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16화 – 모든 기억을 지워라

모든 기억을 지워라

“괜찮을까?”

가스톤은 창가에 서서 밖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과 어조에는 다크에 대한 우려감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스톤의 행동이 못마땅 했는지, 미카엘은 느긋한 표정으로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일침을 놨다.

“아마 괜찮을 거야. 다크가 누구야? 이 시대 최강이라고 불렸던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물리친 녀석이야. 걱정 말라구.”

미카엘과 함께 적진 안에서 느긋하게 술타령을 벌이고 있는 팔시온과 미디아를 노려보며 가스톤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구. 너는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이냐? 우리들은 지금 적국의 한복판에 있는 거라구. 그것도 코린트 다음간다는 크루마에 말이야. 저기를 봐. 네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사방에 기사들이 득실거리고 있다구. 그것도 대단히 수준 높은 기사들이 말이야.”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응대였다. 팔시온 등 검을 쓰는 무리들에게 있어서 다크에 대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크루마의 황궁이니 당연하겠지. 황궁에 있는 기사들 하면 근위 기사 아니겠냐? 오히려 수준 낮은 녀석들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야. 쓸데없는 잔소리하 지 말고 여기 와서 술이나 한잔해.”

“젠장, 모두들 간뎅이가 부었는지, 아니면 아예 겁을 상실했는지…….?

“너는 기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는 거야. 다크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녀석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혹시 모르지, 크루마의 근위 기사단이 총출동한다면 가 능성은 있겠지. 하지만 다크가 정면 대결을 포기하고 그냥 도망치려고 한다면 막을 놈은 아무도 없어. 그것을 미네르바도 잘 알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구.” “젠장, 들어간 지 두 시간이 넘었어. 이 정도면 식사를 해도 수십 번은 더 했겠다. 그런데도 왜 안 오는 거야? 역시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해.”

그런 가스톤을 보고 미카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너는 근검절약하는 크라레스에만 있어서 잘 모르고 있어. 이런 대 제국 공작의 식사 초대를 받았다면 최소한 몇 시간은 먹고 마시게 되어 있다구. 별의별 해 괴한 것들로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자신들이 미식가(美食家)라고 자처하는 놈들도 많지만, 미네르바의 직위나 다크의 직위를 감안한다면 결코 싸구려 음식을 대 접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 거기에다가 다크는 협상까지 할 거잖아. 그것까지 감안한다면 두 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알겠어?”

“그도 그렇군.”

“너도 서류 더미에만 파묻혀서 궁상떨지 말고 상류 사회의 생활에 대해서 좀 배워라.”

“제기랄! 그래 너 잘났다.”

이때 저쪽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췄다. 가스톤은 창가에 서 있었기에 그것을 재빨리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그들의 허리에 검이 걸려 있는 것으 로 보아, 모두들 기사들인 듯했다. 가스톤은 중얼거리면서 주문을 외운 후 나지막하게 시동어를 외쳤다.

“뷰 마나 포스!”

마나포스를 관찰해 보니 이곳에 접근 중인 인물은 네 명. 역시 모두 다 근위 기사급의 강력한 마나를 몸속에 지니고 있었다.

일단 자신의 예상이 맞아 떨어지자 가스톤은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다. 여기저기에 엄청난 마나의 덩어리들이 보이고 있었다. 최소한 가스톤이 확인한 것만도 10 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야의 저 뒤편에 진홍색의 붉은 덩어리가 보였다.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대상은 엄청난 마나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사방에 퍼져 있는 기사들의 몸체가 짙은 주황색인 것을 감안한다면 차원을 달리하는 고수임이 분명했다.

가스톤은 처음엔 다크인 줄 알고 활짝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곧 굳어 버렸다. 만약 그가 다크라면 결코 저쪽에 서 있지 않고 곧장 이리로 들어왔을 것이다. 가 스톤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짤막하게 외쳤다.

“미네르바다.”

“미네르바가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기에 미네르바가 와 있어.”

“헛소리하지 마. 미네르바는 다크와 함께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에 와 있겠어?”

미카엘은 코웃음을 치며 넘겨 버렸지만, 팔시온은 그렇지 않았다. 팔시온은 그만큼 가스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미네르바가 확실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야. 다크라면 이리로 곧장 들어왔을 거 아니야? 그런데 저기에 그냥 서 있다구. 그리고 지금 저쪽에서 네 명의 기사가 이리로 오고 있어.” 가스톤의 설명에 팔시온의 안색은 급격히 굳어졌다. 미네르바가 이리로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지금 다크와 회담을 나누고 있어야만 했던 것이 다.

“젠장, 뭔가 잘못되었어. 모두들 준비해라, 탈출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거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어. 상대는 근위 기사야. 시간을 끌면 안 된다구. 빨리 준비해, 빨리!”

허둥지둥 자신의 짐을 챙기려고 하는 미디아에게 팔시온은 짤막하게 지시했다.

“이봐, 짐 챙기고 앉아 있을 시간 없어. 모두 다 놔두고 이리 와.”

“에잇! 저거 돈 많이 준 건데…..”

“그런 것은 목숨 붙어 있으면 다시 살 수 있어. 자, 준비해!”

팔시온이 긴장을 풀지 않고 천천히 검을 뽑아 들자 미디아와 미카엘도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둠 속이야. 재빨리 행동하면, 잘하면 탈출할 수 있을 거야. 자, 가자! 이봐, 가스톤 뭐 하고 있는 거야?”

