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11화 – 말 한마디에 얻은 미란
말 한마디에 얻은 미란
그랜딜 공작과 뭔가 쑥덕쑥덕 나지막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황태자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서는 미네르바를 보고는 사무적인 어조로 딱딱하게 말했다.
“어서 오시오, 켄타로아 공작.”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되었소?”
“예, 전하. 드래곤은, 아니 그와 함께 온 치레아 대공은 미란의 독립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미네르바의 말에 황태자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미란의 독립을?”
“예, 전하.”
“아버님이 그 땅을 획득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데, 감히 그 땅을…..”
“그래도 미란을 포기하셔야 하옵니다, 황태자 전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는 프루니아의 황궁이 파괴될 것이옵니다. 그러고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크루마를 멸망시키려고 할 것이옵니다. 물론 제가 감히 황태자 전하께 뜻을 꺾으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옵니다. 그랜딜 공작에게 물어보시면 아시겠 지만, 협상이 결렬된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이니 오해는 말아 주시옵소서.”
황태자는 핼쑥하게 질린 얼굴로 그랜딜 공작과 나직한 어조로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미란의 독립을 허가하오.”
“예, 전하. 그리고 치레아 대공은 크루마, 크라레스, 미란 3국의 영구적인 동맹 및 불가침조약을 제안했사옵니다.”
“뭐! 영구적인 동맹 및 불가침조약이라고?”
“옛, 전하. 인간들의 관점에서 영구적인 조약이라고 해도 채 10년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에인션트급에 가까운 골드 드래곤이 그 보증을 선다면 드래곤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조약은 지켜질 것이옵니다. 본국의 경우 크라레스보다 월등한 대국인 것이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드래곤의 지원을 받는다면, 단 몇 시간 만에 본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것도 사실이옵니다. 그런 만큼 두 번째 제안은 본국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하옵니다.”
또다시 그랜딜 공작과 의견을 주고받은 후,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그랜딜 공작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본 미네르바는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드래곤은 의회 의장인 그랜딜 공작과 국무대신인 얼스웨이 후작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미네르바의 말에 그랜딜 공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며 황태자는 놀라서 물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며 존경하는 두 명의 충신을 왜 드래곤이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뭣이? 아니, 드래곤이 왜 그들을 원한다는 말이오?”
“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치레아 대공과 함께 찾아온 드래곤에게 그랜딜 공작이 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사옵니다. 아마 그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올지.”
“그게 무슨 말이오, 그랜딜 공작? 드래곤에게 무슨 실례되는 행동을 했기에 경을 원한다는 말이오?”
“그, 글쎄 말이옵니다. 반도로스 후작이 조금 실례되는 언동을 한 적은 있사옵니다. 하지만 저는 대지의 여신께 맹세코, 드래곤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사 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전하!”
자신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황태자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 역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 둘을 잃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켄타로아 공작, 경이 드래곤에게 잘 말해서 딴 것으로 그의 노기를 가라앉힐 수는 없겠는가? 얘기를 들어 보니 그랜딜 공작이나 얼스웨이 후작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보석 같은 것으로 안 된다면, 그 원인 제공자인 반도로스 후작을 데려가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나? 아무런 죄도 없는 그의 상관들을 잡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미네르바도 황태자가 그 둘을 순순히 내줄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쯤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만큼 황태자를 원로원파가 꽉 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결코 조국 크루마의 미래는 밝을 수가 없었다.
엘프리안이 파괴된 후,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며 뼈저린 죄책감에 미네르바는 스스로 투옥되었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그녀가 듣고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크루마의 국력을 재정비해야 할 때, 원로원은 그들의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수많은 충신들을 투옥하거나 좌천시켰다.
그런 후 그 자리에 그들의 수하들로 채워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가 파괴되어 모든 지휘 체계가 삐걱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지휘부의 대대적인 교체는 크루마
를 거의 통제불능에 가까운 상태로까지 몰아가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 조국이 망해 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치레아 대공과 모종의 밀약을 맺은 것이었다.
