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15화 – 혼란스런 과거의 기억

혼란스런 과거의 기억

“기나긴 역경을 견뎌 내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네.”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서사시 「아르티어스 애가의 마지막 한 구절을 읊은 후 미소 띤 얼굴로 다크에게 말했다.

“어려울 때는 역시 고향이 최고지. 너에게는 이곳 치레아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여기서 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아르티어스는 코린트의 수도 케락스에서 곧장 치레아로 공간 이동해 왔다. 그가 생각했을 때, 아무래도 아들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은 아들의 보금자리인 이 곳이 최적일 테니까 말이다.

치레아 공작 관저의 한쪽 구석에 위치한 공간 이동 마법진에 도착한 일행들은 곧바로 관저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공간 이동 마법진 근처에 버티고 서 있는 거 대한 것들..

“어라?”

갑자기 나타난 손님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트롤들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잘못 왔나? 이런, 이런, 벌써부터 치매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나? 수십 번도 더 와 본 이곳 좌표를 잘못 기억하다니…….”

아르티엔이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제대로 찾아온 것일 게다. 저놈들은 흑마법에 조종당한 것들이야. 그렇지 않고 야생의 그들이었다면 벌써 공격해 왔겠지.”

“그도 그렇군요.”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트롤들의 뒤쪽에서 꽁꽁 묶여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는 그들에게 달려오며 외쳤다.

“어서 오시옵소서! 대공 전하.”

그 순간 무표정하게 트롤들을 둘러보던 다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달려오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봤던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여태껏 몬스터에게 잡혀 있다가 구원을 청하는 것으로 여기고,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썼다. 그녀의 손이 우아하게 원을 그린 그 순간, 그녀의 사방으로 푸른 강기의 다발들이 쫙 뿌 려져 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벌어진 일은 여태껏 인간 세상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던 아르티엔 어르신의 입을 쫙 벌어지게 만들었다. 뭔가 강력한 마나의 존재감 을 느낌과 동시에 사방에 있던 트롤들이 일제히 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 다음 순간 다크는 달려오고 있는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그리고 이 몬스터들은 뭐야?”

사내는 공포에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선, 돌아오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하지만… 하지만 몬스터들을 왜 죽이셨사옵니까?”

사내는 공간 이동을 통해 나타난 자들 중에서 적과 아군을 선별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몬스터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법진을 통해 왔다 갔다 하는 수 많은 인간들 중에서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걸 대신 선별해 줘야 하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뒤에 서 있다가 몬스터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첩자인 누군가 본다면 들통 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꽁꽁 묶여서 포로인 척 연극을 하면서 몬스터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착각해서 다크가 몬스터들을 몰살시켜 버린 것이었다.

“어라?”

사내의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다크였다.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물에 떠내려간 보따리는 왜 안 건져 주느냐고 따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 가? 다크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느낀 사내는 다급하게 말했다.

“카르토 백작님을 만나서 보고를 받으시면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실 것이옵니다.”

다크는 잠시 카르토 백작이 누군가 생각을 정리했다. 곧이어 그 이름을 가진 인물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크가 알고 있는 그 카르토 백작이 맞다면 그의 경 우 요직에 있기는 했지만 공국 내부에 몬스터를 끌어들인다든지 하는 그런 중대한 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높은 상급자가 수두 룩했기 때문이다.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은 어디에 있느냐? 먼저 그를 만나서 보고를 듣고 난 후에 카르토 백작을 만나겠다.”

“대공 전하, 송구스럽게도 카슬레이 백작님은 치레아에 안 계시옵니다.”

“왜?”

“황제 폐하로부터 치레아 기사단의 출동 명령이 떨어져서 지금 전선에 나가 있사옵니다. 기사단 전원이 출동해 버렸고, 또 가스톤 님도 대공 전하와 함께 행방불 명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카르토 백작님이 책임을 맡으셨사옵니다.”

그러면서 사내는 다크와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힐끔 쳐다봤다. 팔시온, 가스톤, 미디아, 미카엘. 이렇게 네 명이 대공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하지만 왜 이 자리에

대공 혼자만 양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대공을 따라온 저 사람들은 또 뭐란 말인가? 그런 것들이 궁금해서 힐끗 던져 보는 눈길이었다.

