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11화 – 닭대가리 아르티어스
“저… 아버지!”
무려 일주일에 걸쳐 설교라고 하기보다는 신세 한탄에 가까운 주절거림을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설교를 듣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것이다.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냐?”
그러면서 슬그머니 올라가는 아르티엔의 주먹을 힐끗 쳐다보고,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말했다.
“그건 아니구요.”
“그럼, 뭐냐?”
“며칠 동안 저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목은 안 마르세요? 아버지를 위해서 아주 좋은 포도주를 장만해 뒀습니다.”
아르티엔은 갑자기 자신에게 웃는 낯짝을 보이며 포도주를 권하는 아들놈을 향해 수상쩍은 시선으로 빈정거렸다.
“호오, 그래? 없던 효성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 테고……. 너 같은 닭대가리가 웬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냐?”
닭대가리라는 말은 아르티어스가 아르티엔에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마법을 배울 때 불렸었던 별칭이었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배우는 속 도가 자신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자 닭대가리라며 엄청난 구박과 박해를 가했었다. 아르티어스의 그 삐뚤어진 성격도 알고 보면 다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 르티어스가 마법을 배우는 속도는 결코 딴 헤즐링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딴 헤즐링보다 월등하게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태껏 다른 헤즐링이 마법을 배우는 것을 보지 못했던 아르티엔의 기대치에는 엄청나게 못 미쳤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르티엔은 모든 것은 무시하고 마법만을 마스터한 좀 이상한 드 래곤이었고, 또 마법에 있어서 아르티엔을 따라갈 수 있는 드래곤은 극히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자신의 어렸을 적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이 덜떨어진 아들놈을 게으름 부린다며 무지막지하게 닦달했었다. 그것이 오랜 세월 계속된 부자간 불화의 결정적 인 원인이었다.
“이씨, 닭대가리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욧!”
여태껏 그런대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얼굴색이 변해서 따지고 들자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후퇴했다.
“그랬었나? 이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역시 늙으면 죽어야 돼.”
얼렁뚱땅 말끝을 흐리는 아르티엔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 그것도 4천 살이 넘은 드래곤의 별명으로 닭대가리는 좀 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 일 뿐, 아직까지도 아르티엔의 눈에 아르티어스는 말썽꾸러기 헤즐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쳇! 그렇게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 양반이 4천 년도 전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기억해??
하지만 그것을 입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아부성 짙은 미소를 얼굴 가득 뿜어내며 공손히 말했다.
“저도 이제 에인션트 드레곤이 다 되어 간다구요. 예전의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르티어스가 아무리 자신의 나이를 강조해도 아르티엔의 눈에 비치고 있는 그는 말썽꾸러기 헤즐링일 뿐이었다. 그것도 철이 들려면 한참 먼……. 그렇기에 아 르티엔은 의심스런 눈길을 던지면서 투덜거렸다.
“그건 그렇고, 웬일로 내 생각을 다 해 주느냐? 오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구나.”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정색을 하고는 섭섭한 듯 말했다. 그의 표정과 어투로 봤을 때 이 세상에 ‘불효자식’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는 불굴의 의지 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누가 뭐래도 저는 아버님의 하나뿐인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어느 아들이 아버지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 까?”
“생각을 해 준다는 놈이 분가한 후 코빼기도 안 보였냐? 무려 3천 년하고도…….”
또다시 지겨운 설교가 시작될 순간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손을 가로저으며 말을 막았다.
“그건 오해십니다. 몇 번이나 찾아뵙고 싶었지만, 여태껏 아버님의 명성에 누만 끼쳐 드렸기에 솔직히 찾아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대신 아버님과 만났을 때를 위 해서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포도주를, 아버님을 생각하며 구입해 뒀었죠.”
사실은 아르티엔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그 자체가 싫었기에 가 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만큼 아르티엔과 얽혀 있는 기억은 부자간이 아니라 사제지간보다도 더한 강압적인 교육을 하려는 부친과 그것에서 해방되려는 아들과의 어긋난 시련의 역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부친의 마수(魔手)에 떨어져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 도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여태껏 별로 쓰지도 않던 ‘아버님’이란 말을 계속 집어넣으며 슬쩍 입에 발린 말로 아르티엔을 설득했다. 아르티엔은 매우 포도주를 좋아했기에 그 정도 사탕발림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랬냐? 오오, 며칠 동안의 설교가 아주 큰 효과가 있었구나. 네 녀석이 그런 생각까지 다 하게 만들어 준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목도 컬컬한데 한잔하면서 부
자간의 오붓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행여나 포도주 가지러 가는 척하면서 도망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게다.”
