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21화 – 파괴되는 엘프리안시 (14권 끝)
파괴되는 엘프리안시
철수 작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그린레이크에게 반란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가두고, 또 그의 심복 부하들도 모두 다 가둬 버렸다. 그 외에 의회나 국무부에서 일하던 인물들도 몇몇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이 사실을 황제와 함께 프루니아로 떠난 국무대신이나 의회 의장에게 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후 엘프 리안 시내의 철수 작전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황제가 황궁에서 떠난 다음 날 철수 작전은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 황궁 내의 거의 모든 값나가는 집기들과 각종 유물 등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수도 밖으로 빼 냈던 것이다. 겨우 하루 동안에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크루마의 문화재들을 수도 밖으로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에 가까운 혹독한 중노동이었다. 그리 고 그 중노동에 동원된 것은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엘프리안시의 시민들이었다.
징발된 건장한 남자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짐을 엘프리안시 외곽으로 옮기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거의 5만 명이 넘는 남자들을 동원했기에 그 엄청난 일이 하루 동안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네르바는 일단 큰 일거리가 끝나고 나자 그때서야 수도에서 모든 시민들의 철수를 발표했다. 수도 방위군의 남은 1개 사단과 황궁 경비대까지 출동하여 시민들 의 혼란을 수습했기에, 그것도 비교적 순조롭게 행해졌다.
대부분의 준비를 갖춘 후, 미네르바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크와 그 일행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궁리하면서.
다크일행은 곧장 황궁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다음 천천히 아래쪽으로 고도를 낮추어 바닥에 내려섰다.
“웬 놈들이냐?”
하늘 위에서 날아서 내려온 그들을 발견한 경비병이 달려오자, 다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미네르바를 불러오너라.”
미네르바는 이미 자신을 찾아오는 일행들에 대해서 실례가 없도록 당부를 해 놓은 상태였기에 경비병은 공손하게 질문을 던졌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를 찾아오신 분들이십니까?”
“그렇다.”
잠시 후 경비병의 보고를 받은 미네르바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것을 보며 다크는 살기 어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허둥대는 꼴을 보니, 자신이 지은 죄가 뭔지 알긴 아는 모양이군.”
미네르바는 달려오면서 다크의 뒤에 서 있는 아르티어스를 확인했다. 역시 그녀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혼자 온 것이 아니고 드래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것도 가 공스러운 힘을 지닌 웜급 드래곤을. 미네르바는 다크의 앞에 서자 곧장 준비해 놨던 것을 내밀었다. 아르티어스가 직접 만들어서 다크에게 선물했던 그 검이었다. 미네르바는 다크가 검을 허리에 차는 것을 보며,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제발, 나 한 사람의 목숨으로 용서해 줘. 이곳에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들은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서 비롯된 것인지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제 발 그들은 용서해 주길 바라.”
다크는 무표정하게 미네르바를 잠시 바라봤다. 그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서를 구하기에 앞서서, 나한테 먼저 건네줘야 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미네르바는 흠칫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놨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그린레이크 공작이 데려가서 세뇌를 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야. 어제 그를 감옥에 수감해 버린 후 그들 을 빼내기는 했지만, 도저히 너에게 건네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다크가 화가 나서 외칠 때, 뒤에서 아르티어스가 한마디 했다.
“그들을 데려오너라. 내가 치료하마.”
미네르바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자 몇몇 기사들이 달려갔다. 그들은 곧이어 다크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그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어딘가 좀 이상했다. 모두 들 두 눈이 풀려 있었고, 뭔가 멍청한 상태였다. 다크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르티어스에게로 간절한 시선을 담아 보냈다.
“치료하실 수 있는 거지요?”
“헛,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누구냐? 그 위대한 골드 일족의 후예로서 나보다도 잘난 드래곤이 있으면…..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멈추고 아르티엔의 눈치를 힐끔 봤다. 아르티엔은 저런 바보탱이 아들 따위는 둔 적이 없다는 듯 먼 산을 보는 척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종족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저따위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아르티 엔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고칠 수 있으면 빨리 고쳐 주세요.”
“알겠다, 그만 보채거라.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아르티어스는 멍청하게 서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서는 마법의 푸른 오라(Aura)를 뿜어내고 있는 손을 들어 각자의 머리 위에 살짝 올리기를 반복했다. 잠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갑자기 팔시온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 아르티어스 님,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팔시온은 갑자기 눈앞에 아르티어스가 보이고, 또 저 앞쪽에는 다크의 모습까지 보이자 어리둥절해서 말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분명히 정보부원이라고 솔직하 게 자신들의 신분을 밝힌 그 개자식들에게 별의별 고문을 당했던 것 같은데, 그게 꿈이었나? 하지만 이리저리 돌아가던 팔시온의 시선에 미네르바와 그의 부하들이 잡히자 화들짝 놀랐다. 그건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희들을 구해 주러 오셨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충 사태 파악을 한 그들은 저마다 아르티어스에게 감사를 보낸 다음 다크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모두들 한마디씩 던졌다.
