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10화 – 인신매매범에 팔리다
인신매매범에 팔리다
다음 날 다크는 일어나서 무녀 복장 대신에 보통 시녀들이 입는 허름한 옷가지를 입었다. 무녀의 옷을 입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그들 틈에 녹아 들어가기에 안성 맞춤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을 라나의 하녀쯤으로 생각하지 절대로 여행 동료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과거에 살 수로서 생활했을 때,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녹아 들어가는 방법을 혹독하게 교육받았던 다크였다. 그렇기에 하녀로 분장을 한 것인데…….
“이번에 공녀님의 호위 기사가 고용되었다고 하더니, 그분의 시녀가 너인 모양이구나.”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하녀가 다크를 보고 말을 걸었다. 다크가 그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빨리 따라오너라. 그렇게 빈둥대고 있으면 어쩌니?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단 말이야.”
다크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 하녀를 따라가서 일을 해야만 하는가? 거기에다가 자신은 라나의 시녀로 되어 있는 것이지, 공녀의 시녀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될 수 있으면 가냘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항변했다.
“저… 저는 엔테로아 님의 시녀인데요.”
그 하녀는 콧방귀를 뀌며 같잖다는 듯 말했다.
“흥, 겨우 고용 무사의 시녀인 주제에 내 말을 못 듣겠다는 거냐?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별 고약한 년을 다 보겠군. 너 이리 좀 따라와.”
그 하녀는 물정 모르는 꼬마 계집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이 신참은 상하 관계에 따른 법칙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겨우 고용 무사의 하녀 주제 에 대 귀족의 하녀 나으리와 맞먹으려고 들다니 말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슬며시 약이 오른 다크 또한 맞받아쳤다.
“뭐야? 누가 따라오라면 무서워할 줄 알아?”
하녀가 데리고 간 곳은 그 근처에 있는 아무도 없는 빈 방이었다. 다크가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하녀는 곧장 본색을 드러냈다.
“이것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말대답이야? 나는 드루이드 후작 가문의 하녀란 말이야. 어디 근본도 없는 천한 것이 알량한 무사 나부랭이를 믿고…….. 말을 하며 하녀는 다크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바닥을 날렸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아주 손쉽게 저지당해 버렸다. 다크가 날아오는 그녀의 손바닥을 아주 간단 하게 낚아챘던 것이다.
“훗! 감히 누구한테 손찌검을 하려고 들어? 죽고 싶냐?”
다크가 손에 점점 힘을 주자 하녀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상대는 가냘파 보이는 소녀인데도 그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신참내기 하녀를 길들이 겠답시고 깝죽거리던 하녀는 뭔가 일이 생각대로 풀려 가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짝!
“꺄악!”
방금 전 그 하녀가 신참 하녀를 상대로 써먹으려고 했던 그것, 그것이 정반대로 자신의 뺨에서 터진 것이다. 그리고 한 3분 정도? 그동안 그 하녀는 정말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호되게 구타(?)를 당했다.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대는데 어찌 머리에서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하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흘끗 바라본 그 신참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다음에 또 한 번 더 귀찮게 굴었다가는 죽을 줄 알아. 이제는 아주 개나 소나 다 나하고 맞먹자고 드는군. 나 참! 더러워서.”
툴툴거리면서 나가는 다크를 보며, 그 하녀는 이빨을 뿌드드득 갈면서 원한에 찬 시선을 보냈다. 손가락도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두들겨 맞았으면 어느 정도 정신 을 차릴 만도 하련만, 그 하녀는 전혀 그럴 기색이 아니었다. 만약 길 가다가 만난 사이였다면 하녀로서도 그날 재수 없었다고 투덜거린 후 침 한번 ‘퉤 뱉고 끝냈겠 지만, 범인이 한 지붕 아래 있으니 당연히 복수할 기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년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뿌드드득! 두고 보자! 내 저년을…..
원래가 두고 보자는 놈은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고, 또 ‘두고 보자’는 저주성이 다분한 글귀는 힘없는 자들이 내뱉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행일치를 주장 하듯 그날 저녁에 다시금 다크를 만나러 왔다.
똑똑!
“예.”
