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화 – 여신의 신탁
여신의 신탁
아르티어스가 협박하고 돌아간 후 미네르바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일단 한 가지 일은 해결된 것이다. 저 드래곤의 이목만 피하면 만사가 자 신의 뜻대로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네르바는 집무실에 마련되어 있는 푹신한 의자에 내려앉듯 주저앉으며 말했다.
“포도주나 한 잔 가져다 다오.”
“예, 전하.”
“자네도 한잔할 텐가?”
미네르바의 물음에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던 이블리스는 황송하다는 듯 말했다.
“예, 전하.”
“어쨌건 시작은 좋군. 그린레이크 녀석, 재수 없는 놈이기는 하지만 실력만큼은 큰소리 칠 만하군. 드래곤도 탐지하지 못할 정도의 보호망을 구축했으니까 말이 야. 아무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먼. 자, 이제 드래곤을 따돌렸으니 그녀를 최대한 빨리 코린트로 보내 버려야겠어.”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의 요청에 의해 다크의 마나를 봉쇄하고, 또 그녀의 기척을 지울 수 있는 팔찌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린레이크는 그 두 가지 작용을 한 번 에 할 수 있는 것을 만들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 두 가지 작용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마법 도구를 만들기는 한 가지 작용을 하는 것을 만드는 것보다 두 배 이상 어렵기 때문이다. 적국의 마법사나 기사들을 생포했을 때, 그들이 마나를 끌어 모으지 못하게 막는 팔찌는 이미 각국에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척을 숨길 수 있는 팔찌만을 제작해서 미네르바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건넸던 것이다. 때문에 다크는 지금 양팔에 팔찌를 하나씩 찬 상태로 뻗어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다크의 마나를 제어할 수 있건 없건 간에, 그녀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었다. 지금은 제어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그것이 지속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드래곤이 다음에도 저렇게 조용히 물러난다는 보장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블리스였기에 미네르바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이었다. 다 크도 위험하지만 드래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던 것이다.
“예, 그녀가 본국에 머무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이옵니다.”
“그래, 그녀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아직도 변함이 없다고 하옵니다.”
“약이 너무 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큰일이야. 계획의 초점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 코린트여야 한다는 것 아니었나? 그래야만 드래곤의 분풀이 상대로서 코린트를 방패막이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일세.”
“그렇지요. 이쪽은 들통 나더라도 코린트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고 발뺌할 수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코린트에 건네질 때까지 그 녀는 꼭 살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지오그네는 자신의 목을 걸고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고 장담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신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글쎄…….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텐데…..”
“전하, 원래가 기사들의 그 강인한 육체는 보통 인간의 것과는 다르지 않사옵니까? 하물며 그녀는 최강자의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 아니옵니까? 잘될 것이옵니다, 심려 놓으시옵소서.”
“그럴지도……. 어쨌건 깨어나면 즉시 내게 보고하라고 이르게. 일단 청기사도 빼앗아야 하겠지만 몇 가지 의문점도 풀어야 할 테니까 말일세. 그리고 최대한 빨 리 이 숨 막히는 초조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옛, 전하.”
