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14화 – 귀한 손님을 이따위로 접대하나

귀한 손님을 이따위로 접대하나

“오랜만이군. 요즘 크루마에서는 귀한 손님을 이따위로 접대하나?”

새파란 꼬마 숙녀에게서 나오는 말투치고는 매우 고약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꾹꾹 참으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지금 아주 바빠서 말이지. 그러니까 제발 좀 기다려 주면 안 될까?”

“언제까지?”

“오래 기다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급한 일만 대충 처리하고 바로 만나면 되잖아. 너도 멀리서 왔으니 좀 쉬어야 할 거고 말이야.”

미네르바는 다크와 그 일행들을 슬며시 관찰한 후 다크가 데려온 부하들의 옷에 상당량의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일단 휴식부터 좀 취하고 있으라구.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어?”

“이봐, 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걸 물었어.”

미네르바는 끝까지 뻑뻑하게 나오는 상대를 향해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다시금 미소를 보냈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함께 대화를 나누기로 하지. 어때? 식사도 하고, 그러면서 함께 대화도 나누면 좋잖아? 지금 나로서는 그게 최선의 대답이야. 지금 나는 몸 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구.”

“좋아, 그렇게 바쁘다니 기다려 주지.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까지만이야. 더 이상은 못 기다려, 알았어?”

“분명히 약속은 지킬게. 자, 뮤토 백작이 안내해 줄 거야. 샤워나 하면서 피로를 풀라구.”

미네르바는 다크를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서 보내는 데 성공했다. 다크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미네르바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다크 일행은 뮤토 백작의 안내로 황궁의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근사한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외국의 사신들이 왔을 때 묵는 곳이었기에 방들은 대단 히 호화롭기는 했으나 감시하기 좋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건물 자체가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건물 주위에는 경비병들의 막사들 이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마도 사신들이 안전하게 체류하다가 돌아갈 수 있도록 경호하는 것과 함께, 그들이 몰래 첩보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인 것 같았다.

다크 일행은 오늘 새벽에 크라레인시를 떠난 후 전투를 세 번이나 겪었기에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리고 있었으므로 숙소로 안내되자마자 서둘러 목욕부터 했다. 뜨 끈한 물로 간단하게 씻으면서 그들은 눈치 빠른 크루마 측의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그들이 욕실에서 나오자 하녀들이 신선한 과일들과 주스, 차 따위를 가져왔다. 미카엘은 차 맛을 살짝 본 후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 좋은 차로군. 맛도 좋지만 향이 정말 근사해. 확실히 여행은 신분이 높은 사람하고 같이 다녀야 해. 대접이 다르거든.”

미카엘이야 폼 잰다고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여태껏 변두리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했던 털털한 팔시온은 차가 영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찻잔을 내려놓고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시녀에게 물었다.

“시원한 맥주는 없소?”

맥주는 서민들이 마시는 대중적인 음료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런 천박한 음료를 마시지 않았기에, 황궁에는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신 이 촌놈이라고 광고하는 상대의 모습에 시녀는 얼굴에 떠오르는 비웃음을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맥주는 드시는 분이 안 계셔서요. 대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릴까요? 밖에 사람을 보내어 맥주를 사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말입니다.”

“그럼 포도주를 가져다주시오. 그리고 독한 술이 있으면 한 병 가져다줬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이때 다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봐, 이런 거 말고 술은 없어?”

다크의 말에 시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시녀는 바로 이 눈앞에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녀가 가장 극진히 모셔야 할 높은 분이라는 귀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저기 시원한 포도주가 있사옵니다, 전하. 혹시 백포도주를 원하시옵니까?”

“그런 거 말고 맥주는 없어? 뜨끈하게 목욕한 후에는 맥주가 최곤데 말이야.”

투덜거리는 소녀의 말에 시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고귀해 보이는 소녀가 맥주 같은 천민들이나 마시는 술을 달라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죄송하옵니다, 전하. 곧 사람을 보내어 준비해 올리겠사옵니다.”

“빨리 가져와. 여기 맥주 맛은 어떤지 궁금하군.”

“예, 전하.”

시녀가 나가고 나자 팔시온이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꼼짝없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로군.”

“어쩔 수 없지. 미네르바가 바쁘다니까 말이야. 일단 이쪽에서 부탁을 하러 왔으니 그 정도 기다려 주는 예의는 지켜 줘야지.”

모든 것을 간단히 넘겨 버리는 다크였다.

