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8화 – 토지에르의 믿음직한 수족들
토지에르의 믿음직한 수족들
“전하, 렉손 요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
이블리스의 말에 미네르바는 하던 일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렉손 요새라는 곳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렉손 요새? 처음 들어 보는군.”
“예, 카스티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요새니까 전하께서 모르실 것은 당연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설마 프랑코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것인가?”
카스티오 산맥 뒤쪽에는 프랑코 왕국이 있었다. 프랑코 왕국은 전력으로 보나, 국력으로 보나 강대국인 크루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한 국가였다. “그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감히 프랑코 왕국 따위가 본국을 넘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카스티오 산맥은 원체 험준해서 정규급 타이탄들은 투입이 불가능해서 로 투스를 배치한 것이 아니옵니까? 타이탄의 이동도 어려운데 그쪽에서 국경을 넘는 모험을 할 리가 없사옵니다.”
프랑코군이 공격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그런 변방에서 일어난 일이 보고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뭔가? 어디하고 전투를 벌인 거지?”
“오우거들이 나타났다고 하옵니다.”
오우거라는 말에 미네르바는 짜증난다는 듯 외쳤다. 미란 국가 연합의 합병으로 인해 그녀는 정신없이 바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겨우 오우거 몇 마리가 나온 것 가지고 나한테 보고할 것까지 있나?”
물론 이블리스도 오우거 몇 마리와 싸운 것 정도는 보고할 거리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이탄이 개발된 이후, 오우거는 그야말로 멋진 사냥감 정도밖 에 안 되는 위치로 전락했으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과거에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오우거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드래곤의 영토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는 급감해 있었다.
“전하께서 바쁘신 것은 잘 알지만, 이것은 보고 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전하. 렉손 요새의 지원 요청을 받은 엘프란 기사단 산악 파견대에서 로투스 2대를 급 파했다고 하옵니다.”
엘프란 기사단 산악 파견대는 유일하게 로투스급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투스급은 출력이 0.5밖에 되지 않는 저성능 타이탄이었기에, 제2차 제국 전쟁 직전 에 있었던 군비 경쟁 때 대부분이 폐기되어 카마리에로 재생산되었다. 하지만 험준한 서부 산악 지대의 특성상 헤비급 타이탄을 투입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로투 스 10대를 폐기하지 않고 그곳에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미네르바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되물었다.
“그래서?”
“그런데 그들이 오우거한테 당했다는 보고이옵니다. 타이탄 전력이 감소했기에 전하께 보고가 올라오게 된 것이지요.” 미네르바로서는 기가 막히는 보고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아무리 저급 타이탄이기로서니 오우거한테 당한단 말인가?
“타이탄이 오우거한테 당했다고? 도대체 오우거가 몇 마리나 나타났기에 로투스가 당했단 말인가?”
“세 마리이옵니다, 전하.”
“세 마리! 세 마리라고?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인가?”
“결코 아니옵니다, 어찌 감히 전하를 기만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그런데 어떻게 겨우 오우거 세 마리가 타이탄 2대를 부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로투스가 형편없는 타이탄이라고 하지만….
“그건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무래도 타고 있던 기사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만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오신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도 그런 시골구석에는 가려고 안 하니, 사고를 친 놈들이나 좌천당한 놈들을 보냈으니까 말이야. 그놈들 설마 술 퍼마시고 만취한 상태에 서 타이탄을 조종한 것은 아닐 테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어쨌든 엘프란 기사단에 공문을 띄워라. 또다시 그런 추태를 보이는 날에는 엄히 문책하겠다고 말이야.”
“옛, 전하.”
