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0화 – 황실 병원의 암운
황실 병원의 암운
드래곤이 떠나고 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집무실로 돌아온 즉시 레티안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레티안이 들어오자 공작은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자고 불렀네. 자네도 들었겠지? 드래곤이 와서 난리를 친 것 말일세.”
“예, 공작 전하. 별궁이 박살 났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보고는 들었사옵니다.”
로체스터는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드래곤은 그녀를 찾아온 것 같아. 만약 그녀를 죽여 버렸다면 큰일 날 뻔했어. 미네르바가 재빨리 이쪽에 그녀를 넘겨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말이야.” 레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말을 수긍했다.
“예, 미네르바 공작은 우리 쪽에다가 드래곤의 분노를 떠넘긴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저렇게 악착같이 찾아 댄다면 언젠가는 들통이 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미네르바가 이용할 수도 있지요. 그것을 드래곤에게 고자질할 수도 있다는 것이옵니다. 그녀를 지하 감옥에 수감해 둔 것은 매우 잘하신 결정이옵니다.”
“맞아.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든 크루마의 입장에서 코린트는 넘기 힘든 장벽일 테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녀를 드래곤에게 넘겨주는 것은 어떨까? 용병대장 은 그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던데 말이야.”
레티안은 잠시 생각해 본 후 냉정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대답했다.
“그녀를 지금 드래곤에게 넘겨주는 것은 좋지 않사옵니다.”
“왜?”
“크루마에서 사용한 정신계 마법에 따른 부작용으로 약간 상태가 안 좋사옵니다. 그런 그녀를 드래곤에게 넘긴다면 드래곤이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거기에다가 크루마 쪽에서는 우리가 강압적으로 요구했기에 그렇게 했다고 대답한다면 최종적으로 드래곤의 분노를 받을 나라는 본국이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답변이었다.
“그렇겠지.”
“그런 만큼, 그녀를 없애는 것보다는 회유하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일단 그녀가 우리 쪽의 손을 들어 준다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녀야 지 금 상태가 좋지 못하지만, 그녀의 뒤를 돌봐 주는 드래곤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사옵니까? 또 드래곤이 직접 나선다면 정신계 마법의 부작용쯤은 아주 간단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로체스터는 구미가 당기는지 입맛을 다셨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그 고생을 했겠는가?
“회유라……. 하지만 그것이 쉬울까?”
“일단 그녀를 지하 감옥에서 꺼내 주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런 후 귀빈으로서 대접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시간을 들여서 회유한다면 어쩌면 가능성도 있사 옵니다. 사실 그녀와 크게 원수질 일을 한 적은 없지 않사옵니까? 또, 지금 그녀의 몸 사정은 좋지 못하옵니다. 사람은 몸과 정신이 피곤할 때, 그때가 회유하기 좋지 않사옵니까?”
“그럴까?”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존재는 뭔가에 약점이 있기 마련이옵니다. 돈, 재물, 뭐 그런 것들 말이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소용이 있을까? 그녀는 크라레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인데 말이야.”
“그렇다면 크라레스 황제를 인질로 잡는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크라레스는 이미 끝장 난 국가인데 어려울 것도 없겠지요.”
“그렇군.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어.”
“하지만 전하, 회유는 급할 것이 없겠지만 지금 당장 해 둬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게 급한 일이 뭔가?”
“회유하기 전에 드래곤이 이곳을 찾아낸다면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시옵소서.”
“쯧,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드래곤은 코앞까지 왔었지만, 그녀의 기척을 찾아내지 못했어.”
“물론 드래곤이 마법을 이용해서 그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미네르바가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것을 이미 봤으니까요. 하지만 정령 마법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옵니다.”
“정령 마법이라고?”
