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6화 – 탈출하는 다크

탈출하는 다크

라나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은 신녀가 내린 교령을 받들어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 낼 영웅을 찾아내어 그가 하는 일을 도와주라는 것, 그러면서 신녀는 코린트의 수도 케락스시로 가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황궁 한 귀퉁이에서 할 일 없이 지내면서 자신에게 주어 진 임무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코린트는 예로부터 엄청난 군사 대국이었다. 또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다. 코린트의 군대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있었고, 또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각 종단의 무수한 신관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종단들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떨치는 것은 아레스를 모시는 자들이었다. 아레스는 전쟁의 신으로서 코린 트의 호전적인 기호와 잘 맞았기에, 그 신관들이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라나는 이미 코린트의 최고 사령관인 로체스터 공작까지 만나서 신탁을 전했다. 하지만 그 후 뭐가 바뀌었는가?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코린트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결정하는 것에 관여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직책도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코린트의 군부는 라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가 가 지고 온 신탁을 정적(政敵) 타도에 이용했으며, 또 그런 사실이 외부에 새 나가지 않도록 슬그머니 라나를 감시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모든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라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온 뛰어난 무녀였기에, 코린트의 그러한 처사는 어떻게 보면 배신행위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고 있었다. 또, 현명한 그녀는 코린트의 수뇌부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까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 다. 바로 권력에 대한 탐욕이었다. 한 사람이나 혹은 한 국가가 오랜 세월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면, 수많은 다른 사람이나 국가가 그 자리에 올라서지 못 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라나는 제임스의 설명을 통해 로체스터 공작이 개인의 권력에 집착하는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충신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코린트의 신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조국 코린트가 초강대국의 위치를 유지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만약, 악의 세력이 번성하더라도 코린트에 득이 된다면 기꺼이 그들의 행동을 방관할 것이 분명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제임스와의 잦은 만남을 통해서 다크라는 소녀가 대단히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녀는 제임스가 매우 조심스럽게 대할 정도로 신분 또한 높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라나는 이곳에서 무작정 허송세월을 하는 것보다는 그녀의 탈출을 도와줌으로써, 새롭게 일을 시작해 보려 하고 있었다. 과연 라나의 짐작 대로 그녀가 대단한 인물이라면 탈출을 도와준 자신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녀의 도움은 앞으로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낮에 보석상점에 가서 확인된 것이 아닌가? 목걸이는 고사하고 그 조그마한 귀걸이 한 쌍만 팔아도 다크가 원하던 모든 것을 구입하고도 돈이 남을 정도로 그녀가 건네준 장신구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건넨 귀걸이 한 쌍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금은방의 주인들……. 라나는 열 곳 이 넘는 금은방들을 돌아다니며 그중에서 가장 후하게 가격을 불렀던 곳에서 귀걸이를 팔았다. 한 쌍으로 제작되어 있음이 분명했던 목걸이까지 함께 넘기면 더욱 높은 가격을 지불하겠다는 금은방 주인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은 귀걸이만 팔아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드워프가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총동원하여 만든 최고의 걸작품들을 꼭 싸구려 모조품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지니고 있다가 현금으 로 바꿔 오라고 턱 내줄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귀걸이 한 쌍만 해도 8백 골드나 하는 물건을 말이다. 그것도 목걸이와 함께 판다면 1천 골드를 주겠다 니……. 보통 용병들이 목숨 걸고 싸운 다음 얻는 한 달 수입이 10골드 정도임을 생각한다면 정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면 다크라는 저 소녀가 옛날에 만났을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저 소녀는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되었을까? 장사를 했다 하더라도 겨우 10년 만에 절대로 이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될 수는 없었다. 또 예전에 봤을 때도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검객이었는데, 무슨 수완이 있어서 장사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뭔가 권력이라든지 뭐 그런 것과 모종의 연 관을 맺고 있지 않을까? 권력만 있다면 돈은 함께 굴러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만약 그녀에게 권력이 있다면 라나에게 엄청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여신님이시여,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옵니까?”

라나는 나직한 어조로 여신의 뜻을 물었다. 물론 여신님이 자신과 같이 비천한 종에게 직접 대답을 내려 주실 것으로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고 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그냥 답답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떠든 것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라나는 한참을 더 서성이면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다크라는 소녀를 도와주는 것이 순수하게 옛날의 빚을 갚는 의미였다면 이렇게까지 갈등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나는 너무나도 머리 회전이 빨랐기에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속마음에는 그녀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쩍 들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 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그런 하찮은 잔꾀는 많이 쓰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무녀가 아닌가? 신의 뜻을 대변하는……

‘그래, 나중에 도와 달라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야. 아마 여신께서도 내가 이렇게 못된 생각을 품었던 것을 용서해 주시겠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라나는 총총히 다크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제자는 케락스에 있는 신전에 부탁해 두었고, 제임스가 마련해 준 숙소에 남아 있는 짐이라고 해 봐야 별로 소중한 것도 없었다. 또, 감시자의 눈이 번뜩이는 이때 과감하게 짐을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다크의 탈출을 돕는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였다. 여기저기에서 몬스터들이 날뛴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가 자리를 비운 것이다. 어제 제임스가 어딘가로 떠난다면서 다크의 병간호를 부탁한다고 인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다크의 감시를 총책임지고 있는 제1근위대장인 그가 떠났다면, 탈출이 한결 쉬워질 것은 분명했다.