“제 머리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구요. 어떻게 아버님을 앞에 두고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르티어스는 변명을 늘어놓은 후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 창고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창고 구석구석을 뒤져서 오래전에 숨겨 뒀던 것을 찾아냈다. 그가 꺼 낸 병에는 핏빛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전에 미네르바가 그에게 뇌물로 바쳤던 최고급 포도주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병이었다.
아들놈이 행여라도 훔쳐 먹을까 봐 레어까지 들고 와서 창고 깊숙이 감춰 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아르티어스가 아끼던 것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미끼의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또다시 아르티어스는 창고 구석을 여기저기 뒤져서 작은 스위치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벽이 스르릉 열리면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수천 개도 넘는 작 은 병들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그 병들 중에서도 ‘독약’이라고 쓰인 곳에 놓여 있는 병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찾다가 그중 하나를 꺼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늘게 떨리는 그의 손이었다. 아르티어스의 손은 그 독약병을 잡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다가 기나긴 한숨 소리와 함께 멀 어져 갔다. 아무리 아버지를 싫어하는 아르티어스라고 하더라도 그를 독살하는 것만은 도저히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제기랄!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버지니까 할 수 없잖아.”
다시 아르티어스의 눈길이 뒤지기 시작한 곳은 ‘수면제’ 쪽이었다.
‘가능한 한, 아주 강력한 놈으로…….?
아르티어스가 이리저리 뒤지다가 선택한 작은 푸른색 약병, 단 한 방울로도 코끼리를 한 달 동안 잠재울 수 있는 최강의 수면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약병에 쓰 여 있는 주의 사항처럼 그 약의 효력만큼이나 막강한 부작용이었다. 이 약은 약의 안정성은 아예 무시한 채 효력만을 중시해서 만든 것이기에 부작용이 심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방금 전 독약병을 집으려고 하면서 망설인 것과는 달리 매우 과감하게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직접 독약을 사용해서 살해하는 것은 못할 노릇이겠지만, 그 약의 부작용 때문에 죽은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자위할 여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조심조심 포도주병의 마개를 뽑은 후, 그 약병을 조심스럽게 살짝 기울여 한 방울 집어넣었다. 지금 그에게는 아들을 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설혹 재수가 없어서 아버지가 부작용 때문에 사망한다고 해도 아르티어스는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 장수를 누렸기에, 이제 더 이상 산다는 것에 대해 미련이 없으실 것이 분명했다. 뭐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자라 온 환경상 효심(孝心)이라는 것에 대해서 교육받은 적 이 전무한 이 아들놈은 그럴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수면제가 든 병을 처음 놓여 있던 곳에 집어넣으려다가 다시 꺼내어 한 방울을 더 추가했다. 아무래도 한 방울로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만 큼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증가하겠지만…….
“여기 있습니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병과 투명한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아버지 앞에 다시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르티엔은 슬쩍 병을 보는 듯 가장하며 조심스럽게 포 도주병의 밀봉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다가 병에 붙은 이름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이건 크루마 황실에서나 마신다는 ‘로얄 크루나’가 아니냐?”
“예, 아버님. 오래전에 아버님 생각을 하며 구입해 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아버님께 가져다 드릴 염치가 없어서………
아르티어스는 슬쩍 뒷말을 흐렸다. 더 이상 말을 하다가는 이 포도주를 포기해야만 하는 아쉬움이 목소리에 녹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포 도주는 아르티어스가 아끼고 아꼈던 것이었다.
아르티엔은 입맛을 다시며 포도주병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렇게 좋은 것을 구했으면 빨리 가져와야지.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났냐? 혹시 엘프리안까지 날아가서 황제를 협박한 것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나이가 있는데, 쪼잔하게 포도주 몇 병 구하겠다고 그 수고를 하겠습니까?”