하녀는 슬쩍 문을 연 후에 대답한 사람이 엘프라는 것을 알고는 두리번거리며 그 얄미운 계집아이를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으므로 공손을 가장한 어조로 표 정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저, 하녀는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포도주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무슨 일이지?”
“그런 일이라면 저에게 지시를 해 주셨으면 되는데, 괜한 일을 하셨군요. 딴 곳에서는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공녀님의 지시로 무사님들이 드실 좋은 술
을 언제나 준비해 둔답니다. 물론 과음하시는 것은 안 되겠지만요.”
“아,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너에게 부탁하기로 하지.”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하녀는 깍듯이 인사를 한 후 방문을 나섰다. 그런 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안 그래도 밖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상대가 벌써 밖에 나가 있 다니…….
“차~안스, 후후훗.”
그런 다음 부리나케 그 얄미운 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달려 나갔음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저년이야.”
하녀는 포도주병을 들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그러자 하녀를 따라오고 있던 남자들 중에서 수염을 잔뜩 기른 덩치 좋은 사내가 감 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야, 아주 삼삼하게 생겼는데? 내다 팔면 제법 비싸게 받을 수 있겠어.”
“내가 말했잖아. 물건 하나는 끝내 준다고 말이야.”
“뒤탈이 날 염려는 없는 것이겠지?”
“안심하라니까. 저년은 후작 가문의 하녀가 아니라 떠돌이 무사가 고용한 하녀야 뒤탈이 날 염려는 절대로 없어. 그리고 3일 후면 영지를 향해 출발할 거야. 그 엘 프 무사가 하녀를 찾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
“흐음, 좋아.”
털보는 품속에 손을 넣어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하녀에게 건넸다.
“자, 약속한 5골드야.”
하녀는 주머니 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살짝 이빨로 깨물어서 진짜인지 확인한 후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시는 내 눈앞에 저 계집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 줘.”
“염려 말라니까. 다시는 못 보게 해 주지.”
하녀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자신의 품속에 슬쩍 집어넣은 후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너무 험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제값을 받으려면 물건의 상태가 좋아야 하니까 말이야.”
“염려 말라구. 이런 장사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녀가 떠나고 난 후 털보는 주위의 사내들에게 말했다.
“자, 시작하자. 저 정도라면 못 받아도 60골드는 받을 수 있어. 흠집 안 나게 조심해서 모셔라.”
“염려 마십쇼, 두목.”
다크는 포도주를 사 들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라나가 아닌 자신이 마실 것이었는데, 라나 보고 사 오라고 하면 남들이 보기에 조금 이상할 듯 하여 직접 움직이게 된 것이다. 사위에 어둠이 깔려 있었기에 지나다니는 행인은 거의 없었다. 이때 그녀의 뒤쪽에서 발걸음을 빨리해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 려왔다. 혹시나 추격자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크는 걸어가는 속도를 조금 더 줄이면서 그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 두 명의 사내는 다크를 지나쳐 앞쪽으로 바쁘게 걸어가 버렸다.
아무리 탈출하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인 것 같다고 내심 투덜거렸다. 앞쪽으로 지나쳐 간 두 사내는 옆으로 뚫려 있는 골목길의 앞쪽에 서서는 뭔가 대화를 나누면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뭔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내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앞으로 걸어가는 다크와 의 거리는 자연히 다시금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뒤쪽에서 남자 두 명이 달려오면서 외쳤다.
“이봐,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방금 왔어.”
그러면서 어쩌구저쩌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크는 그 네 명의 사내들이 만나는 자리에 우연히 지나가게 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앞과 뒤에 두 명씩, 완전히 포위된 입장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았다. 곧이어 자신은 앞의 둘을 지나쳐 앞으로 나갈 것이고, 뒤에서 오는 두 놈은 앞의 두 놈과 만나서 술이라도 마시러 갈 것이니까 말이다.
바로 이때, 뒤쪽에서 다가오던 한 사내가 우악스럽게 다크의 목을 뒤에서 감아 왔다.
“조용히 해!”
사내는 여태껏 계집들을 납치하면서 몇 번이나 써먹어 왔던 그 수법을 다시금 재현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여자를 제압한 다음 저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꽁꽁 묶어서 푸대 자루에 집어넣은 후 자신들의 소굴로 운반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초장부터 뭔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뒤에서 상대가 손을 감자마자 다크는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상대는 앞쪽으로 크게 돌면서 패대기쳐졌다. “어이쿠!”