천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라나는 다크의 숙소에 도착했다. 여태껏 그녀가 여러 번 이곳에 왔었기 때문이었는지 그녀를 제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크는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까지 라나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끝났어?”

 “예.”

라나는 살짝 다크와의 거리를 좁혔다. 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많을 것이니 대비를 해야 했다.

“이것을 끼세요.”

살며시 내미는 작은 반지, 파란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마법 도구였다.

“이것도 역시 시동어로 ‘파워업’이라고 외치면 되는 것인가?”

“잘 아시는군요.”

반지를 슬며시 손가락에 끼자 살짝 빛이 나며 반지는 스스로 주인의 손가락에 맞춰 크기를 줄였다. 모든 마법을 띤 반지는 그렇게 제작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손가 락 굵기는 매우 다양하기에 어쩔 수 없이 추가되는 사항이었다.

다크는 반지를 끼자마자 나직하게 시동어를 외쳤다.

“파워 업!”

몸속에서 반지 쪽으로 마나가 흘러 들어가는 것이 슬며시 느껴졌다. 그녀가 직접 마나를 움직이고자 했을 때는 그렇게도 안 되더니 마법 도구는 그것을 별로 어렵 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검은?”

라나는 긴 로브 자락을 슬쩍 들치며 검을 건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뭔가 경악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며 두 명의 기사가 몸을 날려 왔다. 그리고 저 뒤편에 있던 기사들은 이쪽의 기사들이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는 약간 뒤늦기는 했지만 그들도 이쪽으로 몸을 날려 왔다. 그들은 라나와 다크를 감시하던 중에 검을 건네는 것을 본 것이다.

다크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다음 검의 손잡이를 꽉 쥐자 오랜만에 느껴지는 이 푸근한 느낌.

“흐흐흣!”

몸은 최상의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전에 지하 궁전에서 탈출할 때와는 달리 검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고, 온몸에 힘이 넘치고 있었다. 절로 살기 어린 웃음 이 터져 나올 수밖에……. 다크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접근해 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라나는 황급히 다크를 뒤쫓으면서 주문을 외웠다.

“자애로우신 지혜의 여신이시여, 저 용맹한 전사를 위해 힘을 주소서!”

그리고 한순간 다크의 몸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는 듯하더니 다크는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녀로부터 축복을 받은 순간, 검의 무게가 더욱 가볍 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맹렬한 검격에 기사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과감하게 휘둘러 오는 검! 상대는 가냘픈 소녀, 그것도 마나까지 봉인된 소녀라는 생각 자체가 무색해지는 순간 이었다. 저쪽에서 네 명의 기사가 가담하기 전에 이미 두 명의 기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너는 먼저 도망 가!”

새로이 네 명이 도착하자 라나가 도우려 했지만, 다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라나 또한 미숙하지만 검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물론 호신을 위해서였다. 뛰어난 미 모를 지닌 무녀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교단에서는 무녀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데나 교단의 신성 마법들 중에서 는 공격 마법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봤을 때, 다크의 검술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옆에 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라 나는 재빨리 계획해 놨던 탈출로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네 명의 기사들과 어울려 칼질을 하고 있는 다크를 뒤에 남겨 두고 말이다.

“뭣이? 그녀가 탈출했다고?”

레티안의 보고를 받는 순간, 로체스터 공작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졌다.

“예, 전하.”

“마나도 쓸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마나가 봉쇄된 상태라면 힘을 못 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레티안은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곧 솔직하게 대답했다. 숨겨서 될 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것이… 무녀가 도왔다고 하옵니다.”

“무녀? 제임스가 데려왔던 그 아데나 신전의 무녀?”

“예, 전하. 전하도 아시다시피 신성 마법은 마나하고는 무관한 것이라서……. 그녀 혼자 힘으로 빼간다면 막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신성 마법으로 치레아 대공을 도와줬다는 데 있었다고 하옵니다. 사실 치레아 대공이 어느 정도 힘만 차린다면 웬만한 기사들로는 막기가 매우 힘들지 않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얼굴이 벌게져서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물론 신경질이 나서 그런 것이었지만, 그가 한번 내리치자 탁자는 ‘퍼억’하는 굉음을 내며 돌 맞은 개 구리마냥 너덜너덜해진 채로 쭉 뻗어 버렸다.

