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16화 – 신탁의 영웅은 누구?

신탁의 영웅은 누구?

아직도 여름의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태양이 맑게 갠 하늘 위에서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겨울의 영향 때문인지 한낮인데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꽃잎들을 흔들고 있었다. 거대한 정원에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화 려하면서도 포근한 평화로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여인은 그런 대지의 축복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기 고 있었다. 그녀는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이 벌써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데나 여신님, 저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나는 그 커다란 갈색 눈망울로 잠시 드높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으며 다시금 시선을 정원으로 옮겼다. 수많은 화초들이 가을을 맞 이하여 저마다 자신만의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들의 아름다움이 눈길에서만 머물 뿐, 가슴속까지 와 닿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저씨가 싫다고 했어도 따라갔어야 했어. 그래야…….”

그때, 그녀의 눈에 뭔가 휙 하고 건물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기사? 아니야. 기사가 마음먹고 움직인 거라면, 나라도 알아 챌 수 없을 정도로 빨랐을 거야. 그렇다면?”

라나는 재빨리 몸을 놀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엔 대공 관저를 호위하기 위한 약간의 병사들만 남아 있을 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대공 직속에 2개 사단이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가 다 아르곤 국경이나 말토리오 산맥 쪽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제2친위 기사단이 머물러 있었지 만, 그들도 모두 전선으로 이동해 버렸기에 텅 비다시피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사람과 싸우는 것에 대한 교육을 정식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보통 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곧장 그 침입자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던 것이다. ‘첩자인가? 아니면 마법사??

그녀가 정체불명의 인물을 향해 쏜살같이 거리를 좁히고 있을 때, 상대는 살그머니 대공의 침실과 집무실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원하는 뭔가를 발견할 수 없었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뭔가 궁리를 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그 사내와 돌진하고 있던 라나의 시선이 뒤엉켰다. 정체불명의 인물은 멈칫하더니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 마법이라도 쓰는 것인지, 상 당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무녀로서 근육 강화의 신성 마법을 쓰고 있었기에 쫓아가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서라!”

하지만 도망치는 놈이 서라고 한다고 서겠는가? 상대는 뒤를 힐끗거리며 열심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쫓고 쫓기는 추격이 시작되었다. 라나는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지만, 괴한과의 거리를 조금도 좁힐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괴한은 대공 관저에서 한참을 벗어나 숲에 이르자 드디어 라나에게 공격 마법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한은 라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지 처음부터 그녀를 목표로 하지 않고, 그 주변에 마법을 직격시켜 그녀로 하여금 포기하고 돌아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꽝.

주위에서 불꽃이 작열하며 굉음을 울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 물고 악착같이 상대를 쫓아갔다. 한참을 더 달리자 도망치는 상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 도 괴한은 공격 마법과 속도 증가의 마법을 한꺼번에 쓰는 것이 힘에 겨운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 힘을 얻은 라나는 더욱 용기를 얻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기 섯!”

이때 괴한은 다시 한 번 라나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라나의 주위를 향한 위협 공격 정도가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는 나무를 향해서였다. 아름드리나무 의 밑동이 박살 나면서 맹렬한 기세로 쓰러졌다. 그것도 괴한이 어떤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라나와 그 괴한의 사이로 쓰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무는 바로 지척에서 쓰러져 내리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옆으로 돌아간다면 괴한을 놓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나무의 위쪽으로 뛰어오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완전히 나무가 주저앉은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무 높았다. 또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금 지금의 속도로 달릴 수도 없었다. 라나는 이를 악 물고 더 욱더 힘껏 달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괴한을 추격하려면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그 밑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쿵!

“꺄아악!”

굉장한 소리와 함께 라나의 비명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간발의 차이로 나무 밑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라나가 나무에 깔려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괴한 은 속도를 멈추고 섰다가 이쪽으로 몇 발자국 다가오는 듯하더니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곧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발길을 되돌렸다.

“젠장, 젠장, 제엔장!”

괴한은 라나에게 다가와서 마법을 사용해서 굵은 가지들을 잘라 내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소?”

