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12화 – 실버 드래곤의 레어는 하렘

실버 드래곤의 레어는 하렘

“여깁니다.”

아르티어스가 아르티엔을 안내한 곳은 꼭 낙타처럼 두 개의 작은 언덕을 가지고 있는 크라세섬이었다.

“흐음…….”

“크라세섬에 쥬브로에타라는 웜급 실버 드래곤이 살고 있다고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놈도 혼자 사는 것을 어지간히 좋아하는지 기척을 숨기고 있지만 요. 느껴지지는 않지만 여기서 사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르티엔이 갑자기 말했다.

“흐음, 바로 저쪽이군. 가자.”

아르티어스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쥬브로에타의 기척을 아르티엔은 아주 손쉽게 발견한 것이다. 아르티엔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아르티어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쪽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허락도 없이 레어까지 들어가면 누가 봐도 명백한 불법 침입인데요.”

“지금 그런 거 따질 때냐? 헤즐링에 관계된 일인데.”

“그거야, 그렇지만…….

막상 아르티엔이 앞장서서 설치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간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르티엔의 말은 맞았다. 헤즐링을 찾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용 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찾고 있는 아들은 헤즐링이 아니지 않은가?

둘은 섬에 솟아 있는 두 개의 야트막한 산들 중에서 북쪽에 있는 산 쪽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그들의 시야에 그 산의 경사면에 박혀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이자 급 격히 고도를 낮춰 바위 앞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바로 이 바위가 쥬브로에타의 레어로 들어가는 출입문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바위 위에다가 손을 올려서 탐지를 해 본 후 말했다.

“아주 강력한 마법진이군요. 손쉽게 뚫기는 힘들 것 같으니 여기서 기다리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르티엔은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제법이군. 아주 결계를 잘 쳐 놨어. 외부와의 교류를 아예 끊고, 혼자서 꽁꽁 숨어서 지내고 싶은 모양이지?”

말뜻과는 달리 아르티엔은 별로 감탄스러울 것도 없다는 어조로 아르티엔이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자신의 앞쪽에 있는 바위 위에다가 손을 올렸다. 아르티엔의 손이 밝게 빛나는 순간, 옆에서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기겁을 해서 외쳤다.

“출입구를 박살 내면, 이건 완전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구욧! 정신이 있으십니까? 없으…….”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예상과는 달리 대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 거대한 바위가 통째로 슬며시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20여 미터 뒤쪽에서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그 짧은 순간에 방어 마법을 무력화시킨 후에 문짝을 아예 옮겨 버리다니…….”

“누가 네 녀석 같은 줄 아냐? 가능한 한 평화롭게 해결해야지. 일단 말로 해 보고, 그것이 안 통하면!”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주먹을 한번 쥐는 것으로 그 뒷말을 대신했다. 그런 다음 바위가 사라지고 나서 드러난 기나긴 통로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자, 가자.”

“예.”

레어의 복도는 매우 길었다. 꼬불꼬불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복도는 아예 빛이라고는 한 점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암흑의 세계였다. 아르티어스는 자 그마한 빛의 덩어리를 마법으로 만들어 내어 앞을 비췄다. 드래곤의 본체라면 이런 것 없이도 잘 보이겠지만, 호비트로 변신해 있는 상황이었기에 앞을 보려면 빛이 필요했던 것이다.

“매우 특이한 구조군요. 중앙 홀이 나와도 벌써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레어의 복도를 이렇게 길게 만들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이 렇게 복도가 좁지요? 이 정도라면 호비트나 엘프로 변신한다면 모를까, 오우거 정도 크기로만 변신해도 통과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지 않습니까?”

“글쎄다. 실버 일족은 바다를 좋아하니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육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샛길일 가능성도 있겠지. 진짜 통로는 아마도 바다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중앙 홀 또한 그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겠지.”

“으음,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생긴 것도 완전히 다른 것들이, 자기들끼리 따로 노니까 만날 기회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도 잘 모를 정도라면 웬만한 드래곤들은 아예…….”