“이런 제길! 제법 반항을 하는군.”
옆에서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그녀를 뒤쪽에서 껴안았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는 그 순간 옆구리에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소녀가 약간 몸을 비틀면서 왼손으 로는 포도주병을 꼭 껴안고 오른쪽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인정사정없이 가격한 것이다.
“헉!”
엄청난 통증으로 상대의 손이 조금 느슨해지는 그 순간, 소녀는 오른쪽으로 돌아갔던 허리를 다시 왼쪽으로 튕기며 순간적으로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하여 포도주 병을 껴안으며 자로 잰 듯 왼쪽 팔꿈치로 상대의 목을 가격했다. 사내는 목을 가격당하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동료 둘이 당하는 것을 보고 구원차 달려온 털보와 또 다른 사내의 운명도 앞서간 녀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어렸을 때는 소매치기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도둑, 강도, 강간, 인신매매를 일삼는 흉폭한 무리들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약자들이나 괴롭히는 인간쓰레기들이었다. 특별히 격투 술 따위를 교육받은 적이 없었던 그들은 부녀자들이나 나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칼로 협박할 줄이나 알았지, 이렇듯 본격적으로 수련을 쌓은 무사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힘을 쓸 수 없는 소녀인 상태라 해도…….
“갑자기 나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덩치가 산만한 네 명의 사내들은 모두 다 방금 전 격투를 벌였던 도로 옆에 나 있는 컴컴한 뒷골목에 꿇어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눈앞의 소녀가 소녀 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퍽!
“흐어어억!”
명치 부분을 발로 호되게 가격당한 후 앞으로 꼬꾸라지는 동료를 보며, 남은 세 명의 안색은 더욱 핼쑥해졌다.
“갑자기 나를 공격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퍽!
“케엑!”
이번에는 명치를 부여잡고 헉헉거리고 있는 놈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녀석의 턱이 홱 돌아가며 이빨 부스러기가 날아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턱이 날아간 놈의 오른쪽 녀석이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녀의… 하녀의 부탁을 받았습니다요.”
“하녀라고?”
“예, 후작 가문의 하녀라고 하던뎁쇼. 이름 같은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있는데 한번 해 볼 생각은 없냐고 하면서……?” “그래서?”
“쓸 만한 계집을 하나 살 생각은 없느냐구요.”
다크로서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산다고?”
“예, 원래 이 바닥 일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쓸 만한 계집을 구해서 매음굴에 넘기면 최소한 20골드는 받을 수가 있잖습니까?”
매음굴에 넘긴다. 이제서야 산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예전에 살아왔던 중원이나 이곳 이상한 세계에서도 여자들은 그녀들의 신체적 특성 때문 에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략적으로 알고만 있는 것과, 그 대상에 자신이 들어갔다는 것은 얘기가 완전히 다르 다. 그야말로 머리꼭지가 돌 정도로 열화가 치미는 일이었다.
“이런 망할 자식! 그래서 나를 매음굴에 넘기려고 했단 말이냐?”
“아닙니다요.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 미모라면 좀 멀리 가서 노예 경매장 쪽으로 넘기면 최소한 60골드는 족히… 흐어억!”
다크는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그놈의 턱에 깨끗한 발차기를 날린 것을 시작으로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놈들은 살아남으려는 일념으 로 어기적어기적 기어서 큰길 쪽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것은 안 될 말씀이었다. 네 명이 모두 다 두들겨 맞다가 맞다가 지독한 고통 때문에 기절해 버린 후, 다 크는 손바닥을 탈탈 털면서 어둑한 뒷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감히……. 나를 팔아 버리려고 하다니, 그년을 가만히 두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다크가 하녀를 향해 복수의 감정을 불태우고 있는 그 시각,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심복인 레티안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젠장! 아직도 잡아들이지 못하다니…, 제임스로부터 연락은 없었나?”
“예, 전하. 시 외곽으로 더욱 범위를 넓혔지만… 그렇게 범위가 넓어서는 아무래도 수색 작전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사옵니다.”
“경의 말대로 시내에 숨어든 것일까?”
