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21화 – 아르티어스의 분노 (12권 끝)
아르티어스의 분노
“이보게 젊은이.”
젊은 병사는 자신을 젊은이라고 부른 이 새파란 놈을 같잖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의 옷이 대단히 고급이었고, 부티가 팍팍 나는 것을 보고는 처음에 생각했 던 단어를 꿀꺼덕 삼킨 후 공손히 대답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는데 말이야.”
“예, 질문하시죠.”
“여기 내 아들 녀석 안 왔나? 그 녀석 이름이 여러 개라서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말에 젊은 병사는 사납게 콧김을 뿜어냈다. 아침부터 별 해괴한 놈이 황궁 정문에 접근해서는 꼴값을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기기는 꼭 얄상하니 계집처럼 생겨 가지고, 뭐, 아들을 찾아? 여기가 탁아소인 줄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젊은 병사는 상대가 찾는 아들의 이름이 뭔지 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상대에게 쏘아 대기 시작했다.
“잘못 찾아왔소. 여기는 대 크루마 제국의 황궁 정문이란 말이오. 딴 데 가서 알아 보쇼. 아침부터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그나마 병사로서는 최대한 자신의 분노를 억제한 ‘친절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미네르바라는 아가 씨 어쩌구…’하면서 물어볼 예정이었지만, 병사의 불친절한’ 대답을 듣고는 예정대로 ‘미네르바’를 운운할 정도로 속이 넓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다 평소에 아 르티어스가 인간을 하등한 벌레쯤으로 생각했기에 얻어진 고매한 습관이었다.
“뭐야, 그럼 네놈의 눈에는 내가 미친놈으로 보이냐?”
“그럼 아니요?”
“크아악, 이런 빌어먹을 자식!”
아르티어스의 손이 앞으로 쭉 밀려가는 것과 동시에 병사의 목이 잘려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 가공할 정밀도를 보이는 아르티어스 옹의 마법이 작렬했던 것이다. 병사의 목이 아래로 뚝 떨어지고, 곧이어 몸이 옆으로 넘어지는 것을 본 다른 병사들이 창과 칼을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이런 벌레 같은 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모두들 죽어 버려라, 풍검(風劍)!”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용언 마법이 작렬하는 그 순간, 그를 향해 달려오던 병사들의 몸은 피를 뿜으며 일제히 상하로 분리되었다. 정말이지 가공스러운 장면이었 다.
“마법사다, 기사님들께 연락해라.”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10여 명의 기사들이 뛰어나왔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기사들이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 오는데도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 다는 듯 배짱 좋게 나갔다.
“네놈들도 내 아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
그 말에 기사들은 어리둥절해져서 서로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마침, 그날 당직인 뮤토 백작이 웬 침입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서둘러 달려 나오 다가 이 모습을 봤다.
뮤토 백작은 치레아 대공과 함께 전쟁을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녀와 함께 다니던 이 붉은 머리의 미청년 또한 알고 있었다. 미네르바의 지시를 받은 지오그네 에 의해 치레아 대공 일행이 이곳에 왔던 기억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오래전의 그 기억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잠깐! 멈춰라!”
뮤토 백작은 서둘러 아르티어스의 앞으로 달려간 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 혹시 제1차 제국 전쟁 때 크라레스군 진영에 계시던 마법사가 아니십니까?”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자 아르티어스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자네,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전하와 함께 계시던 모습을 몇 번 뵌 것 같은데요.”
“그래그래, 자네라면 내 고충을 이해하겠군. 그 아이를 찾아서 이리로 왔어. 어디 있지?”
“예? 그분께서는 이리로 오신 적이 없으신데요?”
어리둥절해서 말하는 상대의 표정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연극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어디로 갔을까? 이번에 만난 상대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친절한 녀석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노기를 약간 가라앉히고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사용할 대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지, 자네는 잘 모를 수도 있지. 가서 미네르바라는 아가씨를 데려오게. 아르티어스가 보자고 전하면 될 거야.”
뮤토 백작은 상대가 미네르바 공작을 보고 ‘아가씨’라고 호칭했지만, 일단 미네르바와 어느 정도 면식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무례함을 참았다.
“저, 전하께 이곳까지 오시라고 전할 수는 없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뮤토 백작은 재빨리 기사들 중의 한 명에게 지시했다.
“전하께 아르티어스란 분이 찾아오셨다고 전해라.”
“옛!”