신성 아르곤 제국과 크라레스 제국의 경계선인 쟈코니아 산맥은 매우 험준했기에, 과거부터 이 근처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나라들의 경계선 역할을 톡톡히 해 온 거대한 산맥이었다. 쟈코니아 산맥의 가파른 경사와 험준한 지형은 이 시대 최강의 병기라고 할 수 있는 타이탄의 행동에 막대한 지장을 안겨 주었다. 특히나 1 백 톤이 넘어가는 헤비급 타이탄들의 경우는 짙게 우거진 삼림과 험준한 지형에 가로막혀 투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험준한 지형에 둥지를 틀기 좋아하는 많은 드래곤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기에 설혹 타이탄의 이동이 가능한 곳이 있다고 해도 접근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그렇기에 쟈코니아 산맥에 몬스터들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수십, 또는 수백 마리씩 떼 지어 다니는 오크부터 시작해서 트롤, 오우거 등이 쟈코니아 산맥에서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은 것도 다 따지고 보면 험준한 지형을 좋아하여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드래곤들 덕분이었다. 아무리 막강한 토벌대 를 구성하여 몬스터 사냥을 하려고 해도, 그놈들은 약속이나 한 듯 드래곤의 영토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몬스터를 드래곤들이 사육하는 것이 아니냐? 혹은 몬스터들과 드래곤 간에 어떤 밀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인간들 사이에 서 제기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실질적인 생태계의 먹이 사슬은 조금 달랐다. 그 먹이 사슬의 핵에는 드래곤의 식습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드래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하지만 헤즐링일 때는 육체의 성장을 위해 식사를 해야만 했다. 아무리 새끼라고 해도, 원체 드래곤 자체가 덩치 가 있는 존재들인 만큼 막대한 양을 먹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헤즐링 한 마리가 몬스터들을 멸종으로 몰고 갈 만큼 많은 분량의 식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 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오크나 트롤 같은 좀 두뇌 회전이 빠른 몬스터들은 드래곤이 새끼를 낳은 후부터 헤즐링의 식사감들을 사냥을 하든지 채집을 해서, 혹은 민가 를 약탈해서라도 드래곤에게 바쳤다. 그 때문에 헤즐링의 식사 메뉴에는 호비트라고 불리는 인간의 고기도 포함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열심히 구하러 다녔지만 아무것도 못 구하는 날도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동족들 중에서 두셋을 뽑아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헤즐링의 식사감이 떨어지는 날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은 드래곤의 보호를 필요로 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받드는 몬스터들을 드 래곤이 귀엽게(?) 봐주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또, 몬스터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호비트들의 행태는 또 어떠한가? 그놈들은 자기들만 똑똑한 줄 알고 감히 드래곤의 영토에 침입해서 보물이나 마법 서적을 훔치려고 들고, 또 심한 경우에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며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드래곤의 영역은 호비트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 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쟈코니아 산맥의 한 귀퉁이에 칙트족의 본거지가 있었다. 칙트족의 구성원은 돼지 대가리에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먹음직한…, 아니 용맹스러운 오크들이었다. 오크들은 겉보기와 달리 두세 시간만 강한 햇볕을 쬐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피부가 연약했기에 햇볕을 극도로 싫어했 다. 그 때문에 이렇게 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음침한 곳에 동굴을 파고 생활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에 십여 마리씩 모여 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 대규모 약탈 작전에는 믿음직한 동료가 되었다가, 먹을 게 궁할 때는 먹잇감 도 되어 주는 이웃의 오크 마을과 전투를 벌여 전사자와 포로들을 챙겨 와서 지금 굽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물론 굽고 있는 고기 중에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전투 에서 전사한 동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기가 익어 가는 향긋한 냄새가 퍼져 나가고, 높은 온도에 지글거리며 떨어지는 기름기를 보면 마음이 느긋해지기 시작한다. 이때, 누군가가 고기를 크게 한 조각 뜯어내어 씹어 먹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먼저 식사를 시작한 것은 족장이었다. 족장이 식사를 시작하자, 곧이어 오크들은 암컷, 수컷, 새끼들 할 것 없이 모두들 아 직 덜 익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족끼리 전투를 해서 먹이를 조달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된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먹어 두는 것이 장수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었다.