“대충 다 온 것 같구나.”

드디어 튼튼해 보이는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문을 슬그머니 밀면서 말했다.

“설마, 또다시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겠죠?”

문이 열리면서 안쪽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여태껏 짙은 암흑의 공간을 통과해 온 탓인지, 눈이 쓰라릴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어라라?”

실내의 정경을 바라본 아르티어스는 순간, 자신이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반나체에 가까운 암컷 호비트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 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보통 드래곤은 혼자 산다. 설혹 분가하지 않은 자식과 함께 산다고 해도, 드래곤은 자식을 보통 하나만 낳기에 둘이 사는 것이 고작 이었다. 그런데, 저 많은 숫자는……

“이상한 곳으로 들어와 버렸네…….”

바로 이때, 커다란 생선을 들고 가던 괴상하게 생긴 시커먼 놈 둘이 낯선 침입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들고 있던 생선을 내동댕이치고는 삼지창을 겨누며 달려왔 다. 두텁고 볼품없는 발은 꼭 거위의 발처럼 생겼기에, 헤엄치기는 어떤지 몰라도 걷기에는 아주 불편한 듯 자기들은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르티어스가 보기에 는 뒤뚱뒤뚱하는 것이 자빠지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가까이 다가오자, 시커멓게 생긴 이유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피부색이 시커먼 것이 아니라, 온몸에 윤기가 흐르는 짧은 털이 빽빽하게 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지창을 쥐고 있는 손가락들의 사이로 얇은 막도 보였다.

“크르륵! 웬 놈들이냐?”

냄새를 맡을 필요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코는 구멍만 뚫려 있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매우 기묘한 소리로 ‘그것들’은 외쳤다.

“이것들은 또 뭐야?”

“호오, 수인족이로구나.”

“원, 농담도……. 무슨 수인족이 저렇게 생겼어요?”

“저것은 바다에서 사는 수인족이야. 아주 먼 바다에나 나가야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쥬브로에타의 레어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군.”

“수인족이라면 아예 발이 없이, 그러니까 꼭 생선 지느러미 같은 것이 붙은 놈들이 아닌가요?”

“그건 완전히 바다에 적응한 놈들이고, 이놈들은 육지와 바다를 함께 오갈 수 있는 놈들이야.”

“아아, 그렇군요.”

“네 녀석들 주인에게 안내해라. 골드 드래곤 아르티엔이 왔다고 하면 알 거다.”

드래곤이라는 말에 수인족들은 공손하게 그 둘을 안내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수인족이 안내해 간 방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방은 온갖 값진 물건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상아와 진주로 장식된, 다섯 명 은 충분히 앉을 만큼 널찍한 의자였다. 손잡이와 밑판은 상아와 진주로 꾸며져 있었고, 그 위에 엉덩이와 등판이 닿는 곳은 새하얀 물개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 고 그 위에는 의자의 우아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꺼비처럼 생겨먹은 수인족 녀석이 좌우에 아름다운 미녀를 끼고 앉아 있었다. 그놈은 그녀들이 권하는 포도주 를 마시며 오만한 표정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손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하렘(Harem)을 차려 놓고 있구먼. 나 원 참! 드래곤들 중에서 이렇듯 괴상한 취향을 가진 놈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군.”

원래가 육지에서 서식하는 드래곤들과 바다에서 서식하는 실버 일족은 별로 내왕이 없었다. 서식하는 환경부터 시작해서 그 생김새까지 서로가 완전히 달랐기에 자연히 그런 식으로 분리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쥬브로에타에게 ‘아르티엔’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도 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채 기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손님들이 도착해 버렸다.

