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3화 – 신탁의 해석

신탁의 해석

“전하, 약간의 변수가 작용했사옵니다.”

“변수? 그건 무슨 말인가?”

“방금 들어온 벼룩의 보고로는 크라레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옵니다.”

벼룩의 경우 반란의 중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치레아 공국에 있었고, 또 그는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라기보다는 다크의 부관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 기에 치레아 기사단이 본국으로 소환될 때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사실을 알아내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이다.

“반란이라고? 그래, 반란의 수괴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이라고 하옵니다.”

토지에르의 이름이 거론되자 로체스터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고 나니까 별의별 얕은꾀를 다 짜내는군. 토지에르가 누구인가? 크라레스의 충신 중의 충신이 아닌가?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킬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반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인 모양이옵니다.”

“물론 사실이겠지. 놈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구실 삼아 황제를 이리로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야. 보나마나 반란이라는 것도 한바탕 연극이겠지.” 로체스터의 말을 듣자 레티안도 뭔가 깨닫는 점이 있었다. 자신은 반란이라는 말에, 서둘러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고는 로체스터에 게 달려왔는데, 상관은 그녀가 빠뜨린 것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소란을 피운 점용서해 주시옵소서.”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전하.”

“크라레스에 최후통첩을 보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약속한 그날까지 황제를 케락스로 보내라고 말이야.”

“옛, 전하. 그리고 또 한 가지 보고 사항이 있사옵니다.”

“뭔가?”

“요즘 들어 변경에서 몬스터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는 보고서가 계속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이동 중인 수십, 수백 마리의 오크나 트롤을 목격했다는 자 들이 있고, 심지어는 오우거나 미노타우르스 같은 희귀한 몬스터를 봤다는 목격자도 있는 모양이옵니다.”

“그래? 그런 하등한 몬스터들이 일으킨 소란 때문에 전국에 팽배해 있는 전승 분위기를 망칠 수야 없겠지. 기사단을 파견해서라도 주민들이 몬스터의 피해를 입는 일은 없도록 막게.”

“예, 그렇게 조치하겠사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는 없었사옵니다.”

“뭐라고? 정확한 보고인가? 몬스터들이 민가를 약탈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예, 그들이 으슥한 외진 곳을 골라서 서둘러서 이동하는 것이 포착되었을 뿐, 민가를 약탈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사옵니다.”

“이상한 일이군. 얌전히 다닐 놈들이 아닌데 말이야.”

“좀 더 자세히 조사하도록 할까요?”

“아니, 아니야. 겨우 몬스터들 좀 돌아다닌다고 신경 쓸 필요가 있겠나? 그것보다도 아르곤에다가 첩자들을 더 투입하게나. 아무래도 크라레스가 항복한 이후에는 그놈들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지 않겠나? 미리미리 조사해 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되겠지.”

로체스터의 결정은 별로 잘못된 것이 없었다. 사실상 트롤이나 오크 정도는 기사단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처 치가 가능했다. 그리고 오우거나 미노타우르스 같은 경우 인간의 힘으로는 처치하기 힘들 정도의 초대형 몬스터였지만, 모두들 많아 봐야 다섯 마리 정도가 뭉쳐 다 니기에 기사 두세 명만 파견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타이탄이 개발된 이후 변방에 돌아다니는 몬스터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몬스터에 신경 쓰느니 그 시간에 타국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레티안이 아직도 나가지 않고 서 있자 공작이 물었다.

“아직도 보고하지 않은 사항이 남았나?”

“아니옵니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전하를 뵙기를 청하며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좋아. 들라고 하게.” 

“예.”

레티안이 나가고 난 후 곧이어 제임스가 들어왔다. 그런데 제임스는 혼자가 아니라 웬 미모의 무녀와 함께 들어왔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그래, 그런데 그분은 누구신가?”

“예, 드로아 대 신전에서 나오신 수녀님이십니다.”

‘수녀’라는 말에 로체스터의 표정이 약간 떨떠름해졌다. 신녀나 교령도 아니고 감히 수녀 따위가 감히 자신의 집무실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 말씀하십시오, 수녀님.”

“예, 저는 신녀님의 교시를 받고 케락스시에 왔사옵니다. 여신님께서 내리신 신탁의 대상자를 찾아 그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대상자는 누군가?”

“예, 암흑의 기운이 세계를 뒤덮을 때, 그것을 막을 영웅이 케락스시에 있다는 신탁이 내렸습니다. 저는 그 영웅을 돕고자 왔사옵니다.”

“그런가? 어린 나이에 대단히 막중한 임무를 맡았군. 그렇다면 그 증거는 가지고 있나? 수녀를 내가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요즘 국내 사정이 좀 그렇다보니 확 인 절차를 밟자는 것이야.”

“예, 여기 있사옵니다.”

수녀는 신녀로부터 전해 받은 명령서를 공작에게 건넸다. 공작은 그 명령서를 주머니 속에 슬쩍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이곳까지 온다고 피곤했을 텐데, 좀 휴식을 취하게. 아직 암흑의 기운이라든지 뭐 그런 것이 뭘 뜻하는지 잘 모르겠으니 그에 대한 조사는 해 보라고 지시하지. 그 런 후 뭔가 단서가 잡히면 그때 대화를 나눠 보는 것이 어떻겠나?”

