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9화 – 전면에 나서는 용병대장 키에리
전면에 나서는 용병대장 키에리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된 그날, 코린트에는 3개국의 사신이 약속이나 한 듯 꼬리를 물고 방문했다. 사신들은 모두들 코린트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 을 만나기를 원했다. 황제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지만 아직 대관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였기에 로체스터 공작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크라레스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크라레스의 사신이 자신을 만나자고 청했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버럭 짜증을 냈다. 사신 따위가 자신에게 찾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뭐? 크라레스의 사신을 왜 나한테 데려온다는 말인가?”
“전하를 만나 뵙고 청할 것이 있다고 하옵니다. 딴 사람은 안 되고 전하께 그 말씀을 올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사옵니다. 어떻게 하실 것인지 하명해 주시옵 “소서.”
로체스터 공작은 왜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하지만 이곳에 도착하려면 비무장 상태로 들어와야 할 것이고, 그 런 상태에서 자신을 암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좋다. 들라고 해라.”
곧이어 문이 열리고 뚱뚱한 와리스 후작이 겨울인데도 땀을 닦으며 들어와서 인사를 건네 왔다. 실내에 불을 지펴서 뜨뜻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땀을 흘 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궁금하게 여기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예, 공작 전하. 실은 본국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은 잘 알고 계실 줄로 믿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그래서 귀국의 황제를 보내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그것은 아니옵니다. 조만간에 토지에르 폐하께서 직접 항복 문서에 조인하기 위해 오실 것이옵니다.”
뚱돼지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들 속을 내가 모를 줄 알았냐?”하는 비웃음이었다.
“토지에르가 황제가 되었건 말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소. 항복 문서에 서명해야 하는 것은 토지에르가 아니라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폐위된 프랑크 폰 그래 지에트 황제란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알겠사옵니다, 전하. 폐하께 직접 여쭤 본 후에 결과를 알려 드리겠사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전하를 뵙기를 청한 것은 지원군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드리기 위 해서이옵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로체스터 공작은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원군이라니, 무슨 지원군 말이오?”
“말토리오 산맥에서 몬스터들이 집단적으로 난리를 일으켰사옵니다. 지금 그들은 말토리오 산맥에 있는 모든 도시들을 점령한 상태이옵고, 크라레인시로 진격 중 이옵니다. 본국의 기사단들이 반격을 개시한 상태이오나 놈들의 저항이 너무나 거세기에 전하께 도움을 청하고자 왔사옵니다.”
“겨우 몬스터의 난동 때문에 기사단까지 밀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벌써 5개 사단이 전멸한 상태이옵고, 중앙 기사단의 2개 전대가 큰 피해를 당했사옵니다.”
“도대체 그 난동을 부린다는 몬스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기에 그토록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말이오?”
“족히 5만은 된다는 보고를 받았사옵니다.”
5만이라는 말에 로체스터는 경악했다. 어떻게 5만이나 되는 몬스터들이 집단적으로 난리를 일으킨단 말인가? 하지만 로체스터는 냉정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이 일은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 같소. 일단 부하들과 상의한 후 추후에 통보해 주겠소.”
“예, 전하. 아무리 본국이 귀국과 사이가 나빴다고 하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이 아니옵니까? 부디 몬스터에게 짓밟히고 있는 본국의 국민들을 저버리지는 말아 주 시옵소서. 양국의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사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와리스 후작이 물러간 후에 로체스터 공작은 뚱돼지가 한 말의 신빙성에 대해 곰곰이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놈이 왜 몬스터의 침입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와리스 후작을 시작으로 알카사스와 아르곤의 사신들이 줄을 이어 도착하여 위급함을 알려왔다. 그들을 통해 로체스터 공작은 와리스 후작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코린트의 군부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코린트의 모든 작전을 담당하는 부서는 작전 지휘부다. 이곳에서 각 기사단의 작전관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여 각 부대가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작전에 대한 토의를 하게 된다. 그들끼리의 토의가 끝난 후 각 기사단 및 사단의 지휘관들을 앉혀 놓고 브리핑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재, 각국의 보고를 분석한 결과 몬스터들은 산맥을 따라 이동하며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장교는 널찍한 지도의 산맥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몬스터들은 말토리오 산맥과 쟈코니아 산맥을 그 근거지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거대한 쟈코니아 산맥을 중심으로 말토리오 산맥, 오실라니아 산맥이 모두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 모든 산맥에 살고 있는 모든 몬스터들이 대군(群)을 형성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단 몬스터들은 3개의 큰 군집으로 나뉘었습니다.