“예, 알겠사옵니다, 전하.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다시 협상을 해 보겠다고 물러났던 미네르바는 잠시 후 두 명의 낯선 방문객과 함께 황태자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기른 미청년 과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붉은 머리의 청년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나온 말이라고 안 믿어지는 상스러운 소리를 다짜고짜 내뱉었다. “어떤 자식이 황태자야?”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등장에 그랜딜 공작이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붉은 머리의 미청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황태자를 발견한 듯 화가 잔뜩 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물론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오호, 바로 네놈이구나. 그래, 저 엘프 떨거지 둘 달라는데, 뭐 그렇게 군소리가 많아!”
미네르바가 슬그머니 아르티어스를 말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황태자에게 자신의 성의를 보이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뭐, 나중에는 각본대로 되겠지만.
“위대하신 분이시여, 제발 노여움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지명하신 두 명은 저희 크루마의 충신이기 때문에 저희가 이러는 것입니다. 혹시 보석이 라든지 황금, 보물 기타 뭐 이런 것…….”
그 말에 다크의 언질을 받은 아르티어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외쳤다.
“뭣이? 크루마 자체를 없애 버리려다가 아들이 말려서 가만히 놔뒀더니 이것들이 슬슬 화를 돋우고 있네? 엘프 떨거지 둘 달라는데 뭔 잔말이 그렇게 많아?” 그 말에 미네르바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슬쩍 장단을 맞췄다.
“저, 그렇다면 방금 전 무례를 범한 반도로스 후작을 데려가심은…….?
“뭐야? 몇십 년 살지도 못하는 호비트 따위 데려다가 어디에다 쓰라는 말이야? 그래도 엘프 정도는 되어야 한 5백 년쯤 잡일이라도 시키지, 안 그래? 그리고 이왕 이면 다홍치마라고 때깔도 좋아 보이잖아.”
그 말에 황태자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 그래도…….”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홱 돌려 황태자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말했다.
“오호라, 그럼 네놈이 대신 죽을 때까지 레어 청소를 하고 싶다는 거냐?”
아르티어스의 광폭한 살기에 짓눌린 듯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황태자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재빨리 말했다.
“그랜딜 공작, 크루마 황실은 그대의 충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오.”
갑작스런 황태자의 돌변에 그랜딜 공작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저, 전하, 제게 이러실 수가…….”
“전하,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와 크로데인 후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문이 활짝 열리며 로젠이 까미유와 함께 들어왔다. 그들을 보며 로체스터 공작은 다급히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옛, 아버…, 아니 용병대장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사옵니다. 실종 지점에서 계속 흔적을 따라 추격해 들어간 결과 리런드 숲에서 부상을 당한 그를 발견할 수 있었 사옵니다.”
로젠은 힐끗 주위를 둘러봤다. 그것을 눈치 챈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과 까미유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낮은 어조로 로젠에게 물었다.
“그가 부상을 입었다고? 믿기지 않는군. 누가 있어 그를 부상 입힐 수 있단 말인가?”
“예, 아버님께서는 지금 신관의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그런데 마법사가 아버님의 기억을 통해 분석해 본 결과, 믿을 수 없게도 그분과 싸운 상대가 발록이라는 것 을 알아냈습니다.”
“발록이라고? 발록이 뭔가?”
발록이라는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어리둥절한 듯 되물었지만, 같이 듣고 있던 레티안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로젠에게 물었다.
“발록이 확실하다고 했사옵니까? 대공 전하.”
로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레티안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사옵니다. 발록은 하급 마족이긴 하지만, 그 힘은 타이탄에 비교될 정도로 강력하다고 하옵 니다.”