“알겠사옵니다, 공작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살짝 줄을 당겨서 벨을 울린 후, 벨 소리를 듣고 쫓아온 시녀에게 명령했다.

“수녀에게 휴식할 곳을 마련해 주거라.”

“예, 전하.”

수녀는 시녀를 따라 방에서 나갔다. 그녀가 방에서 나가자 로체스터 공작은 신녀의 밀지(密旨)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좋은 게 손에 들어왔군.”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아, 자네는 알 것 없네. 이 검은 기운이 뭔지는 자네도, 나도, 이것을 가지고 온 수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것을 물리치는 영웅이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 지.”

“그렇죠.”

“그렇다면 이건 아주 이용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참, 자네와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군. 경은 레티안이나 불러다 주고 볼일 보게나.”

“옛, 전하.”

레티안이 다시금 들어오자 로체스터 공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뜻하지 않게 아주 좋은 것이 들어왔어. 자네는 이게 뭔지 알겠나?”

서류를 훑어보던 레티안은 조금 놀라운 듯 말했다.

“아데나 여신의 신탁이 아니옵니까?”

“그래, 맞았어. 그것도 드로아 대 신전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신탁이지.”

“그런데 왜 이걸 소신에게 주시는 것이옵니까?”

“이걸 이용할 방도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야. 신탁의 내용은 세계를 덮고 있는 암흑의 기운이 존재하고, 그것을 막는 자가 케락스에서 나온다는 것이지. 대충 그림 으로 그려 놨으니 이해하기는 좀 힘들지만 말이야. 신전 쪽의 해석은 그런 모양인데, 어때?”

“그렇군요.”

서류 뒤에 첨가되어 있는 그림을 훑어보며 레티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이놈의 신탁이 뭐를 뜻하는지는 설명을 들어야 알 수 있을 정도로 난해하니까 말이 다. 일단 설명을 듣고 나서 보니 과연 그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번 사태에 써먹으면 어떨까 싶은데 말이야. 본국의 명성을 드높이고, 또 크라레스 황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증거물로 말일세. 크라레스 제국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을 제압한 것은 코린트야. 그러니 크라레스를 마왕과 결탁한 세력이라고 선 포하고 아예 끝장을 내 버리자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을 응징한 것은 본국이 아니겠나? 어때? 이용 가치가 충분하지 않겠어?”

레티안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전하께옵서 위험해지실 수도 있사옵니다. 군의 총사령관은 전하시니까요. 신탁은 영웅의 출현을 알리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국민들은

전하를 영웅으로 추대할 것이고, 폐하께서 위기감을 느끼시지 않으실까요?”

“딴은 그렇군. 하지만 영웅 따위야 대충 아무나 하나 만들면 되지 않나?”

“그것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일단 영웅이 되려면 공훈이 있어야 하니까요. 만약 제국 전쟁 전에 이런 신탁을 받았다면, 누군가를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그를 계속 손쉬운 전장에 보내어 공훈을 쌓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그 공훈을 날조한다면 부하들의 반발을 살 우려도 있사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써먹지? 자네에게 좋은 생각 없나?”

“정적 타도에 써먹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옵니다.”

과거부터 아데나의 신전에서 나오는 신탁의 정확성은 상당히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왜 미래를 예지하는 그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일까?

그 가장 큰 원인은 신탁이 거의 해석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하다는 데 있었다. 그 때문에 뭔가 사건이 종료된 후에야 그 신탁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구나하면서 고 개를 끄덕이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그렇기에 일부에서는 대충 난해한 징조라든지 언어들을 나열해 놓고는 나중에 그것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냐 는 의심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보면 그것과 대충 들어맞는 일이 꼭 한두 번은 나왔기에 아데나 여신의 신탁이 홀대를 받지 않게 된 것이 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는 아데나 교단의 교세가 미약한 것일까? 거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 신탁이 내렸을 때 그것 이 거의 해석 불가에 가까울 정도로 난해하다는 점을 악용하여 황실이나 군부에서는 얼렁뚱땅 끼워 맞춰 이용해 먹으려고 들었다. 그 가장 큰 예가 아직까지도 논란 이 많은 150년 전에 있었던 코린트 황실에 대한 반란 미수 사건이었다.

코린트 황가에 검은 기운이 퍼진다는 것을 신탁으로 받은 교단에서는 그것을 즉각 통보했다. 그리고 그 통보를 받은 코린트 황실에서는 교단의 기대와는 달리 이 검은 기운이 뭐냐를 두고 엄청난 정쟁(政爭)에 휩싸였다. 물론 나중에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그 검은 기운이 황제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태 어나지 않았음으로 인해서 생기게 되는 내분을 뜻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결론을 짓게 되었지만, 처음 그 신탁이 보내졌을 때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것은 반대 파를 숙청하는 명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놈의 신탁 덕분에 수구 세력과 대치하던 개혁파의 정치인 및 군인 3천여 명이 반란 미수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 거나 처형당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용만 당하면서 점차 세상에 환멸을 느낀 아데나 교단에서는 최대한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아무리 예언이라고 해도 그것 이 이미 밝혀져 버리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또 해석하기가 난해하기에 구구한 억측을 만들어 생사람을 여 럿 잡게 되기 때문이었다.

로체스터 공작과 레티안은 과거 선조들의 본을 받아 이 신탁을 정적 타도에 이용할 궁리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