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13화 – 성질 더러운 아르티어스

성질 더러운 아르티어스

“아웅, 며칠 침대에서 뒹굴었더니 온몸이 다 찌뿌둥하네.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없나? 이거 심심해서 죽겠네.”

한껏 기지개를 켠 후 다크가 심심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힘줄이 뻗쳤다. 모든 일을 애비에게 떠넘기고 저런 소리가 나올 수가 있는 거야?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놈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곧이어 아르티어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음을 고쳐먹고 은근한 목소 리로 아들놈에게 말을 건넸다.

“음, 이럴 때는 여행이 최고지. 한적한 산길을 걸으며 머리도 식히고, 또 알아! 순진하고 예쁜 엘프라도 나타나면 꼬시는 재미도 쏠쏠하잖아. 그래, 간혹 겁대가리 를 상실한 오크라도 뛰어나오면 맛있는 별식을 즐길 수도 있고, 허 그러고 보니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군.”

아르티어스의 은근한 부추김에 잠시 생각해 보던 다크는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맞아, 예전에 언제 한번 붙어 보자고 약속한 엘프가 있었지. 그래, 그 녀석에게 놀러 가면 되겠네.”

다크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아르티어스는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 오랜만에 너와 오붓하게 여행을 가면 좋을 텐데,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정말 안타깝구나.”

다크가 여행을 떠나면 즉시 모든 일을 호비트들에게 떠맡기고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싶은 아르티어스였다.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뭐.”

그때였다. 뭔가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무실 한쪽 구석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더미에 파묻혀 머리만 보 이던 카르토 백작이었기에 다크와 아르티어스는 잠시 그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황급히 일어섰는지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큰 소리 를 낸 것이다. 그는 일어서자마자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함께 가십시오, 어르신. 모든 일은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다크는 급하게 말을 내뱉는 카르토 백작의 얼굴을 기묘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봤다. 한 며칠 그를 못 봤기에 얼굴이 온통 퉁퉁 붓고, 푸르죽죽한 멍으로 물들어 있 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쟤 얼굴이 왜 저래요? 아빠가 그랬어요?”

싸늘한 다크의 시선에 아르티어스는 당황해서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러니까… 애들이 게으름을 피우기에 조금 교육을 시켰을 뿐인데……?

“내가 나 모르게 아무도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욧!”

다크의 눈초리가 높게 올라가며 사나운 눈빛을 보이자 아르티어스는 당황하면서도 열심히 변명했다.

“그,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그 약속을 하기 전에 한 거였거든. 사실 너도 생각해 봐라. 열심히 두들겨 패고 치료 마법으로 증거 인멸을 할 수 있는데도 내가 왜 그 냥 놔뒀겠냐? 이것은 너하고 한 약속 이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죠. 하지만 제발 적당히 하세요. 아빠가 마음먹고 패면 최소 사망이라구요. 그건 그렇고, 카르토 백작. 아빠와 함께 가라고?”

다크의 질문에 카르토 백작은 힘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아르티어스가 제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를 신에게 갈구할 만큼 간절하기만 했다.

“옛, 전하. 두 분께서 오붓하게 여행을 다녀오십시오. 모든 것은 제가 책임을 지고 확실하게 처리해 두겠사옵니다.”

“그래? 그럼 잘됐네. 아빠도 함께 가죠.”

“그, 그래? 오랜만에 함께 가자꾸나.”

아르티어스는 당황해서 말했다. 잠시 동안이라도 여유로운 휴식을 만끽하려던 그의 모든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카르토 백작을 향 해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때, 아르티엔이 대낮부터 무슨 포도주를 그렇게나 많이 마셨는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뭐, 여행을 간다고?”

아르티어스는 황당하다는 듯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니, 여행 간다는 말이 언제 나왔는데, 벌써 오십니까?”

“하하, 전에 네 녀석이 나를 떼놓고 놀러갔잖냐.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 뒀지. 그래, 어디로 갈 건데?”

다크가 말하는 엘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아르티어스는 대충 얼버무리며 다크에게 떠넘겨 버렸다.

“그, 그… 그러니까 얘야, 네가 말씀드려라.”