“너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빨이 갈린다구.”
“그 정보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개자식들. 너도 한번 당해 보면 혀를 내두를 거야.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지 말이야.”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다구.”
다크에게 별의별 말을 다 하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신뢰를 가득 담은 미소가 말이다.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동료들을 완벽하 게 치료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미네르바에게로 다가갔다. 미네르바 또한 시선을 딴 데로 돌리지 않고 다크를 마주 봤다. 다크는 서로 간의 거리 가 아주 가까워졌다고 생각된 그 순간 발을 날렸다.
퍽!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미네르바는 뒤로 나뒹굴어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그녀의 부하들이 다크를 향해서 저마다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안 돼!”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상태에서도 단호하게 외쳤다. 부하들은 검을 뽑아 든 상태에서 모두들 멈춰 섰다. 하지만 아직 검을 회수할 생각은 모두 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검을 거둬라. 이것은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둬야 옳은 것. 나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낼 수 있게 도와 다오.”
스메르는 입을 악 다물며 분노를 씹어 삼켰다. 그런 다음 장중한 어조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검을 넣어라. 이건 명령이다.”
레디아 제1근위대의 기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미네르바는 정말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다크에게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들겨 맞는 미네르바의 입 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다크가 이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봤을 때, 결코 또 다른 뒤탈을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엘 프리안시, 60만의 인구가 모여 사는 이 도시만 지킬 수 있다면 그녀는 그 어떤 굴욕이라도 참아 낼 수 있었다.
다크는 두들겨 팰 만큼 팼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동작을 멈추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배반당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해. 두 번 다시 나의 호의를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나를 한 번 속인 인간은 절대로 신뢰하지 않으니까 말 이야.”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빠, 갈 준비를 해 줘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그가 아는 한 아들놈은 결코 이 정도에서 복수를 마무리할 인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벌써 가려고? 이제 시작인 거 아니냐? 너는 한 번도 이 아빠의 브레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못 봤잖아. 오늘 한번 보여 주려고 했더니.”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미네르바가 치를 떠는 가운데, 다크는 냉정하게 외쳤다.
“그만 가자구요. 최소한의 반항도 안 하는 상대를 무슨 재미로 계속 두들기고 있겠어요?”
아르티어스는 기죽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알겠다. 나는 절대로 가기 싫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리로 와라. 아버지도 이리로 오시죠.”
그런 다음 팔시온 일행에게는 갑자기 사나운 눈초리를 희번뜩거리며 말했다.
“네놈들은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 알아서 재깍재깍 기어 와야 할 거 아냐?”
“옛, 어르신.”
팔시온 일행이 허둥지둥 아르티어스의 주위로 모여 들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다크에게 다시금 다정한 시선을 보내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어디로 가고 싶냐? 치레아로 돌아갈 거야?”
“몰라요. 어디 조용한 곳에서 친구들하고 술이나 한잔하고 싶어요.”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
아르티어스는 공간 이동을 하기 직전, 미네르바에게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으드드득. 나를 속인 벌은 네년의 뼛속 깊이 새겨 줄 것이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미네르바는 그것을 정확히 들었다. 미네르바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스메르 경!”
“예, 전하.”
“모두 철수할 준비를 해라. 오늘 하루 동안은 수도를 비운다. 아무래도 이것으로 일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치레아 대공은 그런대로 용서를 해 준 것 같은데, 드래 곤은 그런 것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자, 서둘러라.”
“옛, 전하.”
다크 일행이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고 마법사는 제임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발렌시아드 각하, 아무래도 이것으로 끝인 모양입니다. 복수가 의외로 싱겁게 끝났군요.”
“다행한 일이 아닌가? 주범인 크루마를 이 정도로 처리한 것을 보면, 본국은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겠어. 자, 돌아갈 준비를 해 둬라.”
“지금 통신으로 보고를 하시지 않고 돌아가서 직접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화급을 다투는 보고 사항은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고, 정말 오늘은 멋진 광경을 봤어. 미네르바 켄타로아……. 정말 대단한 여자다. 같은 기사로서 존경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엘프리안시가 소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저 엄청난 치욕을 참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치레아 대공도 대단해. 자신에게 충분히 복수 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에서 넘길 수 있는 것을 보면, 약자에 대한 관용이 있는 진정한 기사임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훌륭한 기사들과 같은 시대를 살게 해 주신 아레스 님께 감사드린다.”
