천막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레티안은 곧이어 달려왔다.

“금십자 기사단에게 전해라. 근거리 공간 이동에 성공했으면, 장거리 이동 준비를 해서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스바시에 공국의 수도를 기습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근위기사단에 출동 준비를 명해라. 또 마법사들에게 크라레인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장거리 이동용 마법진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빨리!”

“예, 전하.”

레티안이 공작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보며, 해골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용병대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도를 기습할 건가?”

“당연하지. 벼룩은 고양이가 곧이어 금십자 기사단으로 공간 이동할 것이라고 보고했어. 그렇다면 곧이어 수도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될 테고, 놈들의 근위 기사 단이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을 거야. 그녀만 없다면 크라레스의 기사단 따위, 하루아침 해장거리도 안 되지.”

“그럴 만한 시간 여유가 있을까? 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때는 곧장 도망쳐야 하겠지만…, 시간 여유는 충분할 거야. 고양이는 금십자 기사단이 쟈드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곧이어 받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 녀는 또다시 쟈드시를 향해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해. 그리고 그때를 이용해서 우리는 크라레인시를 박살 내는 거야. 후퇴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갖춰 놓고 말이 “야.”

서둘러서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다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빈 벌판과 수풀, 그리고 반쯤 박살 나서 불타오르고 있는 작은 요새 하나뿐이었다. “여기 어디에 적의 기사단이 있다는 거지?”

공작의 물음에 마법사는 당황해서 외쳤다. 자신이 이동할 좌표를 잘못 알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여기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 보겠사옵니다, 전하.”

“좋아. 자네는 수도에 연락해 봐. 그리고 팔시온, 너는 미카엘과 함께 요새에 가서 적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 봐.”

“알았어!”

어이없게도 목표물을 찾지 못해서 허둥대고 있는 다크를 위해, 팔시온은 미카엘과 함께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이곳으로 올 때 말은 아예 가져오지 않았기에 그들 은 전속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팔시온이 미카엘과 함께 떠난 직후 마법사가 외쳤다.

“수도에 확인해 본 결과 여기가 맞다고 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팔시온이 뭔가 정보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크는 주위를 빙 둘러본 후 자신이 걸터앉기에 알맞아 보이는 돌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서는 걸터앉았다. 그녀가 거느리고 온 대원은 마법 사 둘과 기사 20명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최소의 인원만을 이끌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왔던 것이다. 여분의 인원들이나 보급품들을 모두 다 수도에 남겨 두고 왔기 에 식사 한 끼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나 빨리 이곳으로 왔는데도 상대가 없다는 것이 못내 석연찮았다. 저 요새의 상태를 보면 놈들은 얼마 전까지 저 요새를 신나게 박살 내고 있었던 듯한 데…….

다크가 초조하게 팔시온과 미카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로체스터 공작과 그의 패거리들은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인 크라레인시에서 10킬로미터도 떨 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쳤다. 로체스터 공작은 위급할 때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이동용 마법진부터 갖춰 놓은 후 금십자 기사단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쪽의 공격은 금십자 기사단이 공격을 시작한 후 조금 있다가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로체스터의 공격대가 수도를 박살 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크는 이리 저리 딴 생각들을 하면서 팔시온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무장하 고 요새를 공격 중인 금십자 기사단 가까이에 타이탄 없이 공간 이동할 수는 없었기에, 다크의 공격대는 타이탄을 꺼낼 시간을 벌기 위해서 요새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에 도착했었다. 그 때문에 팔시온 일행이 돌아오는 시간도 상당히 많이 걸렸다.

““대공 전하!”

마법사가 얼굴이 노랗게 질려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금십자 기사단이 쟈드시에 나타났사옵니다. 지금 쟈드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옵니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리로 갔었군. 스바시에로 갈 준비를 해라.”

놈들의 이동 시간과 이쪽의 이동 시간이 교묘하게 일치했던 모양이라고 투덜거리며 다크는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라고 생각하 기에는 너무나도 타이밍이 절묘했다. 다크는 찜찜한 속마음을 감추며 우연일 거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가까운 곳에 있는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옛!”

스바시에는 초장거리에 있었기에 마법진의 규모는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그리는 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거기에다가 20명 이상이 움직이는 마법진 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법진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다크는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마법사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미카엘, 팔시온과 합류하여 수도로 가라.”

“옛.”

머지않아 마법진은 완성되었고, 마법사는 기나긴 주문을 외워 댔다. 그들은 크라레스 제국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요새에서 시작해서 남쪽 끄트머리에 가까운 곳 까지 초장거리 이동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마법사의 주문은 엄청나게 길었다. 초조하게 마법사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마법사는 주문을 멈추고 땀을 닦 으면서 외쳤다.

“완성되었습니다. 모두들 마법진에 올라가 주십시오.”

그리고 곧장 그들은 쟈드시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데군데 폐허가 되어 있는 쟈드시였다. 방금 전과 같이 적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 다. 금십자 기사단은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로 벌써 후퇴해 버렸던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적을 놓치는 것이 두 번이나 연속되자 다크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놈들의 이런 행동은 자신을 고려해서 만들어 놓은 작전이라는 것 이 확실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아 빠진 놈. 나하고 싸우는 것이 그렇게도 겁이 난단 말인가?”

투덜거리는 다크를 향해 이번에는 새파랗게 질린 마법사가 외쳤다. 그는 이번에도 적을 만나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에 연락을 했었는데, 그때 의외의 보고를 들었던 것이다.

“전하! 놈들이 수도를 침공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금십자 놈들이냐?”

“아니옵니다. 코란 근위 기사단이옵니다. 지금 수도에 있는 모든 기사단들이 투입되어 적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고 하옵니다.”

“아주 나를 가지고 노는군…….”

놈들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툴툴거리던 다크는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면서 외쳤다. 복수할 멋진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코린트의 수도로 공간 이동할 수 있나?”

놈들의 근위기사단과 금십자 기사단이 없으니 수도는 텅 비어 있든지, 아니면 발렌시아드 기사단 혼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놈들처럼 한바탕 휘저어 놓은 후 적의 근위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내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라 외친 것이었지만, 마법사는 죄송한 듯 고개를 수그리며 사정했다.

“예? 저 전하, 코린트의 수도는 너무 머옵니다. 제 능력으로는 하루에 세 번이나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것은 힘드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다면 전하의 생명을 보장해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젠장!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언젠가는 이 빚을 이자까지 붙여서 갚아 주겠다.”

다크는 어쩔 수 없이 부하들을 인솔하여 수도로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크의 예상대로 수도는 처참한 몰골로 다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성곽 과 궁전…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그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온갖 난리를 쳐 댔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다크는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온 기사들의 인사를 대강대강 받은 후 천천히 걸어갔다. 황궁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웠던 것은 적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채 복수라고는 해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이토록 적이 철저하게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놈들에게 첩자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 다.

자신과 자신의 기사단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하지만 무려 세 곳이나 되는 곳에 달려갔는데도 불구하고 놈들의 그림자도 못 봤다는 것은 그녀의 행동을 놈들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다시 동료를 의심해야 하는 처지에 서게 된 다크. 여태껏 살아오면서 상대의 비열한 수법에 고생을 많이 했고, 또 치가 떨리는 배신도 당했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뿌드드드득!

그녀는 황궁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을 배신한 그놈을 찾기만 하면 그야말로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자신에게 맹세하고 또 맹세하고 있었다.

『<묵향12 : 외전-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