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4화 – 멍청한 드래곤과 한심한 아들
멍청한 드래곤과 한심한 아들
코린트 제국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코린트 제2의 도시라고 불렸을 정도로 부유했던 상업 도시에 웅장한 황궁이 들어서고, 수도 방어를 위한 보병들과 기병, 그리 고 기사단들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그 규모가 비대해지고 있었다.
“크라레스에 대한 최신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공작 전하.”
로체스터 공작이 총사령관의 자리를 움켜쥔 후, 정보부를 통괄하게 된 베르딘 후작은 아주 깡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냉랭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전에 그로체스 공작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보부 때문에 상당히 고생을 했던 로체스터 공작은 그로체스 공작이 물러난 후 정보부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 를 썼고, 그 결실로 맺어진 것이 바로 이 베르딘 후작이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베르딘의 그 날카로운 눈을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새로운 것이라도 있는가?”
베르딘은 즉각 대답했다.
“예, 크라레인시 외곽에 설치되어 있는 군사 통제 구역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시행해 본 결과 그곳은 스바스(Swas) 근위 기사단의 훈련장임이 밝혀졌사옵니다. 아마도 그 넓은 면적으로 추리해 보건대 타이탄 기동 연습장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그거야 당연하겠지. 그렇게 넓다면 근위 기사단만이 아니라 중앙 기사단의 몇 개 전대가 함께 기동 훈련을 해도 충분한 면적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넓은 곳을 근 위 기사단 혼자만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송구스럽사오나 아직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사옵니다. 적의 대비 태세가 원체 삼엄하기에 내부에 첩자를 몇 번 침투시켜 보았사오나 모두 실패했사옵니다.” “그게 수상하다는 말이야.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은 청기사(Blue Knight). 출력 3.0에 높이 6미터 정도, 추정 전투 중량 160톤 내외. 이 상상하기도 힘든 괴물에 대한 데이터는 지난번 전쟁에서 웬만한 것은 다 밝혀졌는데 구태여 뭘 숨기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안 그래? 레티안?”
레티안이라는 이 아름다운 중년의 여마법사는 2년 전에 로체스터 공작의 부관이자 상담역으로 임명되었다. 그녀가 지닌 엄청난 암기력과 뛰어난 판단력은 로체스 터 공작에게 대단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레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질문에 즉각 대답했다.
“아직 청기사의 숫자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사옵니다. 혹시 그것을 숨기려고 그 난리를 떠는 것일까요?”
“글쎄. 청기사의 숫자는 대략 3대에서 14대 사이겠지. 두 명의 대공들이 1대씩 가지고 있을 거고, 명색이 근위 타이탄인데 근위 기사단장이 1대는 가지고 있을 것 아닌가? 스바스 근위 기사단이 열두 명의 오너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는 상태니까 최대로 잡아 봐야 14대겠지. 그런데 겨우 그 숫자를 숨긴다고 보기에는 너무 그 보안이 과도하다 이 말이야. 본국의 최신형 적기사II의 경우에도 그 정도로 보안을 신경 쓰지는 않고 있지 않나? 어느 나라가 근위 타이탄의 훈련 장까지 통제하면서 그 보안을 유지하느냐 이 말일세.
사실 타이탄이라는 것은 그 조종술만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더 이상 타이탄에 탑승하고 훈련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일종의 거대화된 갑옷 이상의 의미가 없다 고 봐야지. 그래서 그런 훈련 모습 따위를 통제하고 있는 그놈들이 더욱 수상하게 생각되고 있는 거라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하는 레티안에게 미소를 보낸 후 로체스터 공작은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참, 그 외에는 없나?”
“물론 더 있사옵니다. 크라레스의 왕자가 미란에 파견된 것 같사옵니다.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아마도 정략결혼을 통해 양국 간의 우의를 더욱 다지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뭣이? 놀라운 소식이군. 그 사실을 안다면 크루마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로체스터 공작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까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분명히 이번 일로 인해서 크라레스와 미란, 그리고 크루마는 미묘한 갈등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크루마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저희 쪽에서도 수많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이니까요.”
