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5화 – 인간의 대역을 맡은 골드 드래곤

인간의 대역을 맡은 골드 드래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미카엘의 물음에 다크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언제까지나 녀석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어제저녁, 다크는 아르티어스를 불러다가 자신의 대역을 부탁한 후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인 팔시온, 미카엘, 미디아, 가스톤만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와 있는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오랜 시간 다크와 함께 지냈기에, 다크의 습관이나 행동거지, 말투 따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다크의 대역을 하는 한 들통 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다크는 안심하고 대역을 맡기고는 이렇듯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에구구, 허리야. 오랜만에 말을 탔더니 허리가 쑤시는군. 승마를 오래 하는 것은 나같이 고귀한 분께는 조금 무리야.”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주물러 대며 투덜거리는 미카엘을 보며 미디아가 곱지 못한 시선을 보냈다.

“헛소리하지 마. 눈은 안 그런데 입으로만 투덜거리고 있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 거야?”

미디아의 물음에 다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 코린트의 영내로 들어섰으니 그 뒤는 당연한 것 아니겠어?”

“어떻게?”

“일단 놈들의 집결지를 찾아낸 후 박살 내는 거야. 그만큼 당했으면 갚아 주는 것이 도리지.”

“겨우 우리들만으로?”

“그거야 붙어 보면 알겠지. ‘겨우’인지 ‘씩이나’인지…….”

상대의 대답에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미디아는 선결 조건부터 말했다. 다크의 말대로 붙어 보면 알겠지만, 어디 있는 줄 알아야 붙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어디에 집결해 있는 줄 알고……..

그런 걱정 따위는 할 필요 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크가 말했다.

“헤헤헷, 그거야 다 알아내는 수가 있지. 어젯밤에 열심히 궁리해서 방법을 다 생각해 뒀어.”

“어떻게?”

미디아의 물음에 다크는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신의 의견이 곧 진리라도 되는 듯 말이다.

“내가 찾아낼 수 없으면 놈들이 나를 찾아오게 하라. 그게 그 방법이지.”

“그렇다면…..”

“근처에 어디 큼직한 요새나 성이 있으면 그걸 박살 내는 거야. 그러면 놈들이 상부에 지원을 요청할 테고, 그러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 아니겠어?” 다크의 말이 지니고 있는 허점을 생각하며 팔시온이 눈이 둥그레져가지고 외쳤다.

“억수로 많이 몰려오면 어쩔 거야? 우리는 겨우 네 명밖에 안 되는데.”

“언제는 그런 거 생각하면서 싸웠냐? 자, 가자구.”

태평스레 말을 마친 후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는 다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미치겠군. 이런 식이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야.”

매우 튼튼하고 정교하게 세공된 문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경비병은 근위 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이 나타나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론가르 트는 즉시 그 인사를 받아 준 후 그들의 앞에 섰다. 그는 통과해서 지나갈 생각이 아니라, 이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만나려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전하께 만나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게.”

“옛!”

경비병은 낮게 대답한 후, 즉시 문 뒤쪽에서도 충분히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전하, 근위 기사단장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고 해라.”

“옛.”

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경비병들은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두터운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이곳은 며칠 전만 해도 이름만 있을 뿐, 경비병 한 명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빈 방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있어야 할 부총사령관은 루빈스키 대공과 달리 황궁보다는 자신의 공국을 더 좋아했기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 앉게나. 지금 한잔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차 한잔하겠나?”

“영광이옵니다, 전하.”

그렇게 크지 않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론가르트가 자리에 앉자, 다크는 시선을 집무실의 한쪽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문 쪽으로 돌리며 외쳤다.

“세린! 차를 가져와라.”

“예, 주인님.”

문 안쪽에서 가녀린 음성이 대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끓여진 차를 가지고 묘인족 소녀가 나타났다. 론가르트는 그 묘인족 소녀가 치레아 대공의 전속 하녀 인 세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녀와 안면도 좀 있었기에 탁자에 찻잔을 조심스런 손길로 올려놓고 있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보내 줬다.

