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13화 – 다크가 크루마로 간 까닭

다크가 크루마로 간 까닭

수정 구슬 저 너머에서 들려온 보고는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고관들을 많이 구출했다고 하더라도, 정작 국왕이 빠져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미란 연합의 각 국가들은 모두 다 국왕이 통치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뭐라고? 그러니까 가므 국왕 구출에는 실패했다 이건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건 그렇고,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가므에 간 것이 아니었나? 지금 딴 곳에 있는 거야?”

“예, 지금 저희들은 가므 왕국의 남부에 와 있사옵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도로부터 남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옵니다.”

“가므 남부에? 거기에는 왜? 그곳에 감옥이 있었나?”

“그건 아니옵니다. 가므의 왕궁 잠입에 성공했사온데, 갑자기 적의 대 부대가 들이닥쳐서 포위당했사옵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탈출을 하다 보니 장거리 공간 이 동을 하기에는 시간 여유가 없어서, 단거리 이동으로 이곳에 온 것이옵니다. 지금 마법사들이 장거리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사오니, 한 시간쯤 후에는 크라 레인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좋아,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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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는 부하들과 합류하자는 말을 꺼내려다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첩자의 존재가 영 찝찝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시 말을 바꿨다. 부하들은 지 금 다크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알았다. 될 수 있으면 적들과의 충돌은 피하고 조심해서 돌아오도록!”

“옛, 전하.”

다크가 통신을 끝내자마자, 팔시온이 질문을 던졌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기는……. 엘프리안으로 가야지.”

“엘프리안? 크루마의 수도인 엘프리안 말이야?”

놀라서 외치는 팔시온에게 다크는 마치 옆집에 놀러가는 듯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크루마가 언제 중립국에서 적국으로 돌변할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 다.

“엘프리안시가 거기 말고 딴 곳에도 있었나?”

“그건 아니지만… 크루마라면 별로 사이가 좋은 나라가 아니잖아. 그리고 이번에는 미란까지 침공해 들어왔고 말이야. 이렇게 되면 적국이나 다름없다구. 거기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아직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주고받은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가서 미네르바를 만나자고 요청하면 들어줄 거야.”

“미쳤군, 그건 자살 행위야. 너무 위험하다구.”

“자살 행위인지 아닌지는 가 보면 알겠지.”

다크는 팔시온에게 대충 대답을 해 준 후 가스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스톤!”

“응?”

“엘프리안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줘!”

“하, 하지만…….”

“무조건 반대만 하지는 말아 줘. 미네르바를 설득해야만 일이 풀린다구. 아무리 내가 있다고 해도 코린트를 상대한다는 것은 힘들어. 요 근래 벌어진 전투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잖아. 녀석들이 나와 싸우지 않으려 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러니 그 녀석들이 나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크루마의 도 움이 필요하고 말이야. 미란의 국왕을 돌려받는 것은 그다음 일이라구.”

“알았어, 준비할게.”

가스톤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얇은 책자를 꺼낸 다음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크루마 크루마…, 여기 있군. 엘프리안 근처에 공간 이동하기에 괜찮은 장소가… 좋아, 엘프리안 근처로 강이 흐르고 있어. 그 위로 공간 이동하기로 하지.”

다크 일행은 마법진을 통해 크루마의 수도인 엘프리안시 외곽으로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마법을 역 탐색하여 추적하는 것은 알카사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엘프리안 근처까지 곧장 공간 이동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곳, 그곳의 위쪽에서 흰 빛이 번쩍하더니 사람들이 떨어져 내렸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장애물을 생각해서 15미터 상공에 공간 이동한 것이었기에, 모두들 엄청난 가속도가 붙은 채 땅에 떨어져야만 했다.

다크는 역시 고수의 면모를 보이며 마법사인 가스톤까지 껴안은 채, 안전하게 아래쪽에 착지했다. 그녀는 자신의 발 저 아래쪽에 얕은 개천이 흐르는 것을 알고는 한쪽으로 장풍을 일으켜 그 추진력으로 옆쪽으로 이동하여 땅 위에 착지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그 얕은 개천 위에 곤두박질을 쳤다.

“이런, 젠장할!”

아예 강이었다면 몰라도 얕은 개천이었기에, 모두들 진흙투성이가 된 채 엉금엉금 개천에서 기어 나왔다.

“이봐! 분명히 강 위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모르겠어. 분명히 지도에는 강 위라고 되어 있는데 말이야.”