아주 넓은 방, 아니 중간은 넓은 홀로 되어 있었고, 그 홀의 가장자리에는 푹신한 소파들이 빙 둘러서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방이라기보다는 무도회장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 문양의 금붙이들이 군데군데 붙어 있는 호화로운 가구들. 모든 가구들은 마호가니나 흑단, 자단 같은 값비싼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구들에 새겨진 문양만 척 봐도 대단한 실력의 장인들이 공들여 제작한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순은으로 뼈대를 만들고, 여러 가지 색상 의 수정들을 붙여 놓은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붙어 있는 것만 봐도 대단한 부호(富豪)의 집인 모양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렇게 돈이 많은 듯한 인물이 만든 듯한 홀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창문 대신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등잔에서 흘러나온 아련한 빛들 이 홀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침실에 이렇게 창문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숙면을 방해하는 햇빛이 조금이라도 들어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여긴 침실이 아니니까 그건 아닐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고 실컷 춤을 추 고 싶어서?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두꺼운 커튼을 사용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넓은 창문이 있어야만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받을 수 있고, 또 겨울에 따뜻한 햇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햇볕을 싫어하는 듯한 이 홀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그 홀에 사람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확실히 홀의 한쪽 구석에는 햇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짓거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홀의 한쪽 구석에서 얕은 신음 소리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뭘 하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긴 소파 위에서 아리따운 여인과 두툼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사내의 정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문이 활짝 열리는 동시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겁을 한 여인이 후다닥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들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하지만 그 근육질의 사내는 도
망치는 그 여인의 하얀 엉덩짝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한, 또 당황한 듯한 시선을 던졌다. 자신도 저 여인처럼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옷가지를 주워 들어 앞을 가리고, 얼굴이 벌게져서는 쥐구멍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은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오그네 각하.”
“그러는 경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보시다시피…….”
얼버무리는 사내를 향해 지오그네는 앙칼지게 외쳤다.
“경을 여기에 배치한 것은 시녀와 그 짓이나 하라고 한 것은 아니야.”
“저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고, 원체 무료하기에 그만.
“토린 경은?”
“저와 교대한 후 쉬고 있습니다.”
“빨리 옷이나 입게.”
“옛, 각하.”
사내는 옷가지를 쥐고 뒤쪽으로 엉기엉기 걸어간 후 주섬주섬 차려입고는 다시 그녀의 앞으로 나왔다. 빨리 입다 보니 옷차림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허리에 빛 나는 장검을 차는 것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
“안내해.”
“옛!”
기사는 홀의 한쪽에 있는 문 앞을 막고 있는 묵직한 가구를 옆으로 치웠다. 그가 힘껏 밀어야 할 만큼 그 가구는 육중해 보였다. 기사는 가구를 옆으로 치운 후, 두 터운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각하.”
“흠…….
문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도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창문이 없는 것 또한 그러했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비단 휘장이 드리워진 넓은 침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시녀가 기겁을 하며 일어서서는 인사를 건네 왔지만 지오그네는 그녀를 본체만체하고 장인이 공들여 새겼음직한 각종 문 양이 새겨진 흑단 침대에 천천히 다가섰다. 휘장을 옆으로 살짝 치우자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 보였다.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느냐?”
“예, 소녀가 공들여 감시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사옵니다, 각하.”
“그래? 미네르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약이 너무 과했나?”
지오그네의 혼잣말을 듣고 옆에서 기사가 참견해 왔다.
“이렇게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독제를 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각하.”
기사의 참견에 지오그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해독제? 독약도 아니고 수면제에 무슨 해독제가 있단 말이냐? 그리고 처음부터 저렇게 강한 상대에게 해독제가 존재하는 약을 썼을 리가 없지 않나?”
“그, 그렇습니까?”
지오그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소녀를 다시금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다. 과연 얼마나 지나야 깨어날 수 있을까?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 다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지오그네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예 치료가 불가능한 약을 썼으니까…….
“시간만이 해결해 주는 것인가?”
지오그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소녀의 눈이 살짝 떠지며 밖으로 나서는 그들의 뒤통수를 슬쩍 바라본 후 다시 감기는 것을 그들 은 눈치 채지 못했다. 지오그네라는 높은 상관에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는 지오그네를 뒤따라 나온 후 문을 닫고는 또다시 힘껏 가구를 밀어서 문을 틀어막았다. 문 앞쪽에 걸쇠나 뭐 그런 것을 붙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문 에 손상이 가기에 이런 편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포로가 이곳에 영구히 갇혀 있을 것도 아니니까.
“철저히 감시하고 뭔가 변동 사항이 있으면 즉시 나에게 연락하도록 하게.”