마법사는 제임스의 혼잣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말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각하.”
“그래, 출발하자.”
“여기면 괜찮겠냐?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술집인 것 같은데 말이야.”
“괜찮네요. 빨리 들어가죠.”
“자, 모두들 고생했을 텐데 실컷 마시자. 계산은 내가 할 거니까.”
“안 그래도 지금 수중에는 땡전 한 푼도 없어. 모두 다 압수당했거든.”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가운데 팔시온이 호기롭게 외쳤다.
“이봐, 여기 주문받아.”
“예,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맥주. 역시 시원한 맥주가 최고지. 모두에게 맥주 큰 걸로 한 잔씩. 그리고 소시지하고 햄, 구운 닭, 새끼돼지 통구이, 그리고 어… 미디아는 뭐 먹고 싶은 거 없 어?”
“그거면 충분해.”
미디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하자, 팔시온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물었다.
“저, 어르신께서는 뭘 드시겠습니까?”
“포도주……. ‘진홍의 망토’라는 포도주 있나? 전에 여기서 먹어 보니까 그게 제일 나은 것 같던데.”
“예, 있습니다, 손님.”
“그거 한 병… 아니, 다섯 병 가져다줘. 여기에 배터지게 포도주를 마셔 보고 싶다는 분이 계시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손님. 그렇다면 맥주 큰 거 네 잔하고.”
““잠깐, 어떻게 해서 네 잔이야. 다섯 잔이지.”
“예? 하지만…….”
점원은 다크가 아주 어리게 보였기에 설마 맥주를 마시랴 싶어서 계산에서 뺏던 것이다. 그걸 짐작한 팔시온은 점원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기에 다짜고짜로 주문 량을 확정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맥주 큰 거 다섯 잔하고 포도주 다섯 병, 그리고 소시지하고 햄, 구운 닭, 새끼돼지 통구이나 가져와.”
“알겠습니다, 손님.”
점원이 달려가고 난 후, 아르티어스는 헛기침을 해 대며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어디에 가려고?”
아르티엔이 슬쩍 말을 걸자, 아르티어스는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저, 화장실에 잠시…”
아르티엔은 일부러 큰 소리로 되물었다.
“화장실이라고?”
“예, 그래요. 화·장·실! 금방 갔다가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라구요.”
“인간의 일에 너무 크게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단다. 특히나 네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그 거대한 도시를, 헙!”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아르티엔의 입을 꽉 틀어막으며 귓속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오신다면, 그 어둑한 레어로 돌아가셔서 혼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할 거라는 점을 명심하세요, 아시겠어요?”
“훗, 네가 설마 나를 레어로 쫓아 보낼 실력이 있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 제가 레어로 돌아가 버릴 테니까, 아버지도 여기에 계속 붙어 계시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죠.”
아르티어스의 협박에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들을 놀리려고 해 본 소리였지, 사실 호비트의 도시 하나쯤 박살 내 버린다고 해도 아르티엔과 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놈이 가루를 만들 작심을 하고 있던 그 도시에서 인기척이 그렇게 많이 느껴지지도 않았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이미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둔 것 같았다.
“오냐, 눈감아 주지. 대신 향기로운 포도주를 배터지게, 알겠지?”
아르티어스는 이가 갈리는 소리로 대꾸했다.
“물론이죠.”
크루마 황궁 밑 지하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지하 감옥. 이곳은 국가 반역죄 같은 아주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 놈들만 투옥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지금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 아니 엘프들이 수두룩하게 갇혀 있었다.
“이봐, 네놈들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고도 멀쩡할 줄 아느냐? 지금 당장 미네르바 그 계집년을 불러와라.”
노기에 가득 차서 울부짖는 그린레이크. 얼마나 괴성을 질러 댔는지 또랑또랑했던 그의 목소리는 꽉 쉬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 앞에는 중무장한 기사 두 명이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 또한 처음에는 그린레이크를 달래기도 하고, 비위를 맞춰 보려고 해 봤으나 통하지 않자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젠장, 폐하께서만 돌아오신다면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미네르바 네년이 무슨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코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야. 네년이 아무리 황제 폐하의 귀를 막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영원히 계속될 줄 아느냐? 조만간에 나의 충직한 부하들이 이 사실을 폐하께 고할 것이다. 폐하께서 돌 아오시기만 한다면..”
