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4화 – 토지에르의 음모
토지에르의 음모
크라레스의 황실은 격변의 소용돌이를 거쳐, 이제 그 제위(位)는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이 이어받았다. 토지에르는 몇몇 충신들에게 거짓 반란만이 그래지에 트 황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꼬드겨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은 성공이었다. 군의 통수권을 토지에르가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토지에르는 반란에 성공한 후 처음 충신들과의 계획과는 달리 황제를 지하 감옥에 가둬 버렸다. 그런 후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흑마법사들을 그곳에 배치했다. 이 렇게 해서 그는 황제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때까지도 흑마법사들 외에 이렇다 하게 신뢰할 만한 부하들이 없었다. 아무리 마왕의 현신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육체를 뒤집어쓴 이상 그가 발 휘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기에, 모든 기사들을 잡아다가 한꺼번에 세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일부 쓸 만한 기사들을 골라 세뇌를 하는 한편, 흑마법사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몬스터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인간보다는 훨씬 지능지수가 떨어지면서도 암흑의 기운에 가까운 존재들인 몬스터들 이라면 손쉽게 부려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마왕은 주위에서 자신이 아직 강림한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이때, 자신의 세력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독아(毒牙)를 감추고 있었 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전하!”
갑자기 달려온 근위 기사단장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의 말에 짐짓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뭐가 말인가?”
“신성한 황궁에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것 말이옵니다.”
“그들은 황제 폐하의 새로운 병사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강적 코린트와의 전쟁을 하려는 마당에 몬스터들의 손이라도 빌릴 수 있다는 것은 신의 도우심이 아 니신가? 이것도 다 내가 흑마법을 익힌 덕분이 아닌가 말이야.”
뭐 마신(魔神)도 신은 신이니까 말은 되는 것 아닌가?
“그거야 그렇사옵니다만, 그래도 황궁에까지 그런 추악한 것들이 돌아다니게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옵니까?”
몬스터의 이동은 첩자들의 눈을 피해서 한밤중에 진행된 일이었는데, 론가르트 백작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 보니 그것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토지에르는 점잖게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아아, 그건 다 나에게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야. 몬스터들은 다 지하 감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단장은 운 좋게 그것을 본 모양이군.”
“지하 감옥에 말씀이시옵니까?”
토지에르는 일부러 뭔가 비밀스러운 말을 하는 듯,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춰서 속닥거렸다.
“그렇지. 폐하의 안전을 도모하고, 또 첩자들의 침입을 막는 데는 오히려 몬스터들이 낫지 않겠나? 사실 반란을 일으켜 폐하를 폐위하고, 지하 감옥으로 모신 것도 다 타국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말이야. 몬스터는 마법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이니 확실히 믿을 수 있지. 본국의 첩자가 열 명이라면 코린트의 첩자는 50명이야. 하지만 그 첩자들이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지하 감옥 안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겠나? 바로 들통 날 것이 뻔하기에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그것들을 지하 감옥에 배치시킨 거라네. 알겠나?”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들어봤을 때 말은 되었기에 론가르트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예.”
“그건 그렇고, 기사단의 재정비는 끝났나?”
“예, 그런대로 기사단장들과 대충 의견 일치를 보았사옵니다.”
“어떻게 하기로 했지?”
“중앙 기사단의 각 전대는 전력 유지를 유해 30대씩으로 나누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사옵니다. 3전대만 트라노 30대와 테세우스 7대로 편성했사옵니만, 나중 에 추가로 생산되면 4전대로 독립시켜야 하겠지요. 그 외에 나머지 기사단들의 변동은 없사옵니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수고했네.”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예전에는 이틀에 한 대씩 납품되고 있던 타이탄이 요즘은 거의 납품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아아, 그것은 흑마법사들을 긴히 쓸 일이 있어서 파견해 버렸기에 엑스시온 생산에 문제가 생긴 것 때문이지. 며칠 정도 있으면 정상적인 생산이 가능할 테니 걱 정하지 말게.”
“예, 알겠사옵니다. 전하.”
“내가 지시한 대로 병력 배치는 시작하고 있나?”
“예, 일단 기사단의 배치는 이미 시작했사옵니다. 수도에는 치레아, 스바시에, 근위 기사단이 남고 중앙 기사단은 각 방위선의 핵으로 배치할 것이옵니다.”
“군대의 배치는?”
“군대는 아직 재편성 중에 있사옵니다. 아마도 일주일 이내로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재편성이 끝나는 대로 방위선으로 보내겠사옵니다.” “잘해 보게. 나는 단장의 능력을 믿고 있으니까 말일세.”
