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2화 – 코린트에 감도는 전운

코린트에 감도는 전운

드넓은 초원과 야트막한 산으로 이뤄져 있는 아름다운 프루니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달리며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오랜 옛날에는 사냥 대회라는 행사 자체 가 각자의 기마술과 궁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기회였고, 국가가 지닌 세력을 타국에 과시할 수 있는 무대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감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군사 훈련의 목적까지 띠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검술이 발전함에 따라 기사들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또 그들에게 타이탄이라는 마법 병기가 주어진 후 부터 사냥 대회의 성격은 많이 변질되었다. 군사 훈련의 목적보다는 귀족들의 친목 도모의 장소로 바뀐 것이다.

크루마의 황실 사냥터에서 벌어진 이번 사냥 대회도 여태껏 있어 왔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 간의 친목 도모는 물론이고 미란을 흡수 통합한 후 더욱 강대해진 국력을 대외적으로 과시라도 하는 듯, 크루마의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여 크루마 제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다. 경호의 임무보다는 귀족들이 사냥 감들을 비교적 사냥하기 쉽도록 몰아주는 임무를 더욱 중시하게 된 1개 사단급의 병사들이 폭넓게 포진하여 귀족들을 향해 사냥감들을 몰아주면서 사냥 대회는 시 작되었다.

잡털 하나 없는 흰 말을 타고서 사냥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바로 그가 현재 크루마의 63대 황제인 알카파이네 드 크루마였다. 한 귀족 젊은이가 한껏 폼을 잡고서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자, 화살은 사슴의 엉덩이 부근에 명중했다. 상처 입은 사슴은 길게 울부짖으며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 을 보며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황제 또한 사냥을 즐겼기에 젊은이의 미숙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의 뒤에 서 있던 늙은 기사가 황제의 마음을 짐작하고서 나직하게 말했다.

“이렇게 구경만 하실 것이 아니라 폐하께옵서도 사냥에 참가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황제는 자신도 참가할까하는 마음이 솟구쳤지만, 곧이어 그 욕구를 너털웃음으로 억눌렀다.

“허허헛, 아닐세. 짐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아. 뒤늦게 끼어들어 봐야 괜스레 욕만 듣게 된다는 것을 짐이 모를 줄 아는가? 모두들 짐이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각별히 배려할 것이고, 또 짐보다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하지 않도록 모두들 조심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여는 대규모 사냥 대회인데, 괜히 모 두의 흥을 깰 이유가 없지.”

바로 이때, 마법사 한 명이 뒤쪽에 마련되어 있는 임시 마법진으로 공간 이동해 왔다. 그는 초조한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이어 그는 찾으려던 사 람을 발견했는지 황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사람은 황제의 뒤편에 서 있었기에 마법 따위를 사용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접근하려고 들 었다가는 황제의 뒤편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암살자로 간주되어 즉각 목이 달아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추어라.”

곧이어 기사 한 명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마법사는 황급히 기사의 명령에 따라 멈춰서며 말했다.

“엘프리안에서 온 긴급 전문입니다. 국무대신 각하를 긴급히 뵙기를 청합니다.”

“가 보시오.”

그곳은 황제로부터 1백 걸음도 채 되지 않은 위치였기에 마법사는 국무대신 얼스웨이 후작을 향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방금 전의 그 기사가 검을 뽑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두 걸음 뒤에서 뒤따르기 시작했다. 얼스웨이 후작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황제가 바로 근처에 있었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취해지는 조치였다.

마법사는 얼스웨이 후작의 앞에 이르자 예법에 따라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이냐?”

“엘프리안에서 도착한 긴급 전문입니다, 각하.”

마법사는 자신의 품속에 넣어 온 전문을 아주 천천히 꺼내어 건넸다. 황제 근처에서 품속에 넣었던 손을 급히 뽑기라도 한다면, 뒤에 서 있는 기사는 그 행위를 단 도 같은 흉기를 던질 준비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즉시 목이 날아가 버릴 우려가 있는 것이다. 국무대신인 지크니아 엘 얼스웨이 후작은 그것을 받아서 읽기 시작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에 찬 표정으로 변했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얼스웨이 후작은 황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 후 땅바닥에 엎드리며 통렬한 어 조로 외쳤다.