발록의 힘을 설명하기 어려웠던 레티안은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사들인 점을 감안하여 타이탄을 예로 들었던 것이다. 레티안은 주변을 둘러본 후 발록의 위 력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확인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흑마법사가 발록과 계약을 맺었을 때라면, 그가 발록의 마법은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막강하기 그지없는 본체를 현세에 드러낼 수는 없사옵니다. 그만 큼 마계의 생명체가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만약 발록이 그런 모든 제약을 깨고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그를 직접 소환할 만큼 월등히 강한 자, 즉 마왕 정도가 세상에 강림했음을 뜻하는 것이옵니다. 옛 문헌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마왕이 강림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사옵니다.”
“이상하군. 경도 알고 있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다니 말이야. 마왕이 강림하면서 피바람을 일으켰다면, 응당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 아닌가?”
마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로체스터 공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왕이 강림하는 것은 거의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인간이 아닌 드래곤에 의해 말살되었사옵니다. 우 리들 마법사들은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잊혀진 수많은 언어로 기록된 자료들을 배우기도 하고, 누군가 드래곤을 사냥했을 때, 그 레어에서 찾아낸 문헌들을 통 해 지식을 얻기도 하옵니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월등하게 광범위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흠, 그런가? 경의 말대로라면 발록의 등장은 곧 마왕이 강림했다는 말이 되겠군. 참, 그러고 보니 전에 왔었던 그 라나라는 무녀 말일세. 치레아 대공을 탈출시 킨……..”
“아, 암흑의 기운이 세계를 뒤덮는다는 아데나 여신의 신탁을 가지고 찾아왔던 그 무녀 말씀이옵니까?”
“그래, 그 무녀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암흑의 기운이 세계를 뒤덮는다는 말이, 마왕의 강림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의 말씀대로 발록이 출현했다면 마왕의 강림이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던 로체스터 공작은 뭔가 기억이 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 그렇다면 그 신탁에서 밝혔던 영웅은 치레아 대공이라는 말인가? 사실 그 무녀도 지금 치레아 대공에게 가 있으니 말이야.”
“속단하기는 이르오나, 그럴 가능성은 아주 크옵니다. 사실 그녀가 세계 최강의 검객이라는 점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니 말이옵니다.”
레티안의 말이 계속될수록 주위의 공기는 무거워져 갔다. 모두들 침중한 얼굴로 레티안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흐음, 그런데 마왕이라는 존재가 있기나 한 것인가? 사실 나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화나 영웅담에서나 등장하는 악역이 마왕이라고 알고 있었거든. 그런 게 과 연 있을까?”
“물론 있사옵니다, 전하. 신관들은 신의 힘을 받아 신성 마법을 쓰고 있사옵니다.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신성 마법을 쓸 수 있겠사옵니까? 마찬가지 로 흑마법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사옵고, 각국에서는 흑마법사들을 발견하는 대로 처형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것도 다 마왕의 강림을 막자는 의도에서 하는 행동이옵니다.”
“그런가? 하지만 과거 영웅담을 들어보면 마왕도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던데? 사실 아무리 전설에 나오는 영웅이 강하다고 해도, 타이탄만 하겠는가?”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이번에 마왕의 수하라고 할 수 있는 발록에게 용병대장께서 부상을 당하신 것으로 보아 결코 마왕의 힘을 얕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레티안은 일부러 키에리 전하라고 하지 않고 용병대장이라고 불렀다. 사실상 코린트에서 키에리는 이미 죽은 존재이지 않은가? 하지만 로체스터는 그런 부하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에도 키에리라는 대륙 최강의 기사가 발록이라는 마물에게 당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로젠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마왕의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본국의 힘만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그녀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떨까?”
“치레아 대공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사옵니다. 하지만 전하, 아버님이 부상을 당하신 곳은 크라레스의 영토이옵니다. 그것을 보면 몬스터들의 난동도 마왕의 강림과 관계가 있 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리고 그녀 또한 크라레스의 대공이 아니옵니까? 만약 그녀가 마왕과 한통속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 말에 레티안이 옆에서 조심스러운 어조로 반박했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옵니다, 대공 전하.”