“감사하옵니다, 전하.”
론가르트 백작이 밖으로 나가고 난 후 토지에르는 문 쪽을 보고 빈정댔다.
“벌레 같은 것들이 눈치 하나는 빠르군. 생각 같아서는 모두 다 몬스터의 밥으로 던져 주고 싶지만…, 그래도 충성스러운 마계의 신하들을 소환하기 전까지는 저 놈들이 살아 있는 편이 좋겠지. 자, 그럼 다시 소환 의식을 시작해 볼까?”
토지에르는 곧장 지하 감옥으로 공간 이동했다. 그것 때문에 지하 감옥을 몬스터로 채워 넣은 것이니까 말이다.
지하 감옥에 도착한 토지에르는 주문을 외워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타의 마법진들과 달리 그가 만들고 있는 마법진에서는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이 뭉실뭉실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마법진이 완성되자 그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자신의 본체를 암흑의 저편에 있는 마계에서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이따위 조잡한 마법진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강력한 소환 마법을 실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빼앗는 데 성공한 벌레의 육신을 통해 뿜어낼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은 마왕인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도 미미한 것 이었다.
일단 마법진 위에 올라선 마왕은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그 주문에 따라 거대한 마법진이 형체를 만들어갔다.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어둠의 맹약에 따라, 템스트라! 그대를 소환하노니 신성한 빛의 장막을 뚫고, 기나긴 어둠의 통로를 거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마법진의 중간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것은 뭔가 형체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템스트라는 지고하신 마왕 앞이라서 자신의 형 체를 만들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형체는 아니었다. 뭔가 울룩불룩한 시커먼 액체로 만든 인형과 같은 형상이었다. 템스트라는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듣기 껄끄러 우면서도 텁텁한 목소리로 외쳤다.
“끅끅, 지고하신 어둠의 마왕께서 이 미천한 종을 불러 주셔서 영광이옵니다.”
템스트라의 말대로 마왕은 그야말로 마계에서 ‘미천한 놈을 불러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가진 힘의 한계였으니까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인간계에서 주어진 내 힘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너 같은 놈들뿐이니까 말이다.”
토지에르는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린 후 템스트라에게 말했다. 그토록 오랜 작업을 했고, 마력을 집중했는데 겨우 이 정도밖에 불러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니던가?
“네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겠다.”
“하명하시옵소서!”
“코린트 제국의 황제를 죽여라. 실패는 용서하지 않겠다.”
“옛! 명을 받들겠나이다. 하지만 속하는 공간 이동 마법을 할 줄 모르옵니다. 그리고 그 코린트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옵고, 더군다나 황제라는 자가 누군지도 모르옵니다.”
템스트라의 말을 들은 토지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실 마왕 자신도 코린트 황제라는 놈의 상판대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마왕 은 한 가지 좋은 방도를 떠올렸다.
“너를 코린트의 수도라는 케락스시로 보내 주겠다. 그곳에서 황제라는 놈을 찾아서 죽여라.”
“옛!”
마왕은 품속을 뒤져서 공간 이동 좌표가 자세히 나와 있는 책자를 꺼내서는 코린트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케락스로 가는 좌표를 찾아낸 마왕은 곧장 템스트라를 그곳으로 공간 이동시켰다.
마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템스트라가 아무리 마계에서는 등급이 낮은 악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왕이 이곳에다가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템스트라는 마왕에게 그 금쪽같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전에 강림했을 때는 미개한 인간들 을 얕잡아보고 서두르다가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전하! 전하! 일어나시옵소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로체스터는 급히 일어났다. 그는 평소의 습관대로 침대 머리맡에 놔뒀던 검부터 집어 들었다. 하지만 주위에는 그 어떤 위험도 감지되지 않 았다.
“무슨 일이냐?”
“전하,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사옵니다.”
“뭣이?”
로체스터 공작은 재빨리 일어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여태껏 잘살아 오던 황제가 왜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 수녀가 건네줬던 그 신탁을 무시했던 것이 영 찝찝 했다. 세계가 어둠에 휩싸인다는 것. 영웅의 출현에 중점을 두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둠이란 것은 황제의 사망을 뜻하고, 영웅이란 것은 새로운 황 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젠장! 그것도 생각해 뒀어야 했는데…….’