팔시온은 혼자서 뭔가 중얼거리며 가만히 있는 가스톤을 향해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여태껏 자기 혼자서 위험하다느니 떠들어 댄 주제에, 정작 탈출하려고 하니 까 거기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가스톤은 중얼거림을 멈춘 후 손을 동료들을 향해 앞으로 쭉 뻗으며 외쳤다.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

“뭐 하는 짓이야?”

“나는 도망쳐 봐야 곧 잡힐 거야. 마법으로 마나를 감췄어. 너희들만이라도 탈출해라.”

“이봐, 그래도 함께 탈출해야지.”

“내가 가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야. 모두 어서 가!”

가스톤은 확정적으로 말한 후 다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봐, 가스톤!”

하지만 가스톤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젠장! 그래, 너는 여기에 남아 있어라. 꼭, 구하러 올게. 가자!”

슬쩍 돌아서는 팔시온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오랜 시간 가스톤과 함께 생활했던 팔시온은 그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팔시온은 가스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듀에이트인 자신들의 탈출도 장담을 못 하는 판에,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느라 거의 마법 수련을 하지 못했던 가스 톤까지 함께 데려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쨍그랑!”

셋은 유리창을 박살 내며 도약했다. 그들의 목표는 성벽! 성벽을 건너 뛰어 드넓은 밖으로 나가면 주위가 어둡기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거기에 희망을 걸고 달려 나가는 것이다.

“쫓아라!”

“저놈들 잡아랏!”

순식간에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도망치는 팔시온 일행을 따라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가스톤이 그들의 뒤통수에다가 대고 마법을 뿜어냈다. 시간이 없었기에 그렇게 강력한 마법은 쓸 수 없었지만, 어쨌든 커다란 불꽃 덩어리가 기사들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다.

근위 기사들은 설마 방 안에 누군가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가다가 뒤쪽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들을 향해 불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을 눈치 챘다.

“마법이다!”

가스톤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에 맞은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근위 기사답게 옆으로 살짝 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조금의 시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상대와의 거리는 조금 더 벌어졌다.

이제 멀어져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가스톤은 창가에 그냥 서 있었다. 사실 도망갈 방법도 없었기에 거기에 서서 동료들이 무사히 탈출하기를 빌며 그들을 배웅했 던 것이다. 이때 그의 뒤에서 숨 막히는 마나의 힘이 느껴졌다. 가스톤이 천천히 뒤로 돌아서자 거기에는 차가운 표정의 미네르바가 서 있었다.

“잔꾀를 부리다니…….?

“퍽!”

미네르바는 가스톤의 따귀를 호되게 갈긴 후 쓰러지는 가스톤을 가리키며 싸늘한 어조로 명령했다.

“체포해!”

실내로 들어서는 미네르바를 향해 이블리스가 치하를 보냈다.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고마워, 이블리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마법사 녀석이 잔꾀를 부리는 덕분에 놈들이 다 도망쳐 버렸어. 제2근위대를 전부 투입했는데도 놓치다

니……. 으이그!”

“어두워서 그럴 것이옵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없으니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이옵니다. 날이 밝은 후 본격적으로 추격을 시작하면 곧 잡아들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2근위대만으로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쟉센에 나가 있는 제네리아 기사단을 불러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마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 옵니다. 그들까지 동원한다면 좀 더 빨리 잡아들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좋아, 그렇게 하게.”

“옛!”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용기사들을 출동시키도록!”

“옛, 전하. 용기사들에게 지시해 두겠사옵니다.”

“참,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의 양아버지가 찾아올지도 몰라. 그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다크의 양아버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블리스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예? 크라레스가 감히 이곳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겠사옵니까? 설혹 조사하기 위해 온다고 해도 대충 변명을 둘러대어 내쫓든지, 아니면 감옥에 집어넣으면 될 것 이 아니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의외의 대답에 이블리스는 당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설마 그녀의 양아버지도 엄청난 실력의 기사이옵니까?”

“아니, 드래곤이다. 그것도 에인션트급에 가까운 골드 드래곤이지. 도대체 어떻게 부자간이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미네르바의 말에 이블리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드래곤이 양아버지라면……. 결코 드래곤은 자신의 아들이 행방불명된 사실을 묵과하지 않을 것은 분 명했다.

“그렇다면 계획을 좀 수정해야 하옵니다. 드래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으니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이번 사실을 알고 있는 병사들의 입단속부터 해야지요. 그렇다고 그들을 없애 버릴 수는 없사옵니다. 황궁의 병사들의 상당수가 행방불명된다면 그들의 가 족들을 통해서 소문이 퍼질 것이고, 그것을 드래곤이 들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이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다가 마법으로 기억을 지워야 하옵니다.”

“음…, 기억을 지운다고? 그런 마법도 있었나?”

“예, 있사옵니다. 마리나 지오그네 경에게 지시하면 될 것이옵니다.”

“좋아, 그다음은?”

“최대한 빨리 도망친 녀석들을 체포해 와야겠지요. 그런 후 그 작전에 동원된 인물들의 기억도 지워 버려야 하옵니다. 드래곤은 매우 영리하옵니다. 그리고 집요 한 몬스터지요. 조금이라도 빈틈을 만들었다가는 큰일이 나옵니다.”

“알겠다. 지오그네에게 지시하도록 하지. 그럼 새벽에 시작될 수색 작전에 대해 만전을 기해 두도록 해라.”

“옛, 전하.”

미네르바는 마리나 지오그네가 기다리고 있을 지하 감옥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