자신의 의견이 곧바로 반박되자 불쾌한 표정으로 로젠이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그녀의 양부는 드래곤이옵니다. 그리고 드래곤은 절대로 마왕과 손을 잡지 않사옵니다.”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을까? 만약 모른다면 알려 주면서 서로 간의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않겠나? 사실 지금처럼 어떤 찜찜한 일이 벌어질지 모를 격변기에는 그녀와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사실상 그녀가 그 드래곤들을 움직이니까 말이야.”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전하.”
레티안의 찬성에 힘을 얻은 로체스터 공작은 로젠에게 지시를 내렸다.
“로젠, 그대가 치레아 대공을 만나 보겠나? 서로 친분도 한번 쌓아 보고, 만약 얘기가 잘 풀리면 동맹도 맺고 말이야. 어찌 되었건 그녀에게 마왕이 강림했다는 사 실을 알린다는 좋은 명분이 있으니까 말일세. 물론 그녀와 대화할 때 드래곤이 옆에서 듣는다면, 마왕의 등장에 대해 뭔가 반응을 보이겠지.”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로젠은 난색을 표했다.
“그것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사실상 마왕이 강림했다고 해서 그녀가 과연 흥미를 보이겠습니까? 사실 저는 그녀를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남의 일에
는 매우 무관심하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화해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동맹을 제안할 수 있겠습니까?”
로젠의 말에 로체스터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일리가 있어. 나도 그게 걸리는군.”
이때 뒤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까미유가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옵니다, 로체스터 전하.”
“뭔가 좋은 생각이 있나? 말해 보게.”
“예, 미카엘 말이옵니다. 미카엘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며칠 전, 오랜만에 제임스하고 셋이 모여서 술을 마셨사옵니다. 그때 그가 자신이 치 레아 대공하고 굉장히 친하다고 자랑을 했었사옵니다.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준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기쁨과 함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그 말이 가지는 의미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정말인가?”
“예, 전하. 그날 미카엘의 얼굴이 영 엉망이었잖습니까?”
“그랬지.”
그날 미카엘의 얼굴을 떠올리자 왠지 기분이 떨떠름해지는 로체스터 공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사실은 그게 밤새도록 드래곤을 말리다가 입은 상처라고 하옵니다. 코린트를 그냥 두라는 미카엘의 부탁에 치레아 대공은 흔쾌히 승낙했지만, 원래 그 드래곤이 라는 것들이 성질이 더럽잖습니까? 그래서 조국을 위해 자신이 대신 드래곤의 화풀이 상대가 되어 줬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드래곤과 맞 서 그 정도 상처로 끝났다는 것이 말이옵니다. 어쨌든 그래서 다음 날 그들이 본국에 도착했을 때는 드래곤의 분노도 완전히 풀린 상태였고, 덕분에 잘 넘어갔다고 하더군요.”
제임스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아들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뒤에서 해내고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니……. 엉망이 되어 있 는 아들의 한심한 모습에 잠시나마 부끄럽게 생각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워지는 로체스터 공작이었다.
“허,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작에 말할 것이지…….”
후회 가득한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까미유는 존경스럽다는 듯 말했다.
“옛, 전하. 그날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사오나, 분명히 그렇게 말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물론 치레아 대공이 옆에 있었기에 죽을 염려는 없었겠지만, 밤새 드래곤에게 두들겨 맞으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말을 하면서도 공포에 질린 표정으 로 눈물을 흘리더군요. 듣고 있던 저희들마저도 가슴이 찡해졌을 정도였사옵니다.”
“오오, 아레스신께서 코린트를 도우시는군. 자네는 급히 가서 그 아이를 불러오게.”
“옛, 전하.”
미카엘이 까미유와 함께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그곳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자신의 귀환을 축하하며 밤새도록 진 탕 마셨던 제임스 형과 까미유 형, 그리고 옛날부터 왠지 대하기가 어려웠던 근엄한 표정의 로젠 형, 그리고 웬 미인 아가씨 한 명과 아버지. 그리고 해골바가지처럼 생긴 괴상한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한 명.