가스톤은 당황하여 주위를 훑어봤다. 개천이 흘러가는 주변 지형을 봤을 때 개천의 규모가 훨씬 더 커야 함에도 그 흐르는 물의 양은 이상하리만큼 적었다.

“위쪽을 둑 같은 거로 막아 놨나? 지형으로 봤을 때, 꽤 많은 양의 물이 흘렀던 것 같은데 말이야.”

“에퉤퉤……. 벌써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으니 그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아. 젠장! 가스톤 너 또다시 이따위로 공간 이동을 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디야?”

“저쪽으로 한 20킬로미터 정도 걸어가면 엘프리안시가 나올 거야.”

“좋아, 제대로 온 모양이군. 자, 가자구.”

“전하, 큰일났사옵니다.”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는 이블리스를 바라보고, 미네르바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 조심스러운 그가 이렇듯 당황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큰일이 벌어진 듯했기 때 문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예, 미란에 치레아 기사단을 막기 위해 파견한 부대가.

“그 부대가 왜? 치레아 기사단을 놓쳤단 말이냐? 50대나 보냈는데?”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30대 이상 파괴당한 채 후퇴했사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네르바를 향해 이블리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설마가 아니옵니다, 전하. 전사자들 중에는 스펜 안트리아 경도 있사옵니다.”

스펜 안트리아라면 녹색 도마뱀 작전에 파견되었을 정도로 제법 실력 있는 근위 기사였다. 그런 그가 전사하다니…….

“뭣이? 그 정도의 실력자가 전사할 정도로 치레아 기사단이 강하단 말이냐?”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결정적으로 치레아 기사단을 몰아붙였을 때, 지원군이 나타났다고 하옵니다.”

“지원군? 크라레스에 그렇게나 많은 여유 부대가 있었단 말이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구나.”

“그것이 아니옵니다. 또 다른 기사단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치레아 대공이 움직인 모양이옵니다. 우스꽝스러운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을 붙인 초대형 청색 타이탄.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그녀뿐이잖습니까.”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알아챈 미네르바는 탁자가 움푹 패도록 두들기며 노성을 터뜨렸다.

“젠장, 샤트란은 어디 있나? 스펜과 함께 있었을 텐데.”

“지금 상처를 치료하는 중입니다.”

“뭐? 상처라고? 설마, 중상은 아니겠지?”

“다행히 샤트란 경의 상처는 그렇게 심하지 않사옵니다. 다만 타이탄이 좀 심하게 부서졌을 뿐이지요. 상처가 치료되는 대로 이리로 오라고 일러뒀사옵니다.”

“젠장, 어쩐지 시작이 순조로운 것 같더라니…….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크라레스는 코린트와 싸우는 데 바빠서 이쪽은 신경도 못 쓸 줄 알았는데, 나의 실수야.”

이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경비병에게 미네르바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이 미네르바에게 그 말을 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옛, 뮤토 백작님께서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급한 일이라고 하옵니다.”

“들라고 해라.”

“옛!”

뮤토 백작은 경비병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급히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옛, 치레아 대공 일행이 도착했사옵니다. 정문 경비병들로부터 연락이 들어왔기에 설마하면서 가 봤는데 진짜였사옵니다. 전하를 만나 뵙겠다며 시비를 걸고 있 사옵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사옵니까?”

뮤토 백작의 보고에 미네르바의 인상이 확 찌그러들었다.

“시비를 걸고 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만약 전하를 뵙지 못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옵니다.”

“젠장! 아이구, 골치야.”

도대체가 그놈의 치레아 대공은 자신이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뭔가 사건을 일으켜 대니 정말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힘으로 못 하게 막 으려니,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고……. 머리를 쥐어뜯듯 감싸 안았던 미네르바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의문을 제시했다.

“그녀가 왜 왔지? 동맹국인 미란을 집어삼켰다고 항의하러 왔나? 아냐, 그런 일이라면 그 뚱보 녀석을 보내도 충분할 텐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군.”

미네르바가 혼란스럽게 말하자, 이블리스가 옆에서 충고를 했다.

