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8화 – 공작이 암습을 당할 정도라면?

공작이 암습을 당할 정도라면?

크라레스의 황제는 토지에르가 치명상을 당한 것을 보고받고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맹렬한 분노를 토해 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조사해 봤느냐? 흉수는 어떤 놈인가? 필히 밝혀내어 복수를 해야 할 것이야.”

분노에 미쳐 길길이 뛰는 황제 덕분에 중신들은 한동안 숨을 죽여야만 했다. 이렇듯 이성을 잃은 황제는 처음 봤던 것이다. 바로 이때 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루빈스키는 서둘러서 들어온 후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 생각보다 늦었구먼.”

“예, 폐하. 제가 있는 곳에서 범행 현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현장을 둘러보고 오느라고 늦었사옵니다.”

“그래, 어떻던가? 단서라도 찾았나?”

“약간은 알아낸 것이 있사옵니다. 발자국들을 따져 봤을 때 습격자들은 다섯 명, 그중 네 명이 습격에 가담했고 한 사람은 그냥 지휘만 한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놈 들의 보폭을 따져 봤을 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발자국을 살펴봐도 뭔가 이상한 점이 있기에……. 그러니까 파여 있는 발자국 의 깊이를 따져 봤을 때 몸무게가 약 70킬로그램 전후인 것 같사온데, 한 명을 제외하고 네 명의 발자국 특성이 거의 동일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비슷하다는 것이지 요. 아무래도 나머지 네 명은 움직이는 습성이나 공격시의 발놀림까지 똑같을 정도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로 사료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호위 무사들의 사인(死因)은 검 같은 예리한 것에 베인 것이었는데, 검상을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헤드필드 경의 목숨을 앗아 갔을 정도로 고 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의 검술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수준의 검상이라는 것이지요. 검술이고 뭐고 없이 단순히 속도와 힘만으로 벤 것이었사옵니 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헤드필드의 목숨을 앗아 갔는지 이상하옵니다.”

“경의 검술에 대한 안목은 짐도 인정하는 바이니, 그 원인은 딴 데 있다고 생각해야 하겠지.”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 대공이 급히 물었다.

“폐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신 것이 있사옵니까?”

“짐도 처음에 다론 경이 가져온 것을 보고 확실히는 잘 몰랐었는데, 경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가는구먼.”

여기까지 말한 황제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한쪽에 서 있던 다론을 향해 말했다.

“다론 경, 경이 가져왔던 것을 다시 이리 가져와 보라.”

“옛, 폐하.”

다론이 천에 싸인 물건을 가져다가는 황제 앞에 펴 놓았다. 그것은 다론이 마법사들을 지휘하여 토지에르의 몸에 박혀 있던 것을 뽑아 낸 흉기들이었다.

“바로 이것일세. 여기 이 낫처럼 생긴 것의 끝부분에 달려 있는 이 뭉툭한 살덩어리……. 다론 경도 말했지만, 이건 도저히 사람이 쥐고서 사용했던 무기로는 보이 지 않지?”

루빈스키 대공도 그 천에 싸인 물건을 자세히 바라본 후 황제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아무래도 말로만 듣던 키메라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키메라는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말에 다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키메라는 마법으로 재구성된 강력한 전투 생명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그것 때문에 알카사스의 경우 병사들의 일부를 키메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키메라가 강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이지, 마법사나 기사보다 강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이것을 폐하께 보여 드리며, 그 점이 이상하다고 보고드렸사옵니다.

키메라들만으로 토지에르 전하와 경호 기사인 헤드필드 경, 그리고 경비병들을 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요. 하지만 전하의 말씀대로 엄청난 속도와 힘을 낼 수 있는 키메라라면 조금은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다론의 말을 듣고 한참 궁리하던 루빈스키는 황제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알카사스가 이 짓을 꾸몄다는 것이옵니까? 키메라를 병사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은 알카사스뿐이옵니다.”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한 황제는 천천히 말했다.

“글쎄…, 경의 말이 옳긴 하지만 알카사스는 본국과 아무런 원한도 없어. 그리고 이해관계도 없지. 혹시나 놈들이 본국에서 테리아를 수출하는 것 때문에 자국(自 國) 타이탄의 수출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모르겠지만, 본국에서 수출하는 테리아의 양은 많지가 않고, 또 동맹국에만 한해서 수출하기에 녀석들에게는 아무 런 영향도 없었을 것이야.”

“그렇다면 크루마나 코린트 둘 중 하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

“그렇다면 명확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속단하기는 이르겠지만 아마도 코린트일 가능성이 클 것이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본국의 지휘 체계에 타 격을 주는 한 가지 방편으로 채택했을 테니 말이옵니다. 본국 최대의 적은 아무래도 코린트가 아니겠사옵니까? 그런데 황궁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던 토지에르 가 왜 그 외진 타이탄 훈련장 근처까지 온 것이옵니까?”

“글쎄…, 다론의 보고로는 자네가 불렀다고 하던데?”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다론을 향해 따지고 들었다.

“예? 다론 경, 다시 한 번 더 말해 보게.”

“예, 전하. 전하를 수행하던 수련 기사가 오늘 아침에 달려와서 전하께서 비밀스럽게 상의할 것이 있으니 타이탄 훈련장까지 와달라고 전했사옵니다. 그 때문에 토지에르 전하께서는 소수의 경호병만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가신 것이지요.”

“나는 그를 부른 적이 없었는데? 그 수련 기사가 누군가?”