“옛, 각하.”
기사는 즉시 대답한 후 조금 걱정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오그네 각하. 저 소녀, 아무리 혼수상태라고 하지만 4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괜찮을까요?”
그녀로서도 이것이 조금 걱정되던 차에 부하 녀석이 괜한 참견을 해 오자 짜증난다는 듯 톡 쏘았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의식도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목구멍에 흘려 넣다가 혹시 걸리기라도 하면 질식사한다는 것을 경은 모르나? 쯧쯧……. 하여튼 기 사란 것들은 무식하게 검이나 휘둘러 댈 줄 알지….”
자신의 무식함을 들먹이자 기사의 얼굴색이 시뻘게졌다. 하기야 기사들보다야 마법사들이 유식한 것은 사실이고 또 상대는 자신보다 상급자이니 참고 넘겨야 하 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무식하지 않은 사람보고 무식하다고 하는 것과 진짜 무식한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탓하는 것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 그 기사는 읽을 줄 도 모르는 진짜 ‘’무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얼굴색이 점점 더 붉어지며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자 지오그네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미네르바 전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죄수다. 혹여나 실수가 있다면 경의 그 어깨 위에 달려 있는 것으로 사죄를 해야 할 거야.”
“걱정 마십시오. 지하로 들어오는 각 통로마다 경비를 서고 있으니 그 어떤 놈도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만할 일이 아니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경비나 잘 서게.”
“예, 각하.”
기사와 헤어진 후 지오그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경계 상태를 점검했다. 이곳 지하 구조물은 대단히 넓고도 복잡했다. 마법에 능통한 드래곤이 자신의 아들을 찾 기 위해 지하 감옥에 슬쩍 잠입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소녀를 지하 감옥에 가둬 둘 수는 없었다. 처음 이틀 동안은 소녀를 지하 감옥에 넣어 두었지만, 곧이어 이곳 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곳은 황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지하에 만들어 둔 임시 피난처였다. 황제를 위시한 황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그 사용인들이 기거할 수 있 도록 만들어져 있었기에 대단히 넓었고, 미로와 같이 복잡했다. 하지만 보안상의 편의를 위해 크게 구획(區劃)으로 만들어 놨고, 각 구획의 통로에는 튼튼한 보루 (堡壘)를 만들고 경비병들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지금은 보안상의 이유와 드래곤의 잠입 위험 등을 고려하여 각 통로마다 오너급 기사 한 명과 기사 두 명, 그리고 마법사 한 명이 견인족 20마리씩을 배당받아 경 비를 서고 있었다.
지오그네가 통로로 향하는 문을 열자 타이탄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높이는 3미터 정도밖에 안 되지만 마차는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널찍한 복도가 이 어졌다. 하지만 그 복도는 20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고, 또다시 강철로 된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오그네는 철문 앞에 서서 가볍게 두 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강철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이 살며시 열렸다. 창문을 통해 통과하려는 인물이 지오그네라는 것을 확인한 상대방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기기기긱하는 금속음이 울리며 문은 힘겹게 열렸다. 아무런 소리 없이 문이 열리도록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첩자의 침입에 대비하여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둔 탓이었다.
철문 안쪽에는 아주 넓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높이 7미터, 폭 8미터의 아주 넓은 공간. 전쟁이 벌어지면 이곳에 있는 기사는 타이탄을 꺼내 놓고 적을 막게 된 다. 이런 데에서 타이탄 한 대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타이탄을 탄 채로 돌입할 수 없을 만큼 통로까지 좁다면 적들은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 상당 한 시간을 투입해야만 할 것이다. 타이탄을 이 통로 안쪽으로 집어넣기 위해 통로 전체를 파괴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미터가 넘는 거구에 강인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견인족. 개처럼 튀어나온 주둥이 사이로 하얗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견인족의 통보를 받았는지 공간의 옆 쪽에 있는 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달려 나와 인사를 건네 왔다. 지오그네는 주위를 쓱 훑어본 후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없었나?”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각하.”