세린이 돌아간 후 론가르트는 그녀가 올려놓은 차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를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론가르트는 뭔가 이상함을 직감적으로 느끼 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찻잔을 잡은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었다. 오른손은 찻잔을 잡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왼손으 로 잔을 들어 차를 조금씩 마시면서, 그의 오른손은 조금씩 조금씩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향해 슬그머니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론가르트 단장, 경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의논할 것이 있기 때문이야.”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며 상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론가르트가 알고 있는 한 다크 폰 치레아 공작은 선머슴 그 자체였 다. 론가르트가 근위 기사단장이었기에 부총사령관인 그녀와는 차를 마실 기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 마시는 예의는 거의 낙제점 수준이었다. 그렇던 그 녀가 짧은 시간 동안, 그것도 오랜 시간 몸에 밴 것 같은 우아한 동작을 몸에 지니게 될 가능성은 갑자기 토끼 머리에 뿔이 솟아오를 가능성보다도 훨씬 어렵다는 것 은 뻔한 사실.

하지만 그녀가 몇 달 정도 보지 못한 사이 예의를 몸에 익혔을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기는 했지만 조금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말투라든지 뭐 그런 것은 매우 다크와 유사했다. 그렇기에 론가르트는 짧은 시간이지만 심도 있게 고민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진짜 치레아 대공 전하라면 소드 마스터를 넘어 선경지. 자신의 공격을 분명히 피해 낼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짜라면 자신의 검에 여지없이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자 론가르트의 오른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슉!”

론가르트의 검이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의 검은 상대의 목을 꿰뚫지 못했다. 뭔가 벽에 부딪친 듯 시퍼런 불꽃만을 뿜어내며 튕겨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론가르트의 몸은 뭔가 엄청난 힘에 의해 뒤로 튕겨 나갔다. 콰당 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벽에 금이 갈 정도로 부딪친 후 바닥에 볼 썽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기는 했지만, 론가르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검을 꼭 쥔 상태였다.

‘진짜인가??

만약 상관이 재미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친 것이라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론가르트로서는 정말 가까스로 비명을 참고 있을 정도로 온몸이 쑤셔 오 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경비병들이 뛰어 들어왔다. 찻잔이 박살 난 채 뒹굴고 있고, 면회하러 들어갔던 론가르트 백작은 검을 뽑아 든 채 볼썽사 나운 모습으로 한쪽에서 뒹굴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는 창가로 달려갔다. 그들로서는 론가르트가 공작을 시해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창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발견하고는 다크를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전하.”

하지만 다크는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잠시 장난을 친 것뿐이다. 나가 보도록!”

“옛, 전하.”

상관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그들은 재빨리 밖으로 나가 버렸다. 경비병들이 나가고 나자 소녀는 그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흐, 눈치가 아주 빠른 녀석이로군.”

억지로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고 있던 론가르트는 상대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자신의 처음 짐작이 정확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등 뒤로 식은땀 이 흘러내렸다. 상대는 자신이 기습 공격을 가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실력자였다. 론가르트는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자신은 황제 폐하께 실력을 인정받아 근위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는 신분이었다. 그런 자신이 적국의 자객 따위에게 설혹 곧장 목숨이 날아간다고 해도 숙이 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리가 조금 전의 충격 때문에 후들거리고 있는 상태에서도 일부러 침착하게 가장하며,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당당하게 상대에게 외쳤다. 하 지만 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나? 나는 누구일까? 아주 재미있는 문제 아닌가?”

비장하기까지 한 론가르트의 질문에 상대는 장난기 어린 대답을 해 왔다. 비웃듯 미소를 지으면서 여유롭게 말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자신 따위는 아예 신경 쓸 만 한 가치조차도 없다는 것 같았다.

‘나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하기야 내 기습을 막아 낸 것만 봐도 보통 실력은 아니야. 아마도 마법사인 것 같은데……. 나에게 아직도 일격을 가하 지 않고 시간을 주는 것을 보면, 내가 아무리 소란을 떨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근처에는 어느새 소리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뭔가 마법이라도 걸 어 놨다는 것이겠지.’

론가르트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느라 아무런 말이 없자 상대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걸 알려 주려고 불러 들였는데, 벌써 눈치 채고 검을 뽑아 들다니……. 아들 녀석은 생각 외로 좋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군.”

“예? 그, 그렇다면…….”