루빈스키 대공의 서슬 시퍼런 물음에 다론은 그 망할 수련 기사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다행히 곧이어 생각이 났기에 그는 대공에게 그 녀석의 이름을 보고 할 수 있었다.

“예, 로날드… 로날드 거트니안이었사옵니다.”

다론의 보고에 루빈스키 공작은 자신을 따라왔던 기사들 중 한 명에게 신경질적인 어조로 외쳤다.

“자네가 가서 로날드를 잡아와라.”

“옛, 전하.”

하지만 로날드는 행방이 묘연했고, 다음 날 점심때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 습격 사건의 범인에 대한 조사는 완 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빈스키가 이 중대한 사건을 그냥 덮어 두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루빈스키는 스바시에에서 자신이 아끼는 부하 한 명을 불러들였 다.

“불러 계셨사옵니까? 대공 전하.”

40대 중반쯤으로 듬직하고 강인하게 보이는 사내를 믿음직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루빈스키는 반갑게 맞이했다.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은 과거 크라레스에 콜렌 기사단이라는 단 하나의 기사단만이 외부에 드러나 있던 약소국 시절, 콜렌 기사단을 지휘했을 정도로 이름 높은 용장이었다. 그때 그는 코린트가 부여하는 어려운 임무들을 콜렌 기사단이라는 약소한 전력만을 가지고 처리해 나갔을 정도로 뛰어난 책략가이기도 했다. 만 약 그렇지 못했다면 콜렌 기사단은 코린트의 횡포 아래 여기저기 전쟁터로 끌려가서는 벌써 소모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그래 스바시에는 어떻게 해 놓고 왔나?”

“예, 스바시에는 카렌에게 맡겼사옵니다. 그녀가 잘 처리할 것이옵니다.”

카렌 폰 헤이워드라면 스바시에 기사단의 수석 궁정 마법사였다. 그런 만큼 충분히 효율적으로 스바시에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루빈스키는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그래, 현명한 인선이로군. 자네를 급히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맡길 일이 있기 때문이야. 혹시 이렇게 생긴 것을 본 적이 있나?”

쥬리앙은 루빈스키가 내민 괴상하게 생긴 물건을 자세히 바라봤다. 하지만 칼처럼 생긴 그것이 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모르겠사옵니다. 칼 같기도 한데.. 왜 손잡이가 붙어 있지 않고 그렇게 큰 말린 고깃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이옵니까?”

“허허헛, 그게 아니라네. 이게 조금 시간이 지나 겉이 말라 버린 것이지 처음부터 말린 고깃덩이가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 피가 뚝뚝 떨어지던 신선한 살덩이가 붙어 있었지. 마법사들의 예상으로는 키메라의 손일 거라고 하더군.”

“칼과 같은 손을 달고 있는 키메라……. 키메라라면 전에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온갖 동물들을 합성시킨 마법 생물이라고 말이옵니다. 그러니 이런 모양을 못 만 들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런데 왜 그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옵니까?”

“왜냐하면 이것이 토지에르 경을 헤친 놈의 신체 일부분이니까 그렇지. 단서가 거의 없기는 하지만 자네는 범인을 추격해 줘야겠어. 알카사스가 키메라 연구의 종 주국이니까 거기서부터 조사해 나오면 뭔가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해 주겠나?”

“옛.”

“고맙네. 경에게 스바시에 기사단의 오너 네 명을 주겠다. 자네 마음에 드는 녀석들로 뽑아 가도록 해. 그리고 마법사 두 명과 그래듀에이트도 몇 명 데려가는 것이 좋겠지. 자네는 그들을 데리고 철저하게 조사해서 뭔가 단서가 잡히면 보고하도록! 폐하의 윤허는 이미 떨어져 있으니 즉시 출발하게!”

“옛, 전하.”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이 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본 후 루빈스키 대공은 안티노스 후작을 불러들였다. 뚱뚱한 체구를 지닌 안티노스는 루빈스키 앞에 도착하자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불러 계셨사옵니까? 전하.”

루빈스키 대공은 그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오라고 살짝 손짓을 한 후 안티노스 후작이 가까이 다가오자 속삭이듯 말했다.

“쥬리앙 경이 토지에르 경의 시해자를 찾기 위해 알카사스부터 뒤져 들어갈 것이라는 보고를 들었나?”

“옛, 전하. 그건 이미 어제 폐하의 윤허가 떨어진 사항이 아니옵니까?”

“그렇지. 나는 일부러 그걸 공식적으로 처리했네. 또 쥬리앙의 보고도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나에게 보고되겠지.”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안티노스 후작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루빈스키 대공은 그에게 좀 더 자세히 말했다.

“본국의 공작이 시해를 당했어. 물론 키메라들의 공격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니만큼, 타국이 관여했다고 봐야 하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 분명히 내통자가 있을 거야. 토지에르 같은 경우 몇 겹으로 보호되고 있었는데, 그가 당했을 때는 매우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지. 내통자가 없고서야 불가능해. 자네는 철저하 게 내통자를 색출해 내게. 이번에는 그 대상이 토지에르였지만, 다음에는 폐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야.”

루빈스키 대공의 말에 안티노스도 이번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옛, 전하.”

“내가 자네를 고른 것은 그 때문이야. 쥬리앙이 밖에서 휘저으며 눈길을 끌고 있는 동안에, 자네는 비밀리에 놈들을 압박해 들어가서 일망타진하게나. 물론 거의 단서가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자네라면 잘해 낼 것으로 믿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