다크 일행이 저녁 회담을 기다리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미네르바는 여러 가지 일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네르바에게는 지금 일분일초 가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그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옛, 쟉센 방면에 나가 있던 마법사들과 근위 기사단이 방금 도착했사옵니다.”

“좋아, 제법 서둘러서 왔군. 그리고 조사해 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예, 역시 세 명은 기사였고, 한 명은 마법사였사옵니다. 루크란의 말로는 마법사를 제외하고 기사들의 경우 모두들 꽤 실력이 좋다고 하더군요. 마법사는 아무리 후하게 봐줘야 4사이클급 정도로 실력이 떨어졌사옵니다. 그리고 그녀의 경우는 아무런 것도 알아낼 수 없었사옵니다. 루크란은 아마도 그녀가 마법이나 뭐 그런 것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확실한 건가?”

“옛! 루크란에게서 제가 직접 들은 것이니만큼 착오는 없을 것이옵니다.”

마법사는 신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절대적인 마나의 양을 조사하는 뷰 마나 포스와 마법을 포착하는 뷰 매직 포스라는 마법을 쓸 수 있었기에 상대방의 실력을 조 사하는 데는 적격이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렇다면 드래곤이 오지 않은 게 확실하군.”

“예? 드래곤이라니요?”

“아니, 아니다. 자네가 지휘해서 근위기사단원들을 사방에 배치하고, 마법사들 또한 원거리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옛.”

“그래, 치레아 대공 일행은 지금 뭐 하고 있다고 하던가?”

“예, 시녀들의 보고로는 모두들 한 방에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전했으니까 아마 그때까지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 낼 생각인 모양이지요.”

“좋아. 계속 감시하고, 뭔가 특이한 일이 있으면 지체 없이 나에게 보고하도록 해라.”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무슨 일이냐?”

문이 살짝 열리고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부동자세로 보고했다.

“뮤토 백작님이 전령을 보내오셨사옵니다.”

뮤토 백작은 눈이 퍼렇게 멍든 꼴사나운 모습을 지극히 높은 상관에게 보이기가 싫었기에 전령을 보내온 것이었다. 경비병은 전령에게서 전달받은 서류를 미네르 바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미네르바는 그 보고서를 급히 읽어 본 후 중얼거렸다.

“알 수가 없군.”

“예?”

미네르바는 그 서류를 이블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거기에는 지금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이 전권대사의 자격을 가지고 도착했다고 쓰여 있었다.

“좀 이상하군요. 치레아 대공이 여기 와 있는데, 왜 와리스 후작이 왔을까요? 그것도 전권대사의 책무를 띠고 말입니다. 혹시, 그녀 독단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닐 까요? 그러니까 와리스 후작도 여기에 따로 온 것이구요. 앞뒤가 맞지 않사옵니까?”

그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그것만큼 앞뒤가 잘 맞는 가정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짐작만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지.”

미네르바는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그녀의 부름에 즉각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옛, 전하.”

“가서 가레신 후작을 불러와라.”

“옛!”

잠시 후 가레신 후작이 들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이 도착했는데, 경이 좀 만나 줘야겠어.”

“예, 전하. 그런데, 뭐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지금 치레아 대공도 협상을 하러 와 있는데 그쪽의 말도 들어 봐야 할 것 같거든.”

“예? 그렇다면 정식으로 협상하러 온 사람은 누군가요?”

“그게 확실하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경은 시간을 끌면서 치레아 대공이 왜 여기에 왔는지를 조사해 봐.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말이 야……. 혹시 와리스 후작은 그녀가 이리로 온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 무슨 소린지 알겠나?”

가레신 후작은 음흉스레 미소를 지었다.

“예, 이쪽은 최대한 숨기면서, 저쪽의 정보만을 긁어내서 보고 올리겠사옵니다.”

“부탁하네.”

“옛, 전하.”

가레신 후작이 회담장으로 향한 후, 밖에서 경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샤트란 페르 백작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라고 일러라.”

“옛!”

곧이어 샤트란이 창백한 얼굴로 들어왔다. 샤트란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검을 풀어서 앞에다가 놓은 후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비장(悲壯)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료와 많은 부하들까지 잃었사옵니다. 그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상대가 치레아 대공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옛, 전하.”

“그녀가 상대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처음부터 그녀가 상대가 될 줄 예상했다면 너희들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일은 크라레스가 간섭해 오지 않 을 것으로 예상한 나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다. 일어서거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많은 부하들을 잃은 것은 명백한 저의 지휘 미숙이옵니다. 처벌해 주시옵소서.”

