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12화 – 다크는 귀환할 수 없어

다크는 귀환할 수 없어

“전황은…, 전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들어오자,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기겁을 했다.

“토지에르 전하, 아직 몸도 성하지 않으신데……..”

“지금 그런 것 따질 때인가? 조국이 침공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침대에 편히 누워 있을 수 있겠는가? 빨리 전황이나 설명해 보게나.”

재촉을 당한 마법사는 토지에르의 뒤에 사색이 되어 따라와 있는 다론을 향해 먼저 눈길을 돌렸다. 다론은 더 이상 스승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약 간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했다. 다론의 허가가 떨어지자 마법사는 커다란 지도 쪽으로 토지에르를 안내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이라고 했느냐?”

토지에르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차단하고 있던 제자인 다론을 향해 무시무시한 분노를 머금은 눈으로 째려본 후 다시 눈길을 돌렸다.

“설명을 해 보거라. 그래도 아직은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옛, 적들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치가 노출되어 있었던 3, 4전대가 전멸당했고…….”

부하의 설명을 듣고 있던 토지에르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비틀비틀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의자에 앉은 토지에르의 안색은 회의실에 들어설 때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침상에 누워 있을 때 시중드는 하녀들이 쑤군거리는 말을 엿듣고 어느 정도 사태가 위급할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악화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 상도 못하고 있었다. 코린트가, 그 강력한 대 제국 코린트가 혼자도 아니고 주변의 강대국들을 끌어들어 전쟁을 시작할 줄이야…….

“코린트의 소규모 기사단들이 본국의 영내를 휩쓸고 있사옵니다. 오늘 파괴된 곡물 저장고만 해도 무려 여섯 군데이옵니다. 그리고 저장고와 인접해 있는 요새들 을 마구 파괴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도저히….”

“그만 해라. 대충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겠다. 루빈스키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그게 저…….”

“무슨 일이냐? 빨리 말해라.”

부하가 계속 눈치를 보며 말하지 못하고 있자, 보다 못한 다론이 뒤에서 끼어들었다.

“루빈스키 전하께서는 중상을 입으시고 치료 중이십니다, 스승님.”

다론의 보고에 토지에르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그만큼 그는 루빈스키 대공의 실력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루빈스키 대공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어떤 결과 를 초래하게 될지도 잘 알고 있었다. 루빈스키 대공이야말로 크라레스를 받치고 있는 가장 굵직한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뭣이? 누가 그분께 중상을 입혔단 말이냐? 설마 전하께서는 그 전멸당했다는 2개 전대만을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셨다는 거냐?”

“아닙니다, 스승님. 루빈스키 전하께서는 전쟁터가 아니라 적의 계략에 걸리셔서 중상을 입으신 겁니다. 비열한 코린트 놈들이 협상을 하자고 꾀어내서는 기습을 가한 것이죠. 중상을 입으시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탈출하신 것만도 천행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안전에 문제는 없겠지?”

“예, 크로돈시로 후송하여 치료하고 계십니다. 크로돈은 본국의 모든 타이탄 생산 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고, 또 그만큼 경비가 철저한 곳이라서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또 여차하면 영구 마법진을 이용해서 곧장 기사단도 투입할 수 있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누구냐? 폐하께서 직접 하시고 계시느냐?”

“아닙니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총사령관이 되셨습니다.”

토지에르는 이제야 치레아 대공을 생각해 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 그랬지.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계셨었지. 그래, 전하는 어디에 계시느냐? 설마,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기사단들을 이끌고 전장에 달려가신 것은 아니겠지?” “염려 놓으십시오, 스승님. 전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동쪽에 7전대를 파견하시고, 서쪽에는 치레아 기사단을 파견하신 후 돌아가는 사태를 관망하고 계십 니다.”

“그래? 별일도 다 보겠군.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분이 아니신데…….?”

토지에르가 평상시에 알고 지내던 다크라면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전장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토지에르는 그녀가 자신이 빠져나간 후 허술해진 황궁이 적에게 기습을 당하건 말건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위인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코린트는 텅 빈 상대방의 수도를 가만히 놔 둘 정도로 멍청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토지에르가 아는 한 코린트는 이동 마법을 통한 기습전을 매우 잘 활용할 줄 아는 교활함이 넘치는 제국이었던 것이다.