과거 평화로울 때는 그래도 식량 사정이 좋았었지만, 지금 호비트들은 맹렬하게 전투를 벌인 후였다. 그 때문에 오크 마을에 푸짐한 선물을 건네며 통행하던 밀수 꾼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코린트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피난 가 버린 농가들을 털어 봤자 나오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옛날에는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여 큰 마을의 식량 저장고를 털기도 했지만, 코린트의 기사단들이 초토화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식량 저장고들을 불태워 버린 후에 는 사정이 많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험준한 산맥을 넘어 아르곤 쪽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곳은 카만트족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점점 고기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악을 쓰기 시작했다. 몇몇 곳에서는 벌써 고깃덩이를 두고 주먹다짐까지 시작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암컷들은 새끼들을 거느리고 화톳불에서 멀찍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힘에서 밀리는 그들이 얼쩡거려 봐야 피해만 당할 것이 뻔하기 때 문이었다.
바로 이때, 시커먼 로브를 걸친 호비트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불청객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벌어졌던 싸움은 곧 멈췄다. 오크들은 저마다 자신의 무기를 챙겨들었다. 무기라고 해 봐야 농가에서 약탈한 도끼나 쇠스랑 같은 각종 농기구들이나 병사들을 죽이고 빼앗은 창, 칼, 단검 따위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나무 몽둥 이와 돌도끼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쉭쉭거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끄르릉거리는 각종 비음까지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실력 행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들 은 이미 상인들과 각종 거래를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방문객과 ‘협상’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우두머 리의 지시를 받은 오크 한 마리가 앞으로 쓱 나서면서 말했다.
“쉿! 그대는 누구인가?”
그 말에 방문객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이죽거렸다.
“이놈들은 제법이로군, 크하하핫! 나는 어둠의 마왕께서 내리신 명령을 네놈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왔노라. 네놈들은 무릎을 꿇고 위대하신 마왕님의 명령을 경청 하라!”
“쉭쉭! 무슨 헛소리냐?”
“역시 하등한 것들이 되어 놔서 언제나 손을 써야만 하는군.” 검은 로브를 입은 늙은이는 두 손을 위로 쭉 뻗으면서 외쳤다.
“미천한 것들이여! 어둠의 명령에 따르라. 오우베이(Obey)!”
그 순간 번쩍 들려 있는 그 노인의 양손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검붉은 덩어리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오크들의 눈동자가 어느 사이인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어느새 노인의 주위에 살기등등하게 서 있던 오크들의 표정에는 살기가 지워졌다. 그들은 저마다 노인의 주위에 복종을 맹세하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노인은 오만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꿇어 엎드리는 오크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앞의 오크들이 엎드리면서 시야가 뚫린 뒤의 오크들도 그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일 뒤쪽에 있던 암컷들까지도 새끼들과 함께 엎드렸다. 그런 노인의 눈에 빛을 보지 않고 도망치는 오크들 몇 마리가 눈 에 띄었다. 그것을 본 즉시 노인은 차가운 어조로 명령했다.
“저놈들을 잡아 와라!”
그와 동시에 꿇어 엎드려 있던 오크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뒷줄에 서서 노인을 바라보지 않고 서 있던 것들은 암컷이나 새끼들, 혹은 별 로 강하지 못한 오크들이었다. 강한 오크들은 뒷줄에 서 있기는 했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관찰하고 있었기에 그 빛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곧 잡혀 왔다. 그들 또한 강제로 시선을 그쪽으로 맞췄기에 곧이어 복종의 몸짓을 표시했다. 노인은 모든 오크들을 노예로 만드는 작업이 성공하 자, 이번에는 또 다른 주문을 외웠다. 어둠의 마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력한 암흑의 기운을 이들에게 주어, 더욱 강력한 전투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모든 작업을 끝낸 노인은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새롭게 장만한 이 듬직한 병사들을 하루라도 빨리 예정된 집결지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산맥에 파견된 수백 명의 흑마법사들이 벌이고 있었다. 악마를 받드는 흑마법사들은 이미 마왕으로 현신해 버린 토지에 르의 수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곳곳에서 하등한 몬스터들을 복종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고등한 정신 체계를 가진 엘프나 인간들에게 이런 흑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저등한 몬스터들에게는 매우 잘 통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어 새롭게 탄생하 는 암흑 제국 크라레스의 믿음직한 병사들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