“예, 전하. 만약 드래곤이 정령왕을 불러내어 그에게 뒤질 것을 부탁한다면 당장 발각될 것이옵니다. 그녀를 찾아왔던 드래곤은 바람의 정령력을 가진다는 골드 드래곤. 바람의 정령왕에게 부탁한다면 당장 찾아낼 것이옵니다. 전 세계에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옵니다.”
“큰일이로군. 뭔가 대책이 없겠는가?”
로체스터의 걱정스런 물음에 레티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즉시 대답했다. 이미 그것에 대한 궁리를 해 뒀던 것이다.
“당연히 대책이 있으니까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정령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마법진을 쳐 두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그녀가 있는 곳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것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돈이 좀 많이 들 것이옵니다.”
“돈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상관없네. 즉시 시행하게.”
“옛, 전하.”
레티안은 우아하게 인사를 올린 후 급히 밖으로 나갔다. 고위급 마법사들을 소환하기 위해서…….
환자들은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잠자면서 보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잠만 자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식사를 했다. 수녀는 소화가 잘 되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영양가 높은 수프를 조금씩 떠먹여 줬다.
병상에 오랜 시간 누워 있었던 탓인지 수척해진 환자는 그것을 다 받아먹은 후 감사의 인사를 건네 왔다. 이 환자는 수녀가 배당받은 세 명의 환자들 중의 한 명이 었는데, 상당히 쾌활하면서도 넉살이 좋았다. 명패에 붙어 있는 그의 이름은 ‘찰스’였다.
“고맙소. 힘이 없어서 밥도 내 손으로 못 떠먹다니. 내 신세야.”
“찰스 씨,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열심히 드시고, 빨리 회복하셔야지요.”
위로하는 수녀를 향해 찰스는 언제 신세 한탄을 했냐는 듯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이봐요, 수녀님. 남자 친구 있소?”
“예?”
의외의 물음에 수녀가 경악했지만 찰스는 그런 것쯤이야 상관 안 한다는 듯 넉살 좋게 말했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소. 재수 없게 사고를 당한 것이었지만, 조만간에 회복될 거요.”
수녀가 빙그레 미소 짓자 찰스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미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상당히 수척하긴 했지만 아마도 살이 좀 더 붙는다면 꽤나 잘생겼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수녀는 미소를 지으며 응해 줬다.
“예,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찰스 씨는 아주 미남이시지요.”
“헤헤헤, 으아아암”
웃음을 터뜨리다가 찰스는 크게 하품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요즘은 완전히 돼지가 되어 가는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수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어쩔 수 없지 않은가요? 빨리 건강해지셔야죠.”
“그런데, 수녀님.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없던가요? 아무래도 낯이 익은 것 같아서…….”
“글쎄요. 수행을 하기 위해 3년간 코린트 전역을 떠돌았으니 뵌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지난 6년간 황궁 밖을 나선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오.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찰스는 침대에 누운 채 한참 궁리를 하는 듯하더니 어느덧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아무리 강건하고 야심찬 젊은이라고 해도, 장기간 병석에 누워 있다 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이라도 옆에서 말벗도 되어 주고 간호도 해 주고 하면 마음이 슬며시 움직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하물며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답고 또 현숙한 무녀라면 그건 거론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런 이유로 수녀는 자신이 배당받은 세 명의 젊은이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수녀가 데리고 온 제자 역시 그들에게 아주 귀여움을 받았다. 그녀는 수녀 를 도와 여러 가지 심부름을 했고, 그러다 보니 역시 환자들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약간의 문제점을 낳고 있었다. 환자들과 속닥속닥해 가지고는 수 녀 몰래 뭔가를 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 수녀가 노크를 한 후 곧바로 찰스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제자가 뭔가를 황급히 감추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수녀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제 자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간 후 낮은 목소리로 추궁을 시작했다.
“뒤에 감춘 것은 뭐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녀님.”
“뭐지?”