“시내에서도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사오나, 아무래도 워낙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기에 그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씨근덕거리면서 실내를 한동안 왔다 갔다 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로체스터 공작이 손가락을 탁 튕기면서 말했다.
“이렇게 된다면 아예 화근의 뿌리를 없애 버리는 것은 어떨까?”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녀가 무슨 이유로 크라레스의 손을 들어 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그녀는 크라레스 태생이 아니야. 그 정도로 뛰어난 고수가 갑자기 만들어질 수는 없 는 노릇이 아닌가?”
“당연히 그렇사옵니다. 본국에서도 뛰어난 기사 한 명을 키우려면 최소한 30년은…….”
“그러니까 뭔가 모종의 밀약이 그녀와 크라레스 황제 사이에 맺어져 있다고 봐야 하겠지.”
“지당하신 생각이시옵니다.”
“그러니, 그녀를 잡아들이는 것이 힘들다면, 크라레스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예?”
“크라레스는 이번 전쟁에서 치명타를 입었어. 그리고 더불어 몬스터들까지 날뛰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국력을 갉아 먹고 있지. 오죽하면 크라레스에서 사신이 와 서 지원을 요청했겠나?”
“아, 그러니까 이 기회에 아예 크라레스를 없애 버리면 그녀가 더 이상 본국을 적대시할 명분도 함께 없어지겠군요.”
“그렇지, 그건 그렇고 타이탄 훈련장에 가 있는 말썽꾸러기들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제임스가 빠졌다고 농땡이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로젠 대공 전하로부터 모든 적응 훈련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사옵니다. 참, 대공 전하께서는 덧붙여서 크로데인 후작 각하께서 헬 프로네를 손 에 넣으셨다고 전해 오셨사옵니다.”
보고를 올리면서 레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헬 프로네의 입수가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때, 레티안은 헬 프로네가 까미유에게로 갈 것을 그전부터 공작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적기사들을 지 급하면서도 까미유에게만 타이탄을 할당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로젠에게 전해라. 제2근위대장에 임명한다고 말이야.”
‘헬 프로네’ 건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하고 있던 레티안은 갑작스런 로체스터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제2근위대장은 크로데인 후작 각하신데요?”
“까미유는 제2근위대 부대장으로 강등한다. 오히려 그녀석도 그것을 좋아할 거야. 녀석은 언제나 책임이 무거운 대장보다는 부대장 쪽을 좋아했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제2근위대원으로는 오스카, 스칼, 메글리로 한다.”
“예.”
“대충 훈련이 끝났으면 그 녀석들을 수도로 불러들여라. 그런 다음 근위 기사단과 금십자 기사단에 출동 준비를 지시해 둬.”
“예? 곧바로 크라레스를 침공하실 계획이시옵니까?”
“당연하지. 본국에 남아 있는 모든 타이탄 전력을 한꺼번에 쏟아 부으면 약체된 크라레스는 며칠도 못 견딜 것이다. 그녀와 크라레스가 다시금 합해지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키에리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일행은 타이탄 운반 경로를 따라 크라레스의 영토 안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그리고 그 흔적은 말토리오 산맥을 따라 동 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물론 몬스터들의 소굴은 산맥 안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키에리의 고민은 그것이 아니었다. 크라레스 제국 영토 깊숙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흔적은 앞쪽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사악한 기운은 북동쪽에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으으음.”
침중한 신음 소리를 토해 낸 후 키에리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저쪽 길로 쭉 가면 크라레인시가 아니냐?”
키에리의 뒤쪽에 서 있던 털보가 즉시 대답했다.
“맞습니다, 대장. 크라레인 쪽으로 가는 주 도로로 연결됩죠.”
“크라레인시라…….”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쪽 길로 쭉 가면 어디로 연결되나?”
키에리는 타이탄을 들고 갔을 거라고 추측되는 깊숙하게 패인 오우거의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질문에는 털보도 조금 아리송한지 다른 부하들하고 수근거 리더니 대답을 했다.
“이 길은 말토리오 산맥의 서쪽 끝자락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마을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케르바라는 작은 마을이 저희들이 알 고 있는 제일 마지막 마을입니다. 아마 산길을 타고 들어가면 작은 마을이 몇 개 더 있을지도.”