로체스터는 서둘러 옷을 입은 후 황궁으로 향했다. 로체스터가 황궁에 도착하고 보니 제1근위대가 물샐틈없는 경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제임스는 로체스터 공 작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급히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암살자(Assassin)가 들어왔사옵니다.”
“뭣이? 암살자?”
“옛!”
로체스터 공작은 황제 폐하의 침실 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그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뚫고 황제 폐하의 처소까지 잠입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비밀 유지는 확실히 해 놨겠지?”
“옛! 황제 폐하의 승하 사실을 알고 있는 시녀들은 모두 다 체포해 뒀사옵니다.”
“모두 다 없애 버려라.”
“예.”
이윽고 그들은 황제의 침실에 도착했다. 황제의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 부근을 관통하고 있는 깊은 검상이었다. 그리고 황제와 동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두 명의 어린 시녀들의 시체도 함께 있었다. 그녀들의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는 근위 기사단 소속의 마법사 몇 명이 마법을 사용하여 증거 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난장판이 될 때까지 경비 무사들이나 근위 기사들은 뭣을 했던가?”
“예, 심문해 본 결과 그들의 말로는 과거에도 침실에서 계집의 비명 소리라든지 뭔가 두들겨 패는 듯한 소리가 한 번씩 들려왔기에 오늘도 그렇거니 하고 생각했 다고 하옵니다.”
황제는 늙은 후 약간 취향을 바꿔 가학적인 성행위를 즐겼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로체스터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경비 무사들은?”
“모두 다 체포해 뒀사옵니다.”
“그래듀에이트를 남기고 모두 다 처형해라. 그리고 그래듀에이트는 따로 모아서 철저히 조사하되, 의심이 가는 자가 있다면 정신계 마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알 겠나?”
황제를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래듀에이트뿐이었기에, 만약 내부인의 소행일 때를 가정하여 내린 명령이었다. 자국 기사의 경우 정신계 마법은 그야말로 최후 의 수단에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워낙 후유증이 대단해서 최악의 경우 미쳐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로체스터는 그것마저도 허락한 것 이다. 그리고 그들 외의 경비 무사들은 비밀 유지를 위해 죽여 버리라는 뜻이었다.
“옛, 전하.”
“폐하의 시신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장례식을 치를 준비를 하도록 해라. 절대로 칼자국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암살자에 의해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신 것이 아니라 격렬한 정사로 인한 심장마비로 승하하셨다고 발표하도록!”
만약 자객이 들어와서 황제가 사망했다면 근위기사단에 책임을 묻게 된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국력이 쇠약한 판에 한 명의 근위 기사라도 잃을 수는 없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근위 기사단의 단장인 로체스터 공작에게까지도 그 불똥이 튕겨 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이런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옛,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모든 지시를 내린 후 나가려다 말고 방 한쪽에 나뒹굴고 있는 갑옷에 이색적인 눈빛을 던졌다. 젊은 시절 황제가 입었던 그 황금색 찬란한 갑옷의 앞부분이 푹 찌그러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찌그러들어 있는 모양은 오른손 손바닥의 모양과 똑같았다.
“잠깐! 경도 저것을 봤나?”
“옛.”
“혹시 전부터 저런 모양이었나?”
“시녀들에게 물어봤지만, 그전에는 멀쩡했었다고 하옵니다.”
“그래? 이상하군. 그렇다면 폐하를 해친 무기는 뭣이었나?”
“저 갑옷에 딸려 있던 장검이었사옵니다. 저 갑옷은 원래 완전 무장한 기사의 행색으로 저쪽에 서 있었다고 하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이 제임스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갑옷을 거치해 두는 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슬그머니 갑옷 쪽으로 다가가서는 갑옷 위 에 있는 헬멧의 안면 가리개를 들어 올려 슬쩍 안을 확인해 봤다.
“그쪽은 벌써 확인해 봤사옵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놈이 들어오거나 나간 흔적은 발견했나?”
“특이하게도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사옵니다. 아무리 뛰어난 암살자라도 아무런 흔적 없이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인데 말이옵니다.”
“아무래도 내부의 소행임이 확실한 것 같기는 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일단 그래듀에이트들을 족쳐 보면 뭔가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지.”
이때 마법사가 공작에게 다가왔다.
“드디어 증거를 잡았사옵니다.”
“그래?”
“범행이 일어난 후 이곳에 대한 출입을 철저히 막고 찾은 결과 어렵지 않게 범인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냈사옵니다.”
“잔말 말고 한번 보여 보게.”
“옛!”
“리멤버런스 오브 더 록(Remembrance of The Rock : 암석의 기억)!”