“이런, 제기랄!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데……. 수도 경비 사단들과 근위 기사단을 총출동시켜서라도 빨리 그녀를 잡아 와!”

펄펄 뛰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레티안은 냉정한 어조로 조언했다.

“그렇게 추격 작전을 대규모로 벌이신다면 크루마가 눈치 챌 것이옵니다.”

레티안의 지적에 로체스터 공작은 망연한 듯 중얼거렸다.

“크루마? 그렇지, 크루마가 있었지. 이런 빌어먹을! 하필이면 지금 한창 헛소문을 퍼뜨려 놓은 상태에서 탈출이라니…….”

“만약 이번 일이 연극이라는 것을 크루마가 안다면, 결코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말이옵니다.”

“이런, 젠장!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다면. 지금 당장 마법사 세 명 정도와 오너급 근위 기사 다섯 명 정도를 대기시켜라. 그리고 정찰대에 연락해서 용기사를 세 명 정도 지원받도록 해. 내가 직접 그녀를 잡아들이겠다.”

레티안은 다급하게 로체스터 공작을 말렸다. 어느 곳에 크루마의 첩자가 있을지 모른다. 이쪽이 크루마의 미네르바를 중점적으로 감시하는 만큼, 적들도 로체스터 공작을 감시하고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전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오나,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아니 되옵니다. 모두의 이목(耳目)이 전하를 바라보고 있음을 잊지 마시옵소 서.”

“그것도 그렇군.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던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는 중요한 일 때문에 이곳에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별수 없군. 좋다, 제임스를… 제임스를 불러들여라.”

“발렌시아드 각하께서는 기동 연습장에 계시옵니다. 아마도 불러들이는 데 최소한 한 시간은 필요할 것이옵니다.”

“조금 늦어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빨리 제임스를 불러들여라. 아무래도 그녀의 실력이 실력이니만큼 웬만한 기사들로는 생포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사들에게도 그 녀를 발견하면 정면충돌은 삼가고 제임스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지시해라.”

“옛, 전하.”

“헉헉헉… 젠장! 끈질긴 놈들…….

다크가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것에 비해 라나는 여태까지 열 번이 넘는 신성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거의 지친 것 같지 않았다. 보통 전장에서 신성 마법을 통하 여 병사들의 사기, 방어력, 근력, 체력 회복 따위를 담당하는 것이 신관의 몫이었고 그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다수의 병사들을 향 해서 사용하는 것이었지, 오늘처럼 단 한사람만을 향해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라나는 탈출하면서 지속적으로 신성 마법으로 그녀를 도왔음에도 거 의 지치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으세요?”

“별로 괜찮지 않아. 하지만 지난번에 탈출했을 때보다는 아주 상태가 양호한 편이야.”

일단 상대를 따돌린 직후였기에 라나는 다크의 몸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크는 두 곳 정도 상처가 있었지만, 그렇게 깊은 것은 아니었다. 하 지만 빨리 치료해야지 적들이 피의 흔적을 따라서 추격해 올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포션을 약간 바른 후 신성 마법을 동원하여 치료를 보조하자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자신의 몸에 나 있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다크는 눈앞에 있는 이 소녀가 꽤 쓸모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 봤던 그 골칫덩이에다가 짐덩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세월의 장난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다크, 아무리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이렇듯 사람이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라나는 신성 마법을 사용하느라 정신을 집중한 상태여서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기에 되물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다. 자, 다 끝났으면 빨리 가자.”

“잠깐만요, 아저씨.”

“왜?”

“이쪽으로 가면 케락스시의 외곽으로 빠집니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것보다는 빙 둘러서 케락스 시내로 되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너 돌았냐? 내가 방금 도망쳐 왔던 곳으로 왜 돌아가야 하지?”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레 대답하는 다크. 하지만 라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케락스 시내로 들어가서 숨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케락스시는 코린트 최대의 도시입니다. 인구가 무려 50만 명이 넘는 상업 도시죠. 그 수많 은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 산길로 도망치는 것보다는 좋지 않을까요?”

잠시 궁리를 해 보는 다크였다.

“상당히 괜찮은 의견이야. 그런데 어떻게 숨어들지? 아마도 여기저기에 경비병들이 쫙 깔려 있을 텐데? 그리고 어디로 가야 케락스시인지나 알고 있어?”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크는 이곳 코린트의 지리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죽자고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크라레스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전번 전쟁에서 코린트를 향해 북진해 들어갔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코린트의 남쪽에 크라레스가 있 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근처 지리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케락스시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