미카엘은 우선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다른 형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를 이채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해골바가지를 쓴 남자가 갑자기 쓱 다가서더니 미카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억?”
미카엘은 흠칫 놀랐지만, 상대는 미카엘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더니 감탄 어린 어조로 로체스터 공작에게 말했다.
“자네는 늘 입버릇처럼 아들이 순 망나니라고 하더니, 나를 속이고 있었군. 아주 수련을 잘한, 제대로 된 몸이야.”
상대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질책하는 듯 말했지만, 그 눈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는 다시 미카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동안 집을 나갔다더니 어디에서 수련을 했느냐?”
“예? 그냥 이곳저곳…….”
“그럴 리가……. 네 몸은 마스터를 거의 코앞에 두고 있는 상태다. 내가 그렇게도 혹독하게 단련시킨 로젠과 거의 비슷하다는 말이지.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느냐?”
상대의 말에 미카엘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마스터가 될 수 있다니, 미카엘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뭔가 자신에게 괴상한 술법을 걸었을 때, 온몸에 힘이 넘쳐흐르지 않았던가? 미카엘은 하늘을 날 것 같은 환희에 젖어 다크에게 감사했다.
“…..”
그 말에 놀라서 로체스터 공작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신도 처음 만났을 때, 얼핏 아들이 꽤 상당한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정도까지 발전해 있을 줄 이야.
“저, 정말인가?”
해골바가지의 사내는 자신이 농담을 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럼, 절대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물론 로젠처럼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마스터도 그렇게 불가능하 지 않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눈은 어느 덧 물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키에리의 세 아들들이 모두 엄청난 검객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그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자신의 가문 을 코린트 최고 아니, 대륙 최고라고 해도 좋을 가문으로 만든 키에리를 볼 때마다 얼마간은 질투가 담긴 눈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놈이 집을 나갔을 때,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창피했기에 한심한 놈이라고 입버릇처럼 푸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로체스터 공작이었다.
‘메를리나,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우리들의 아들 미카엘이 너무나 자랑스럽지 않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로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해골바가지 사내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허~참, 나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세 놈을 쥐 잡듯이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겨우 한 놈 건졌는데……. 정말 부러우이.”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얼굴이 벌써 눈물에 젖어 있는 줄도 모르고,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요 근래 들어 가장 자신감에 차 있는 당당한 것이었 다.
“크하하핫, 내가 저놈에게 가전(家傳)의 검술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저런데, 가르치기만 한다면 마스터가 문제겠어? 아마 곧 자네도 능가할 거야. 허허, 내 자식이지만 너무나도 믿음직스럽지 않나?”
언제나 자신을 질책하던 기억밖에 없는 아버지로부터 믿음직스럽다는 칭찬까지 들은 미카엘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또한 계속 이어지는 자상한 어조에 그 동안 쌓여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한순간 훨훨 날아가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오, 미카엘. 너, 치레아 대공하고 아주 친하다면서?”
“예, 아버님.”
“음, 역시 잘되었다. 그렇다면 너는 곧장 제임스와 치레아 공국으로 가거라.”
“예?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헤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카엘의 기분은 더욱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아버지 의 계속 이어진 말 한마디가 그의 기분을 순간 저 하늘 위에서 땅바닥으로 곧장 추락시켜 버렸다.
“가서 치레아 대공과 동맹을 맺고 오너라. 내 제임스에게 상세한 것은 다 일러 놨으니 너는 그를 조금만 도와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번 일은 사실 네가 아니면 시도할 엄두도 못 냈을 게다. 치레아 대공에게 사과하고 달래서 보낸 것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동맹을 청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잘 부탁한다.”
“예…….”
기대에 가득 찬 로체스터 공작의 시선을 받고, 미카엘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지만 마음은 별로 편하지 못했다. 헤어질 때 아르티어스의 그 흉폭했던 눈빛을 기억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한 번 작심한 것은 결단코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는 미카엘이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미카엘.”