슬쩍 수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제자는 재빨리 감추고 있던 것을 황급히 밖으로 꺼냈다. 평상시에는 조신하게 행동하는 스승이었지만, 한 번 속이 뒤틀 리면 끝장을 본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녀는 제자가 들이민 것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것은 체스판이었다. 그것도 말들이 얽히고설켜서 한참 접전이 진행 중인 체스판이었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자신 의 제자는 체스를 둘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병실에는 제자와 저 환자 둘밖에 없는데 누구와 체스를 두었단 말인가?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고 제자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찰스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온화한 모습일 때는 잘 몰랐는데, 저렇게 뭔 가를 파고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자니까 누군가의 얼굴이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부름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수녀님.”
“심부름이라. 잠깐 나 좀 보자.”
수녀가 자신을 밖으로 불러내자, 제자는 찰스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냈다. 이런 심부름을 시킨 당사자는 당신이 아니냐는 듯한……. 또 찰스는 찰스대로 뭔가 기억 이 떠오르려는 상태에서 수녀가 밖으로 나간다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우려가 있기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수녀님. 제가 시킨 일입니다.”
“그러신가요? 도대체 누구와 체스를 두고 계셨던 거죠?”
“저 앞쪽 병실의 15호 환자와 두고 있었죠. 저와 오랜 시간 친분이 있었던 분이니까요.”
그 말에 수녀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곳 요양 병동에 있는 환자들의 신상 정보는 일체 비밀이었다. 거의 무방비 상황에 처해 있는 환자들이지만, 황실에서 관리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환자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병실에 누가 치료를 받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이 비밀 사항이었던 것이다.
지금 찰스라고 부르는 이 사람도, 편의상 찰스라는 가명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찰스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찾아냈다는 것은 제자가 이 병동의 상황을 찰스 에게 말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병동에서 최고의 금기(禁忌)를 어겼음을 의미했다.
“크리스틴, 따라 나오너라.”
수녀는 잔뜩 분노를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평상시라면 웃고 넘길 수 있는 자그마한 실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녀에게는 신녀님으로부터 받은 교시를 이행해야만 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채 시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멍청한 제자가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틴은 스승이 화가 잔뜩 난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체념한 상태에서 스승을 따라 나가려는 순간, 찰스가 억하는 신음 소리를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은 재빨리 찰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멍청한 제자를 체벌하는 것은 환자를 돌본 후에 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수녀의 그 매서 운 눈동자는 자신도 모르게 찰스를 향했다.
찰스는 하마터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그만큼 지금 수녀와 겹쳐져 보이는 얼굴이 그에게 충격을 안겨 줬던 것이다. 수녀의 얼굴은 자신을 이 모양으로 만든 그 사람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찰스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기까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쫓아올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떠오르며 그는 뒤에 매달린 줄을 공포에 의해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잡아당겼 다. 그 줄은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음을 무녀나 신관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사실 자신에게 공포심을 일깨워 줄 만한 ‘그녀’가 진짜로 왔다면, 겨우 그들만 불러 가지 고는 턱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 본능에 떨고 있는 그에게는 그런 생각은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녀 한 명이 요란한 종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달려 들어왔다. 찰스는 그 무녀를 보며 겁에 질린 어조로 외쳤다.
“검을 다오! 검을!”
정신없이 검을 달라고만 외치던 그는 갑자기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수녀님.”
무녀는 갑자기 환자가 정신을 잃어버리자 어리둥절한 어조로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마법사님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찰스는 깨어나자마자 곧장 공포에 질린 어조로 검을 달라고 외쳤다. 아무리 달래도 통하지 않았기에 병동을 담당하는 마법사는 환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검을 가져 다줬다. 물론 찰스의 검이 아니라 경비병에게 부탁하여 그의 검을 빌려 준 것이다. 경비병은 검을 빌려 준 후 찰스의 옆에 붙어 서서는 그 검으로 자해를 하거나, 다 른 사람을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옆에 서서 감시했다.