“폐하, 큰일이 벌어졌사옵니다.”

황제는 마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근엄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얼스웨이 경.”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긴급 보고이옵니다.”

황제는 그다지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듯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고?”

“예, 폐하. 갑자기 골드 드래곤이 나타나서 엘프리안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하옵니다.”

황제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황실의 주요 인물들이 이곳에 다 와 있다고 하지만, 수도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미네르바가 기사단을 이끌고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켄타로아 경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이유 없이 엘프리안을 파괴할 리는 없을 텐데…….?”

“어쨌건 사실인 듯하옵니다. 그러니 빨리 궁으로 귀환하시어 전체적인 피해의 정도를 파악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인 듯하옵니다.”

“허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어쨌든 돌아가세.”

“그렇다면 사냥을 중지시킬까요?”

“아니, 놔두게나. 괜히 저들의 흥을 깰 이유는 없지. 또 사냥 대회를 중지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옛, 폐하.”

일단 여름 궁전으로 돌아간 황제는 모든 보고를 종합하여 정확한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황제는 엘프리안이 파괴된 것이 사실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크루마의 수뇌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법사는 엘프리안으로부터 전송된 영상을 마법으로 보여 줬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브레스 한 방에 엘 프리안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것을 보며 사방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황제는 그것을 본 순간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평생을 가꿔 왔 던 수도가 하루아침에 가루가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그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황제가 쓰러지고 나자 국무대신 얼스웨이 후작은 급히 의회 의장인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에게 그것을 보고했다. 후속 조치를 독단으로 처리하기에는 사안이 너 무 컸기 때문이다. 그린레이크 공작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그랜딜 공작은 그를 대신해서 원로원을 소집함과 동시에 황태자를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스웨이 후작이 주치의의 소견에 따르면 황제의 건강 상태가 매우 위독하다는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황제를 배알했다. 황제와 그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 자마자 긴급히 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군의 총사령관인 로체스터 공작이 평상시에 소집하는 것은 기사단의 수뇌부나 각 군의 사단장급 들인 데 반해, 이번에 소집한 사람들은 모두 다 내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이라는 점이 달랐다.

“내가 경들을 소집한 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 발생했기 때문이오.”

갑자기 로체스터 공작이 그들을 회의에 불러내어 국가의 존망이 걸렸다는 둥 뜬금없는 말로 서두를 장식하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후 말했다.

“일단 본국에 어떤 위험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보부장인 베르딘 후작의 보고부터 들어 본 후에 회의를 시작하기로 하겠소.”

지명을 받은 베르딘 후작은 인사를 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치레아 공국의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베르딘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잠시 생각할 여유를 준 후 말을 이었다.

“일의 발단은 그녀의 실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제2차 제국 전쟁 당시 본국의 최대 숙적인 그녀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 고, 자칫 전쟁 패배라는 한계 상황에까지 치달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크라레스 전력의 핵인 그녀가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갑자기 실종되었기 때문에 본국은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실종됨에 따라 엄청난 존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정보부에서 치밀하게 조사한 결과, 그녀 는 골드 드래곤과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그 판단에 가장 큰 단서를 제공한 것이 크루마 제국의 수도 엘프리안의 파괴였습 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국무대신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던졌다.

“엘프리안의 소멸에 대해서는 나도 겨우 한 시간 전에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과 그녀가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예, 정보부에서 각 채널을 동원, 철저히 정보를 분석해 본 결과 치레아 대공이 실종될 당시 마지막 흔적이 크루마의 엘프리안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이지요. 골드 드래곤은 그녀의 실종에 크루마가 관계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드래곤의 분노가 풀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는 한 드래곤의 파괴 행각은 계속될 게 분명하다는 것이 정보부의 분석 입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의 요점이 뭔가? 다음 대상이 본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예, 그렇사옵니다, 국무대신 전하. 그녀가 실종될 때까지 크라레스의 가장 강력한 적국은 우리 코린트였습니다. 그런 만큼 드래곤으로서는 그녀가 실종된 것에 대해서 본국에 혐의를 둘 가능성이 지대하지 않겠습니까?”