예의 없게도 허락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침입해 온 주제에 자신의 취미 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험담을 늘어놓다니……. 거기에다가 자신이 노리개 정도로나 취급하는 호비트로 변신하고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대의 취향에 경멸감까지 느끼는 쥬브로에타였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손님들이 도착했을 때, 쥬브 로에타의 머릿속에서 ‘아르티엔’이라는 이름은 벌써 사라져 버렸다. 아니, 그러한 기억을 더듬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어린 암컷 호비트로 변신하고 있는 놈은 척 봐도 별로 대단할 것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와 함께 온 저 붉은 머리의 수컷 호비트로 변신해 있는 놈은 제법 강해 보였다. 웜급은 오래전에 통과했 고…, 어쩌면 에인션트급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 주제에 그 정도의 실력으로 감히 이 쥬브로에타 님 앞에서 목에 힘을 주다니, 가소로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꼬마로 변신해 있는 놈은 자신들의 주제파악도 못하고 남의 취미 생활에 대해서 비꼬아 대면서 헤즐링을 찾는다는 둥 돼먹지 못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쥬브로에타는 아예 인사는 생략한 채 비꼬는 듯한 어조를 곁들여 시비조로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아르티엔 일행을 안내해 왔던 그 수인족과 비슷했지만, 울림이 훨씬 적었기에 알아듣기는 편했다.

“이거 골드 일족의 두 분께서 저의 보금자리까지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가요?”

꼬마 호비트로 변신해 있는 녀석이 쓱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들은 헤즐링을 찾고 있네.”

“호오, 자식이 분가해 버린 이후로 나는 이곳에서 헤즐링은커녕 도마뱀 한 마리도 못 봤는데… 뭔가 잘못 찾아온 것 아닌가?”

그런대로 점잖은 어조로 타이른 쥬브로에타였지만, 상대는 아주 당차게 나왔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말이다.

“자네한테 직접 볼일은 없고, 나이아드에게 볼일이 있다네. 자네가 나이아드를 불러내 주겠나? 그리고 그 녀석이 내가 묻는 말에 착실하게 대답하도록 자네가 옆 에서 좀 도와줘야 할 거야.”

‘자네’라는 말에 쥬브로에타는 슬그머니 더 열이 받고 있었다. 척 보아도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 것이, 옆에 있는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드래곤을 믿고 까불어? “흐음,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라……. 그를 불러 주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예의 없이 순서와 절차를 생략한 방문객에게까지 그런 수 고를 해 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뭣이라고?”

꼬마 호비트가 발끈해서 외치자, 옆에 있던 수컷 호비트가 슬그머니 그녀를 말리면서 말했다.

“참으십시오. 여기서 사고 치면 안 된다니까요.”

“뭐야? 그럼 저런 싸가지 없는 녀석을 그냥 놔두라는 말이냐?”

“하지만 우리들은 부탁하러 온 입장 아닙니까?”

“괜찮아. 적당히 손 좀 봐 준 후에 부탁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하시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구요. 저도 아들 녀석 찾는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가지고 모두들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아버지마저도 그러시 면 어쩝니까?”

“그런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저놈 하는 말이 괘씸하잖아. 그리고 헤즐링을 찾는 일에는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어. 안 되면 내가 용서가 되도록 만들면 되지.” 다부지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르티엔 어르신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가만히 계십쇼. 제가 할게요. 아버지가 손을 쓰면 사망 아니면 중상 아닙니까? 꼴에 실버니까 조금 힘들기는 하겠지만, 처리하지 못 할 상대는 아니라구요.”

여기서 아르티엔까지 사고를 친다면 더욱 사태가 악화될 것이 분명했기에, 아르티어스는 모든 일족들에게 ‘사고뭉치’로 찍혀 있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 한 것이다. 헤즐링도 아닌 양자를 구출하는 사건이었기에, 자신이 실버 한 마리를 반쯤 죽여 놨다면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아버지가 방파제가 되어 줄 수 있겠지만, 아 버지가 직접 손을 쓴다면 누가 방파제가 되어 준다는 말인가? 그것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을 막아서며 자신이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모든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부여받은 실버 일족의 후예인 자신을 반쯤 죽여 놓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저 둘, 평상시에 딴 놈들이 저딴 소리를 했다면 즉각 두 팔과 한쪽 다리를 분질러 버린 후에 남아 있는 성한 발에 돌멩이를 달아서 바다에다가 던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쥬브로에타는 그런 말에 노기 따위 를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에인션트급으로 봤던 수컷 호비트 쪽 입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바로 그때, 쥬브로에타는 기겁을 할 정도로 놀라 버렸던 것이다. 자신은 저 젊은 호비 트 녀석의 몸에서 은근히 뿜어져 나오는 기척을 읽고 상대가 에인션트급 정도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라면 저 꼬마 계집 으로 변신하고 있는 드래곤의 나이는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쥬브로에타 정도나 되는 막강한 실버 드래곤의 이목을 완전히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기척을 감 출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상대가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 아닌가?