“흐음… 말토리오 산맥이라…….”
키에리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래전에는 크라레스의 수도가 말토리오 산맥에 위치하지 않았던가?”
“예, 맞습니다. 크로돈입죠. 크로나사 평원을 차지한 후에는 크라레인시로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바로 그거야…….”
키에리는 타이탄들의 잔해가 어디로 옮겨졌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수도를 크라레인으로 옮겼다고 해도, 타이탄 생산 시설까지 모두 다 옮긴 것은 아닐 것 이 분명했다. 오히려 산악 지역에 놔두는 편이 수비하기도 편할 것이 아닌가?
“좋아, 타이탄이 어디로 갔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지금부터는 저 묘한 기운을 탐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키에리는 저 북동쪽 하늘 위에 퍼져 있는 사악한 기운을 노려봤다.
“아니, 너는?”
포도주병을 껴안은 채 다가오는 다크를 발견한 시녀는 마치 한밤중에 유령을 본 듯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쯤 꽁꽁 묶여서 얌전히 노예 시장을 향해 떠났을 것으로 생각한 상대가 자신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다크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맞이했다. 두 눈에 불을 켜고 서…….
“오호라! 이거 내가 손수 찾아가야 하는 수고를 줄여 주시는구먼. 너 자알 만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달려드는 다크를 피해 하녀는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것은 마음뿐, 곧장 머리끄덩이를 붙잡혔다. 다크는 도망치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우악스 럽게 움켜쥔 후 한 바퀴 휙 돌려서 패대기를 쳤다. 그런 다음 숨쉴 틈도 없이 들려오는 가죽 두들기는 소리.
짝! 짝! 짝!
패대기쳐졌던 하녀의 뺨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바로 이때, 저 먼 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 짓이냐?”
“어?”
다크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공녀가 집사와 몇몇 하인들을 거느리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지금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행차하려고 하 는 중이었다. 그러던 도중에 출입구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하녀들이 드잡이질을 하는 상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집사는 아직까지도 엉켜 있는 두 하녀 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꾸짖었다.
“냉큼 일어서지 못할까? 이것들이 뉘 안전이라고!”
주섬주섬 일어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하녀들을 보면서 공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집사에게 말했다.
“누가 이런 모습을 봤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앞으로 주의해 주세요.”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집사는 매우 호된 질책을 들은 듯 안색이 시뻘게졌다. 하인, 하녀, 그리고 노예들에 대한 단속은 모두 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화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에게 책임이 있었다.
“예, 철저히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공녀님.”
공녀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앞으로 가다가 잠시 멈추면서 하녀들 중 한 명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거라.”
“예?”
공녀는 고개를 든 다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집사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못 보던 아이 같은데…….”
물론 공녀가 라나를 고용할 때, 그녀와 함께 다크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공녀는 처음 보는 엘프에게 온 정신이 팔려서 그녀와 함께 왔던 다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다. 하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대단한 미모, 이런 아이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엔테로아가 데려온 하녀입니다.”
엔테로아는 라나가 꾸며 댄 가명이었다.
“그런가?”
공녀는 자신의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던 라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저 아이를 나한테 줄 수는 없겠느냐?”
갑작스런 제안에 라나는 흠칫 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공녀님.”
“서로 간에 좋은 일일 것이다. 저 아이에게도 앞으로 편안한 삶이 약속될 것이고, 그대에게도 원하는 만큼의 지위와 돈을 주겠다.”
“예? 그건 저 아이를 팔라는 말씀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저 아이는 제 하녀입니다. 노예 같은 것이 아니라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흐음, 그런가? 뭐, 시간은 많으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럼 가자.”
그날 저녁 늦게 돌아온 라나는 다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의 전말을 말했다.
“뭐라고? 그렇다면 공녀가 원하는 것은……..”
“예, 다크 님을 그녀의 아버지에게 노리개로 선물하겠다는 것이죠. 집사에게 자세히 물어봤는데, 후작은 상당한 호색한으로 벌써 여러 명의 미소녀들을 곁에 두고 있답니다. 집사는 나에게 아저씨를 넘겨준다면 후작 가문 내에서 상당한 직위와 돈을 약속하더군요. 그리고 더불어서 공녀님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응분의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넌지시 말하며 협박했습니다.”