첫 번째 군집은 쟈코니아 산맥을 근거로 하여 서쪽으로 진격하며 아르곤의 점령군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군집은 말토리오 산맥을 기점으로 북쪽으 로 진출하며 크라레스 제국을 집어삼키는 중입니다. 세 번째 군집은 말토리오 산맥의 말단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진출하며 엔테미어 공국을 격파하는 중입 니다. 각국의 사신들이 올린 보고를 종합해 봤을 때 그중에서 제일 규모가 큰 곳은 두 번째 집단으로서 총수가 5만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이외 다른 각국에 침입한 규모는 각각 3만 정도입니다.”
“그럼 총 11만이란 말인가?”
그 엄청난 숫자에 질린다는 듯한 노장군이 물었다. 몬스터의 수가 엄청날 때, 타이탄을 주력 병기로 하는 기사단의 피해야 별로 없겠지만 몸으로 때워야 하는 말단 병사들의 피해는 엄청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예, 장군님.”
“놀라운 일이군.”
일단 대답을 해 준 후 장교는 다시금 설명을 이었다.
“지금 몬스터가 집단행동을 일으킨 곳은 쟈코니아 산맥과 말토리오 산맥뿐이라는 겁니다. 쟈코니아 산맥과 말토리오 산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그 난동은 오실라니아 산맥이나 발렌시노 산맥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군들과 기사단장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장교가 한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교는 준비해 놓은 자료를 모두 다 읽어 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그들을 조용히 시킨 후 말을 이었다.
“이것을 예상해 볼 때, 현재 본국은 몬스터의 침입을 받고 있지 않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쟈코니아 산맥의 가장 끝자락과 발렌시노 산맥은 본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발렌시아드 공국과 쟈코니아 지방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강화해야만 한다는 것이 작전 지휘부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자국이 침공당할 수도 있다는 말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부하들을 진정시킨 후 말했다.
“현재 작전지휘부에서 내린 판단은 방금 설명을 들은 바와 같다. 그에 대해 귀관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몬스터들이 행동을 통합하기 전에 토벌군을 파견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전하.”
“그것보다는 방어 태세를 완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지금까지 산맥 주변에 위치한 요새들은 소규모의 몬스터들만을 상대해 왔사옵니다. 만약 그런 대규모 침공을 당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방어보다는 공격이 우선이옵니다. 적들의 능력을 알아야 어느 정도 수준까지 대처를 해야 할지 정해질 것이 아니옵니까?”
서로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방금 전 의견을 내놨던 장군 한 명이 앞의 의견을 내놨던 장군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다가 공격을 당한다면 누가 책임질 거요, 당신이 책임질 거요?”
오는 말이 곱지 않으니 당연히 가는 말도 곱지 않았다. 모두들 각 기사단을 책임지는 인물들, 계급은 똑같으니 한판 해 보자는 의도가 확실했다.
“뭣이? 그럼 당신은 눈과 귀를 틀어막고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면 끝인 줄 아시오? 놈들의 규모와 전력을 알아야 대비를 할 거 아냐?”
둘이 싸우기 시작하자 모두들 패를 나눠서 수비를 하자는 쪽과 공격을 하자는 쪽으로 갈라져서 저마다 한마디씩 해 대기 시작했고, 곧이어 회의장은 소란스러워지 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이곳에 모인 인물들은 모두 다 교양보다는 실력을 앞세우는 무인들이 아닌가? 급기야는 욕지거리까지 오고 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놔 둬서는 안 되겠다고 느낀 로체스터 공작이 탁자를 큰 소리가 나게 몇 번 두들긴 후 엄하게 호통 쳤다.
“모두들 닥쳐랏! 여기가 시장통인 줄 아는가? 안 그래도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많은데 서로 싸워서 뭐가 남는 것이 있겠는가?”
이제 장군들 및 기사단장들의 의견은 거의 들은 상태였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단안을 내렸다. 일단 현 상태에서 군대를 바로 산맥 안으로 투입한다면 위험천만할 것은 분명했다.
“장군들은 모두 각자가 맡은 부대로 복귀하여 몬스터와의 전투 준비를 행하시오. 그리고 변방의 각 요새 및 성에는 공문을 띄워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이르 시오. 그리고 금십자 기사단은 준비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가 언제든지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출동하도록 하라.”