“기사단이 출동했단 말이지…, 알겠다. 집무실로 갈 테니 카르토 백작을 불러오도록 해라.”

다크는 너절하게 쓰러져 있는 트롤의 사체들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쓰레기들은 빨리 치워 버려.”

“옛, 전하.”

보고를 끝마친 후 카르토 백작이 나가고 나자, 다크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푹 퍼져 있는 주인의 눈치를 보 며, 세린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주인님, 따뜻한 물을 받아 놓을까요? 목욕을 좀 하시면 기분이 한결 개운해지실 겁니다.”

“아, 목욕은 됐고, 술이나 좀 가져오너라.”

“예, 주인님.”

다크는 천천히 술을 따라 마시면서 혼란스럽게 엉켜 있는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오래전의 일들이 마치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 인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참기가 힘들었다.

다크가 최초로 인간적인 정을 느꼈던 사람은 마지막 사부였던 유백이었다. 아마도 그는 다크를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생각했기에, 좀 더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지막 제자라는 것 때문에 조금 더 감상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망할 사제라는 녀석에게서 사부의 최후를 전해 들었을 때가 기억 났다. 탈마(脫魔)에 이르지 않고서는 피해 갈 수 없는 산공의 고통, 무리한 수단을 써서 역행하여 쌓은 내공은 죽기 직전에 흩어지면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안겨 준 다. 사부는 죽는 그 순간까지 그 지독한 고통에 처절하게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때,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여태껏 배운 대로 일검에 그 고통을 없애 드렸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 마교 교주와의 갈등, 아마도 그것은 아주 사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연속되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때 조금만 더 신 경 썼더라면, 마교 내에서 자신을 찍어 내려고 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먼저 파악하기만 했어도,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던 ‘국’이 그렇 게 처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갑자기 떠오른 사라졌던 과거의 기억들, 그중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은 그가 꽤 존경했었던 옥영진 대장군과 그 부하들의 죽음을 방관할 수밖에 없 었던 점이다. 자신이 유치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간단한 마교의 술책에 놀아나고 있을 때, 그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그 집에 있었다면 그때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원래가 인간이 살아오면서 천천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추억이라고 한다면, 그 추억들 중에는 죽는 그날까지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반면 최대한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일수록 더욱 더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습성이 있다. 그 렇지만 인간에게는 망각이라는 신이 내려준 축복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기억들이 아주 희미해지기에 그런 부분이 떠오른다고 해도 약간의 불쾌 감 정도만 생길 정도로 사건의 전말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일들이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 듯 아주 또렷하게 떠오른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이 망할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것도,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믿고 깝죽거린 결과가 아닌가? 그리고 여기에 떨어진 후에도 그전의 일은 망각하고 설치고 돌 아다니다가 미네르바에게 호되게 당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기억들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떠오르며 수많은 감정들이 그녀의 가슴속에 넘치고 있었다. 분노, 후회, 슬픔, 그리고 그리움…… 그런 수많은 복합적인 감 정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다가 그 모든 기억들은 ‘후회’라는 감정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다크는 마시고 있던 술잔을 벽에다가 패대기쳐 버린 다음,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급기야는 술병을 들고 통째로 꿀꺽거리기 시작했다.

“주인님, 그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다크에게 그런 말은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단숨에 한 병을 다 비워 버린 후 말리는 세린을 밀쳐 버리면서 벌떡 일어서서는 집무실 옆에 딸려 있는 작은 방 으로 달려갔다. 그 방에는 집무실에서 다크가 원할 때 가져오기 위해 준비해 둔 술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뭐가 어떻게 돼?”

“왜 저러느냔 말입니다.”

“훗.”

씨근거리는 아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시선을 돌려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하늘에 달이 두 개나 동시에 떠 있었기에 달의 빛에 가려서 별 들이 어둡게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왜 드래곤이 서로 어울려서 살지 않는 줄 아느냐?”

“예? 갑자기 웬 뜬금없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어 보니 어느 정도 짐작되는 부분이 있구나.”