지오그네는 마법사인 듯 보이는 사내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래, 적의 마법사나 뭐 그런 것들이 침입해 올 수도 있다. 그런 만큼 경의 임무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될 수 있으면 마법 트랙들을 많이 설치하여 대비하도록 해라.”
“옛, 각하.”
“모두들 고생이 되더라도 며칠만 더 참아 주게.”
“옛, 각하.”
사라져 버린 코린트의 수도 코린티아로부터 새로이 수도가 된 케락스로 연결되어 있는 악티움 대로 중무장 보병 여덟 명이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 고, 도로 양편으로 심어져 있는 족히 수십 년은 묵은 가로수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한낮에도 걸을 만했다.
어쨌든 악티움 대로는 상업 도시 케락스와 수도 코린티아 간의 군수물자의 이동과 병력 이동을 위해 건설된 것이었다. 하지만 대개의 도로들이 그렇듯 여행자들 의 이동을 통제하지는 않았기에 많은 화물들과 여행객들이 이 도로를 애용했고, 그렇기에 그 도시들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기하학적 도형이 수놓아져 있는 하얀 로브(Robe : 길고 헐거운 겉옷)를 입고 대로 위를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 한 명은 어른이었고, 또 한 명 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소녀와 달리 어른의 경우 로브에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상태라서 얼굴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나긋나긋한 걸음걸이와 언뜻언뜻 로브 아래로 드러나는 늘씬 한 다리의 곡선으로 보아 여성인 듯했다. 어른은 차분한 눈길로 정면을 한 번씩 주시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소녀는 달랐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 차의 행렬을 구경하거나, 노새를 끌고 가는 사람들 혹은 등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소녀는 그것도 지겨워졌는지 저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게 펼쳐진 넓은 대로. 지평선 끝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벌써 몇 날 며칠 동안 이 대로를 걸어왔는지 모른다. 소녀는 고개를 위로 올리며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수녀(修)님.”
소녀의 부름에 답하여 돌아오는 음성은 아주 부드러웠다.
“왜 그러느냐?”
“수녀님께서는 왜 마차를 안 타시고 걸어가시는 건가요? 마차를 빌릴 수 있을 정도로 여비는 충분하잖아요.”
비싸게 마차를 빌릴 필요도 없이, 악티움 대로를 왕복하는 승합 마차(乘合馬車)라는 값싼 대중교통 수단도 있었다. 20여 명은 탈 수 있는 거대한 마차에 여러 사람 이 탑승하여 부대끼며 가는 것이기에 속도도 느렸고, 쾌적도도 떨어졌지만 어쨌건 걸어가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소녀의 말투에서 약간의 짜증을 읽어 낸 상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후훗, 네가 발이 아픈 모양이구나.”
수녀가 정곡을 찌르자 소녀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건 아니구요.”
“그러느냐? 그건 그렇고 저쪽에 앉아서 쉴 만한 장소가 있으니 거기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예.”
수녀는 나무 그늘 밑에 자리 잡은 제법 큰 돌덩어리가 길가에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다시 질문을 던졌 다.
“수녀님께서 마차를 달라고 부탁하셨으면 충분히…….?”
“그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란다. 신을 받드는 사도들이 육체의 안락을 꾀하면 안 되는 것이야. 아주 급한 일이라면 또 모르지……. 하지만 신탁에서 정해 놓 은 때까지만 케락스에 도착하면 돼.”
소녀는 수녀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싱그러운 가을바람이 상쾌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테지만, 그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기에 도보로 여행하기에는 최적의 계 절이었다.