일단 뮤토 백작은 기다렸다. 그쪽으로 보낸 기사가 지금 정문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 미네르바에게 설명을 할 것이다. 만약 미네르바가 여기서의 10여 명의 병사 들이 죽어 나간 사실을 묵인한다면 그것으로 넘어가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르티어스라는 이 녀석과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10여 명의 기사들이 앞에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이놈을 상대로 아무래도 체포하겠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뮤토 백작이 미네르바에 게로 보낸 기사는 구원병을 청하는 전령과도 같은 역할로 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뮤토 백작은 구원병이 달려와서 이 녀석을 체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태는 전혀 예상 밖으로 진행되었다. 미네르바가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왔던 것이 다. 미네르바는 부하들이 입을 헤벌리고 있는 사이 아르티어스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르티어스 님.”
“그래, 잘 있었나?”
“예, 그때 브로마네스 님 때는 아주 크게 신세를 졌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뭐, 그 정도 일을 가지고……. 허허헛!”
미네르바는 여기저기에서 시체를 치우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들을 찾아서 왔다네. 자네도 알지? 다크 폰 치레아 말이야. 그 아이가 부하 몇 명과 함께 나가더니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 이 말일세. 젠장, 나하고 함께 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저런, 큰일이군요. 하지만 아르티어스 님, 아드님은 6년 전에 세계 최강의 검객이라 불렸던 발렌시아드 대공을 물리친 분이시죠. 그런데, 감히 누가 아드님을 해 코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그것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혹시, 어디 여행이라도 다니시는 것 아닐까요?”
제일 마지막 말이 아르티어스의 가슴을 찔리게 만들었다. 진짜 그 망할 놈이 여행이라도 간 것이 아닐까?
그렇다, 충분히 그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상대의 대답이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르티어스 옹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자네 말도 일리는 있군.”
“아드님을 찾으시는 데 혹시 지원은 필요 없으신가요? 저희도 지금 미란을 병합했기에 여력은 별로 없지만, 6년 전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몇 명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아, 됐어!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먼.”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좋은 포도주가 있습니다만…
“아니, 나는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군. 그럼 잘 있게.”
아르티어스는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 도움을 청할 만한 녀석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오호, 이게 누군가?”
입구부터 시작해서 황금으로 번쩍거리는 레어에서 금발의 미청년이 걸어 나오며 아르티어스를 반겨 맞이했다. 아르티어스는 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레어에 들 어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정말 탐이 나는 레어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드워프를 족쳐서 이와 유사한 레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애써 털어 냈다. 지금 급한 것은 레어가 아니었으니까.
“브로마네스, 오랜만이군. 6년 만인가?”
“이 박정한 녀석. 그래 그때는 대충 코빼기만 보이고 돌아가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온 거냐?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자구. 아주 좋은 포도주 를 구해 놓은 것이 있어. 드워프 녀석들에게서 뺏은 건데, 자그마치 432년이나 된 진품이라구.”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슬쩍 가로저으며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딴 곳으로 가자구.”
“왜, 내 레어에는 들어가기 싫다는 거야? 이걸 보니까 네 집은 그야말로 허름한 동굴처럼 느껴지지? 으하하하핫!”
“그런 게 아니야. 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다구.”
“이봐, 물어보는 데 장소를 바꿔 가며 대화를 할 이유라도 있나? 들어가자구. 그리고 6년 사이에 얼마나 더 멋지게 장식을 해 놨는지 보란 말이야.”
브로마네스의 레어. 아닌 게 아니라 그 레어 안은 그야말로 호화찬란했다. 그 때문에 황금을 결코 돌같이 볼 수 없었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망설인 것이다. 드래곤은 원래부터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아르티어스 같은 골드 일족은 특히나 황금을 좋아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가 말한 ‘장식’이란 것은 황금이 아니었다. 벽면 전체가 황금인데, 거기에 황금 장식물을 붙여 봐야 모양이 잘 안 나기 때문인지 장식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실물 크기의 조각상들이 중앙 통로의 좌우에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호비트, 오우거, 고블린, 엘프, 드워프 등등 하여튼 전 세계의 모든 생물들이 다 만들어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의 모습이 중앙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황금색의 벽에 흰색의 대리석이 섞여 있다 보니 아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어때, 멋있지? 내가 드워프들 보고 이 중앙 통로의 좌우에다가 이 조각상들을 배치하라고 일렀지. 완성된 지는 얼마 안 되었어. 자네가 첫 번째로 이것을 구경하 게 되어 나는 매우 흡족하다네.”