“나도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네놈이 크루마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며 뒤집어엎었다는 소문은 못 들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엔은 과거 아르티어스가 황금에 눈이 뒤집혀서 말토리오 산맥 인근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협박하여, 금은보화를 긁어 들이던 시절을 슬쩍 꼬집어서 말한 것이었다.
“아버님만 늙은 게 아니고 저도 늙었다구요. 어릴 때나 그런데 돌아다니지, 나이 들어서까지 그런 망령된 짓을 하겠습니까?”
아르티엔은 병에다가 무슨 장난을 쳐 놓지 않았는지 세심하게 살펴봤다. 하지만 아주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병의 겉만 봐 가지고는 그 어떤 증거 도 찾아내지 못했기에, 그는 아르티어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포도주 마개를 따며 투덜거렸다.
“글쎄다, 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하는 말이지.”
투덜거리면서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힐끔 쳐다봤다. 뭔가 기대에 가득 찬 눈빛.
“아무래도 저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언제나 사고 치기 전에 꼭 저런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아직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귀중한 선물 공세를 펼치는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엔은 슬며시 시치미를 떼고는 말했다.
“나 혼자서만 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술이구나. 자, 너부터 한잔해라. 오랜만의 부자 상봉을 축하하며 함께 한잔하자꾸나.”
역시나 아르티엔의 예상대로 아르티어스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제가 감히 아버님 앞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아버님께 술주정 한 번 했다가 쥐어 터…, 아니 절대로 아버님 앞에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 다고 하늘에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소중한 맹세를 어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당황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르티어스를 본 아르티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슬그머니 지었다.
‘역시 뭔가 못된 꾀가 숨어 있구먼.
하지만 아르티엔은 짐짓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투덜거렸다.
“여태껏 네 녀석이 살아온 과정을 낱낱이 알고 있는 내 앞에서 감히 그딴 소리를 하다니…….”
“저도 개과천선했다구요.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과거사에 얽매여 계십니까? 개과천선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저를 위해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십 니까?”
“어디 보자…….”
아르티엔은 애주가답게 포도주잔을 집어 들고는 향기를 맡는 척했다.
“오! 정말 향기롭군.”
그러면서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반응을 살폈다. 아르티어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활짝 미소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헤헤… 자, 목도 마르실 텐데 한잔 쭈욱 들이켜십시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기대 어린 눈길을 받으며 포도주를 조금씩 음미하면서 한 잔을 다 마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에 손을 갖다 대며 숨이 꽉 막히는 듯 버둥거렸다.
“으윽! 큭큭…..
역시 수면제의 효력은 대단했다. 에인션트 드래곤에게 해독의 주문 하나 외울 시간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뭔가 이상이 있음을 깨닫고 발버둥을 치고 있기는 하지만 곧이어 아버지가 깊은 수면에 빠질 것이라고 확신한 아르티어스는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거기 누워서 한 달 정도 푹 쉬십쇼. 그때쯤엔 일이 끝났을 테니까요. 설혹 부작용 때문에 돌아가셨다면 시신은 나중에 돌아와서 후하게 장사지내 드립죠. 그럼 저 는 이만 바빠서. 헤헤헤.”
아르티어스는 지긋지긋했던 아버지와의 이별을 기뻐하느라 미처 아르티엔이 쓰러지는 순간에 보이는 행동에서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르티어스는 절대로 독약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냥 슬그머니 잠들어야 정상인데, 왜 큭큭거리면서 꼭 독에 중독된 듯 버드럭거리다가 잠잠해졌단 말인가?
서둘러서 아르티어스가 내빼고 난 후, 쓰러졌던 아르티엔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어쭈? 뭔가 이상해서 중독된 척했더니, 나보고 여기서 한 달 동안 퍼질러서 자라고? 그렇다면 그 지독한 록사나의 뿌리를 주원료로 만든 수면제를 썼다는 소리구 먼. 사망률 40퍼센트가 넘는 수면제를 나한테 먹여? 이런 망할 녀석!”
