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3화 – 치레아 대공을 감시하라

치레아 대공을 감시하라

“여기야. 자 긴장을 풀고 들어가게. 자네한테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제스터는 불안한 표정으로 상대의 미소 띤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본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대단히 호화로우면서도 넓은 방. 과거 크라레스 왕국의 수도였던 크로 돈에 있는 왕궁에 비하면 엄청나게 화려했다. 하지만 제스터는 이런 화려함에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그가 여태껏 근무하고 있던 치레아의 대공이 거처하는 궁전도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던 만큼 그에 못지않게 화려했기 때문이다.

방 안에는 화려한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이 누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포도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다가 제스터가 들어오는 것을 잔잔한 눈빛으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제스터가 앉아야 할지 그대로 서 있어야 할지 망설이며 어정쩡하게 서 있자 포도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에 앉게나.”

황태자비 생신 무도회는 하룻저녁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낮에는 잠도 보충해야 했고, 또 체력도 비축해 둬야 했다. 제스터는 자신에게 할당된 방에서 모자라는 잠을 보충하던 도중 난데없이 칼을 들이미는 괴한에게 끽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끌려왔던 것이다.

제스터는 일단 상대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살길이 열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제스터는 상대 가 앉아 있는 탁자의 반대편에 서서는 그의 허리 부분을 유심히 바라봤다. 실망스럽게도 상대는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스터는 일단 상대가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후, 포도주잔을 쥐고 있는 상대의 손을 슬쩍 바라봤다. 손바닥 부분에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것으로 보 아 상당히 열심히 검술 수련을 한 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제스터는 부하도 없이 자신과 일대일로 앉아 있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감 넘치는 눈을 유지하고 있는 상대의 수련도가 상당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을 이쪽으로 납치해 온 인물도 감히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였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저 인물의 정체가 한편으로는 매우 궁금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네. 나는 자네를 해치기 위해서 이곳으로 초청한 것이 아니야. 참, 내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겠지? 나는 엘리안 폰 그레지에트라 고 한다네.”

상대의 말에 제스터의 고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숙여졌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황태자 전하. 소신은 제스터 크로스란이라 하옵니다.”

“아아,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치레아 대공의 심복이라지?”

“심복은 아니옵니다, 전하. 그냥 부관일 뿐이옵니다.”

제스터의 답변에 황태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호쾌하게 말했다.

“허헛, 아직 어린 나이인데 벌써부터 겸손의 미덕을 알고 있구먼. 자네도 한잔 들겠나?”

“영광이옵니다, 전하.”

황태자는 손수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이렇게 자네를 부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해 주게나.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야.”

“무엇이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의 황가(皇家)에 대한 충성심은 어떤가?”

황태자의 말에 제스터는 망설일 것도 없이 즉시 답했다.

“절대적이옵니다, 전하. 기사를 꿈꾸는 저에게 황가에 대한 충성심은 저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이 변함이 없사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다니 내 마음이 흡족하구먼. 그렇다면 내 한 가지 물어보겠네. 자네가 모시고 있는 대공에 대한 충성심과 황가에 대한 충성심이 서로 어긋난다면 어느 쪽을 우선으로 하겠는가?”

이 순간 제스터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이 질문을 하는 상대는 황실의 인물. 그렇다면 그 대답은 당연히 상대의 구미에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그에게 는 로체스터 공작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가 최우선이었다. 그 임무를 이행하려면 먼저 살아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황가이옵니다. 기사에게 있어 충성심은 최고의 덕목.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모범 답안 같은 대답에 황태자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대 같은 젊은이들이 있는 한 황실과 크라레스는 영원할 것이야. 내 그대에게 황태자로서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네. 들어주겠나?”

제스터는 황태자의 말이 단순한 ‘부탁’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부탁을 거절한다면 어쩌면 행방불명으로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태자가 그를 비밀리에 이곳으로 납치해 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명령을 따르겠나이다.”

황태자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제스터의 말은 상대를 매우 기쁘게 해 준 것 같았다.

“치레아 대공을 감시해 주게. 그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모두 나에게 보고하게나.”

황태자의 부탁은 제스터를 놀라게 했다. 이 순간 제스터의 머릿속에는 온갖 가능성들이 줄지어 떠오르고 있었다. 황태자가 대공의 감시를 명한다는 것은 대공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아는 한 치레아 대공은 뛰어난 무인이었고 또 현명한 통치자였다. 만약 그가 코린트의 국민이 아닌 크라레스의 국민이었다면 그녀를 우상과 같이 숭배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를 황실에서 믿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기에 갖은 잡생각들이 다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얼굴 표정에 드러난 것을 보고 황태자는 씁쓰 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러는가?”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너무나 의외의 명령이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물론 명령이시라면 수행하겠사옵니다.”