찰스는 일단 검을 손아귀에 쥐자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침착한 어조로 15호실의 ‘로젠 형’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
마법사는 무녀들과 신관들 틈에 끼여 있던 수녀에게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며 질책했다.
“도대체 어떻게 찰스 님이 병동 내의 내부 사정을 알게 된 것인가? 병동 내부의 환자 배치는 절대 기밀이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수녀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이 병동에서 요양하고 있는 환자들에 대한 보호는 중요했던 것이
다.
마법사가 경비병에게 뭐라고 막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수녀의 얼굴을 본 찰스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저 마녀를 죽여야 해!”하면서 두려움에 질린 어조로 비 명을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경비병은 실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환자가 검을 휘두른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잘 알기에, 급히 환자가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손목을 붙잡았 다. 그리고 마법사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수녀였다는 것을 눈치 채고 경비병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녀가 경비병들에게 끌려갔음에도 환자는 로젠을 찾고 있었 다.
“어떻게 할까요? 마법사님.”
“할 수 없지. 15호실의 그랙을 이쪽으로 불러 주게. 일단은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야.”
“그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합니까?”
“괜찮을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난동을 부리겠나?”
“예, 그렇게 하죠.”
곧이어 창백한 안색을 한 로젠이 신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찰스는 로젠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찰스는 로젠이란 인물 을 믿는 것 같았다. 로젠은 약간의 설명을 신관들에게서 들었음인지 찰스에게 다가서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단 검부터 놓고 얘기하자.”
“그녀, 그녀가 나타났어, 형!”
“그녀라니?”
“우리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치레아 대공 말이오.”
“치레아 대공이라고? 그녀가 어디 있는데?”
그 물음에는 뒤에 서 있던 마법사가 답해 줬다.
“수녀를 말씀하는 모양인데, 병실에 구금해 뒀습니다.”
“구금해 뒀다고?”
로젠으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여기에 왔다면 결코 구금 따위를 당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시오.”
“예.”
마법사는 지체 없이 로젠의 부탁을 들어줬다. 오랜 시간 이 병동에서 일해 왔던 마법사는 이들의 신분 내력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신성력을 주축으로 수련 을 해 온 신관이나 무녀들의 경우 잘 모르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마나를 다루는 법을 익혀 온 그는 이 ‘마나 고갈’이란 희귀한 병이 아무나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병에 걸려서 황실 소속의 이 병원에 입원하려면 타이탄을 조종하던 오너 정도는 되어야 올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병자 개개인의 신상 은 모르지만 대략적인 신분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감히 상대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이곳입니다.”
로젠이 만난 수녀는 여느 성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왜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환자의 신상을 누설한 죄를 물으신다면, 당연히 제가 그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저를 보고 마녀라고 하는 것 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제 신상에 대해서는 드로아 대 신전에 문의하시면 곧바로 아실 수 있을 텐데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흑마법 따위를 익힌 적이 없습니다.”
로젠은 가만히 앉아서 정중하게 수녀의 말을 경청했고, 또 그녀의 외모를 살펴봤다. 마녀라고도 불리는 치레아 대공은 15세 정도의 소녀와 같은 외모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모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검술 실력 때문에 모두들 마녀라고 쑤군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수녀는 20 대 초반의 완숙미를 뿜어내는 아름다운 성직자였던 것이다.
“저도 그 녀석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참, 이럴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 녀석과 얘기를 나눠 보기로 하죠. 같이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저도 누명은 벗어야 할 테니까요.”
로젠은 수녀를 문 앞에 세워 둔 후 말했다.
“제가 신호를 하면 들어오십시오.”
잠시 후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오자 수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를 보자마자 찰스의 표정이 다시금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자, 로젠은 곧장 그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비틀거리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로젠은 꼴사납게 자빠질 뻔했다. 황급히 옆에 서 있던 신관이 그를 부축했다. 로젠은 한 대 맞고 침 대 밑에 널브러져 있는 찰스를 향해 외쳤다.