그 순간 상대는 몸은 그대로 유지한 채, 머리만 슬쩍 아르티어스의 것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것을 보고 론가르트는 등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괴물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 같은 매우 괴기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들어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르티어스라고 하지. 아들 녀석의 부탁 때문에 잠시 대역을 하고 있는 중이야. 자, 일어서서 여기에 앉게나. 나였으니까 망 정이었지, 안 그랬으면 아들 녀석이 세워 놓은 소중한 대역의 목이 떨어질 뻔했어.”

상대의 말에 론가르트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가공할 만한 실력을 지닌 상대는 적국의 자객이 아니라 아군이었던 것이다. 론가르트는 재 빨리 정신을 수습하여, 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후 뒤집어져 있는 의자를 바로하고 앉았다. 이제야 상황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다크 같은 강자를 누가 감히 흔적도 없이 해치우고 대역을 할 수 있겠는가? 또 황제나 토지에르에게 들었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아버지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그 드래곤은 강력한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어떤 형태로든 변화시킬 수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르티어스라면 공작 전하의 아버지였기에 론가르트의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아니, 실례한 것은 아니야. 자네의 그 빠른 눈치에 감탄했을 뿐이지. 그건 그렇고 용건을 말하겠다. 나는 아들 녀석의 대역은 할 수 있지만 전쟁터에서까지 대역을 할 생각은 없어. 또 그것을 아들도 잘 알고 있고 말이지. 그래서 전쟁터에서의 대역은 자네가 대신 해 줘야겠어.”

“예?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나는 타이탄을 조종해 본 적도 없고, 또 내 타이탄도 없어. 그러니까 자네의 타이탄에다가 아들 녀석 타이탄의 문장을 그리란 말이야. 그리고 치레아 대공이 타이 탄을 써야 할 때가 되면 나 대신 자네가 나가면 되는 거야.”

“하, 하지만 전하와 저는 실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면서 론가르트가 항변했지만, 아르티어스는 매우 느긋하게 대답했다. 벌써 그것까지 다 생각해 뒀던 것이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자네가 타이탄을 타고 나가서는 슬쩍 허세만 부려도 적들은 꼬리가 빠지게 도망칠 테니까 말이야. 아들 녀석 말로는 상대국의 윗 녀석들은 대부분 자신의 실력을 다 알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당연히 허세가 먹혀 들어갈 거라구.”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의견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다행히 적들이 겁먹고 도망친다면 모르지만, 단 한 명이라도 덤벼든다면 론가르트의 실력이 그대로 들통 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싸우면 되지,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물어? 내가 대신 싸워 주리?”

마법으로 도와주겠다든지 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적이 덤비면 너 혼자 싸우다가 죽어 버리라는 이 아르티어스 옹의 기가 막힌 대답.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까지도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 옹에게 있어서 이따위 제국이 망하든 흥하든 그건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더더욱 론가르트의 생사 따위는 관심 밖이었 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양아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아들의 일만 아니라면 어디까지나 속편한 소리만 하는 아르티어스 옹이었다.

근위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 얼마 있지 않아 기사 한 명이 급히 와서는 시급한 일이라며, 점잔을 빼고 앉아 있는 아르티어 스 옹에게 보고를 했다.

“알카사스에서 사신이 도착했다고?”

“옛, 전하. 비밀리에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그래에? 좋아, 이리로 오라고 일러라.”

“옛, 전하.”

잠시 후 알카사스의 사신이 도착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협상을 할 상대가 너무나도 어린 여자 아이라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상대는 나이나 생김새야 어 떻든 간에 ‘전하’라고 불리는 적국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렇다면 그만큼의 권한 또한 지니고 있을 것은 분명한 사실. 상대가 만만하게 보인다는 것이 그에게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협상할 때 상대가 노련한 인물인 것이 더 문제지.

“안녕하십니까, 전하. 저는 에리카 트로이아라고 합니다. 크라레스 제국의 뛰어난 기사이신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대가 입에 발린 칭찬을 해 대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손을 휘저어 그것을 막은 후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본관을 찾아 온 이유는 뭔가?”

“급하기도 하군.’

