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7화 – 난폭한 습격자
난폭한 습격자
엘리안 황태자는 지금 데이더스의 저택에 와 있었다. 크루마에서 도착한 손님이 그와 만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엘리안 황태자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 몇 명만을 대 동하고 조용히 데이더스의 저택으로 갔다. 그런 후 기사들에게는 데이더스와 비밀스럽게 의논할 것이 있으니 저택 밖을 경비하라고 이르고 저택 안으로는 혼자만 들어갔다.
데이더스는 황태자를 자신의 지하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황태자와 만나기를 원하는 인물이 짙은 녹색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채 음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 다.
워렌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질문을 들은 엘리안 황태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황위를 계승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누구냐 이건가?”
“예, 전하.”
“글쎄…, 그것을 묻는 저의가 뭔가?”
“현재 크라레스는 세 명의 공작들이 이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등에 업을 수 있다면 전하께서 황제로 등극하시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크루마에 오랜 시간 와 계셨기에 전하의 지지 기반은 매우 미약한 상태이옵니다. 미네르바 전 하께서도 이 점 때문에 심히 우려하고 계시옵니다. 이런 때는 전하를 밀어 줄 강력한 존재가 필수적이옵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없다면 걸림돌들을 차례차례 없애 나가야 하지요. 현재 전하를 밀어줄 인물이 세 명의 공작들 중에 있사옵니까?”
엘리안 황태자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흐음, 경의 말에 일리가 있구먼. 아마도 그들 중에서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은 루빈스키 아저씨뿐일 거야. 루빈스키 아저씨는 내가 크루마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에 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지. 하지만 아저씨 혼자서만 나를 도와준다고 될 일이 아니지. 토지에르 영감은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상당히 싫어하거든. 그리고 치레아 경의 경우는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으니 얼굴도 못 봤지만, 들리는 얘기를 종합해 본 결과 그녀는 아예 황위 계승권 자체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 더군.”
엘리안의 말에 워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를 궁리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토지에르 영감만 없애 버린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그렇지 않사옵니까? 한 사람은 중립이고, 한 사람은 전하를 밀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토지에 르 영감만 없애 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 나도 많이 생각해 봤지만, 그에게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뒤집어씌워 물러나게 만들 수는 없어. 그에 대한 아버님의 신뢰는 절대적이야. 서로를 이간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흐흐흐, 전하, 제가 언제 이간질하자고 했사옵니까?”
워렌은 음산하게 웃으며 물었다. 엘리안이 조용히 앉아 있자 그는 힘이 깃든 음성으로 뒷말을 이었다.
“제거하자고 했습지요.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옵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그에게 엄청난 호위들이 딸려 있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자신도 6사이클을 마스터한 마법사라구. 나에게 혐의가 오지 않도록 없애 버릴 수 있 었다면 내가 벌써 했겠지.”
“흐흐흐, 전하. 전하와 제가 힘을 합친다면 그것도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는가?”
“토지에르를 한적한 곳으로 유인해 주시옵소서. 대신 전하의 이름이 나오면 안 되고, 또 호위의 규모가 커도 안 되옵니다. 그가 절대로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하려 면 그것이 필수 조건이옵니다. 그것만 해 주신다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사옵니다.”
“으음…, 힘든 주문이로군. 시간을 좀 주게나. 좋은 방법이 없을지 데이더스와 의논해 보겠네.” “옛, 전하.”
“휴우…….”
토지에르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후 투덜거렸다.
“바빠 죽겠는데, 왜 오라는 것이지?”
아침에 루빈스키 대공의 밑에 있던 수련 기사가 달려와서, 대공이 그와 상의할 중요한 사안이 있다면서 근위 기사단의 타이탄 기동 연습장으로 급히 오라고 하더 라는 연락이 왔다고 전했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근위 기사단의 훈련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만 있으면 기동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적기사의 신 모델이 양산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온 후 부터는 아예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토지에르는 루빈스키 시종의 말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토지에르의 마차 주위에는 네 명의 경호 기병이 호위하고 있었고, 마차 안에는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공작이라는 그의 신분에 따른 통상 적인 경호였다. 그렇기에 경호병들도 경무장이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 또한 달랑 검만을 허리에 차고 있는 정도였다.
“젠장, 기동 연습장에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둬야 하겠군.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이동 마법진으로 가는 것인데 잘못했어. 헤드필드 경, 도착하 려면 아직도 멀었나?”
토지에르의 짜증 섞인 물음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의 기사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40분 후면 도착할 것이옵니다, 전하.”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단 기동 연습장은 보안상 워낙 외진 곳에 건설했기에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토지에르가 투덜거리는 가운데 마차 는 어느덧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마차가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군.”
“산길을 달려가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고 잘 포장하여 훈련장이 어디 있는지 광고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헤드필드의 말에 토지에르는 빠른 시일 내에 꼭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고야 말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기사들이야 숙련된 승마 실력이 있을 테니 운동을 겸해서 달려오겠지만 마법사들에게 이 길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스바시에 전하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단 말이야.”
“청기사 때문이 아닐는지요.”