아르티어스는 애써 조각상들에서 시선을 돌리며 저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자네의 이런 악취미나 둘러보고 있을 여유가 없어.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구.”
브로마네스는 계속 걸음을 레어 안쪽으로 옮기며 비웃듯 말했다.
“호오, 무슨 일인데 천하의 아르티어스가 이렇듯 조급해하시나. 그래, 무슨 일인데?”
“전에 왔을 때 말한 적 있지? 양자를 하나 얻었다고 말이야.”
“아, 그 호비트 계집?”
호비트 계집이라는 멸시를 가득 담은 표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발끈했다.
“말조심해, 이 빨갱아! 드래곤 구이를 만들어 버리기 전에!”
“호오, 그것 기대되는군. 노랭이의 마법 실력이 꽤 좋아진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말토리오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꼬마 애들 잡고 심심풀이 장난한 것밖에 안 되잖아? 나를 그런 꼬맹이들하고 동급으로 취급하면 안 되지이~.”
사실이 그러했기에 아르티어스는 벌게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부탁하러 온 주제에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정면으로 싸우면 자기가 절대로 지지 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객관성이 떨어졌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에게 몇 년 전에 깨달은 비장의 한 수가 있듯 놈에게도 그런 것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말이다.
“젠장, 그래 너 잘났다. 혹시 요 며칠 사이에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냐? 그러니까… 그래, 혹 엘프리안에 유희를 나온 드래곤이 느껴지지 않던?”
“유희를 나온 드래곤이라……. 글쎄, 나는 별로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아서 말이지. 여기 도시가 꽤 크다 보니 간혹 가다가 한 놈씩 보이지. 그런데, 그런 것만으 로 내가 그놈이 네 아들인지, 남의 아들인지 알게 뭐냐?”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이 오우거 대가리야. 요 며칠 사이라고 말이야.”
“글쎄……. 하나 있기는 했지. 하지만 한 3, 4일 기척이 느껴지더니 그냥 사라졌는걸.”
“그 기척은 어디서 느껴졌는데? 황궁이야, 아니면 시내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잘 모르겠어. 나는 요즘 저걸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기에 딴 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거든.”
브로마네스가 가리킨 것은 중앙 홀에 만들어지고 있는 거대한 벽화였다. 그것은 아직 미완성 작품이었고, 드워프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면서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20여 미터에 이르는 그 거대한 벽화는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섞었는지는 모르지만 붉은색이 나는 황금으로 만들어지고 있 었다.
아직 반 정도밖에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아르티어스는 한눈에 드워프들이 뭘 만들고 있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바로 브로마네스의 본모습이었다. 붉은 색 황금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의 형상. 정말 멋있었다. 과연 브로마네스가 딴 곳에 신경 쓰지 못할 만도 했다.
브로마네스는 여기저기서 분주히 일하고 있는 드워프들을 가리키며 으스댔다.
“어때, 저 녀석들 일 잘하지? 저 멀리 오실라니아 산맥까지 날아가서 잡아온 녀석들이야.”
“미쳤군. 나 같으면 그럴 시간 있으면 낮잠이나 더 자겠다. 그건 그렇고, 기척을 느꼈다는 그 드래곤 녀석 말이야. 어디로 갔는지 알아?”
“글쎄, 신경 써서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니 모르겠는걸?”
“이런 젠장, 네 녀석은 그럼 아는 게 뭐가 있냐?”
아르티어스는 화를 발칵 내면서 곧장 발걸음을 돌려서 여태껏 걸어온 곳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제야 허겁지겁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를 뒤따라오며 달래기 시 작했다.
“이봐, 그렇다고 그렇게 화낼 이유는 없잖아.”
“이유가 충분해.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되고 있잖아. 따로 알아보는 수밖에……. 네놈을 조금이라도 믿고 있었던 내가 머저리다.”
아르티어스는 브로마네스의 레어를 빠져나와서 산 아래를 바라봤다. 산 아래쪽으로 거대한 엘프리안의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엘프리안을 한참 내려다본 후 꼭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꼭 누군가 범인이 있다면 들으라는 듯이…….
“만약 내 아들을 해친 놈이 있다면, 그놈이 호비트이건 드래곤이건 혹은 또 다른 무엇이건, 나의 타오르는 분노를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폭발적인 광기를 이기지 못해 황금색으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묵향13 – 외전 : 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