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4화 – 라나의 결심
라나의 결심
로체스터 공작의 밀명으로 그 부하들이 치레아 대공을 처형했다는 소문을 은밀하게 퍼뜨리고 있는 그 무렵, 코린트의 황궁 한 구석에서는 언제나처럼 긴 금발을 단정하게 뒤로 묶은 후 로브를 이마까지 깊숙하게 뒤집어쓴 정식 무녀의 복장을 하고 있는 무녀가 한 가지 일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저질러 댄 철없는 짓거리 때문에 자신을 원수 보듯 미워하는 저 소녀, 그 소녀와 어떻게 화해를 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무녀는 자신이 근처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달려서 지나가는 다크를 보고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은 ‘감시자격인 제임스와 함께 온 것이 아 니었기에 소녀와 얘기라도 나눌 작정이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듯 다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체에는 신성 마법에 의한 근력 강화를 시킨 덕분에 쉽게 다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무녀는 다크와 나란히 달려가며 생긋이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변함없이 건강하시군요, 아저씨.”
숨이 턱에 찬 듯 헐떡거리며 다크는 옆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꼴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헉헉! 미친 소리하고 있네.”
하지만 무녀는 그 정도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푸대접은 그동안 수없이 당해 봤기에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저씨가 나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나도 이해할 수 있어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는지 잘 알거든요. 하 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필요가 있을까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저를 용서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헉헉헉, 절대로, 헉헉, 절대로 용서 못 해!”
“어떻게 하면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겠어요?”
무녀는 신성 마법의 덕택인지 오랜 시간을 달렸어도 호흡이 하나도 가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따라서 달려가며 이런저런 말로 다크를 설득했다. 그런 모든 말 이 다크에게는 헛소리들로 들렸기에 그녀는 거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 매혹적인 제안이 들려왔다. 다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 닌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헉헉, 뭐라고?”
“제가 아저씨가 탈출하는 것을 도와 드리면 저를 용서해 주실 거냐구요.”
다크는 더 이상 달릴 기분이 아닌 듯 속도를 줄였다. 그런 다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진담이냐?”
“예, 아저씨가 왜 여기에 잡혀 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예전의 아저씨의 성품이라면 절대 나쁜 일을 하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제 가 힘이 된다면 도와 드리겠다는 것이지요.”
“흐음, 어려울 텐데?”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거예요.”
“어째서?”
“아저씨가 여기서 도망칠 힘이 없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든요.”
“그거야…….”
“그러니까 제가 도와 드린다면 쉬울 거라는 거죠. 아무도 아저씨가 누군가 딴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자신 있는 라나에 비해서 다크의 반응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글쎄, 너 따위가 도와준다고 뭔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데?”
“한번 믿어 보시라니까요.”
“언제, 어떻게 할 건데?”
“오늘 저녁에 탈출하도록 하죠. 저도 준비할 것이 있구요. 저녁 식사를 단단히 한 후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해가 질 때쯤 올게요. 참! 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 요?”
“한 이 정도 길이의 짤막한 검, 그 뭐라더라… 그렇지, 샤벨(Shabel)을 구해다 줘. 아주 얇고 가벼울수록 좋아. 그리고 혹시 시간이 난다면 검의 손잡이를 이런 식 으로 바꿔 줘. 대장간에 가서 말하면 될 거야.”
다크는 손짓으로 검의 크기를 말한 후, 자신이 좋아하는 손잡이의 방식을 땅바닥에 슬쩍 그리면서 설명한 후 곧장 그 흔적은 지워 버렸다.
“그리고 전에 마나를 흡수하면서 근력을 높여 주는 장갑을 써 본 적이 있는데, 그걸 내가 쓸 수 있을까?”
“글쎄요. 저는 마법 쪽은 잘 몰라서 확실한 대답을 해 드릴 수는 없네요. 혹시 몸속에 있는 마나는 느껴지세요?”
“당연히 느껴지지. 하지만 그걸 사용할 수가 없을 뿐이야. 아마도 이 녀석들이 막고 있는 모양이야.”
다크는 자신이 양쪽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아마 써도 별 상관은 없을 거예요. 원래 마법 도구들은 그 사용자의 마나를 강제적으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기에 마법 도구를 이용해서 능력 이상의 마법을 구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의 몸속에 마나가 있기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 되겠죠.” “그래? 그렇다면 힘을 배가시켜 주는 그런 마법 도구를 하나 구해 줄 수 없을까?”
그 말에 라나는 약간 미안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 드릴 수가 없어요. 저는 신을 받드는 사제거든요. 마법 도구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아요.”
다크는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자신의 목걸이와 귀걸이를 풀었다. 물론 이것들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파이어해머를 족쳐 만들어 준 것으로 대 단히 값진 세공품들이었다. 그녀는 사로잡힌 채 크루마를 거쳐 코린트로 왔지만 그녀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검 외에는 압수당하지 않았 기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팔면 안 될까?”
“예? 그건 매우 소중한 것 같은데, 팔아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지.”
라나는 다크가 내미는 것을 자세히 살펴봤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무녀로 성장했기에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다크가 내미는 이 물건들이 얼마나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사실 그녀가 내미는 목걸이나 귀걸이에 붙어 있는 보석들은 아주 작았고, 전체적으로 어린 소녀에 게 어울리도록 아주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보통 금은 세공품들의 경우 붙어 있는 보석들의 덩치가 클수록 비싼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니까 라나는 이것으로 그 비싼 마법 도구를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부탁을 받았으니까 성심껏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보석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가치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걸 팔아서 마법 도구를 살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는 코린트의 수 도니까 금은방들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아마도 괜찮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리고 이 정도 길이의 짧은 단도(Dagger)도 몇 개 부탁해. 아주 가벼운 것일수록 좋아.”
“예, 한번 구해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탈출할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자연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중에 올게요.”
라나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다크는 라나의 갑작스런 탈출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열심히 궁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원래 그런 쓸데없는 것으로 시간 낭비는 되도록 사양하는 이 행동파는 머리 쓰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운동의 열기로 넘쳐 있던 그녀의 몸은 싸 늘하게 식어 있었다.
“나중에 알 수 있겠지. 설마 신을 받든다는 무녀가 거짓말을 하겠어? 샤워나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