국무대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골드 드래곤이 그녀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다음 파괴 대상으로 케락스를 선택할 가능성이 짙다는 말이군.”

“예, 그렇사옵니다, 국무대신 전하. 그런데 문제는 골드 드래곤이 본국에 언제 올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케락스 상공에 그 모 습을 드러낼 가능성까지도 있사옵니다.”

베르딘 후작의 말이 끝나자 로체스터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경들을 긴급히 소집한 것이오. 이미 폐하의 윤허는 떨어졌소. 국무대신은 최우선 순위에 따라 황족 및 주요 시설을 긴급히 시외로 대피시키도록 하시오.”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로체스터 공작. 아무리 긴급 사항이라고 해도 확인되지도 않은 정보를 믿고 대피 작업을 진행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그 많은 시설 및 재화들을 어떻게 단시일 내에 시외로 대피시킨다는 말입니까?”

국무대신이 곤란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화가 나서 외쳤다.

“그렇기에 폐하의 칙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당장 철수 작업을 시작하란 말이다. 수도방위사령부에는 내가 이미 명령을 내려 놨으니까 원하는 만큼 병력 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타이탄 생산 시설을 몽땅 다 시외로 옮기도록 해라.”

“하지만 그렇게 대대적으로 밤중에 인원을 동원한다면 시민들이 눈치 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청난 혼란이……..

“닥쳐라. 그런 것도 내가 생각하지 않은 줄 아는가? 하지만 지금의 비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시민들의 혼란은 감수해야 한다. 전에 코린티아시가 파괴되 었을 때, 타이탄 생산 시설의 파괴로 인해 본국이 얼마나 막대한 타격을 받았었는가? 그것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런 악몽을 또다시 되 풀이할 수는 없다.”

로체스터 공작은 회의장에 모여 있는 모든 관료들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서슬 퍼런 어조로 외쳤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모두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단축시켜라. 만약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내 직접 반역죄로 처단하겠다. 그리 고 철수 작업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파괴해도 무방하다.”

로체스터의 강압적인 자세에 국무대신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정을 담당하는 수장이 저럴 정도니 그 밑의 관료들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일방적인 지시로 회의는 끝났다.

회의를 마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던 도중 베르딘 후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치레아 대공에 대한 벼룩의 보고는 없었나?”

“아직 없사옵니다, 전하. 크라레인시로 일행을 이끌고 갔다는 것 외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엘프리안을 파괴한 후 치레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판단 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나?”

“현재로서는 없사옵니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그들을 이끈다면 모르겠사오나 상대는 드래곤이옵니다. 도저히 첩자들의 능력으로는 추격 자체가 불가능하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제임스는 분명히 치레아 대공이 미네르바를 용서해 주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갑자기 드래곤이 엘프리안을 파괴했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경은 혹시 짚이는 것이 있나?”

베르딘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잠시 후 로체스터 공작이 말을 이었다.

“크루마의 첩자들에게 연락하여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좀 더 확실하게 알아 보라고 하게. 드래곤이 왜 엘프리안을 파괴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 보라는 말이야.” “옛, 전하.”

급히 자리를 뜨려는 베르딘 후작의 뒤통수를 향해 로체스터 공작이 말했다.

“아아, 그리고…….”

“무엇이옵니까? 전하.”

“용병대장으로부터 연락은 없는가? 그때 연락이 끊어진 이후 새로운 연락이 들어온 게 없는가 이 말일세.”

“아직 없사옵니다.”

“경은 크라레스에 침투해 있는 첩자들에게 연락해서 통신이 끊어진 지점을 최대한 빨리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이르게.”

“옛, 전하.”

“가 보게나.”

베르딘 후작을 보낸 후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는 로체스터의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오래전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했을 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들이 한창 활동하던 그때의 코린트는 대륙 최강의 힘을 자랑했었다. 키에리가 모든 것을 지시했고, 또 그들은 그 지시를 따라서 아무리 불가능해 보 이는 일이라도 해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며 친구들이 하나 둘 자신의 곁에서 떠나고 혼자 남게 되자 로체스터는 너무 외로웠다.

“이 친구야, 지금 자네가 필요해. 나 혼자 코린트를 짊어지려니 너무 힘들군.”

집무실에 앉아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