트로이아는 눈앞의 이 풋내 나는 소녀를 속으로 비웃으면서 천천히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가 노련한 외교관일수록 능구렁이가 다 되어서 자신의 뱃속은 감

추면서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이끌어 가는 것이 상식이었기에, 트로이아는 이제 더욱 상대를 얕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코린트와 크라레스는 쌍코피가 터지게 싸울 것이다. 물론 알카사스도 거기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알카사스의 원로원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크라레스가 제공해 줄 마음이 있다면 이 전쟁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어제의 전쟁에서 크라레스가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 이다. 타이탄이야 어떻게 수리하거나 재생산하면 되겠지만, 전사한 기사들을 되살릴 길은 없었다. 기사의 수가 적은 알카사스로서는 가급적이면 이번 전쟁에서 피 해를 줄이기를 원했다.

상업 국가인 알카사스의 상인 기질도 아주 크게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파견된 트로이아는 만만해 보이는 소녀를 슬며시 바라보며 이번 협상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예, 우선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트로이아는 소녀의 표정을 한번 주의 깊게 살핀 후 말을 이었다.

“귀국은 지금 매우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코린트가 대병을 앞세우고 압력을 가해 오고 있지요. 정보에 따르면 벌써 귀국의 2개 전대가 전멸을 당했고, 수도까지 적이 난입해 들어와서 곤경을 치르셨다고 하니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고 동쪽에서는 막강한 아르곤 제국이 침공해 들어와서 매우 곤 란을 겪고 계시고요. 또 서쪽에는..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항복하라는 것이냐?”

상대를 깔보는 듯한, 어떻게 보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소녀가 퉁명스레 말을 끊어 오자 트로이아는 상대의 무례함에 혓바닥을 찰 뻔했다.

물론 외교관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말을 가로막는 경우는 허다했다. 하지만 이렇듯 노골적으로 대화를 끊어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거기에다가 지금 은 크라레스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이런데도 이렇듯 고자세를 유지하다니. 도대체가 저 계집애는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닙니다. 본국이 귀국을 침공한 것은 코린트의 압력도 있었지만 한 가지 오랜 숙원(宿願)을 해결하려는 것도 있지요. 본국은 저 머나먼 서쪽의 건조한 초 원에서부터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 왔습니다. 동쪽의 그 비옥한 토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는 도중에 본국은 마법을 이용하여 기후를 제어할 수 있게 되었 고, 지금은 전 영토가 비옥하고 풍요롭게 변화했습니다. 그렇기에 본국이 영토를 확장해 오던 첫 번째 목표는 이제 사라졌다고 봐도 상관이 없죠. 그러던 와중에 두 번째 목표가 생겼습니다.”

트로이아는 소녀가 지겨운지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고 말을 잠시 끊었다.

“본국은 상업 국가라고 불릴 만큼 예로부터 상업을 장려해 왔습니다. 물론 국토가 비옥하지 못해서 생산력이 떨어지다 보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만약 개국 초부터 상업에 의존해서 국력을 키워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마도 왕국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본국은 멸망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마법을 이용해서 국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토지의 생산력을 엄청나게 높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본국에 있어서 상업이 가지는 그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본국에서 남아도는 엄 청난 잉여생산물들을 타국에 수출하고, 또 본국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들을 수입하며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력을 더욱 더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로 를 통해 대량의 화물을 옮기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다는 것이지요. 또 거기에 귀국과 같이 중개 무역을 하는 나라가 끼어들기라도 한다면 본국의 몫이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트로이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대의 속셈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지겨운 말을 듣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항구가 필요하다는 말이로군. 대량의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커다란 항구가 말이야. 장황한 자네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스바시에 서쪽 귀퉁이의 항구가 포함된 땅덩어리를 떼어 준다면, 귀국의 군대를 철수시키겠다. 이거겠지?”

“그, 그건…….”

소녀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이쪽의 속셈을 짚어 내어 말했기에 트로이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에 소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놀고 있군. 그따위 협박을 한다고 해서 이쪽에서 ‘그러십니까?’하고 땅덩이를 떼어 줄 거라 생각했냐?”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이쪽에서도 생각이 있습니다.”