순간, 쥬브로에타는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대충 흘려들었었던 아르티엔’이라는 이름. 골드 드래곤들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마법에 대한 연구를 미친 듯이 한 괴짜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보통의 드래곤들이 그 처치 곤란할 정도로 기나긴 수명을 누리면서 시간 때우기를 위해 별의별 취미 생활을 즐기는 동안, 그 괴짜는 미친 듯이 마법만을 연구했다. 그에게는 마법만이 그 기나긴 생의 유일한 동반자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자의 파워는 너무나도 강대해 서, 육상의 드래곤을 그야말로 도마뱀 정도로 취급하던 실버 일족의 수장인 쟈크레아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행동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의 1천 년쯤 전에 만나서 얘기를 나눴었던 쥬로미네는 조금이나마 인간 세상을 돌아다녔던 실버 드래곤이었다. 아르티엔에 대한 가공할 만한 정보는 모두 다 그 때 그에게서 얻어 들은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올라 보지 못한 경지까지 마법을 완성시킨 위대한 드래곤이라는 휘황찬란한 수식어부터 시작해서, 1천5백 년쯤 전에 나타났던 어둠의 대마왕을 죽인 후 ‘대마왕 슬레이어’라는 존경어린 명칭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그 망나니 아들 아르티어스와 유사할 정도로 개차반이 라는 둥……. 그러면서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의 별의별 기행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웃음보를 터뜨렸었지 않았던가?

그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여태까지 한껏 거드름을 피워 대던 쥬브로에타는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어조로 말했 다.

“귀한 손님을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갑작스런 쥬브로에타의 태도 변화에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는 잠시 당황해서 바라봤다.

‘저놈이 갑자기 쥐약이라도 먹었나?”

그런 후 그는 아직까지도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두 소녀를 향해 꾸짖었다.

“빨리 이 귀한 손님들을 자리에 모시지 않고 뭣들 하느냐? 그리고 너는 빨리 달려가서 내가 아끼던 포도주를 가져오너라. 그리고 파크들에게 말해서 성대하게 요 리를 준비하라고 일러라. 빨리 움직여!”

마지막 순간에 ‘아르티엔’이라는 드래곤에 대한 공포스러운 소문들이 뇌리에 떠오르면서 목숨을 건진 쥬브로에타였다. 쥬브로에타는 자신들의 노예들을 동원해 서 귀한 손님들을 위한 접대 준비를 손수 명령하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의 친구인 쥬로미네에게 감사했다.

“어르신, 나이아드만 불러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외에 더 도와 드릴 것은 없습니까?”

갑자기 이렇듯 태도를 바꾸자, 아르티어스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에게 뭔가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아르티엔은 넉살 좋게도 여태까지 펄펄 날뛰던 것은 잊어버렸는지 옆에 앉은 소녀가 권하는 포도주를 한창 마시는 중이었다.

“아버지, 우리가 지금 포도주 마시러 왔습니까?”

“아, 참, 그렇구나. 하지만 워낙 좋은 포도주라서 말이야. 자네 포도주에 대한 취향이 아주 뛰어나군 그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어르신. 헤헤헤.”

쥬브로에타는 장단을 맞춰 헤헤거린 후 말을 이었다. 확실히 사람이나 드래곤이나 힘이 있고 봐야 했다.

“지금 바로 나이아드를 불러 드릴까요?”

“그래 주게나.”

곧이어 쥬브로에타의 부름에 응해서 정령왕 나이아드가 나타났다.