“예, 전하.”
“현재, 본국의 기사단 전력은 위태로울 정도로 줄어들어 있는 형편이다. 그런 만큼 몬스터들의 규모 및 전력에 대한 조사는 용병 기사단에 일임하도록 한다.” 로체스터 공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십자 기사단장인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이 벌떡 일어서서 반론을 제기했다.
“전하,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어떻게 용병을 믿을 수 있겠사옵니까? 거기에다가 용병대장으로 선임한 자는 여태껏 자신의 부하들은 돌보지 않고 시외의 자택에 들 어앉아 놀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런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지 마시고 저를 보내 주시옵소서. 생명을 바쳐 임무를 완수해 내겠나이다.”
제임스는 제1근위대장의 신분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용병대장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참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전사했다고 되어 있 었고, 또 그것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체스터 공작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지금 키에리의 복권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키에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알파레인 후작에게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타일렀다.
“물론 나도 경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금십자 기사단이 빠진다면 본국에 남은 기사단은 믿을 수 없는 용병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밖에 남지 않는다. 적의 규모와 전 력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위험한 곳에 경을 보낼 수는 없다. 경을 아끼는 나의 마음을 좀 헤아려 줄 수는 없겠는가?”
로체스터 공작의 은근한 말에, 이 단순한 무인은 엄청나게 감동했는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로체스터 공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독거렸다. ‘무식한 놈’하고 생각하면서…….
“물론 용서하네. 그럼 이렇게 결정난 것으로 알고 각기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서 준비 태세에 만전을 기하라.”
“옛,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회의가 끝나는 대로 용병대장의 사택으로 갔다. 그는 호위 기사들을 밖에다가 세워 둔 후 혼자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용병대장은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크라레스가 거의 끝장난 상태였기에 돌아가겠다는 뜻을 로체스터에게 슬쩍 비췄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서 발목을 잡힌 채 고민 중이었던 것이다. “어서 오게.”
“아무리 빠져나갈 궁리를 해 봐야 별수 없을 걸세.”
“왜?”
“벌써 일이 터졌거든.”
“무슨 일? 크라레스는 완전히 끝난 상태 아닌가? 그녀까지 잡혀왔다면 이제 더 이상 큰일은 없지 않
키에리는 말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미쳤는지 놀란 어조로 외쳤다.
“설마, 드래곤이 다시 찾아왔나?”
“아닐세. 그게 아니고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난동을 부리고 있다네.”
“겨우 몬스터 따위가 난동을 부려 봤자 별것 있겠나?”
“이번 난동은 보통 규모가 아니야. 현재 확인된 것만 11만이 넘는다네. 아르곤 측의 보고로는 2개 용병 기사단이 삽시간에 전멸당했다는군.” “정말인가?”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것 때문에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네. 바람도 쐴 겸 자네 부하들을 이끌고 그놈들 동태나 좀 알아 봐 달 라는 거지.”
“내 부하? 내 부하가 어디 있는데?”
“벌써 모아 놨네. 대륙을 떠돌던 용병 기사 녀석들인데, 그런대로 쓸 만은 할 거야. 한 20명 정도 모아 놨으니 데리고 가게. 그리고 마법사는 이쪽에서 두세 명 정도 지원해 주겠네.”
“허헛, 그따위 오합지졸들을 거느리고 산책을 하라고? 그런 일이라면 나 혼자 가는 것이 더 좋을 텐데? 오두막에 남아 있는 죠드보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 면 좋아할 테지.”
“그러면 죠드도 데려가게. 대신 그 부하들도 함께 데려가야 해. 지난번 전쟁에서 그놈들을 뽑아 놓기만 하고 쓰지를 않았기에 부하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네. 좀 더 불만이 쌓인다면 그놈들과 함께 자네도 쫓겨나는 수가 있어. 자네 때문에 그놈들을 뽑아 놓은 것 아닌가?”
용병대장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어렸다. 물론 해골 가면에 가려 위쪽은 안 보였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은 눈과 밑 부분의 턱선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었다. “좋은 일이군. 그럼 나는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 일부터 해 주게. 우리는 옛날부터 함께 아니었나? 자네가 그만둔다면 나도 그만둘 거고, 자네가 남아 있는 다면 나도 남아 있을 거야. 제임 스 녀석도 제법 기사티가 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게. 제임스와 까미유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떠나자구.”