그린레이크가 악을 쓰고 있을 때,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지하에 울려 퍼졌다. 그린레이크는 자신을 방면하라는 지시를 가지고 온 전령이거나, 혹은 폐하께서 돌 아오셨다는 소식을 가지고 오는 인물이기를 간절히 마음속으로 빌었다. 발걸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더니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켄타로아 전하의 명령이다. 철수한다. 서둘러라.”
“정말이십니까? 전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리가……. 그렇다면 저 죄수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다. 최대한 빨리 수도를 이탈하라는 지시만 계셨을 뿐이다. 모두들 서둘러라. 한시가 급하다.”
기사들은 잠시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죄수들의 패거리가 혹시나 자신들을 따돌리고 이들을 탈옥시키려고 하는 음모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기사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의 상관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다 그 기사를 따라서 서둘러서 지하 감옥을 떠났다. “그러면 그렇지. 나의 충직한 부하들이 벌써 손을 썼구먼.”
그린레이크는 자신의 부하들이 몇몇 기사들을 매수하여 이곳에 있는 모든 기사들을 철수시켰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감옥을 경비하고 있던 기사들 이 하나 둘도 아니고 모두 다 철수할 리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감옥 문을 열어 주기 위해 나타나는 마법사는 없었다.
“전하, 보소서. 골드 드래곤이옵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골드 드래곤은 황금빛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며 그곳에 떠 있었다. 육중해 보이는 날개를 퍼덕이며 잠시 한 자리에 떠 있던 드래곤의 입에서 갑자기 흰 광선 같은 것이 폭발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엘프리안시는 갈가리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잠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엘프리안시 상공을 천천히 몇 바퀴 선회하더니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미네르바는 형언하기 힘든 감정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엘프리안시는 그녀가 어렸을 때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북방의 거대 도 시였다. 그녀는 그 도시가 더욱더 찬란하게 성장해 나가기를 바랐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 해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 것이 사라져 버렸다. 폐허가 되어 버린 엘프리안시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작은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그녀와 함께 서 있던 스메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미네르바는 황급히 눈물을 닦은 후 근엄한 어조로 말하려고 노력하며, 명령을 내렸다.
“스메르 경, 오랫동안 경은 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 주었네. 그것을 나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별 말씀을 다 하시옵니다, 전하.”
“총사령관이자 근위 기사단장으로서 경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
스메르는 어리둥절해서 대꾸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시온지…….”
“엘프리안시가 소멸한 것을 폐하께 즉시 보고하라.”
“예, 전하.”
미네르바는 망설이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놓으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나를 체포하라.”
그 말을 들은 주위의 모든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저기서 간간이 흐느낌 소리도 들려왔다. 스메르는 자신감 있게 미네르바 를 설득했다. 그만큼 미네르바에 대한 군대의 충성과 신뢰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하, 희망을 잃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제국과 황실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것을 폐하께서도 알아주실 것이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구나. 나를 체포해라! 스메르 경.”
“전하, 한 가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사옵니다.”
마법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중년의 마법사 나르데어스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로체스터는 궁금증을 가지고 물었다. 나르데어스가 직접 자신에게까지 와서 보고하 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통신이라는 것 자체가 밖에서부터 들어온 보고를 최대한 빨리 공작에게 넘겨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전령을 통해서 전달하 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예, 몬스터들의 세력을 탐색하기 위해 투입한 용병 기사단에 관한 것이옵니다.”
“그래서?”
“그게…, 언제나 3시 경에는 연락을 보내왔었사옵니다. 아마 식사를 마친 후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연락을 해 오는 것 같았사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세 시간 이나 기다렸지만 아직도 연락이 오지 않고 있사옵니다. 뭔가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로체스터 공작은 ‘겨우 그런 일을 가지고 나한테 보고를 하다니’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부하에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이제 겨우 세 시간 지났는데 말이야. 뭔가 급한 일이 있다 보면 보고 올리는 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여태까지의 보고를 토대로 유추해 보면, 오늘 용병 기사단은 크로돈시 외곽에 이르게 된다. 그곳까지 몬스터의 세력이 미치고 있다는 보고는 아직 없었어.”
“폐하의 말이 옳으시옵니다. 하오나 용병대장은 아무래도 몬스터 세력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었사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쩌 면 크라레스의 기사단과 충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쯧쯧, 별의별 걱정을 다 하고 있군.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하세. 이만 나가 보게나.”
“예, 전하.”