아르티엔은 투덜거리다가 “우욱”하면서 붉은 덩어리를 토해 냈다. 그것은 마나의 막에 싸여진 방금 전에 마셨던 로얄 크루나였다. 완벽하게 마나의 막에 둘러싸였 기에 단 한 방울도 그의 체내에 흡수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엔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그 붉은 덩어리를 버리려다가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고는 손짓을 해서 다 시 병 속에 담았다. 그런 다음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품속에서 끄집어 낸 것은 작은 약병이었다. 아르티엔은 그 안에 들어 있던 액체를 마나를 이용해서 조 금만 꺼냈다. 푸른색 투명한 액체의 자그마한 방울이 진주 알갱이처럼 병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아르티엔은 그 약병을 밀봉해서 다시 품속에 집어넣은 후 손가락을 그 액체 방울 쪽으로 향했다. 아르티엔의 손가락 끝에서 휘황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대로 푸른색의 액체는 점차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 다.
“흐흐흣! 원료만 짐작할 수 있다면 그깟 해독약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지.”
아르티엔이 손을 뻗자 아직까지도 공중에 떠 있던 자그마한 붉은빛 액체 덩어리는 빠르게 움직여서 포도주병 속으로 퐁당 들어가 버렸다. 아르티엔은 살며시 포도 주병을 흔들어서 해독약이 섞이도록 한 후 다시금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 아르티엔은 포도주의 그 영롱한 붉은빛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말했다.
“젠장, 아들놈이 준 최초의 선물을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
이제는 눈치 볼 것도 없이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포도주를 마셨다.
“정말 좋은 포도주로군. 동기가 좀 불순한 것을 제외한다면 나무랄 데 없는 첫 선물이야.”
뭔가에 홀린 듯 또다시 한 잔을 더 따르며 아르티엔은 말했다.
“무턱대고 마법 교육만 시켰지, 드래곤으로서 꼭 가져야만 하는 품성과 성격 교육을 시키지 않았더니 결과가 이 모양으로 나타나는구먼.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 어. 죽기 전까지 저놈을 제대로 교육시켜 놓아야 하는 것이 내 의무지.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아버지를 뵐 면목이 서지.”
•훌쩍 술을 입속에 털어 넣은 후 아르티엔은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빨을 뿌드드득 갈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다시 동굴로 돌아와서는 술병을 집어 품속에 넣으면서 외쳤다.
“네놈이 튀어 봤자 벼룩이지! 이번에 잡히기만 해 봐라.”
아르티엔은 바람과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애비를 우습게 보는 놈은 어떤 꼴이 되는지 확실하게 알려 준 후 다시금 설교를 시작할 작정으로…..
서둘러서 레어 밖으로 나온 아르티어스, 하지만 그는 마음만 급할 뿐 아직까지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실버 드래곤을 찾아가야 해. 그놈들이라면 나이아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조금 만만하면서도 나이아드를 불러낼 만한 놈이 누 가 있지? 그러니까…….”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궁리를 했다. 너무 약한 놈이면 나이아드를 불러낼 만한 능력이 안 될 테고, 너무 강한 놈이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최강의 종족인 실버 일족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 만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버 드래곤이 웜급에 이르면 그 파워는 에인션트급 그린 드래곤과 맞먹을 정도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르티어스 옹이라도 자연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버 일족은 해양에서 살아가는 만큼 그 덩치와 파워는 육상의 드래곤과 차원을 달리할 만큼 컸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뒤에서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섯거라!”
“이런 빌어먹을! 잠든 것이 아니었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소녀, 아르티엔이었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르티어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순순히 붙잡히느니 반항을 해 보 기로 작정했다. 마법으로 따진다면 자신은 절대로 아버지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여태껏 수많은 골드 드래곤들이 태어나고 또 죽었지만, 아르티엔 만큼 마법에 깊숙이 파고든 드래곤은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상대로 마법으로 승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 많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싸움이라는 것은 자신의 강점으로 승부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렇게 따져 본다면 아르티엔의 약 점은 몸싸움일 것이다. 아르티엔은 여태껏 줄곧 마법에만 매진해 온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싸우기로 작정하자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 나오며 그 빛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져 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법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진 작부터 깨닫고 현신을 한 상태로 육박전을 전개하기로 작심했다.
“어쭈? 너 간뎅이가 부었냐? 감히 애비한테 반항할 망상을 하는 것을 보면..
<어디 누가 죽나 해 보자구요.>
“맨날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나한테 닭대가리라는 소리를 듣는 거얏!”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르티엔의 몸은 빠른 속도로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르티엔의 손에서 수십 가닥의 은빛 광선이 뻗어 나갔다. 아들놈의 현신이 끝나기 전에 감행하는 기습 공격이었다.