“카렐이라는 엘프한테 놀러갈 건데요.”

아르티엔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카렐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카렐이라……. 혹시 그 키아드리아스하고 함께 사는 별종 엘프 말이냐?”

“예.”

다크와 아르티엔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안색이 더욱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가기 싫은 여행을 따라가야 하는 데다가, 아버지까지 같이 간다는 것이 영 불만이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사이가 좋지 못한 키아드리아스의 집을 방문해야 한다니…….

“일단 준비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다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준비할 거나 있나요. 아빠가 옆에 있을 건데…….”

“그, 그래도 한 며칠 신세지려면 이것저것 좀 챙겨야 할 것도 있을 테고, 뭐 그렇잖냐?”

황급히 얼버무리듯 대답하는 아르티어스의 말에 그런 대로 수긍을 하던 다크는 세린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그러죠, 뭐. 세린한테 준비하라고 이를게요.”

다크가 나가고 난 후 아르티어스는 카르토 백작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너 이 자식. 빨리 이쪽으로 튀어 와!”

“예? 왜, 왜 그러십니까?”

“내가 하는 일에 끝까지 방해를 해? 넌 이제 죽었다.”

아르티어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탈탈 털며 밖으로 나오다가 기겁을 했다. 문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크와 수녀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 던 것이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는 뭔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즉시 방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서 카르토 백작을 불렀다.

“야! 야, 이 자식아. 빨리 튀어 와.”

아르티어스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카르토 백작은 사력을 다해 엉금엉금 일어서며 겨우 입을 벌려 대답했다.

“에?? 예. 에 그어시니가? 어으시.(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빨리 안 와?”

아르티어스가 으르렁거리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거의 실신 지경이었던 카르토 백작이 좀비가 마법으로 움직이듯 비틀거리며 아르티어스에게 필사적으로 걸어 갔던 것이다. 카르토 백작의 육신은 이미 한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을 자극해 힘겹지만 그의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이 다. 아르티어스는 카르토 백작의 멱살을 틀어잡아 쓰러지려는 그를 바로 세운 후, 치료 주문을 사용하며 투덜거렸다.

“젠장, 내가 호비트의 멍 자국 따위를 없애려고 힘들게 마법을 배웠나.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지?”

이때 아르티어스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부르르르 진동했다. 아르티어스는 신경질 난다는 듯 멱살을 잡고 있던 카르토 백작을 놔버렸다. 카르토 백작은 거의 반쯤 실신해 있는지 아르티어스가 손을 놓자마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겉에 보이는 멍 자국은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속으로 든 골병은 하나도 치료가 안 되었던 것 이다.

아르티어스는 보석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를 쓱 꺼내 들었다.

“이상하네. 레어에 누가 침입한 줄 알았더니 누가 통신을 보내는 거지?”

슬며시 주문을 외우자 곧이어 목걸이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 위로 금발을 길게 기른 근육질의 사내가 등장했다.

“여어, 내 친구여. 오랜만이야.”

반갑게 인사하는 상대에게 아르티어스는 버럭 화부터 냈다.

“뭐야, 새꺄? 친구 좋아하고 있네.”

“에이, 너무 화내지 말라구.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사귄 사이야? 무려 수천 년을 함께한, 형제보다도 더욱 끈끈하게 맺어진 우정이 아닌가?” 

느물거리는 듯한 브로마네스의 말투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아르티어스였다.

“우정 좋아하고 있네. 그런 놈이 나를 아버지한테 팔아넘겨? 아버지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자네 마음은 십분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자 고 나까지 걸고 넘어져? 그러고도 이제 와서 친구와 우정을 찾냐?”

“에이,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잖아. 그건 그렇고 어르신은 어때?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던?”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머리꼭지가 확 도는 것을 느꼈다.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원래부터 그 반은 자기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선심 쓰듯 선물로 써먹는 것도 모자라서 효도가 어떻고, 불효자가 어떻고 주절거려 괜히 아버지의 눈총을 받지 않았던가. 아르티어스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참다가 선물이라는 말에 뭔 가 생각났다는 듯 브로마네스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너 빨리 튀어 오래.”