나르데어스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조용히 있던 레티안은 그가 나간 후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나르데어스의 의견도 조금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사실 크라레스의 기사단과 맞붙었다면, 큰 곤욕을 치룰 수도 있는 것 아니겠사옵니 까?”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나르데어스는 용병 기사단을 이끌고 크라레스에 가 있는 용병대장의 신분이 뭔지 모르기에 저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겠지만, 용병대장 그가 누구인가.
“결코 어떤 일도 생길 리 없다. 경은 용병대장이 누군지 잊었나?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단이 총출동한다고 해도 그를 어떻게 하지는 못해. 그녀가 직접 나선다면 혹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지금 드래곤과 함께 크루마에 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결과적으로 별일 아니라는 말이 되는 거지.”
“예, 전하.”
이때, 문밖에서 경비병이 외쳤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오셨사옵니다, 전하.”
“오오, 벌써 왔는가? 들라고 해라.”
“옛, 전하.”
경비병이 문을 활짝 열자, 제임스가 들어섰다. 경비병은 제임스만을 들여보낸 후 다시금 문을 닫고 부동자세로 문 앞에 섰다.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의 안색이 아주 밝은 것을 보고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사건의 전모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했기에 다급하게 질문을 던 졌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전하, 일이 아주 잘 풀렸사옵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켄타로아 공작은 대단한 여걸이었사옵니다.”
제임스는 방금 전에 본 광경을 흥분한 어조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크가 얼마나 그녀를 개 패듯이 패 놨는지,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참 으면서 수도를 지켜 낸 미네르바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정말 그녀는 기사들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사옵니다. 결코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끝까지 핍박하는 비열한 근성은 없었으니까 말이옵니다.”
제임스의 보고를 통해 코린트가 무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로체스터 공작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되자 로체스터 공작은 다크의 복수라는 것을 자신 이 직접 가서 보지 않은 것이 억울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미네르바가 오뉴월 개 맞듯이 맞았다는데, 그걸 못 본 것이 한 스러울 정도였던 것이다.
“호오, 대단한 구경을 했군. 나도 봤으면 10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갔을 텐데 말이야. 미네르바가 그토록 두들겨 맞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하 하핫! 정말 직접 가서 보지 못한 것이 원통할 뿐이군.”
제임스도 밝아진 로체스터 공작의 영향을 받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 일이 아주 쉽게 풀릴 것 같사옵니다.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크루마의 처우가 그렇게 관대했던 것을 보면, 이쪽에서 사신을 보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변명 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사옵니까?
“경의 말이 옳도다, 제임스.”
“예, 전하.”
“이번에도 경이 수고해 줘야겠다. 전보다 좀 더 많은 선물을 가져가도록 하게. 드래곤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최고급으로 열 상자 정도 가져가고, 그리 고 최고급 브랜디(포도주를 증류한 술)도 서너 상자 가져가고 말이야. 그 외에 금은보화를 두루 갖춰 가지고 가서 변명과 함께 사과를 하는 거야. 사실 우리가 그녀 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나? 정신계 마법에 당한 후유증을 치료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고 말이야. 안 그런가?”
“맞사옵니다, 전하.”
“그래, 그 부분을 확실하게 설명해 주란 말이야. 또, 그녀가 도주했을 때도 사로잡으려고만 했지, 결코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않았나? 그 때문에 이쪽의 피해가 엄청났던 것이고, 결국은 그녀가 달아날 수 있었던 주된 원인도 그것 아니겠나? 그 모든 것을 잘 설명하란 말이야. 그럼 잘하면 그냥 은근슬쩍 넘어 갈 수 있겠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즉시 출발하겠사옵니까?”
“아니, 내일 가는 것이 좋겠지. 지금은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어. 이쪽에서도 선물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저쪽도 오랜 시간 헤어졌던 부하들을 다 독거리려면 오늘 저녁 화끈하게 술 파티를 할 것 아니겠나?”
“예, 전하, 그럼 물러가겠사옵니다.”
제임스가 막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그때,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중년의 마법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제지하려는 경비병과 부딪치면서 방 안으로 나뒹굴며 들어왔는데, 로체스터 공작을 보고도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뭔데 그러느냐? 폐하께서 심장마비라도 걸리셨냐? 왜 이렇게…….”
마법사를 나무라던 로체스터 공작의 질책은 마법사의 보고 한마디에 멈춰 버렸다.
“엘프리안시가 소멸당했다는 첩자들의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엘프리안시 상공에 갑자기 나타나서 흰 광채의 브레스를 뿜었다고 하옵니 다. 그 때문에 지금 엘프리안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고 하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로체스터 공작과 제임스는 경악감에 입이 쩍 벌어진 채 굳어 버렸다. 과연 코린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묵향 15 – 외전 : 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