제스터의 말에 황태자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원래가 기사들이라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아주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면 명령에 따 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는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제스터 같은 아직 세파에 찌들지 않은 젊은 수련 기사들을 자신의 첩자로서 이용하려고 계획 한 것이었다.

“고맙네. 그대의 작은 노고가 황실의 안위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 준다면 3년 이내에 기사로 책봉될 수 있도록 내가 힘써 주겠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아아, 그런 말은 하지 말게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해 힘써 주었다면 그에 따른 보상은 해 줘야만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보고는 어떻게 올리면 되겠사옵니까?”

“아, 상세한 부분은 데이더스 백작에게 지시를 받으면 될 거야.”

“예, 전하.”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있었군. 데이더스의 보고로는 애인과 함께 왔다고 하던데, 그녀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제스터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을 납치해 온 기사, 즉 데이더스 백작에게서 보고를 하는 방법 외에도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제스터로는 아쉽게도 이 번 일은 치레아 공작의 신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제스터가 가장 추잡하다고 생각하는 일, 즉 황태자의 권력 강화에 관계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무술 수련을 위해 오랜 시간 크루마에 있었고, 또 부인도 크루마에서 얻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황태자의 지지 세력은 매우 미미한 상태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정세 덕분에 황태자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기에 이미 두 명의 후보가 책정되었고, 교육도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명의 경쟁자 들은 여태껏 크라레스에 있었던 강점을 살려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저마다 조금씩 키워 나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태자의 입장에서 가장 걸리는 인물들이 바로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 다크 폰 치레아 대공, 토지에르 폰 케락스 공 작……. 바로 이 세 명이 크라레스 최고의 권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지지하는 인물이 다음의 황제가 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는 그 세 중신들의 행보에 관심을 곤두세우게 된 것이다.

제스터가 나간 후 한참 지나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들어오게.”

“예.”

소리를 죽여 조심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황태자의 심복인 데이더스였다. 그는 제스터를 바래다 준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았나?”

“예, 전하. 조심해서 처리했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사옵니다.”

“좋아. 수고했네.”

“감사하옵니다, 전하.”

“오늘 저녁때쯤 손님이 올 거야. 그들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위험하니 자네가 그들을 맡아 주겠나?”

“예, 전하.”

“그들이 누군지는 나도 잘 몰라. 그것 때문에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했지. 무크시에 가면 드래이크라는 여관이 있을 거야. 내일 아침 8시에 그곳에 가서 포도주와 맥주를 동시에 주문하고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말을 걸 거야. ‘크라레스의 여름은 정말 덥군요. 그것 때문에 아침부터 맥주를 드시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왜 포도주 를 함께 드시는 겁니까? 서로 짝이 맞지 않을 텐데’하고 상대가 말하면 자네는 ‘포도주를 마시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면 더위를 덜 탄다고 해서요’하고 답하면 돼. 그 러면 바로 자기소개를 할 걸세. 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이름은 워렌이야. 알겠나?”

데이더스는 황태자의 말에서 손님들이 아르곤을 경유하여 입국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크시는 동쪽의 아르곤으로 뻗어 있는 넓은 도로가 시작되는 관문 이었다. 그는 황태자의 말을 머릿속에 잘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답했다.

“예, 전하.”

“자네는 그를 데려다가 자네 집에 숨겨 놓으면 돼. 이 일은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져야 해. 잘해 낼 수 있겠나?”

“예, 전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참, 워렌 혼자일 가능성은 없고 아마 동행이 있을 테니 그들을 모두 다 태우려면 큰 마차를 가져가야 할 걸세. 알겠나?”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처남이 보내오는 사람들이니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게.”

처남이라는 말이 나오자 데이더스는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의 처남은 미티 베르키아 백작으로서 베르키아 후작의 장남이 었다. 그리고 그 베르키아 가문은 크루마에서 알아주는 명문 귀족이었다.

황태자의 처남이 된 미티 베르키아 백작은 황태자가 크루마에 인질로 잡혀 있을 당시 엘프리안 아카데미에서 사귄, 아직 새파란 젊은이였다. 그렇기에 무술 실력 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 때문에 관직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높은 직위를 차지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크라레스 제국 황태자의 처남이라는, 정치적으로 봤을 때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매형을 도와주겠다며 보내오는 사람은 처남의 사람이 아닌, 크루마의 총사령관 미네르 바가 파견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크루마에서도 자신들과 친한 엘리안 황태자가 황제로 등극한다면 대단한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레스와 크루마 간에 이상한 공기가 감도는 지금, 아무리 처남이 돕는 것이라고 해도 황태자가 크루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 다. 만약 그것이 발각된다면 최악의 경우 폐위(廢位)당할 위험성마저도 안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데이더스는 긴장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