아르티엔은 잠시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우리들 드래곤의 기억은 거의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지.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일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나. 하지만 우리 들 드래곤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기억들은 레어에 혼자 들어앉아서 만들어 놓은 아주 밋밋한 것들이지. 물론 세상을 떠돌면서 호비트나 오크, 트롤, 오우거 따위와 어울려서 유희를 즐기기도 하지. 그 과정에서 동료가 죽기도 하고, 하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싸우기도 하고, 울고, 웃고, 분노하면서 지내게 되지. 하지만 그것들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다르지. 유희의 경우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서 그 생을 바라보는 것이야. 호비트들이 연극 구경을 하면서 울고 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 런 기억은 아무리 떠올려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들이지. 똑같은 연극을 한 번 더 본다는 것 정도 외에는 별 감흥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드래곤끼리 어울려서 만 들어 낸 기억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고 봐야 해. 그것 때문에 우리 종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는 것을 매우 꺼리지.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선명하게 떠오를 테 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는 드래곤인 친구가 몇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드래곤들끼리 어울려서 친구로 지내는 녀석들도 많아요. 그건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닙니까?”

“맞아, 드래곤들도 소수이긴 하지만 친구를 깊게 사귀지. 하지만 그것도 다 헤즐링 시기를 벗어나서 독립된 개체로서의 완성이 끝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헤즐링일 때, 그들은 절대로 아버지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일 을 당한다면? 아마도 그 기억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들 거야.”

“그렇다면 아버지가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뭡니까? 손자 일을 물었는데, 왜 난데없이 우리 종족에 대해서 별로 흥미도 없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시작하시는 겁 니까?”

“닥치고 들어 봐. 다 연관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인간은 드래곤에 비해서 훨씬 덜 성숙된 자아와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지?”

“그렇다고 봐야 하겠죠.”

“하지만 인간은 망각이라는 신의 축복을 가지고 있지. 기억하기 싫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두 다 세월이 가면 잊어버리는 놀라운 신의 축복을 가지고 있 단 말씀이야.”

그것이 신의 축복이 될 수 있나? 하는 회의적인 심정으로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래서요?”

“그렇기에 인간은 현재에 매달리게 되는 거지.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야. 미래도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현재만이 중요한 거야.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모든 일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걸 과연 성숙되지 못한 정신 체계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

아르티엔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챈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정신 붕괴 또는 자아 상실까지 갈 수도 있는, 속된 말로 미치거나 자폐증에 걸린다는 말이 아닌가?

아들의 표정 변화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장담하시죠?”

수상쩍은 어조로 질문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아르티엔은 으스대듯 대답해 줬다.

“나는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마법을 남발하지는 않으니까 하는 말이다. 원래가 호비트의 두뇌라는 것은 매우 불완전해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도 곧잘 잊어버 리지 않느냐? 지금은 잊고 지냈던 수많은 과거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라서 당황스럽겠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하지만 그 잊어버리는 순서에 조금 문제의 여지는 있지. 내가 예상하는 최악의 가정은, 그 아이가 안 좋았던 일들, 그러니까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모든 일들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후회스럽던 수많은 일들을 계속 떠올리면서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고……. 그러면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것이지.”

아르티엔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한눈에 척 봐도 호비트의 수명을 기준으로 따졌을 때, 이제 겨우 20년도 채 못 살았을 거 아니냐? 겨우 20년 동안 쌓인 안 좋은 기억이라고 해 봐야 별것도 없지.

기껏해야 남자한테 퇴짜를 맞았다든지, 혹은 짝사랑이라든지… 그런 몇 가지 후회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게다.” 아르티엔은 아들이 안심하라고 덧붙인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느낀 아르티엔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라고 있냐?”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아이는 겉모습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80년은 충분히 살았다구요. 우리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호비트의 입 장에서는 대단히 긴 세월이지요. 그리고 안 좋은 기억도 무지하게 많을 거예요.”

아르티엔은 약간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80년? 80년이라……? 그렇군, 뭔가 이상한 기척이 바로 그거였어. 혹시 그 아이 저주 같은 것에 걸린 것이냐? 뭔가 흑마법에 당한 것 같은 흔적이 엿보이던 데.

아르티어스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본격적으로 조사해 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셨어요? 아버지 말씀대로 흑마법 중에서 악명 높은 디스라이크에 걸린 모습이죠.”

아르티엔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핫! 디스라이크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예쁜 모습이 된 거지? 도대체가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로구나. 의외의 연속이라고나 할

까…….”