“훗, 압력만 가해 가지고는 안 되니까, 이번에는 꼬드기는 거냐?”
“마음대로 생각하게.”
“좋아.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지.”
“일단 그곳에 가기 전에 나하고 함께 황궁에 가세.”
“황궁에는 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데, 어쩌면 타이탄을 써야 하는 사태까지 갈지도 몰라. 그럼 자네는 헬 프로네를 그대로 쓸 작정을 하고 있었나?”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그걸 까미유에게 물려주고 새 것을 쓰게. 솔직히 헬 프로네보다는 성능이 좋을 걸세. 그리고 까미유의 타이탄은 박살이 났으니 물려주기도 좋을 거야.” “그놈 벌써 퇴원했나?”
“그건 아니지만…….?
“그러다가 크로테아가 딴 놈을 찾아서 도망가 버리면 어쩔 건가?”
“크로테아라면 까미유의 잠재력을 이해할 테지. 또 그놈은 까미유의 진면목을 알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몸이 완쾌될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 “좋아. 그렇게 하지. 리사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인데 아깝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 그럼 내 새로운 귀염둥이를 보러 갈까?”
“이 녀석이야. 자네를 위해 특별히 설계했네. 적기사의 두 번째 변형 모델이야.”
용병대장은 지하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타이탄의 모습에 압도감을 느꼈다. 몸체 전체에 예전의 흑기사처럼 시커먼 페인트를 칠해 놓은 이 타이탄은 웬만 한 타이탄보다 월등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른손을 쓰는 키에리를 위해 타이탄 또한 오른손에 거대한 검을, 왼손에는 방패 대신 묵직해 보이는 소드 스토퍼를 달고 있었다.
“크기가 청기사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당연히 청기사하고 똑같은 크기야. 그리고 덩치도 비슷한 것 같지? 하지만 청기사에 비해 이놈은 알맹이가 비었어. 적기사과 같은 중공장갑을 썼기에 120톤밖 에 안 나가는데도 아주 크게 보이는 거지. 그녀가 사로잡히기 전에,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서 만든 녀석이야. 어때, 훌륭하지? 이놈 하나만을 만들었기에 정식 명칭 은 정하지 않았어.”
용병대장은 엄청난 위용을 과시하며 지하 공간에 서 있는 타이탄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하군.”
“키에리 발렌시아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숨기고 싶다면 싫더라도 이놈을 써야 할 거야.”
“알겠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 같군.”
키에리는 자신의 타이탄, 크로테아를 불러냈다. 크로테아는 키에리의 말을 듣고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박했다.
<내가 미쳤냐? 너 같은 놈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계약을 해지해 달라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크로테아의 그 걸쭉한 입담에 키에리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놈을 떼어 놔야 저기 대기하고 있는 녀석과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것이 아 닌가?
“나는 지금 너를 쓸 수 없다. 너 또한 계약의 사슬을 통해 나에게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지 않나? 나와 계약을 맺고 있는 한 더 이상 너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거 야. 그러지 말고 까미유에게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까미유라고? 그 애송이 말이냐?>
“몇 년 더 기다려 봐. 훌륭한 놈으로 성장할거야.”
<그럴까?>
“당연하지.”
키에리는 슬쩍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크로테아를 어르고 달래서 떼어 놓는 데 성공했다. 크로테아는 까미유의 몸이 낫기를 기다린다며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 졌다. 키에리는 크로테아와의 계약 해지에 성공하자 성큼성큼 시커먼 타이탄에게로 걸어갔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키에리드 발렌시아드다. 앞으로 내게 남은 생의 동반자가 되어 주지 않겠나?”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인물이 동반자가 되어 달라는 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타이탄은 재빨리 응답해 왔다.
<나는 기꺼이 그대의 종이 될 것을 수락하겠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게레리아다. 언제든지 내가 필요할 때 불러다오.>
“알겠다.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려라.”
시커먼 타이탄이 공간의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며 키에리는 중얼거렸다.
“게레리아.”
“뭐?”
무슨 말인가 해서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로체스터를 향해, 키에리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앞으로 저놈은 게레리아야. 적기사III로 불리는 것보다는 게레리아로 불리는 것이 낫겠지.”
“좀 특이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뭐, 자네 좋을 대로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