“오랜 벗이여, 무슨 일로 나를.

하고 제법 친근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던 나이아드는 저 의자에 앉아 있는 아르티어스를 보는 순간 얼굴을 확 구겼다.

“네 녀석은 또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느냐?”

“남이야 무슨 일로 와 있건,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나이아드는 쥬브로에타를 향해 살기 어린 어조로 물었다.

“저놈을 죽이는 데 힘을 보태 달라는 부탁인가? 그렇다면 내 흔쾌히 들어주지.”

그 말에 쥬브로에타는 얼굴색이 약간 창백해지며 속삭였다.

“그놈 말고 그 옆에 있는 분을 알아보겠나?”

“누구?”

힐끗 나이아드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옆에서 소녀가 따라 주는 포도주를 감탄사를 연발하며 마시고 있는 또 다른 소녀. 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교묘하 게 숨기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쥬브로에타의 조언에 따라 자세히 관찰하자 그 힘의 실체가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헉! 이 정도의 마나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아르티엔?”

“오! 오랜만이군,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여. 그동안 잘 지냈는가?”

나이아드는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의 아버지라는 것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위대하신 골드 드래곤께서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군요.”

하지만 나이아드는 손으로 아르티어스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 망할 녀석만 내 눈에 띄지 않는다면 편안하죠.”

“그런가? 아들놈에게 들으니, 자네가 손자의 행방을 안다면서?”

“손자라구요? 핫! 그 망할 계집 말씀이십니까?”

“자네하고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바로 그 아이일세.”

이야기가 길어지면 다크가 호비트라는 사실이 밝혀질 우려가 있기에 아르티어스는 둘의 대화를 끊었다.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그 아이가 있는 곳이나 알려 줘. 자네도 나하고 계속 얼굴 보기는 싫을 것 아닌가?”

정령과 한번 관계를 맺으면 그 정령의 향기가 시술자의 몸에 죽을 때까지 남아 있다. 그것을 통해서 정령사들의 경우 상대가 어떤 정령을 다루는지를 읽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정령의 향기’라고 정령사들이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정령과 시술자 간의 교감의 끈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령을 단 한 번이라도 불러낸 정령사는 죽을 때까지도 그 정령과의 교감이 연결되며, 역으로 정령도 그 끈을 통해 정령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정령사를 어떤 마법이나 정령술, 마 법진으로 숨겨 놨다고 하더라도 한 번 교감을 맺은 정령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이아드는 그런 이유로 다크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위치를 손수 가르쳐 줄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싸가지 없는 계집과 그녀를 두둔하는 아르티어 스의 불행은 곧 나이아드의 행복이었으니까 말이다.

“싫어, 내가 왜 그딴 것을 알려 줘야 하나?”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나이아드를 상대하지 않고 쥬브로에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도와준다고 했지요?”

쥬브로에타는 마지못해 말했다.

“빨리 대답해 주게. 내, 부탁함세.”

쥬브로에타가 간청하자, 나이아드는 한동안 고심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으으음, 어쩔 수 없군. 그 아이는 지금 코린트에 있다. 케락스라는 도시에 있는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 있지.”

“케락스시라고?”

아르티어스는 전에 크라레스의 패거리들과 함께 일할 때 받아 뒀던 공간 이동 좌표 책을 꺼내 들었다.

파파파팍.

페이지들을 들추자 곧이어 케락스의 좌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읽음과 동시에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을 잡아끌며 말했다.

“어딘지 알았습니다, 빨리 가자구요.”

“잘되었구나. 이거 조금만 더 마시고 가자. 어차피 어디 있는 줄 알았으니 조금 지체한다고 해서 별문제 될 것은 없잖느냐?”

“빨리 가자구요. 그딴 포도주는 나중에 배터지게 사 드릴 테니까…….”

“나이아드에게 그 아이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그렇게 안 해도 찾을 수 있다구요. 빨리 가요!”

더 이상 나이아드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도록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서둘러 아버지를 붙잡고 공간 이동했다. 아들이 있는 도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