“어떤 여자애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상태에서 그 저주에 걸린 것이니 그렇겠죠. 그전에는 남자였단 말입니다. 그것도 호비트들 중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 로 강력한..”

아르티엔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오호라,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나는 또 암컷을 보고 아들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가 정착된 것인가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냥 놔두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왜 괜히 그딴 마법은 걸어서 저 모양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일단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저 아이가 지나가 버린 시간에 얽매여 버릴 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딛고 한 단계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인지는 말이야.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겠지.”

“손자의 일인데도 아주 속 편하게 얘기하시는군요.”

아르티엔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사전에 호비트 양자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나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니까.”

아르티어스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손자라구요.”

“아니, 그 애는 너의 아들일 뿐, 나의 손자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네가 무엇을 가지고 즐기건 방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만약 내가 그런 생각이 없 었다면, 그 아이가 나한테 대든 그 순간 아예 소멸시켜 버렸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네가 슬퍼할 것 같아서 그냥 놔둔 것이지. 네가 무슨 종족의 아이를 양자로 삼건 나는 상관할 생각이 없다. 엘프나 오크, 심지어는 우리들 드래곤의 노예로서 신께서 점지해 주신 드워프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나한테까지 강요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알겠냐?”

“그으래에요? 좋아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멀리까지 배웅은 안 할 겁니다.”

이죽거린 후 픽 돌아서서 들어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아르티엔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물론 골드 드래곤의 노룡 아르티엔으로서가 아니라, 어쩌면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으로서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아르티엔은 유희의 대상으로서 손자를 원하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다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그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손자를 대하듯 다정하게 해 줄 것이다. 할아버지 노릇을 유희로 생각한 이상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아르티엔은 결코 도와 주지 않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뒤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런 다음 퉁명스런 어조로 말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좋을 대로 하세요. 아버지는 그 아이를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그 아이는 제가 낳은 헤즐링보다도 더 소중합니다.” 아르티어스는 지금은 조금 진정되었나 싶어서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다크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냐?”

“예, 아르티어스 님. 주인님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이분을 모시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이번에 함께 오신 신관이시라고 해서요.”

아르티어스는 이번에는 라나 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게나.”

“예? 하지만…….”

“별일 없을 거야. 아버지도 그렇게 보증했으니까 말이야. 물밀듯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에 파묻혀서 많이 괴로워하겠지만, 결국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털고 일어 서겠지. 이 위대하신 아르티어스의 아들이 저 정도 시련에 굴복할 수는 없지 않겠나?”

아르티어스의 신념 어린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라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부르십시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르신께서는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인 듯싶습니다. 그 렇게 손쉽게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시는 것을 봐서 말입니다. 하지만 옆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는 믿음도 중요하겠지만 어려울 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도 큰 힘이 되더군요.”

“잘 알겠네.”

아르티어스는 라나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듯 세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크는 어디에 있느냐?”

“안에 계십니다.”

아르티어스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위에는 몇 개인가 빈 병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인사불성이 되어 축 늘어져 있는 다크의 모습이 보였다. 다크가 덮고 있는 담요는 아마도 세린이 가져다가 덮어 준 것 같았다.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다가가서 다크의 옆에 앉았다. 그런 후 아르 티어스는 다크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작정 도움만을 준다고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단다. 우선은 옆에서 지켜봐 주마. 그게 며칠이 걸리든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네가 오래지 않아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다크의 방황의 시간은 계속되었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불리 참 견할 수도 없었다. 아들놈이 여태껏 보여 줬던 성격으로 봤을 때, 말리면 말릴수록 더 할 것이었다. 어쩌면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겠다고 날뛸지도 모를 일 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들놈이 자살하겠다고 날뛰면 말려야 하겠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거의 밤잠도 잊고 다크를 몰래 감시했다. 다크는 모르고 있었지만, 수십 개도 넘는 마법의 눈들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악! 골치야. 머리통이 빠개지는 것 같군. 이봐, 세린.”

“예, 주인님. 해장술을 드시겠습니까?”

3일 동안 오로지 술만을 마셔 왔던 주인이었기에 세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질문을 던져 왔다. 어제도 눈뜨자마자 해장술부터 시작해서 밤늦도록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주인의 반응이 달랐다.