“야, 이 정신 빠진 놈아! 몸이 조금 말을 안 듣는다고, 그사이에 정신까지 썩어 문드러졌냐? 똑바로 정신 차리고 봐. 저분이 진짜 마녀가 맞아?”
우악스런 일격을 당한 찰스는 머리가 띵한지 두세 번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좀 더 세심하게 수녀를 살펴봤다. 물론 그가 이렇듯 용기를 짜낸 것도 옆에 로젠이라 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마녀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의 마음속에 격심한 공포를 심어 놨던 것이다.
차근차근 따지면서 보자, 확실히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수녀의 얼굴에서는 마녀와 달리 오만함이나 자유분방함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나이 대가 맞 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녀가 처녀로 성장한다면 꼭 저런 얼굴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를 먹지 않는 마녀는 결코 처녀가 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예전에 만났 던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벼룩’의 보고서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누군가와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찰스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로젠에게 한 대 맞은 것은 억울했는지 침대에 자빠진 상태에서도 그쪽에 변명을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형은 마녀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봐서 냉정을 유지한 모양인데, 진짜 닮았다니까.”
이제 제정신을 차린 찰스를 황급히 들어선 경비병이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로젠도 호기심이 이는지 말했다.
“진짜 그렇게 닮았냐?”
“진짜라니까. 그 마녀가 나이를 좀 더 먹으면 꼭 저렇게 생겼을 거야. 내 명예를 걸고 그건 확신할 수 있어.”
“하기야,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 한둘은 있다고 하지 않냐? 그건 그렇고, 마녀가 이렇게 생겼단 말이지……..
22
로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녀를 쏘아봤다. 수녀의 그 모습을 자신의 뇌리에 담아 뒀다가 언젠가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수녀는 상대의 살기 어린 눈빛에 오 한이 나는 듯했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제 오해가 풀린 모양이군요.”
“예, 죄송합니다. 수녀님.”
이때, 여태까지 조용히 사태의 경과를 주시하고 있던 마법사가 점잖은 어조로 끼어들었다.
“오해는 풀렸지만, 그것으로 수녀의 죄가 용서될 수는 없소. 끌고 가라.”
“옛!”
경비병이 수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며, 마법사는 신관들에게 지시했다.
“그랙님을 병실로 모시게. 많이 피곤하실 거야.”
로젠은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신관들의 손에 이끌려 병실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시끌벅적하던 병동은 일단 정돈이 되었다. 하지만 스승은 끌려가 버리 고 이제 홀로 남겨진 크리스틴의 문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위의 눈치를 살짝 보면서 찰스의 병동으로 숨어들었다. 크리스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찰스였다. 그가 크리스틴을 꼬셔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이봐요,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욧!”
모든 일이 해결되었기에 곧이어 찾아온 격심한 피로감에 깜빡 잠이 들어 있던 찰스를 크리스틴은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정상인의 몸이 아닌 찰스였기에 달콤하 게 자고 있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그 손길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무, 무슨 일이냐?”
“이렇게 주무실 때가 아니라구요. 수녀님을 구해 주세요.”
“수녀? 수녀가 누구였지?”
아직 잠이 덜 깨서 몽롱한 정신에 이리저리 생각을 하던 찰스에게 수녀가 누군지 떠올랐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잡혀 들어간 수녀를 말이다. 그녀는 제자의 잘못을 모두 다 덮어쓰고 구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지금 찰스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입장이 아니었다. 크나큰 공포에 따른 긴장에서 해방된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격심한 피로감뿐이었다. 너무나도 피곤했다. 그리고 그것도 한참 잠이 든 상태에서 강제로 일어난 상태였기에 피로감은 더욱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으응~, 그건 좀 자고 나서 생각하자.”
찰스는 시트를 끌어 덮으며 잠꼬대하듯 중얼거렸고, 곧이어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