“혹시 동맹을 맺자고 온 것은 아닐까요? 정보에 의하면 크라레스는 지금 매우 힘든 모양이옵니다. 기사단 전력의 반 이상이 무너졌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으니 까 말이옵니다. 아무리 그녀가 키에리를 물리쳤을 정도로 강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녀 개인의 힘이지요. 국가 전체를 방어하는 데 있어 혼자만 강해 봐야 별로 도 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녀도 아마 깨달았을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치레아 기사단의 일로 미란에서 본국의 기사단과 한판 붙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쪽을 적 으로 돌렸을 때 뒤처리가 힘들다는 것을 그쪽에서도 느끼고는 뒷수습을 하러 왔다고 보시는 것이 맞을 것이옵니다.”

미네르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

“어떻게 하시겠사옵니까? 일단 만나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대공이라는 그녀의 신분으로 봤을 때 만나 보지도 않고 내칠 수는 없사옵니다.”

이블리스의 의견은 타당성이 있었다. 상대국의 대공이 사신을 보낸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왔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미네 르바는 뮤토 백작에게 지시를 내렸다.

“좋아, 이쪽으로 모셔라.”

이때 이블리스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안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일단 상대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눌 것인지, 또는 저쪽에서 어떤 것을 들고 나올지 의논하고 대비책을 세 울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그것도 그렇군.”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후 뮤토 백작에게 다시금 명령을 수정해서 지시했다.

“그들을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안내해라. 그런 다음 그들이 의심을 가지지 않도록 아주 성대하게 대접을 해 줘라.”

“예, 전하.”

지시를 받은 뮤토 백작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미네르바가 급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잊고 알아 보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 누구와 함께 왔던가? 혹시 붉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어쩌면 여자로까지 혼동할 만큼 아름다운 미청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던가?”

뮤토 백작은 잠시 치레아 대공과 함께 온 일행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네르바가 말한 인물과 대충 비슷한 인물조차도 거기에 포함된 사람은 없었다. 근육질, 아니면 나이 많은 비쩍 마른 마법사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람은 없었사옵니다. 일행은 네 명이 더 왔사온데… 생김새로 봤을 때 세 명은 기사였고, 한 명은 마법사인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기사들 중에서 둘은 남 자, 하나는 덩치 좋은 여자였사옵니다. 마법사는 한 40대쯤 되어 보였사온데, 뭔가 비범함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고 흔히 볼 수 있는 마법사들과 다름없었사옵니 다.”

“그런가? 그렇다면 드래곤은 오지 않았나?”

“예? 드래곤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닐세, 그냥 혼잣말이야. 그건 그렇고 만약을 대비해서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키게나.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코린트가 알아서 좋 을 게 없어. 혹시라도 코린트가 우리들끼리 동맹을 맺으려고 한다고 오해하고 군대를 보내온다면 매우 귀찮은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알겠는가?”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모든 것을 은밀하게 처리해 주게. 자, 빨리 가 보게.”

“옛!”

뮤토 백작이 나간 후 미네르바는 이블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쟉센에 나가 있는 근위 기사단을 불러들여라. 그리고 고위급 마법사들도 모두 다 소집해라. 만약에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준비를 좀 해 두는 것이 좋

지 않겠나?”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전하.”

“일단 숙소로 안내하기는 했는데,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좀 끌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근위 기사단이 도착하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릴 테고 말이야.”

이블리스는 창밖을 바라봤다. 정오는 한참 넘었지만, 아직도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시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최소한 서너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게 좋겠군. 자네가 직접 가서 통보하게. 그러면서 상대를 관찰해 봐. 참, 마법사 몇 명을 데리고 가서 상대방에 대해서 확실하게 조사해 보게.”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블리스와 의논하고 있는데, 뮤토 백작이 다시금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의 눈 주위는 방금 전 나갔을 때와는 달리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명령받은 대로 손님 들을 숙소로 안내하려고 하다가, 다짜고짜 미네르바를 먼저 만나겠다고 우기는 다크에게 한 대 맞았던 것이다. 뮤토 백작은 이 성가신 방문객을 어떻게 좀 처리해 달라고 미네르바에게 다시금 간청하기 위해 올라온 것이었다.

“전하! 도저히 안 되겠사옵니다. 일단 전하를 뵙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좀 선처를 해 주시옵소서.”

뮤토 백작도 꽤 뛰어난 검객이라고 하지만, 미네르바가 알고 있는 한 치레아 대공은 그보다 훨씬 윗줄에 놓이는 검객이었다. 뮤토 백작 정도는 한 다스가 덤벼도 이길 수 없는……. 미네르바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안내해라.”

“옛, 전하.”

미네르바는 방문을 나서며 이블리스에게 지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금 상의해 둔 일을 모두 처리해 두게.”

“옛,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