“세린, 나를 죽이려고 작심했냐?”

세린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오랜만에 네가 차려 주는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구나. 3일 동안 후회하고 고민해 줬으면 죽은 녀석들에게 충분히 보답을 해 준 거지. 죽은 놈은 죽은 거고, 나는 이렇게 잘 살아 있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 자, 우선 목욕물부터 받아 둬라. 씻은 후에 식사를 하고 싶다.”

여느 때의 낙천적인 주인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세린은 다급하게 말했다.

“예, 주인님.”

세린이 목욕과 식사 준비를 위해 달려 나간 후, 다크는 천장에다가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빠도 아침 식사 함께 하시죠. 며칠 동안 감시하신다고 피곤하셨을 텐데……. 그리고 그 호텔로 찾아오신 것에 대해서 할 말도 좀 있구요.”

그 말과 동시에 천장의 한쪽 귀퉁이,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둥실 떠 있던 작은 눈알 같은 것이 ‘팍하고 사라져 버렸다.

“에구구, 벌써 눈치 채고 있었나?”

아르티어스는 무안해져서 뒤통수를 긁으며 일어섰다. 일단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자, 오랜만에 함께 하는 아침 식사인데 뭘 입고 갈까…….”

여기저기에서 사다 모아 놓은 옷들이 수십 벌은 족히 되었기에 아르티어스는 두리번거리면서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마디 툭 내뱉었다.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이야? 나는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죽은 놈들 때문에 3일씩이나 고민해 줬으면 많이 해 준 거라니, 이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호비트가 할 수 있는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뒤적뒤적 옷을 찾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참, 호텔에 찾아온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댔지. 에구구, 늦게 찾아왔다고 또 얼마나 구박을 하려고……. 내가 그 고생을 해서 찾아간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렇다 면 그걸 어떻게 알아듣도록 변명을 해야 하지?”

아르티어스는 옷 찾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별로 변명이 통할 상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밑져 봐야 본전이니까.

“생각 밖이네요.”

“뭐가?”

“저는 할아버지라는 그 드래곤도 함께 데려오실 줄 알았는데, 아빠 혼자서만 왔어요?”

아버지를 데려온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잔머리를 굴리려고 든다면, 다크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 자신이 있는 총명한 아르티어스가 아니었던가? 아르티어스는 그것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아르티엔을 데려왔을 때의 최악의 상황도 이미 고려해 본 결과 내린 결론이 었다. 아들놈이 여태껏 그래왔던 대로 아르티엔의 앞이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인다면? 닭대가리라고 자신을 놀리는 아버지 앞에서만은 절대로 아 들에게 당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왔던 것이다.

“뭐, 그 노친네는 바쁘니까..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식사니까 우리 둘이서만 오붓하게 먹기로 하자꾸나.”

“그러죠, 뭐. 세린! 식사 가져오너라.”

곧이어 세린이 식당으로부터 날라 온 따끈한 갖가지 음식들이 식탁에 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의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래도 서로 간의 분위기가 조금 심 상찮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크도 뭔가 껄끄러운 기분을 느꼈는지, 포도주를 조금 마신 후에 말을 걸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아르티어스가 통 말이 없었 기에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아빠!”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아르티어스는 화들짝 놀라면서 준비해 놓은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아! 얘야. 그게 아니고 말이다. 나는 절대로 고의로 그렇게 늦게 찾아간 것이 아니야.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나도 정말 너를 찾아낸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니까……..”

행여나 아들이 “조용히 해욧! 드래곤이라면서 그런 것도 못 해요?”하고 따질세라 다급하게 말을 내뱉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살며시 다크가 자신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아들의 애정 표현에 멍한 상태인 아르티어스. 따뜻한 아들의 체온에 아르티어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술 더 떠서 약간 은 쑥스러운 듯한 어조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가 구하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단 한마디의 말, 그 말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폭발하는 줄 알았다. 여태껏 다크가 이렇듯 다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아르티 어스는 더욱 기뻤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다크가 건넨 인사 한마디 덕분에 식사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끝마쳐졌다.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이 새로운 변화가 기쁘기는 했지만, 뭔가 썩 석연치 않았는지 식당 문을 나서면서 거의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기분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상은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