“좀 빨리 가시면 안 될까요? 아무리 다음에 다가올 암흑의 세기를 막아 줄 영웅이 케락스에 나타난다는 신탁이 내렸지만, 그가 누군지 또 어떤 사람인지는 하나도 알지 못하잖아요? 조금이라도 빨리 케락스로 가서 조사를 해 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수녀는 소녀를 향해 사랑을 가득 담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녀도 과거에 그러했듯, 이 소녀 또한 범상한 신분은 아니었다. 다음 세대의 종단을 이끌어 갈 뛰 어난 인재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소녀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수많은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던져 대고 있었지만, 수녀는 언제나 한결같이 차분하면서도 부 드러운 어조로 대답해 줬다. 이렇듯 소녀의 인성과 지성을 다듬어 가는 것에 무한한 재미를 느끼면서도, 옛날 자신이 세상 구경을 나가서 저질러 댔던 얼토당토 않 은 짓거리를 회상해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종단에서는 이런 식으로 다음의 인재들을 교육시켰고, 수녀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이 교육 방법이 매우 좋다고 깊게 공감하고 있었다. 사원 안에서만 쌓은 경험과 지식은 아무래도 세상의 그것과는 분리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미 케락스로 가라는 신탁이 내린 이상, 그 대부분의 힌트는 아데나신께서 가르쳐 주신 셈이라고 봐야 하겠지.”
“어째서요?”
“그 강력한 암흑의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 만한 강력한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 코린트뿐일 거야. 지금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코린트 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코란 근위 기사단이 세계 최강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지 않느냐?”
이제야 뭔가 짚힌다는 듯 소녀는 고개를 까딱였다.
“영웅이란 옛날부터 전해 오는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란다. 전설에서야 농부의 아들이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거나, 아니면 이 름 없는 시골 무사가 드래곤으로부터 강력한 무기를 얻어 내어 영웅으로 등장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지. 그만큼 타이탄이란 것은 모든 것을 바꾸 어 놓았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수녀님께서는 케락스로 가셔서 아그립파 4세 폐하를 만나시고 도움을 청하실 건가요?”
소녀의 철없는 물음에 수녀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내 신분으로는 도저히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없단다.”
사실 아무리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고 하지만 젊은 그녀에게는 경험과 실적이라는 것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아직 ‘수녀’라는 말단직에 머물러 있었다. 수녀로서 교단의 계율을 지키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단계를 지나 수양 정도를 인정받게 되면 지금과 같이 누군가를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하나의 신전 을 책임질 수 있는 대사제(大司祭)의 직함을 받으려면 아직도 더 많은 수련을 거쳐야 하고, 또 자신이 맡은 제자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코린트의 황제에게 감히 알현을 청할 정도가 되려면 신녀(神女)나 그녀를 보좌하는 교령(敎令) 정도는 되어야 했다. 대사제가 되기에도 아직까지 까마득한 여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알현을 청하기에 코린트의 황제 폐하는 너무나도 지고(至高)한 신분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녀님께서 수녀님께 영웅을 찾으라는 교시(敎示)를 내리신 것일까요? 드로아 대 신전에는 수녀님보다 훨씬 능력이 크신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내가 가야만 한다고 아데나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단다. 어떻게 여신님의 깊은 뜻을 한낱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니? 가 보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영웅을 찾으실 거죠? 무작정 케락스시를 헤맨다고 만날 수 있을까요?”
“아데나신께서 도우신다면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하지만 일단 케락스가 목적지인 것으로 보아 영웅은 코린트의 기사일 확률이 높지 않겠느냐? 그리고 코린트의 기사들 중에서도 근위 기사거나 아니면 그보다 높은 지체를 가지고 계신 분일 가능성이 크겠지.”
“으음, 그렇다면 누구를 만나 뵈어야 하는 거죠?”
권력의 구조나 기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에 심각하게 궁리하는 소녀였다. 수녀는 그런 자신의 제자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물론 자신의 신분으
로 봤을 때 황제는 고사하고 근위 기사도 만나기를 청하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는 케락스에 있는 신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자, 이만 일어서자 갈 길이 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