콰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아르티어스의 주위에 엄청난 흙먼지가 뿜어져 올라왔다. 아르티어스가 그 먼지 구덩이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을 때,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낭패스러운 몰골이었다. 군데군데 상처를 조금씩 입기는 했지만, 뭐 자신의 예상보다는 피해가 작은 편이었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했던 것이다.
‘현신한 나를 상대하려면 당신 또한 현신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 손으로 장사 지내드리죠. 흐흐흐.’
이제 웬만한 마법 따위는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는 꼬리를 슬슬 흔들며 여유만만하게 서서,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 자리 잡고 아래 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르티엔을 노려봤다. 서로 간의 거리는 1킬로미터가 조금 더 넘는 아주 먼 거리였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의 밝은 눈에는 상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다 보였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르티엔, 그 여유로운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르티어스였다.
아직까지 아버지는 본체로 현신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체로 현신하는 그 찰나는 완벽한 무방비의 대단히 위험한 순간이었기에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의 눈 앞에서 현신하는 위험을 자초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전력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르티엔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 아르티어스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여유만만 한 것일까? 겨우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가 가져다주는 시간 여유는 몇 초 되지도 않는다.
겨우 그 몇 초의 시간 여유로 에인션트급에 근접하는 아르티어스의 브레스를 막을 만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용언 마법을 사용한다면 시간 여유는 충분하겠지만 위력에 문제가 있을 테고, 마법은 주위의 마나를 응집하고 압축할 시간 여유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여유 만만한 미소가 아르티어스를 헷갈리게 하기 위한 속임수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는 골드 일족 최강이라 불리는 드래곤이다. 그런 만큼 아르티어스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르티어스는 뭔가 단안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 내려오시죠! 왜, 겁나십니까?>
슬그머니 도발을 가하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아르티엔은 거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러는 네놈이나 올라오려무나.”
드래곤이 날아올랐을 때의 그 커다란 날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르티어스 자신도 그 점을 이용해서 드래곤 여럿 잡았지 않았는가? 그것을 잘 알면서 하늘 위 로 따라 올라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헤헤헷! 세상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겁나십니까? 아버지는 골드 일족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이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 배짱은 안 되 는 모양이죠?>
아르티어스의 말에 아르티엔의 얼굴이 시뻘겋게 바뀌었다.
“저런, 때려죽일 놈을 봤나!”
노기를 터뜨리는 아르티엔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도발하면 열 받아서 내려올 거야. 그러면 킥킥킥, 이 손으로…….’
<거기서 어중간한 마법 따위 날려 봐야 본체로 돌아간 나한테 그 어떤 타격도 주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죠? 어때요? 여기 내려와서 한판 해 볼 배짱이 있으십니 까? 맨날 닭대가리라고 놀려 댄 아들하고 한판 해 볼 배짱이 있으시냐구요!>
“으드드득!”
아르티엔은 분노를 참지 못해 이빨을 갈아 댔다. 하지만 아르티엔은 아래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점점 확신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그 미소는 속임수였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만큼 자신이 있다면 이리로 내려와서 싸워도 될 것이 아닌가? 아르티어스가 어떤 방식으로 아르티엔을 공격할까 궁리 하는 중에 아르티엔이 선수를 쳐 왔다.
아르티엔은 저 아래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거대한 골드 드래곤을 향해 한쪽 손을 슬쩍 들어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도 아 르티엔의 주위에 파동 치는 엄청난 마나의 기운에 따라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아르티어스의 눈가가 슬쩍 찌푸려졌다. ‘마법인가? 아마도 그렇다면 8내지 9사이클급?”
그러다가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주위가 뭔가 이상한 마법진에 의해 공간의 왜곡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것은??