헤드필드의 조심스런 추측에 토지에르도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글쎄…, 나도 그것 외에는 생각나는 이유가 없으니, 조금 걱정이 되는군. 만약 청기사 때문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이렇듯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헤드필드가 검을 뽑아 들며 검을 휘둘렀다. 좁은 마차 안에서 휘두른 검이었기에 마차의 상부 구조물이 검에 찢겨 나갔 지만 헤드필드는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토지에르를 향해 날아오던 상대의 검을 막아 냈던 것이다. 그는 검을 막아 내자마자 마차 문을 박살 내면서 튀어나갔다. 문을 열 그 짧은 시간도 아쉬웠던 것이다.
상대는 자신이 가까스로 기척을 알아낼 수 있었을 정도로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좁은 곳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짙은 녹색의 로브로 몸 전체를 감싼 정체불명의 적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막히자 뒤로 재빨리 물러섰던 그들은 두 번째 공격을 위대 다시금 도약했다. 상대는 두 명, 헤드필드는 마나를 끌어 모으며 그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슉!
“우윽!”
대기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검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헤드필드는 앞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내면서 검을 휘둘렀다. 상대의 숫자가 많았기에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적의 수를 줄이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필살의 공격은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금속질로 된 가면을 쓰고 있는 정체불명의 적이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길게 찢어진 짙은 녹색의 로브 자락 사이로 인간의 피부 라고 생각되지 않는 두터운 가죽이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죽 갑옷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가공해 놓은 가죽 갑옷과는 전혀 색다른 자연스러운 질감이 엿보였 다. 그리고 그 두터운 가죽은 깊지 않게 가로로 갈라져 있었고, 가죽 바로 밑에서 붉은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진짜 가죽 갑옷이라면 피가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고 피부를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내는 데 헤드필드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렀다. 앞의 상대와 검을 주고받는 동안, 뒤쪽에서 치고 들어온 녀석에 의해 등에 깊숙한 검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는 공격을 주고받은 그 짧은 순간에 상대가 어쩌면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미 치명적일 정 도로 깊은 검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상대가 시도한 두 번째 공격에 의해 목이 몸통에서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헤드필드의 눈동자는 이미 머리가 몸통 에서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강한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헤드필드가 쓰러졌을 때쯤에야 호위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공격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진 격투였다. 하지만 호위병들은 변변한 공격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모두 피를 뿌리며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짙은 녹색의 괴한들이 감행한 공격이 끝나자 풀숲에서 또 다른 괴한이 한 명 더 뛰어나왔다. 그도 처음 공격해 들어간 인물들과 똑같은 복장이었다. 그는 짙은 녹 색의 로브를 펄럭이며 걸어오더니 마차 안을 확인했다. 하지만 마차 안에는 핏자국이 있기는 했으나 정작 목표물의 시체는 없었다.
“제기랄, 놓쳤구나.”
넷으로 이루어진 공격조의 마차에 대한 공격은 근소한 시간차를 두고 양쪽에서 감행되었다. 첫 번째 공격을 막아 낸 호위기사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그때 이미 그가 뛰어나오는 반대편에서도 검이 마차를 찢으며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6사이클을 마스터한 고위급 마법사라고 해도, 주문을 외울 시간적 여유도 없는 그런 갑작스런 공격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상대는 그 짧은 시간에 도망쳐 버렸다. 이는 상대가 주문을 통해서 마법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법 도구를 이용해서 공간 이동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그의 시선에 특이한 것이 잡혔다. 바로 자신이 데리고 왔던 부하들 중에서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피를 흘리고 있는 그 부하에게 다가가서 팔을 난폭하게 잡아챘다. 과연 그 부하의 팔은 손목 부분에서 잘려 나가 있었고, 거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는 시선을 돌려 반대편에서 공격을 감행했던 또 다른 부하를 바라봤다. 역시 그 부하의 손에도 이상이 있었다. 왼손에 붙어 있는 무기의 절반이 잘려 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그것까지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대로 공격이 성공하기는 했군. 그래…, 손목이 날아간 것으로 보아 아주 깊숙한 검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어. 아마도 죽기 직전에 도망친 모양인데 어디로 갔 는지 알아야 쫓아가지. 젠장할! 되는 일이 없구먼.”
습격자들의 우두머리가 목표물의 시체 확인을 못한 것을 원통해하고 있을 때, 그 ‘목표물은 크라레스의 황궁 한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연구실에 모습을 드러냈 다. 싸구려 마법 도구를 이용한 제법 먼 거리의 이동이었기에 마나의 손실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전하,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갑자기 연구실에 피투성이가 된 채 모습을 드러낸 토지에르를 보고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괴상하게 생긴 검에 웬 고깃덩어리가 달라붙은 채로 복부를 꿰뚫고 있었 고, 또 다른 것은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깊게 들어가 있지 않아서 심장이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못했기에 토지에르가 즉사하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였다. 거기에다가 검이 꽂혀 있는 채로 이동해 왔기에 출혈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토지에르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이유였다. 마법사들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토지에르를 살리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