만약 루빈스키 공작이 건재한 상태라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위험한 작전이었다. 어쨌든 토지에르로서는 다크가 수도에 남아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니

내심 안심이 되었다.

“론가르트 경은?”

“예, 치레아 대공 전하의 명을 받고 수도 방어를 위해 힘쓰고 계십니다. 이리로 부를까요?”

“아니다. 먼저 치레아 대공 전하부터 만나 뵙고 상의를 드리는 것이 순서겠지. 론가르트 경은 그다음에 만나도 된다. 자, 그럼 안내하거라.”

“예, 스승님.”

“오오, 어서 오게나, 토지에르 경.”

토지에르는 총사령관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다크의 태도가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다크를 여자로 만든 것이 토지에르였기에 다크의 태도는 언제나 친밀한 가운데서도 상당히 차가운 무언가를 느끼게 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나 보니 그런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토지에르는 자신이 수척한 얼굴로 제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오다 보니 그녀가 약간 측은하게 생 각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넘겨 버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렇군. 그런데 몸은 왜 그런가? 자네가 아프다는 보고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예, 전하께 심려를 끼칠 것 같아서 입단속 좀 시킨 것이지요.”

“그건 그렇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알아냈나? 자네가 부상당한 것이 혹시나 그것을 조사하다가 생긴 변고가 아닌가 추측되네만……. 그렇지 않고 루빈스 키처럼 전쟁터에서 당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겠지.”

그 말을 하는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아주 강렬하게 빛났다. 토지에르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뺏어 내겠다는 뜻이 매우 강력하게 내 포되어 있는 눈빛이었다.

토지에르는 그 눈동자를 보고 주눅이 드는 자신을 느꼈다. 도저히 가냘픈 소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든 힘과 광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렇기에 토지에르는 여태껏 그러해 왔듯 상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둥글넓적 말해야 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자신도 모르게 광기 넘치는 눈으로 토지에르를 노려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그 방법을 토지에르가 알아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그것을 빼앗은 다음, 그 일을 아예 묻어 버릴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묻어 버리기 위해서 국가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도 아르티어스는 결코 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차마 다크보고 이곳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말은 못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막을 궁리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부상을 당한 것은 크루마의 자객들 때문이었습니다. 마법사들 수십 명을 풀어서 조사하고 있으니 조만간에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여태까지와 같이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겨 주십시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으음,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보였던 것 같군.’

아르티어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헛기침을 했다. 이제 자신이 알고 싶었던 사항을 알아낸 만큼, 토지에르에게 들키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험험, 알겠네. 그래, 무슨 일인가? 참, 세린! 차를 내오거라.”

세린이 차를 가져다가 각자 앞에다가 한 잔씩 놔뒀지만 아르티어스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전에도 론가르트와 대화가 잘 풀리다가 그놈의 차가 나온 후에 들 통 났던 뼈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토지에르는 차를 조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이번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실 요량이십니까? 세 방향에서 적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론에게 보고를 들으니 알카사스에서 휴전 을 교섭하러 왔던 사신을 반쯤 죽여서 보내셨다구요? 적의 사신을 그 모양으로 만드셨다면, 뭔가 다른 계획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헛! 겨우 그따위 일을 가지고 그러나? 나는 그놈의 능글거리는 낯짝이 보기 싫었을 뿐이지,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이 무계획적인 아르티어스의 대답에 토지에르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 삼면이 적인데, 그것들 중의 하나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아르티어스가 날려 버린 것이다.

“어휴, 그렇다면 이제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거기에 자극받은 알카사스는 전면 공세를 취해 올 텐데요.”

“스바시에 기사단을 보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야.”

“하지만 서쪽은 그렇다고 쳐도, 동쪽은요? 겨우 2개 전대만으로 얼마나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코린트를 막을 기사단은 하나도 없지 않습 니까? 이대로 나간다면 파멸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파멸은 무슨 파멸. 미란에 보낸 치레아 기사단이 돌아오면 상태는 좋아질 거야. 안 그런가? 자자, 최악의 상황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구.” “하지만…….”