그 공간의 왜곡은 엄청난 마법이 터졌을 때, 그 여파가 딴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한정시키는 오브젝트 리머테이션(Object Limitation : 목표 제한) 마법을 사용했 을 때 그 여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었다. 좁은 공간만을 그 목표로 했을 때는 왜곡의 정도가 미미했기에 눈치 채기 어렵지만, 아르티엔은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걸 쳐 그 마법을 썼기에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처럼 무턱대고 마법을 남발하는 유형의 드래곤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상대만을 철저히 파멸시킨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에는 아무런 상 처도 주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마법 컨트롤이 뛰어난 것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공간 왜곡이 이토록 광범위하다면 아르티엔이 사용하려는 마법의 위력이 결코 약한 것일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르티엔은 마법으로 자신에게 반항하는 아들 놈을 반쯤 죽여 놓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죠. 옛날의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르티어스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몸속에 쌓여 있는 바람의 기운을 섞어 내뿜을 준비를 시작했다. 그에 따라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한껏 벌어 진 입속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것은 폭발적인 파괴력을 품고 하늘 높이 뿜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르티엔의 마법이 완성 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기인 브레스로 말이다.
“어엇? 브레스까지? 이 녀석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약간 당황한 듯했던 아르티엔, 하지만 곧이어 그의 눈은 슬쩍 가늘어지며 살기가 가득한 어조로 외쳤다. 이렇게까지 아들놈이 막나가기 시작하자 정말 열 받기 시 작했던 것이다.
“오냐, 그래! 한번 죽어 봐랏!”
그와 동시에 아르티엔의 쭉 뻗은 손바닥의 끝에서 엄청난 기운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아르티엔은 그 어떤 주문도 외우지 않았는데도 단시간 안에 엄청난 마나를 사방에서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엔은 마법이 막 완성되기 직전, 욕설을 내뱉으며 주문을 해제해 버렸다. 차마 아들놈에게 그 마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식이라는 것이 뭔지…….
“젠장!”
주문을 해제한다고 해서 뭉쳐진 마나가 순순히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마법 사용을 위해 인위적으로 뭉쳐진 마나들은 처음 끌어 모았을 때 의 역순으로 차근차근 흩어 버려야 했다. 안 그러면 스스로 폭주하면서 대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르티엔이 마나를 되돌리는 그 순간, 이미 아르티어스가 내뿜 은 브레스는 아르티엔의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르티엔은 황급히 용언 마법을 사용하여 공간 이동을 했다.
아르티엔이 공간 이동을 한 그 순간, 그의 통제력을 잃은 마나의 덩어리는 대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이어 그 폭발 지점 위를 아르티어스의 브레스가 쓸고 지 나갔다.
<히히힛! 드디어 해방인가?>
저 정도라면 최소한 사망 아니면 중상일 것이라고 희희낙락하며 아르티어스가 통쾌하게 미소 짓는 것도 몇 초 되지 못했다. 그는 곧이어 자신의 브레스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을 노려보며 떠 있는 아르티엔을 발견한 것이다.
‘젠장! 그 짧은 순간에 공간 이동한 것인가?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시군. 저 정도의 기동력이라면 브레스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봐야 하잖아.’
그때부터 시작하여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강력한 마법을 아르티엔에게 퍼부었다. 브레스를 또 쓸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거리가 벌어져 있는 이상 상대가 또다시 공간 이동할 가능성도 있었다. 앞으로 전력으로 뿜어낼 수 있는 브레스는 겨우 두 번, 강적을 앞에 두고 그걸 헛되게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 닭대가리 녀석아. 지금 당장 레어로 돌아간다면 방금 전까지 대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하실건데요?”
아르티어스가 자신만만하게 따지고 들자, 아르티엔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아예 겁을 상실한 모양이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아버지도 제 처지가 되어 보시라구요. 눈에 뭐가 보이는지.”
그 다음부터 시작된 것은 아르티어스의 처절하다고 할 만큼의 ‘발악’이었다. 상대는 하늘 높이 자리 잡고 있으니 몸싸움을 벌일 수도 없고, 또 적당한 거리를 유지 하고 있기에 브레스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마법뿐인데, 이 세계에서 아르티엔과 마법으로 맞장을 떠서 이길 드래곤이 과연 몇 마리나 될까?