“그게 아니라는데도 그러는군. 썩 일어서지 못할까!”

“예.”

“너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본대에 합류하여 포위망을 굳건히 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라.”

“예? 무슨 포위망 말씀이옵니까?”

“치레아 대공이 지금 부하들과 이곳에 와 있다. 아무래도 너희들과 싸운 후 곧장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만약 협상이 결렬된다면, 그때는 뭔가 조치를 취하게 될 것 이다. 그러니 경은 딴생각하지 말고 임무에 충실해라.”

“예, 전하. 그럼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양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뚱뚱이와 뻔뻔이는 다시금 만나게 되었다. 둘 다 이 방면에는 닳고 닳은 인물들이라서 그런지 그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집에 가려져 있는 자그마한 눈으로 가레신 후작을 훔쳐보며 넉살 좋게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가레신 후작 각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가레신 후작은 상대의 말을 점잔은 어조로 받았지만, 그의 말은 상당히 꼬여 있었다.

“나야 언제나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요즘 귀국의 형편이 좀 안 좋은 모양이군요. 전에 만났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소이다.”

상대방의 비꼬는 말을 와리스 후작은 아주 넉살좋게 넘겼다.

“허허헛! 살이 너무 찐 것 같아서 요즘 살을 좀 뺀다고 노력 중이지요. 아무래도 그 노력의 결실이 드러나는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각하.”

‘너구리같은 놈!’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가레신 후작은 슬쩍 화제를 바꿨다. 일단 미네르바가 알아 보라고 지시한 것을 슬쩍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알아내 야 하니까.

“그건 그렇고, 요즘 치레아 대공께서는 안녕하신가? 6년 전에 몇 번 뵈었는데, 좀 더 성숙해지셨는지 궁금하군요. 그때도 대단하셨지만 지금은 얼마나 더 아름다 워지셨는지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소.”

갑자기 상대가 왜 치레아 대공을 거론하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와리스 후작은 약간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글쎄요, 대공 전하께서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시지요. 아예 세월이 그분을 비껴가는 듯 느껴지니까 말입니다.”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오셨소이까?”

“예, 귀국과 좀 더 관계를 친근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관계를 친근하게라……. 사실 6년 전에 본국과 귀국은 코린트를 상대로 싸운 혈맹이 아니었소?”

“그랬었지요.”

“그런데 왜 지금에 이르러서 이 모양이 된 것이오? 그건 다 귀국에서 미란을 끼고 돌면서 본국과의 긴장 상태를 조성해 나갔기 때문이 아니요? 이 모든 것이 다 귀 국의 책임인데, 지금에 이르러서 갑자기 관계를 정상화하자니 그게 말이 된다고 하는 거요?”

상대방의 통렬한 공격에 와리스 후작은 먼저 웃음부터 터뜨리면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노력했다. 전과 달리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저 뻔뻔이 쪽이었으 니까 말이다.

“허허헛, 가레신 각하, 그건 귀국의 오해입니다. 6년 전에 코린트를 상대로 전쟁을 했던 것은 귀국과 본국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란도 본국의 맹방이었지 않습 니까? 그들이 부탁을 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국의 입장도 좀 이해를 해 주셔야지요.”

“으음, 그렇다면 본국은 귀국의 맹방이 아니었소? 미란만 끼고 돌면서 이쪽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 정당하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거요?”

“허허헛, 그게 다 오해라니까 그러시네요. 사실 본국이 귀국에게 뭐 못 할 짓을 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귀국에게 선전 포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귀국의 상인들 이나 여행자들을 핍박한 적도 없었구요.”

“내가 말하는 것이 결코 밖으로 드러난 그런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러는군요. 좋소. 그래, 관계를 정상화하고 싶다고 하는데 귀하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소?”

와리스 후작은 상대가 그런 질문을 하는 목적을 알지 못했기에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의 수중에는 토지에르 공작이 써 준 위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에 르가 쓰기는 했지만, 그 위임장에는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었기에 완벽한 것이었다.

“허헛, 제가 그런 권한도 없이 이 자리에 나타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에 가레신 후작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와 있는 치레아 대공은 또 뭐란 말인가?

“아무리 귀하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귀국과 본국의 악화된 관계를 감안했을 때 귀국의 공작급이 와서 회담을 하는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옳지 않 소?”