미카엘은 아버지의 칭찬에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 아버지에게 따뜻한 눈길을 받아 봤단 말인가. 이제 그 흉폭한 드래곤에게 맞아 죽더라도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버님.”
대답을 하면서도 미카엘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휴~ 이번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할 수 없지. 갈 때까지 가 보는 거지 뭐. 그나저나 뇌물로 바치려면 무슨 포도주가 최고지? 젠장, 집 안에 있는 거 몽땅 다 털 어서 가져가 보면 알겠지.’
미카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에서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호오, 이게 죽으려고 제 발로 기어 들어왔군.”
아르티어스는 팔시온과 미디아, 가스톤이 튀어 버린 후 무척이나 심심했었다. 사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호비트들은 벌벌 떨기만 했다. 그런데 이놈들은 정신이 나갔는지 간혹 가다 개기기도 했다. 물론 아르티어스가 봤을 때는 가소롭기만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팔시온 일행이 도망간 자리가 휑하니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미카엘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오늘 밤 아들 녀석 몰래 미카엘을 어떻 게 괴롭히는 것이 좋을지 이것저것 상상하며 키득거리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이게 뭐야?”
즐거운 기분으로 밖으로 나선 아르티어스는 곧 미카엘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인상을 쓰기보다는 이상한 것을 본 듯 말했다. 미카엘의 뒤에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도주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힐끔거리다 다급히 대답했다.
“포도주입니다. 어르신 생각이 나서 저희 집 창고에 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드실는지…….”
족히 마차 석 대는 동원해야 다 옮길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분량의 포도주 상자를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다음 슬그머니 다가가서 그것들
중의 한 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흠, 뇌물로 바치기에는 그렇게 좋은 포도주라고는 볼 수 없군. 그래서 질보다는 양으로 보충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냐?”
로체스터 공작이 평상시에 마시는 것인 만큼 싸구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고급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포도주를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창고를 몽땅 털어 가져온 것입니다. 아마 찾아보시면 괜찮은 것도 있을 겁니다.”
“그래? 어디 보자. 하여간에 허접쓰레기만 있으면 알아서 해.”
아르티어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도주 상자를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을 때, 아르티엔이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 또한 포도주라면 질과 양을 따지지 않는 애주가였으니까 말이다.
“오호, 이게 다 포도주야? 요즘 들어 술 복이 터지는구나, 흐흐흐.”
아르티엔이 흐뭇한 웃음을 짓는 가운데,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포도주 상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최단 시간 내에 최상급 포도주를 찾아 꿍쳐 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전에 한번 본 것 같은 고풍스러운 병이 들어왔다.
“어엇!”
아르티어스의 놀란 듯한 신음성에 아르티엔이 괴이쩍다는 듯 의문을 던졌다.
“왜 그러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하마터면 맛도 못 보고 한 병을 깰 뻔했거든요. 헤헤헤.”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군.”
아르티어스는 자신을 경악하게 했던 그 병을 몰래 집어 들었다. 틀림없었다. 밀봉까지 확실하게 된 것으로 보아 아직 한 번도 따지 않은 진품이었다.
“단 세 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웃기고 있네. 자기가 마실 것은 이렇게 꼬불쳐 놓고 말이야. 에그그, 빨리 숨겨야지. 저 노친네가 알아채기 전에 말이야.’
‘아그립파 1세’ 한 병을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공간 이동시킨 후, 또다시 열심히 뒤졌지만 더 이상 그것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아쉬움에 입맛을 쩝 쩝 다시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미카엘은 슬그머니 다가가서 은근슬쩍 말했다.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르신?”
아르티엔 모르게 최고급 포도주 한 병을 꿍치는 데 성공한 아르티어스는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물론 마음에 들어. 확실히 교육 한 번 받더니 자네 눈치가 많이 늘었구먼. 그건 그렇고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이거 가져다주려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야.”