물론 이 수치도, 아르티엔은 드래곤이 아닌 뭔가 다른 생명체로 트랜스포메이션하고 있고 상대방은 마법을 쓰기에 매우 유리한 드래곤의 몸체를 유지한 상태라는 단서가 붙어야만 손가락이 몇 개 정도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아르티엔의 마법 실력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을 낳은 아비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아르티어스, 웬만한 공격은 막거나 맞받아치고, 아주 강력한 공격을 날리면 살짝 피해서는 카운터를 날리는 아르티엔. 처 음부터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마지막 한 방울의 마나가 남을 때까지 악착스럽게 공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아르티엔의 눈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헤즐링일 때야 닭대가리라고 구박하며 처절할 정도로 마법 수행을 시킨 것도 사실이 었지만,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가 목숨을 걸고 달려들고 있는 지금에서야 자신이 낳은 아들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놈이 헤즐링일 때야 비교 대상이 없어서 그렇게 구박했다고 하지만, 4천 살이 넘은 드래곤을 수도 없이 만나 본 아르티엔이었다. 그 많은 드래곤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낳은 아들의 실력은 그야 말로 발군이었다.
“흐흐흐… 성격이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실력 하나는 제대로 쌓았구나. 마법을 통한 실전 경험이 좀 떨어지는 것이 흠이다만, 저 정도면 내 자식으로서 어디에 내 놔도 부끄럽지 않다고 봐야 하겠지.’
뿌듯한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르티엔과 달리 점점 더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절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써도, 또 브레스를 써도, 그의 아버지는 태산과 같이 자신의 앞을 당당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서로 간의 실력 차가 너무 심하게 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르 티어스는 완전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쏘아 대면서도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크흐흐흑!>
아르티어스가 더 이상 허무하기 그지없는 공격을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는 그 순간, 방금 전에 모아 뒀다가 아직 뿜어내지 못한 마법의 기운이 폭주하 면서 대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튼튼한 드래곤의 외갑(外甲)을 뚫지는 못한 채, 여기저기 자그마한 상처만을 만들었을 뿐이다.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을 보고 아르티엔이 오히려 당황했다.
“어라? 저 녀석이 왜 저래?”
하지만 아르티엔은 호기심 어린 시선만을 던지고 있을 뿐, 드래곤으로 현신해 있는 아들의 주위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저놈이 또 무슨 나쁜 꾀를 부려서 자 신을 꾀어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어어어엉~, 내 아들 죽는다. 그런데도 나는 애비가 되어 가지고 도와주러 가지도 못하다니…, 엉엉~.>
산만 한 덩치의 골드 드래곤으로 현신한 채 사발만 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부짖는 모습은 그것이 과연 지상 최강의 존재인지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당한 표정으로 아들놈의 짓거리를 보고 있던 아르티엔은 그 절규하는 목소리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아르티엔, 낮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도대체 그 목소리 안에 얼마나 많은 마나를 실어서 뿜어내었는지 아르티어스는 주위의 공기가 요동친 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절망감을 안겨 줬을 정도로 강한 아버지……. 하지만 그 아버지는 자신과 싸우면서 본래 실력의 10분의 1도 발휘하지 않고 있다는 것 을 방금 내뱉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티어스에게 더더욱 깊은 절망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하나뿐인 내 아들이… 아들이, 흐흑! 그 어리고 나약한 것이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나 있지 않은지…, 엉엉엉…….>
이성을 잃고 울음을 터뜨려 대는 아르티어스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라, 그리고 어리고 나약하다고? 그렇다면 헤즐링…, 헤즐링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저놈이 알을 낳았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는데…….”
아르티엔은 힐끗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저것이 또 무슨 못된 꾀를 부리는 것은 아닌가 가늠해 봤다. 하지만 퍼질러 앉아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저 꼴 사나운 모습, 평소에 아들놈의 그 오만방자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르티엔으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아들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상 실한 듯한 저 모습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연극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알은 혼자서도 낳을 수 있지. 그렇지, 저 녀석은 요 근래 사고도 안 치고 레어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었잖아? 그 동안에 몰래 알을 낳아서 키운 것일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티엔의 얼굴은 점점 희미한 미소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의 아들이라면 자신에게는 손자가 아 닌가?
“하하하, 손자를 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늘…, 하하하핫!”
혼자서 북 치고 장구까지 친 후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아들이 어찌 되었다는 말이냐? 응?”