“허허헛, 그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본국은 전쟁 중이기에 공작님들은 이런 외교 협상을 하실 만한 시간을 내시기가 어렵지요.” 가레신 후작은 와리스 후작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와리스 후작은 치레아 대공이 크루마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에 틀 림없었다. 와리스 후작이 전권 위임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와리스 후작을 이곳으로 파견한 크라레스의 상층부 권력자들도 치레아 대공이 이곳으 로 온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치레아 대공은 완전히 단독 행동으로 이곳에 온 것이 분명히 입증된 것이다.

가레신 후작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같은 얘기를 몇 차례나 돌린 후, 와리스 후작에게 내일 다시 회담을 진행하자고 하고는 숙소로 돌려보냈다. 그런 후 곧바로 미 네르바에게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안 그런가? 이블리스.”

“그렇사옵니다, 전하. 치레아 대공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뭐? 그래도 괜찮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내친김에 왔다면 충분히 그래도 상관없사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손쉬운 상대가 아닌데? 또 그녀를 없애려면 이쪽의 피해도 엄청날 거야. 그녀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고수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실력자니 까 말이야.”

“아니지요. 꼭 그렇게 근위 기사단을 투입해서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을 없애는 방법은 그런 직선적인 것 외에도 많은 추가적인 방법들이 있으니까요.” “그래?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가?”

“암습을 하는 마법이라든지, 약물 같은 것이 많다고 들었사옵니다. 역사상 많은 위대한 무인들이 암습에 의해 세상을 뜨지 않았사옵니까? 조용히 처리하는 데는 역시……. 흐흐흐”

“그것도 그렇군. 여봐랏! 마리나 지오그네를 불러와라.”

잠시 후 세련된 용모의 여마법사가 들어왔다. 미네르바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어서 오게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어.”

“무슨 일이시옵니까?”

“아주 실력 좋은 기사 한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서론이 원체 황당한 것이었기에 지오그네는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예? 미네르바 님이시라면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단히 하실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것을 저에게 물으시옵니까?”

“내 실력으로도 힘든 녀석이 있으니까 그렇지.”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관을 바라봤다. 미네르바의 실력을 잘 아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그렇게나 강한 인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어떤 방법이 있겠나?”

“그, 글쎄요……. 상대가 기사입니까? 아니면 마법사?”

“기사라네.”

“예, 그렇다면 마법이나 약물 종류를 쓰는 것이 좋겠지요. 원래 기사들의 경우 마법사의 기습 공격에 조금 취약한 면이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보다는 약이….”

미네르바는 살짝 눈을 빛내며 말을 받았다.

“마법보다는 약이 효과적인가?”

“예, 그렇사옵니다. 물론 상대가 대비를 안 하고 있다면 마법도 효과적이옵니다만, 상대를 제압하기만 하는 마법은 슬립(Sleep) 등 소수로 제한되기에 대비책을 세우기도 쉽사옵니다. 그런 마법들의 경우 대부분 불시에 적을 기습하기 위해 아주 빨리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그만큼 파워는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좀 괜찮은 실력자 정도만 되어도 그런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기에 그런 상대라면 대비하기 힘든 약 종류가 효과적이지요. 상대를 죽이는 독약부터 시작해서 잠을 재우 거나 몽롱하게 만드는 마취제까지 별의별 것이 다 있지요. 그 종류도 수백 종이 넘기에 일일이 대비책을 세우기도 어렵고 말이옵니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말이지. 아주 어려운 상대가 한 명 와 있는데 말이야.”

“예? 누군데 말씀이시옵니까?”

“전에 경도 만나봤겠지? 다크 폰 치레아 대공 말이야. 그녀가 여기에 와 있어. 경도 알다시피 그녀는 검호 키에리를 격패시켰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지. 그녀를 제압할 약물이 있을까? 상대는 매우 눈치 빠르고 괴팍한 녀석이라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아주 효과가 뛰어나면서도 비밀스런 것이 좋겠지.”

물론 지오그네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6년 전의 전쟁에 참가한 사람이라면 크라레스 파견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그녀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세가 어려웠 을 때, 움직이지 않고 있는 크라레스군을 중앙 쪽으로 돌리기 위해 살라만더 기사단에 찾아가서 당했던 그 수모를 그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감히 대 크루마 제 국의 궁정마법사인 자신을, 공작도 아닌 가짜가……. 이제 그때의 수모를 돌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오그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