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9화 – 암소 네 마리를 보내 주시오
암소 네 마리를 보내 주시오
“에…, 그러니까 경의 말은 토리아 왕국을 침공해 달라는 것인가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될 듯 말 듯 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왕을 잔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뚱보가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은 애써 생각하는 척하다가 자신의 뒤쪽을 슬며시 바라봤다. 그곳에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가 듬직하게 서 있었다. 젊은 왕은 그 기사를 향해 뭔가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그 눈길을 이해했는지 그 기사가 앞으로 슬쩍 나서면서 뚱보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생각할 시간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쪽에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와리스 후작 각하.”
와리스는 상대의 망설임이 당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비대한 얼굴에 일부러 실망감을 잔뜩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아니, 시드미안 공. 저는 공이나 전하께서 이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실 줄 믿고 왔소이다. 그 때문에 폐하께는 전하께서 이쪽에서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곧 장 토리아로 진격하실 것이라고 장담을 드렸었소. 과거 트루비아가 어려울 때 오직 본국만이 그대들을 도와주지 않았었소?”
“하지만 본국의 군사력으로는…….”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시드미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루빈스키 대공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대공에게서 자신이 이번에 맡은 임 무가 얼마나 국가의 안위에 절대적인 보탬이 될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이었다. 무슨 수단을 쓰든 간에 트루비아를 꼬셔서 토리아 를 박살내야만 하는 것이다.
토지에르가 습격당한 후, 크라레스 황제는 계획을 앞당겨 토리아 침공 작전을 시작할 것을 루빈스키 대공에게 명했다. 그만큼 그 사건은 황제에게 엄청난 분노와 초조함을 안겨 줬던 것이다. 그리고 크라레스 황제는 토지에르를 습격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잡지 못한 범인, 즉 코린트를 향해 이것을 통한 간접적인 복수를 하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대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거만한 어조로, 혈맹의 부탁을 무시하는 상대의 태도에 분노를 느낀다는 듯 말했다.
“폐하께서 전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이 아니지 않소이까? 지금 트루비아는 본국에서 지원해 준 카프록시아급 타이탄 테리아를 6대나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 까? 그리고 안토로스급도 2대나 남아 있지 않소? 합쳐서 타이탄 전력만 8대에다가 6개 사단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소이까? 그에 비한다면 토리아 왕국은 12개 사단의 병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기사단은 형편없지 않소이까? 타이탄이 21대라고 하지만 그 대부분이 정규 출력도 내지 못하는 고철들이오.”
여기까지 말한 와리스 후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슬쩍 젊은 국왕의 안색을 훔쳐본 후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가 상대에 대한 질책이라면, 이제부터는 전쟁을 선택 했을 때의 장밋빛 가득한 미래를 달콤하게 말해 줘야만 하니까 말이다.
“물론 전하께서 전쟁을 결심하신다면 본국에서는 테리아 4대를 추가로 드릴 것이오. 합계 12대의 타이탄이라면 충분하지 않겠소? 그리고 타이탄 전투가 자신이 없다면 이쪽에서 1류 기사 몇 명을 타이탄과 함께 추가로 빌려 줄 수도 있소. 순식간에 토리아 왕국의 타이탄들을 파괴하고 그 여세를 몰아 보병들을 박살 낸다면 아주 손쉽게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어렵다는 것이오?”
시드미안은 신중하게 와리스 후작에게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말했다.
“토리아를 치는 것이 쉽다는 것은 이쪽에도 이견이 없습니다, 와리스 후작 각하. 하지만 토리아 왕국의 배후에는 코린트 제국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간섭해 들어 온다면 그 뒷감당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와리스 후작은 트루비아에서 우려하는 것이 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태까지 발전해 나간다면 최악의 경우 트루비아를 도와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뒷감당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소. 만약 코린트가 간섭한다면 이쪽에서도 당당하게 기사단을 파견하여 도와주겠소. 귀국은 본국의 혈맹이 아닌가 요? 귀국이 어려울 때 도와준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분이 서지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미 트루비아 접경 부근에 1개 사단의 병력을 대기시켜 놨고, 비밀리에 수도에서 중앙 기사단 제7전대를 빼내서 트루비아 접경 부근에 포진시켜 뒀소이다. 7전대가 지닌 타이탄 30대라면 만약 코린트가 간섭해 온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을 것이오. 그런 후 코린트가 투입하는 타이탄의 수량에 따라 기사단을 추가적으로 증파해 드리겠소. 폐하께서는 귀국에 결코 무리한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오.”
트루비아의 근위 기사단장인 그라드 시드미안 후작을 향해 여기까지 설명을 한 후, 와리스 후작은 젊은 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치는 데 본국에서 직접 나선다면 자칫 전면 전쟁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트루비아에서 코린트 동맹을 해체시키는 것을 조금만 도와 달라는 것이지요. 과거 트루비아가 어려울 때 본국에서 성심껏 도와 드린 것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이렇게까지 말하자 젊은 왕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는 아직 젊었기에 어려울 때 도와줬던 크라레스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순수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경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네. 폐하께는 짐이 승낙했다고 전해 드리게나.”
“그렇다면 언제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온지?”
“이쪽에도 준비할 시간 여유가 필요하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네.”
“알겠사옵니다, 전하. 폐하께서도 전하의 전폭적인 지지에 크게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께 약속드린 테리아 4대는 3일 안에 보내 드리겠사옵니다.”
일단 협상이 아닌 협박에 성공한 와리스 후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궁을 나섰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해 낸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한 명과 마법사 한 명이 그에게 급히 다가왔다. 원칙상 사절이라고 하면 이들 외에도 두 명 정도의 수련 기사가 대동해야 하지만, 이것은 워낙 기밀을 요하는 방문이 었기에 매우 단출하게 왔던 것이다.
“협상에 성공하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립니다, 각하.”
와리스 후작의 표정을 보고 짐작을 한 기사가 먼저 축하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와리스 후작을 수행하고 경호하라는 명령만을 받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와리스 후작이 처음 이리로 올 때는 매우 초조한 표정이었는데, 이제 약간은 미소를 띤 느긋한 표정인 것을 보고 짐작을 했던 것이다. “고맙구먼. 그건 그렇고 가로 경.”
와리스 후작의 말에 노마법사가 즉시 대답했다.
“예, 후작 각하.”
“본국에 지금 통신을 보내게나.”
“뭐라고 보고를 올릴까요?”
“트루비아의 국왕이 일주일 후에 사용하기 위해서 암소 네 마리를 보내 달라고 했다고 전하게나.”
“예? 암소라뇨?”
“자네는 그렇게만 전하게.”
“옛, 각하.”
노마법사는 그게 암호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급히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마법사가 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며 와리스 후작은 뒤에 서 있는 기 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르베이 경.”
“옛, 각하.”
“자네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나?”
“예?”
“기왕에 나온 김에 엔테미어 공국하고 크루마에도 잠깐 들를까 하는데 상관없겠느냐 이 말일세.”
“예, 곧장 돌아가야 할 정도로 특별히 바쁜 일은 없습니다, 각하.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고맙군. 그렇다면 통신이 끝난 후 먼저 엔테미어 공국으로 가세나.”
“옛,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