“그래, 왕자의 호위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기사 세 명에 시녀가 한 명 정도인 것으로 보고받았사옵니다. 현재 조사 중이온데 모두들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지 않은 관계로 자세한 자료를 얻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사옵니다.”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왜 전쟁의 신전에 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 녀석들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그러게 말이옵니다, 전하.”
“미란과 크라레스가 혈맹을 맺는다고 하면 본국에 문제가 될 것이 있을까?”
공작의 물음에 레티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본국에는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옵니다. 대신 크루마에는 상당한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레티안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공작은 베르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그렇다면 크루마에다가 넌지시 이 사실을 알려 주게나. 미란 내에서 크라레스와 크루마가 한판 붙는다면 아주 재미있게 될지도 모르지. 아마도 왕자의 호 위들이니까 어쩌면 근위 기사들이 투입되었을 거야. 이 기회에 스바스 근위기사단의 실력이 어떤지 알아 볼 수도 있지 않겠나? 그리고 크루마에 조금의 빚을 만들 어 두는 것도 좋겠지.”
“옛,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스테노 네르갈은 이제 두 번째로 마법진 앞에 서서 크라레스에서 오는 귀빈을 마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사단장은 이미 크라레스에서 오는 인물들에 대한 비밀을 대충이나마 눈치 채고 있는 스테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었다.
전에 왕자가 올 때도 그렇게 단단한 다짐을 받지 않았는데, 이번에 도착하는 인물은 도대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마중하라는 지 시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테노는 이번에 올 인물이 누군지, 또 그 수행원들은 누가 될지 매우 궁금해 하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희뿌옇게 빛이 나는 순간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숙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스테노는 잠시 멍한 상태에 빠졌다. 남장을 한 여성 이 호위 무사를 한 명도 거느리지 않고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해서 멋진 환영의 인사말을 건넸다.
“미란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스테노는 레이디에 대한 인사법이 그러하듯 다가가서 그녀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녀가 손을 내밀면 손등에 키스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크는 어디 있지?”
순간 스테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아니 그는 남자였다. 목소리가 굵직한…….
“예? 다크라니요? 아…, 먼저 크라레스에서 도착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신 모양이군요.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스테노는 그 미모의 남자를 한참 맞선이 진행 중인 대 저택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왕자와 그 호위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다크라는 인물이 그곳에 있을 가 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스테노의 안내를 받아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팔시온은 재빨리 일어서서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전에야 덜떨어진 아르 티어스가 오건 말건 별 신경도 안 썼을 팔시온이었지만, 다크의 실종 사건 때 아르티어스의 참모습을 본 후에도 그럴 배짱은 없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티어스 님.”
“흐음…….”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약간의 노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세 명의 죄인을 쭉 훑어봤다. 아르티어스의 눈길을 받은 팔시온과 그 일행들은 이번 여행 자체가 아르티어스 를 따돌린 행동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표정을 태연하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켕기고 있었다.
“네 녀석들이 감히 나를 빼고 여행을 떠나?”
“그건 절대로, 엄청난, 말도 안 되는 오해십니다요, 아르티어스 님. 저희들은 아르티어스 님과 함께 가자고 전하께 말씀드렸지만 전하께서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 다. 전하의 그 고집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의 뜻을 저희들이 어떻게 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로 저희들을 닦달하신다면 정말이지 억울합니다요.”
팔시온이 일단 팔밀이성 발언을 시작하자, 대충 팔시온의 뜻을 짐작한 미디아와 미카엘도 열심히 거들어 댔다.
“팔시온의 말이 맞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전하께서 그냥 가자고 하셨다니까요. 저희들에게는 죄가 없다구요.”
“진짜라니까요.”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든 죄를 다크에게 뒤집어씌우기에 급급했다. 물론 이 일로 인해 다크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간다면 모르지만, 아르티어스도 다크 앞에서 는 꼼짝도 못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르티어스의 모든 분노는 다크에게로 덮어씌우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 네 명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스테노는 매우 정신이 헷갈리는 것을 느꼈다. 원래가 기사도라는 것은 충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그런데 여태껏 매우 사내 답다고 여겨 왔던 이 치레아 기사단의 기사들이 모든 것을 상관에게, 그것도 전하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저쪽에서 숙녀에게 더듬거리며 말을 건네고 있는 덜떨어 진 왕자에게 다 뒤집어씌우는 것을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얘는 어디 있냐?”