“예, 다크를 좀 만나 보려구요.”
“다크? 집무실에 있을 거야. 이렇게 콩알만 한 국가라도 제대로 챙겨 나가려면 잡다한 일이 많거든.”
처음 봤을 때는 영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아르티어스가 미카엘의 말 몇 마디에 저렇게까지 호탕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며 제임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 련은 뒷전이고 언제나 말썽만 부려 대던 그 철부지가 저렇게까지 듬직하게 성장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집구석에서 수련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넓은 세상에 나가서 수련을 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생각해 보는 제임스였다.
제임스와 함께 다크를 만나러 들어온 미카엘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듯 술자리에서 뻥을 좀 쳐 놨더니 이런 결 과가 나타날 줄이야. 과연 다크가 동맹을 맺어 줄지 영 자신이 없었다. 사실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국가 간의 거래가 얽히면 서로 양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 다. 미카엘이 열심히 눈치를 보는 가운데 양국의 정상은 회담을 시작했다.
제임스는 다크를 만나자 로체스터 공작에게 지시받은 대로 마왕의 강림과 현재 국제 정세를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그녀 의 모습에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그리고 가슴은 또 왜 이리 쿵쾅거리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말은 자주 끊어졌고, 어 떤 의미에서는 횡설수설에 가까운 대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다크는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시국도 어수선하니까 서로 간에 동맹을 맺자는 거 아니야?”
“예? 예, 전하.”
“그런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빙빙 돌려 가면서 하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말이야. 뭐, 좋아. 미카엘이 함께 왔는데 그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그래, 서류는 준비해 왔겠지?”
다크가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뒤쪽에 서 있던 미카엘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제임스도 미카엘의 얼굴을 봐 동맹을 맺어 준다는 다크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서류를 꺼내며 대답했다.
“예.”
서류를 쭉 훑어보던 다크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영구적인 동맹과 불가침 협정을 맺을 대상이 왜 치레아 공국이지? 이거 크라레스 제국을 치레아 공국으로 잘못 써 놓은 거 아냐?”
“아닙니다, 전하. 어쩌면 그 마왕의 강림과 크라레스 제국이 어떤 연관성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정보부의 분석이…….”
“헛소리하고 있네. 이건 내 발을 묶어 놓고 크라레스를 박살 내겠다는 음모가 깔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크라레스를 본국으로 생각하시는 한, 결단코 그들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전하께서 그쪽을 적으로 생각하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흠, 그래? 좋아, 그렇다면 그 문구도 집어넣어서 서류를 다시 만들어.”
“예.”
제임스가 화려한 필치로 다시금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가운데, 다크는 미카엘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아빠 품이 좋긴 좋은 모양이지? 며칠 새 살이 피둥피둥 쪘는걸.”
그 말에 미카엘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서 외쳤다.
“뭐야, 새꺄. 겨우 며칠 사이에 무슨 군살이 붙었다고 헛소리야.”
“아냐, 아니야. 왠지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아.”
“하긴 너하고 그 누군가를 며칠 안 봤더니 입맛이 도는 게 살맛이 나더구먼.” 둘의 대화에 제임스가 기겁을 해서는 다급하게 미카엘에게 외쳤다.
“자네, 치레아 대공 전하께 그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제임스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소리치자 다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뭐 옛날부터 친했는데, 현재의 신분이 대수인가?”
“그럼그럼, 너 처음에 봤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었는데도 지금은 엄청 출세했잖아. 이것도 다 우리들이 자상하게 옆에서 보살펴줬기 때문이 아니겠어? 하 하핫.”
히히덕거리며 둘이 계속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제임스는 부럽기 그지없었다. 지고한 신분을 지닌 그녀에게 어떻게 저렇듯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단 말인 가? 자신은 말 한마디를 건네려고 해도 가슴이 울렁울렁, 말까지 더듬더듬 나오는데 말이다. 모든 회담이 성공적으로 성사된 후, 제임스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말했 다.