으드드득, 다크가 이빨을 가는 것을 보며 라나는 위로하듯 말했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여성들에게 아름다운 용모는 신의 축복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의 저주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녀들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성적 노리개로서 삶을 마쳐야 하는 운명이 기다리니까 말입니다. 그녀들의 신분이 낮은 이상,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거든요. 특히나 그녀가 농노 같은 노예 계층이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죠.”
화를 삭이기 위해서 포도주를 꿀꺽꿀꺽 마셔 대고 있는 다크를 힐끗 쳐다본 후 라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은 진정을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케락스시를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니까요. 그 외의 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태까지 다크가 살아온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언젠가는 복수해 주겠다고 벼르면서 화를 삭였다. 언젠가는…… ‘좋아, 일단 나중에 힘을 되찾는다면, 그 망할 후작 놈부터 손봐주기로 하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다크였다.
“전하, 몇 가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사옵니다.”
이블리스의 말에 미네르바는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드디어 코린트에서 치레아 대공을 처형했다고 하옵니다.”
“뭐야!”
미네르바는 놀라서 외쳤다. 여태껏 미끼를 던져 놓고 고기가 그것을 물기를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이 너무 잘 풀린 것 같아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것이 정확한 정보인가?”
“예, 한 가지 의문점을 제외한다면, 썩 신뢰성이 있는 정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의문점?”
역시 뭔가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았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미네르바가 물었다.
“그래, 의문점이라는 것이 뭔가?”
“예, 치레아 대공은 코린트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혀 왔던 숙적이옵니다. 그런 그녀를 처형했는데,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오히 려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며 기사들 및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켜도 시원찮을 텐데 말이옵니다.”
“당연한 의문이로군. 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코린트는 치레아 대공의 목을 전쟁터에서 벤 것인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만약 코린트가 그녀의 목을 전쟁터에서 날린 것이라면 사방에 선전을 해 대며 축배를 들 일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녀의 죽음에는 본국의 비열 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사용되었고, 또 코린트는 그 연장선상에서 그녀를 인도받아 처형한 것이야.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지. 그녀를 죽였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알린다면 당연히 부하들의 사기가 올라가겠지만, 그녀를 죽이는 과정에서 사용된 그 치사하기 그지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공개된다면 그래도 사기가 올라갈까? 또 기사도를 숭배하는 기사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아, 예, 제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2단계 작전을 시작해도 괜찮겠사옵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좀 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세나. 이번 작전은 그 대가가 큰 만큼 위험도 또한 너무 커. 작전이 성공하면 코린트가 멸망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 본국이 멸망한다. 가능한 한 철저하게 확인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지.”
“예, 전하. 그렇게 첩자들에게 이르겠사옵니다.”
이블리스는 서류를 미네르바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카사스와 아르곤의 첩자들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아무래도 이번 몬스터들의 난동이 상상 이상의 규모인 것 같사옵니다.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거의 연이어 벌어지고 있으며, 두 나라 다 기사단들을 파견한 상황에서도 난동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본국에서도 몬스터들의 난동에 대비하여 준비 를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글쎄, 아직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나? 몬스터들은 알카사스와 아르곤만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두 나라와 열심히 잘 싸우고 있지 않나? 그리고 아직까지 는 코린트가 그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있어. 아마 코린트도 우리들처럼 눈치를 보고 있겠지. 알카사스와 아르곤의 국력이 고갈되기를 말이야. 그런 다음에야 코린트 는 전쟁에 동참할 테지. 그리고 그때쯤 본국도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거야.”
“그렇다면 언제쯤이 좋겠사옵니까?”
“일단 코린트가 참전한 후에 계획을 세워 나가도 늦지 않을 거야. 물론 코린트가 참전하기 전에 몬스터가 지리멸렬할 정도라면, 본국이 참여해도 얻어 낼 것은 없 지 않겠나? 그들 스스로도 막아 낼 수 있을 테니, 본국이 도와주는 대가로 무엇을 얻어 낼 수 있겠나?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야.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힘을 비 축하는 것이 좋겠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블리스가 보고를 끝내고 나간 후 미네르바는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천천히 향을 음미하면서 말했다.
“자, 로체스터 공작. 그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