“전하께서는 모든 일을 우리에게 떠넘기시고 저쪽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팔시온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금발을 축 늘어뜨린 소녀가 옆에 과일과 술병을 놔두고 잔디밭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불현듯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그녀를 그렇게 걱정해서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쏜살같이 달려왔건만, 정작 그 당사자는 저렇듯 평화로운 표정 으로 낮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자 속이 뒤집혔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얄미운 낯짝을 한 대 때려 주려고 맹렬한 속도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그 기세가 너무 맹렬했던 탓인지 그가 채 주먹으로 꽁 쥐어박기도 전에 다크의 눈이 살짝 떠져 버렸다. 다크의 눈이 떠지는 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헛바람을 삼키며 앞으로 뻗어 나가던 자신의 손을 멈췄다.
“어라? 여기에는 웬일이에요? 그리고 아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에? 엑! 뭐 하기는, 잠자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조금 쓰다듬어 주려고…….”
“요즘은 주먹 쥐고 쓰다듬어 줘요?”
“에에…, 처음부터 손을 펴서 머리까지 보내는 것보다 주먹을 쥔 편이 공기 저항을 덜 받지 않니? 조금이라도 힘을 절약하기 위한 삶의 지혜 때문이지. 허허헛!”
말도 안 되는 옹색한 변명과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슬쩍 의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다크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자신에게도 죄가 있는 만큼 괜히 그런 사소한 일을 따지고 들어가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아르티어스의 자신에 대한 공격을 원천봉쇄할 무 슨 방법이 없는지 맹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빠까지 이리로 와 버리면 어떻게 해요? 제가 없으면 아빠가 공국을 다스려야 할 거 아니에요? 아빠만 믿고 황제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리로 왔는데…….”
슬쩍 넘겨 버리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질책하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도 잊어버리고는, 자신이 아들의 믿음을 저버린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황급히 얼버무렸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만.. 그리고 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공국은 어떻게 하고 오신 거예요?”
다크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슬쩍 그녀의 ‘오른팔’에게 팔밀이를 했다.
“내가 없어도, 카슬레이 녀석 혼자서 잘할 텐데 뭘.”
“혼자서 잘하기는 뭘 잘해요? 그 녀석은 부하라구요. 치레아 공국이 저 혼자만의 나라인가요? 아빠의 나라이기도 하다구요. 왜 그렇게 주인 의식이 없어요? 제 가 없는 동안에는 아빠가 이끌어 나가야 할 거 아니에요?”
“미안하구나. 그럼 나는 돌아갈까?”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하는 아르티어스를 보고 다크도 조금은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지라 약간은 어리광스런 말투로 말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좀 쉬시다가 가시죠?”
“헤헤헤, 그럴까?”
아들의 쉬고 가라는 그 말이 그렇게도 좋고 고마운지, 여기에 왜 왔는지조차도 망각하고 히죽거리는 아르티어스를 보며 팔시온과 그 동료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한 방 먹일 기세로 달려가더니만…….
한편 이들의 말을 옆에서 주워듣던 스테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있었다. 분명히 이들은 ‘전하라는 인물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웠고, 소녀의 말에 따르면 ‘치레아’를 자기 대신에 이 붉은 머리의 미남이 다스려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저 소녀가?
스테노는 슬쩍 미카엘의 옆구리를 꾹 찌르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혹시, 저분께서 치레아 대공 전하십니까?”
스테노는 상대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며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여태껏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치레아 대공의 모습 과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코린트가 자랑하던 최고의 기사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격패시킨 이 시대 최강의 고수. 그리고 20대의 고성능 타이탄으로 구성된 개인 기사단까지 가지고 있다면 웬만한 국가의 국왕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인물이 저런 새파란 소녀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외감(敬畏感)도 며칠 가지는 못했다. 왕자의 호위는 뒷전이고, 크라레스에서 온 절대로 아버지같이 보이지 않는 인물과 히히덕거린다고 거의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소녀를 봤을 때 스테노의 눈에는 서서히 불신감이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