“대공 전하의 호쾌한 결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라나라는 그 수녀님을 좀 만나 뵙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뭐, 상관없어. 내가 부하에게 지시해 놓을 테니까 만나고 가라구.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미카엘을 통해서 연락하게. 그는 앞으로도 영원한 나의 친구니 까 말이야.”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미카엘이 지급받은 타이탄은 반납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레아 기사단을 탈퇴할 때 타이탄을 반납했어야 하는데, 조 치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럼 그것을 누구에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카르토 백작에게 말해 놓을 테니, 그를 따라가면 될 거야.”
“예, 전하.”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서려는 제임스를 다크가 불러 세웠다.
“참, 잠깐만.”
“예? 왜 그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본국에 박아 놓은 쥐새끼들 있지?”
다크의 말에 제임스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쥐새끼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난처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빤히 올 려다보며 다크는 매몰차게 말했다.
“없다고는 하지 마. 여태까지의 정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확실해. 자네는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저… 그게……”
“그리고 그놈들 중에는 나하고 아주 가까운 놈도 하나 있을 거야. 나는 그놈이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조용히 데려가게. 이젠 더 이상 배신의 쓴맛을 보 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예, 옛, 전하.”
당황한 듯한 제임스를 보며 다크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놈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어. 다만 부하 놈의 배신을 확인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만약 자네가 떠난 후에도 그 녀석이 남아 있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더불어서 그런 더러운 짓거리를 시킨 코린트까지도 말이야.”
“옛, 전하.”
“안녕하셨습니까, 수녀님.”
제임스가 다가오자 수녀는 조금 찔끔했지만, 그래도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예, 제임스 님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전에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한 행동으로 인해 제임스 님께 누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뭐, 상관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수녀님을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왕의 등장 때문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트릴 정도로 놀랐다.
“예? 마왕의 등장이라니요?”
“예, 얼마 전에 코린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뛰어난 기사가 부하들을 이끌고 마왕의 부하인 발록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마법사들의 의견으로는 발록이 본체를 드러낼 때는 마왕이 등장했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마왕 외에는 인간의 힘으로 그 마신의 본체까지 소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답니다.
어쨌든 그가 거느린 부대가 발록 한 마리 때문에 거의 전멸당했을 정도로, 발록은 마왕의 부하라고 하지만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도 그가 부상을 당했지만 사력을 다해서 가까스로 탈출했기에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정보였지요. 그래서 아무래도 예전에 수녀님이 가져오신 그 신탁의 검 은 세력은 마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어 수녀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제임스는 일부러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마왕의 정보를 라나에게 아주 자세하게 말했다. 다크가 마왕의 등장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녀의 주위 에 있는 이 수녀를 통해 이 사실이 전달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쨌든 이 수녀는 다크가 코린트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준 은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그렇다면 저도 어서 코린트로 가 봐야겠군요. 저는 신탁에 따라서 영웅을 도와야 할 사명을 띠고 있으니까요.”
“아니, 수녀님은 이곳에 계셨으면 합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탁은 케락스로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이곳까지 흘러왔지만, 코린트가 마왕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를 상대 할 준비를 한다면 저는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임스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수녀님이 도와야 할 곳은 코린트가 아닙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녀님은 지금 세계 최강의 국가가 어디라고 보십니까? 코린트, 크루마, 아르곤, 알카사스 등등 모두 다 강력한 제국이라고 하지만 지금 수녀님이 계신 치레아 공 국만큼 막강한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제 말은 사실입니다. 치레아 대공은 세계 최강이라고 인정받는 검객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이 그 정도였나요?”
“모르고 계셨었나요? 그리고 치레아 대공을 따라다니는 두 분은 에인션트급에 이르는 골드 드래곤들입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수녀를 보며 제임스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신탁이 영웅을 예고한다면, 치레아 대공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수녀님은 여기서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저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