아르티어스의 말에 브로마네스는 흠칫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왜? 에이~ 너 농담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하지만 농담이라도 섬뜩하다, 야.”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정색을 하고는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농담 좋아하고 있네. 너 그 포도주 시음이라도 하고 아버지한테 드린 거냐?”

“뭐? 내가 먹던 걸 어떻게 어르신에게 선물을 해. 왜? 선물에 무슨 문제가 있었냐?”

“야,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상한 걸 선물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브로마네스는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랐다.

“뭐? 상했다고?”

“그래, 밀봉이 좀 부족했는지 한 모금 드시더니 바로 뱉어 내며 불같이 화를 내시는데, 애꿎은 나만 왕창 깨졌잖아.”

“그, 그래? 이거 큰일 났구나. 어, 어쩌지? 큰일 났네.”

허둥거리며 당황해하는 브로마네스를 보면서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행여 어디로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너,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지? 대륙 끝까지 도망쳐 봐라, 못 찾아내시는지. 그리고 도망치다가 붙잡히면 아예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걸!”

“그러니까 내가 사정하잖아. 어떻게 하지? 어쩌면 좋을까?”

역시 물에 빠져서 정신이 없으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드는 것은 당연한 심리였다. 그것을 느긋하게 즐기며 아르티어스는 아주 묵직한 쇳덩어리를 던져 줬다. 아예 이것을 잡고 그대로 침몰해 버리라고 간구하며.

“어쩌긴 뭘 어째. 아버지 명령대로 해야지. 노여워하시며 그러시던데, 아버지가 가실 때까지 내 레어에 꿇어앉아서 두 손 들고 있으래.”

“뭐? 그럼, 언제 오시는데?”

“몰라, 임마. 나도 지금까지 깨지다가 아버지가 뭔가 볼일이 있으시다고 어디 가셨어. 그 덕분에 지금 겨우 쉬고 있는 거 안 보여? 아마 나중에 레어에 가셨을 때 너 없으면 죽이려고 드실걸.”

그 말을 들은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봤다. 혹시나 자기를 놀린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다크에게 매일 혹사당하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깔끔하던 그가 눈곱까지 끼어 있는 데다가, 왠지 수척해 보이기까지 하지 않는가? 브로마네스는 그것이 다 아르티엔에게 들볶여서 생긴 흔적인 줄로 착각하고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야, 임마! 나 지금 바빠. 언제 아버지가 오실지 모른단 말이야. 이만 끊자구.”

그 말에 브로마네스는 모든 것을 체념했는지, 풀이 죽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리, 다음에 살아서 만날 수 있는 거지?”

브로마네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던 아르티어스는 도저히 웃음을 참아 낼 수 없을 것 같자 재빨리 통신을 끊었다. 그런 다음 아르티어스는 수백 년 묵은 체증이 쫙 내려간 듯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이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군. 짜식, 거기서 수백 년을 기다려 봐라. 아버지가 가시는지…….”

아르티어스는 이번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는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면서 문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라나와 다크는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너무 불안해요. 아저씨도 느끼실 거예요. 며칠 전부터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이 소용돌이치잖아요. 밤에도 몇 번씩이나 악몽을 꾸다가 깬다구요. 그러니까..”

“아, 짜증나게 계속 그러네. 마왕이니 뭐니 그런 거는 없다니까.”

“그렇게도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이건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설명했잖아. 저 이상한 기운은 뭔가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 이상은 국가 비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어. 그리고 내가 너한테 꼭 알려 줄 이유도 없고 말이야.”

완강한 다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라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동안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이제야 신탁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아요. 저도 여행에 함께 데려가 주세요.”

“그것도 안 돼. 그냥 떠나는 여행이라면 몰라도 나는 키아드리아스라는 드래곤의 둥지에 갈 거야. 거기에 너를 데리고 갈 이유가 없잖아.”

“그래도…….”

“자자, 며칠 내로 돌아올 거야.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기다리라구.”

거칠게 말을 내뱉은 다크는 더 이상의 대화는 짜증난다는 듯 서둘러서 걸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