“아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래두 그러네. 자, 나는 할 일이 많으니까 이만 가 보게나. 총사령관의 자리는 매우 바쁘다네.”

“그러지요.”

더 이상 다크와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끼자 토지에르는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일 생각을 깨끗하게 포기했다. 다크와 의논을 해 봤자 건질 게 없었으며, 그 역시도 다

크의 허락 없이도 아직은 모든 일을 장악해 나갈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스승이 일찌감치 손을 털고 나오자 불안감을 느낀 것은 다론이었다.

“이대로 놔둬도 되겠습니까? 스승님.”

“당연히 안 되지.”

“그렇다면?”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서 뒷일을 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단 둘째 황자님을 타이렌 제국으로 피신시키도록 해라. 본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쓸모가 없 지만, 그분이 적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문제가 커진다. 타이렌 제국은 힘이 있는 남방(南方)의 대국(大國)이니, 코린트가 압력을 가해 온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을 거 야.”

“예.”

“그리고 둘째 황자님과 함께 데이비드 폰 그래지에트 후작도 보내라. 만의 하나 이번 전쟁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함이다.”

“예.”

엘리안 황자가 크루마에 인질로 가게 되었을 때 만약을 대비해서 키워진 인물들이 데이비드와 타일러였다. 둘 다 황제의 친척들이었는데, 타일러가 조금 더 자질 이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있었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두 번째 황위 계승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어떻게 뒤집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아니던가? 황위 계승권은 평상시에는 엄청난 것이겠지만, 지금과 같이 뒤를 알 수 없는 전시에 는 매우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론 너는 지금 당장 크로돈으로 가거라.”

“예? 크로돈에는 무슨 일로 말입니까?”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아. 수도는 좀 위험하니 폐하를 크로돈에 계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러니 너는 폐하께서 그곳에서 일을 보시기에 충분하도록 만반 의 준비를 해 두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지금 당장 가 보거라.”

“예, 잘 처리해 두겠습니다.”

“이틀 내로 모든 것을 처리해 두도록! 폐하께서는 그날 근위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시며 크로돈으로 행차하실 것이다.”

“저, 스승님. 그렇다면… 크로나사 평원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포기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구나. 크로나사 평원을 지탱하고 있던 동맥(動脈)들이 하나하나 잘려 나가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 아 크로나사 평원은 통제 불능의 대지가 되고 말아. 오히려 이런 때는 적들이 원하는 땅을 내주고, 뒤로는 협상을 하여 최악의 사태만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지체하지 말고 빨리 가 보거라. 나는 기회를 봐서 폐하와 상의해 볼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스승님.”

“후우, 일이 왜 이렇게까지 꼬여 버렸는지……. 자네는 빨리 가서 와리스 후작보고 이리 오라고 전하게.”

토지에르의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오래지 않아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집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 보는 토지에르 공작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곧이어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말했다.

“안녕하시옵니까? 전하.”

토지에르는 뭔가 열심히 서류를 작성하다가 와리스 후작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면서 반겼다.

“그래, 빨리 왔구먼. 내 경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중대한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야. 해 주겠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전하.”

“경은 지금 바로 크루마로 가 주게. 지금 남은 희망은 크루마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뿐이야. 다소간의 출혈이 있더라도 상관없네. 자, 이건 전권을 위임한다 는 위임장일세. 최대한 빨리 일을 성사시키도록 노력해 보게.”

“이토록 저를 신임해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네. 크루마가 딴 마음을 먹는다면 자네는 거기에서 곧바로 체포될 수도 있네.”

“외교관에게 그 정도 위험이 없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사력을 다해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요. 그럼 가 보겠사옵니다.”

“그래, 수고해 주게나.”

토지에르는 방을 나서는 와리스 후작의 뒷모습을 보면서 일이 잘 성사되기를 기원했다.

토지에르는 잠시 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즉시 부축을 하며 말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전하.”

“이동 마법진으로 가세.”

“예?”

“치레아 공국에 볼일이 있어서 그래.”

“알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