<아들놈이 행방불명되었단 말입니다. 엉엉~. 그 나약한 것이 지금 무슨 꼴을 당하고나 있을지, 흑흑흑!>
“나약하다고? 설마, 그렇다면 헤즐링이라는 말이냐? 한동안 조용하더니 너는 그동안 헤즐링을 키우고 있었단 말이냐?”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아르티어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원래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다크를 헤즐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 에게 헤즐링이라고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다크를 찾은 후에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호비트를 양자로 삼은 것이라 고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오직 강함을 추구하는 아르티엔에게 호비트 양자라는 것은 씨도 안 먹힐 것이 뻔했다. 오히려 다크를 찾는 것을 악 착같이 방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두리뭉실하게 대답을 회피했다. 그냥 ‘나약하다’는 말과 함께 ‘아들’이라고만 말하며 울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해 놔야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테니까.
“헤즐링이 납치되었다면 그건 중대한 사건이다. 왜,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흑흑, 저는 제 힘으로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이런 망할 녀석, 갑자기 네놈이 왜 이웃 드래곤들까지 찾아가서 난리를 피워댔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빨리빨리 말을 했어야 할 거 아 니냐? 이런 미련한 녀석! 그러니까 닭대가리라는 소리를 듣지!”
아르티엔이 슬쩍 손을 흔들자 대기가 요동치며 엄청나게 강한 공기의 흐름이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직격했다.
‘꽝!’
<으갸갸갹!>
그 공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드래곤으로 현신해 있는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이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속도로 보아 어느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갈긴 후 아르티엔은 저 맑은 하늘 쪽으로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시선을 돌렸다.
“허허허, 내가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냐? 허허, 저놈 하는 꼴을 봐서는 절대로 손자 같은 것은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르티엔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그 긴 목을 아래쪽으로 한껏 끄집어내려 작은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고는 주물러 대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손자를 만나 봐야겠다. 그 녀석의 특징부터 소상하게 말해라. 광범위 수색 마법을 통해서 그 목표를 찾아낸 후 곧장 공간 이동하면 끝날 일이 “아니냐?”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제가 왜 이웃 영토까지 침범하면서 난리를 쳤겠습니까? 아무래도 뭔가 결계 같은 것을 쳤는지 도저히 위치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시도는 한번 해 보는 것이 좋겠지. 네 녀석과 나는 방금 당해 봐서 알다시피 레벨이 다르지 않느냐?”
<그러실 게 아니라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에 써 먹으려고 생각했던 건데요.>
“뭔데?”
<아들 녀석이 전에 나이아드하고 관계를 맺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 정령왕 나이아드를 불러내어 행방을 물어보면 가르쳐 줄 겁니다.>
순간, 아르티엔의 눈이 살짝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가늘어졌다.
“오호라, 나이아드라고? 그렇다면 너 혼자서 자가 수정한 것이 아니라 혹시 실버 드래곤하고? 누구냐? 그놈 이름이.”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발끈하며 외쳤다.
<누가 실버 드래곤 따위하고 거시기를 해서 애를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아쿠아 룰러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었죠.>
“그래? 그렇다면 아쿠아 룰러는 어디 있냐? 그걸 이용한다면 간단히 나이아드를 불러낼 수 있을 것 아니냐?”
아무리 마법 실력이 막강한 아르티엔이라고 해도 종족의 특성을 뛰어 넘을 수는 없었다. 그건 마법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드래곤 의 특성과 관계되어 있는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나이아드는 아들 녀석을 아주 미워한단 말입니다. 아쿠아 룰러를 통해 나이아드를 불러내 봤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구요.> “그건 또 왜? 왜 정령왕이 헤즐링을 미워한단 말이냐?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려고 하기 시작하는 아르티엔을 향해, 아르티어스는 당황해서 외쳤다. 여기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아들이 호비트라는 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르티엔은 수색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도와주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서 호비트 따위를 양자로 삼은 행위는 가문의 수치 라면서 오히려 다크 수색 작전을 방해할 우려마저도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하려면 너무 복잡하단 말입니다. 그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나이아드에게 강제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실버 일족뿐이 잖습니까? 실버를 한 마리 족쳐서 나이아드를 불러내어 알아 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손쉬운 길이라니까요.>
“흐음, 실버를 한 마리 족쳐야 한단 말이지?”
<예>
잠시 궁리하던 아르티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그 먼저 저지른 후에 생각하는 성격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아르티엔의 표정이 갑작스레 음흉하게 변한다고 생각 한 순간….
“그래, 어떤 녀석을 족치면 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