그와 동시에 침실 밑에 깔려 있는 대리석판 한쪽에서 3차원적인 희미한 영상이 뿜어졌다. 대지보다는 단단한 암석 쪽이 아무래도 정보의 저장력이 떨어지기에 영 상은 상당히 희미했다.
황금색 갑옷이 검을 쥔 채 움직이는 장면이 슬쩍 보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뭔가 그럴듯한 것이 있을 것을 기대한 로체스터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게 뭐야? 그 망할 암살자 놈이 갑옷 안에 들어가서 움직였다는 것은 척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야. 나는 범인이란 놈의 상판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은 거야. 알겠나?”
“예, 전하.”
마법사는 호된 질책을 당한 후 다시금 이리저리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임스는 공작의 지시를 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제임스는 부하들을 불러서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를 전달한 후, 덧붙여서 금십자 기사단까지 불러들여서 수도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다음 그 자신은 궁전 내외부를 샅샅이 뒤지면서 적이 침입해 들어올 가능성이 있을 만한 곳을 직접 탐색하기 시작했다. 첩자가 와서 황제가 살해당했는데도 상대가 어떻게 침입했는지, 또 상대가 어떻게 유유히 빠져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은 제임스의 자존심을 엄청나게 긁어 놨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가는 수녀를 발견했다. 수녀의 표정이 원체 자연스러웠기에 제임스는 그냥 넘어가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병사에게 질 문을 던졌다. 이런 한밤중에 수녀가 병사들과 함께 걸어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병사는 근위기사단의 복장을 한 기사가 질문을 던져왔기에 지체 없이 대답했다.
“행동이 수상해서 연행해 가는 중입니다, 기사님.”
“뭐? 연행하는 중이었다고?”
“예.”
제임스는 수녀를 향해 의혹에 찬 눈길로 쳐다봤다. 연행당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수녀의 표정이 너무나도 담담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예, 밤에 산책을 하다가 이분들이 수상하다며 가자고 해서 따라가던 중이었습니다.”
제임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 한밤중에 따라오라고 한다고 해서 따라갑니까? 그리고 달밤에 무슨 산책을 하시고 계셨던 거지요? 썩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도 아닌데 말입니다.”
“잠을 자다가 좀 이상한 꿈을 꿨거든요. 뭔가 시커먼 것이… 이곳 황궁을 덮기에 놀라서 잠에서 깼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뚜렷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 데, 왜 그렇게 꿈속에서는 무서웠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잠을 청해 봤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진정이 안 되기에 기분 전환 겸 잠시 밖에 나와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왜 여기를 서성거리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산책 중이라고 대답했구요. 가자고 하기에 따라가던 중이었습니다. 저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 이 두렵겠습니까?”
제임스는 꿈 얘기를 들으면서 상대의 표정을 세밀히 관찰했다. 하지만 수녀는 제임스의 의혹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종 담담한 어조로 말을 끝마쳤다. 사실 그녀 말대로 죄가 없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황제가 암살당한 이때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잡혀 들어가면, 필히 고문을 동반한 생사 람 잡기가 뒤따를 것이다. 결국에는 무죄가 입증될지는 몰라도 묵사발 난 후 아무리 실수였다고 하며 죄송하다는 사과를 들어 봐야 이미 늦은 것이다.
제임스는 잠시 수상쩍은 듯한 시선으로 수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수녀를 전문적인 암살자, 그것도 늙기는 했지만 그래듀에이트급의 기사를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암살자라고 의심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리가 있었다. 수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로브는 언제나 그러하듯 주름 하나 가 있지 않았다. 그 런 그녀가 어떻게 갑옷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겠는가?
또 만약에 백보 양보해서 그녀가 시커먼 암살자의 복장을 하고 황제를 죽였다고 하더라도,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옷까지 갈아입고 이 달밤에 산책을 한단 말인가? 그건 ‘나를 의심해 주세요’하는 꼴밖에 안 되지 않는가.
제임스는 수녀가 아데나 신전의 무녀인 만큼, 뭔가 황제 암살을 예고하는 예지몽(豫知夢)을 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제임스는 어떻게 보면 무모하
고, 또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는 이 수녀를 향해 미소를 보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산책하기에는 너무 날씨가 싸늘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기에, 이 숙소 밖을 서성거리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만 가 보십시
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그 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대화를 해 보고 싶군요.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수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한 후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은 제임스의 지시를 받고 또 다른 수상한 자를 잡기 위해 다시 수색을 시작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