라나는 상대가 아주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나무에 깔린 것을 보고 도망치지 않고 돌아와서 도와주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 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망설인 것으로 보아 도망쳐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 덕분에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나는 잠시 상대를 관찰한 후 말을 이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는 사내의 얼굴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라나는 더욱 아리송함을 느꼈다. 그녀가 국가의 일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법사를 첩자로 부려먹지는 않는다는 상식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생해서 키운 마법사를 첩자나 정탐꾼 정도 로 소모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노릇인 것이다.

“무슨 일로 대공 관저를 정탐하시는 것입니까?”

라나가 상대를 자세히 관찰한 것처럼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라나가 신성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잠시 노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렇소. 말이 나온 김에 물어봅시다. 대공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 것이오?”

“전하께서는 지금 여행을 가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소, 휴~~.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겨우겨우 이곳까지 왔건만.

“대공 전하를 뵙기 위해 오셨다면 응당 정문의 경비병들에게 면회를 신청하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숨어서 안을 살피신 거지요?”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마도 그대가 무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을 죽였을지도 모르오.”

“예?”

“나는 마왕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치레아 대공 전하를 찾아왔소. 지금 크라레스 내부에는 마왕의 뿌리가 너무 깊게 내려있는 상황이라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도저 히 알 수 없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왜 저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상대는 손가락으로 희뿌연 빛을 발하고 있는 라나의 손을 가리켰다.

“신성 마법 때문이오. 마왕을 따르는 자라면 절대로 신성 마법을 쓸 수 없을 테니까 말이오.”

“아, 그렇군요.”

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후, 상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당신을 믿지요?”

그 말에 상대는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믿건, 그렇지 않건 그건 당신 자유요. 왜냐하면 나는 이제 떠날 거니까 말이오. 그럼, 잘 있으시오.”

상대가 미련 없이 돌아서서 걸어가자라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마왕의 존재에 대해서 아시게 된 거죠? 얼마 전에 코린트의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님도 대공님께 마왕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러 오셨어요.” 그녀의 말이 상대의 흥미를 끈 것은 확실했다. 상대는 다시금 되돌아와서 당혹감을 감추며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이 정말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나중에 카르토 백작님께 들으니까 코린트와 치레아 공국 사이에 동맹 및 불가침 협정이 맺어졌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약간 놀란 사내는 잠시 후 뭔가 깨달았다는 듯 되물었다.

“분명히 크라레스 제국이 아니라 치레아 공국과의 동맹이오?”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허 참, 그렇다면 그분께서도 크라레스를 의심하시는 것이 분명하군. 무녀님도 오래 살고 싶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코린트나 뭐 그런 딴 나라로 가시란 말이 오. 지금 마왕이 그 힘을 키우고 있는 곳은 크라레스의 수도인 크라레인시요. 마왕의 꼭두각시가 된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이 땅에 서 벗어나는 것이 좋을 거요.”

“분명히 크라레스라고 하셨습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나는 뭔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크는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아데나 여신의 뜻인지, 자신은 이곳에 남아서 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신탁에 의하면 그녀는 영웅을 도와야 할 사명을 지닌 자. 그렇다면 어쩌면… 이 남자와 다크를 만나게 하는 것도 그 사 명의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진짜 다크가 영웅임이 확실하다면 마왕의 세력권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힘을 기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왕 의 토벌을 위해서..

“지금 대공 전하께서는 키아드리아스라는 드래곤을 찾아가셨습니다. 아마 지금 그의 레어에 계시겠죠.”

“키아드리아스라……. 꽤 유명한 블루 드래곤을 찾아가셨군요. 참, 그런데 아르티어스 님도 함께 가셨습니까?”

상대가 아르티어스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자 라나는 더욱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예, 지금 바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분께 빨리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예. 그럼 이만…….”

상대가 인사만 하고는 떠나려고 하자, 라나는 다급한 어조로 사정했다.

“이보세요.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예? 하지만…….”

“저는 아데나 여신님을 섬기는 무녀인 라나 슈바이텐베르크 수녀라고 합니다.”

“아, 예. 저는 다론 패터슨이라고 합니다. 그냥 다론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모두들 그렇게 부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