트로이아는 성질이 발끈 치미는 것을 느껴야 했지만, 일단은 노련한 외교관답게 상대에게 이쪽의 제안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약간의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소녀의 반응은 트로이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으헤헤헷, 좋아, 좋아. 당연히 이렇게 나오는 것이 재미있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상대의 의외의 반응에 트로이아는 기가 막혔지만 이왕에 갈 데까지 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불리한 것은 알카사스가 아니라 강력한 세 개의 제국과 고독한 전쟁 을 치르고 있는 크라레스였으니까 조금 위협을 하면 통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희생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1개 기사단을 더 투입하여 우리 쪽에서 원하는 것을 뺏어 내면 되겠지요.”

“겨우 1개 기사단만으로 될까? 기왕에 하는 김에 모두 다 투입하는 것은 어때? 듣기에 알카사스는 5개의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면서? 합계 250대면 꽤 재미있는 한판 승부가 되지 않을까?”

“정말 말이 안 통하시는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 멍청한 자식! 여봐랏!”

아르티어스의 부름에 밖에서 중무장한 경비병 두 명이 들어오며 외쳤다.

“옛, 전하.”

갑자기 경비병들을 불러들이는 소녀 때문에 트로이아의 안색은 새파랗게 굳어졌다. 그런 트로이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무자비하게 말했 다.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도록!”

“옛, 전하.”

트로이아는 경비병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면서 악을 썼다.

“전하, 외교 사절에게 이러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흐헤헤헤헷, 헛소리하고 있군.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사신을 죽이지만 않으면 별 탈 없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상식이라구.”

“놀랍게도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그런가? 트로이아 경은 어디 가고 자네가 왔는가?”

“예,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치료?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아주 잘 다져서 보냈더군요.”

“다져?”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의장을 향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사죄를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의장이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흠씬 두들겨 팼다는 말입니다. 후작의 호위병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일어설 힘도 없을 정도로 늘어져 있는 그를 부축해서 마법진을 통해 돌아왔으니 까 말입니다. 사신을 그렇게 대하다니……. 정말 상식과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뢰배들입니다.”

“흐음, 크라레스의 반응이 이상하군. 본격적으로 본국과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는 그냥 항구 하나 양보하고 끝내는 것이 좋을 텐데 말이야. 3국에서 크라레스에 전 쟁을 건 이상 크라레스로서도 이쪽에서 손떼 준다면 땅덩어리 하나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훨씬 더 이익이 아닐까? 거기에다가 이쪽의 사신을 그 모양으로 만들면서 우리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보면, 뭔가 믿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안 그런가?”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 현재 코린트의 행동을 봤을 때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부분 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린트의 기사단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군대는 아직도 국경을 넘지 않고 있습니다. 점령지를 확보하려면 군대를 투입해야만 하는데도 말이지요. 이건 흡사 기동력이 좋은 기사단만을 사용하여 크라레스의 군대나 기사단에 조금씩의 타격을 주고 뒤로 빠지는 게릴라전을 감행하는 듯이 보이고 있어 요. 이건 대단히 강력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써먹는 전법이 아닙니까?”

“글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미리 짐작하여 설전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코린트에서는 군대를 언제 투입할 것인지 알아 보게.”

“예, 의장님.”

“그리고 코린트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오늘 새벽 크라레스는 스바시에 기사단을 6전대와 합류시켰다고 한다. 이로서 크라레스 서부전선 사령관은 아그리오 스 후작이 되겠지. 아마도 힘든 싸움이 될 거야.”

“그렇다면 오늘 새벽에 콘도르 기사단을 그쪽에 보낸 것이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군요.”

“나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저쪽은 모두 합쳐서 60대도 안 돼. 이쪽은 1백 대나 되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인가?”

“그래도… 옛날부터 크라레스 기사들의 용맹성은 소문이 난 것이기에 약간은 우려가 되는군요.”

“아,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크라레스의 최고 정예 기사단은 근위 기사단과 치레아, 스바시에 기사단이야.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이 크라 레스의 수도에까지 진입해 들어가서 격전을 벌였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놈들은 스바시에 기사단을 그렇게 오랫동안 이쪽 전선에 놔둘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만 잘 버티면 되는 거야.”

“예, 의장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장님의 뜻을 클레멘스 후작에게 전하겠습니다. 가장 노련한 지휘관이니만큼 잘해 낼 것입니다.”

“그래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