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20화 – 신의 검을 뽑아 든 성기사단

신의 검을 뽑아 든 성기사단

드디어 마왕의 본거지를 습격하기로 결정된 그날.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과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단, 그리고 다크 일행은 점심 식사 후 공간 이동하여 치레아 공국 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치론에 도착했다. 마법사들이 크라레인시로 갈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진을 만들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각자 시간을 보내며 크루 마와 아르곤에서 보내올 병력을 기다렸다.

다크 일행이 기다리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지면에서 4미터 정도 높이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크루마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네르바는 뛰어난 기사답게 지면에 우아하게 착지한 후 먼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드래곤들에게 차분히 인사했다.

“저것들은 뭐야?”

다크가 자신의 부하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미네르바는 ‘눈치도 빠르군’하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뭘 말하는 거지?”

“네가 데리고 온 떨거지들을 말하는 거다. 나는 분명히 마왕과의 싸움인 만큼 가장 실력 있는 기사들만을 거느리고 오라 말했을 텐데.”

“물론이야. 지발틴 기사단은 가장 우수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크루마의 정예라구. 제2차 제국 전쟁 때, 반 정도를 잃었기에 4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내 말은 근위기사단은 어떻게 했느냐는 말이야. 가장 우수한 기사는 근위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내가 바보야? 하여튼 잔머리 굴리는 데 있 어서는 토지에르와 비슷하군.”

미네르바는 당치도 않다는 듯 깜짝 놀라는 척하며 항변했다.

“잔머리라니,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우수한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구. 얼마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셨지. 선황제께서 도저히 황권을 계속 이어 나가실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선황제께서 황제 폐하의 위를 유지하고 계셨다면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올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신임 황제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현 황제 폐하는 원로원파와 친하거든. 그런 상태에서 근위 기사단을 빌려 달라는 부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내 처지를 이해해 줘. 그리고 내 처지가 이렇게 된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다 너 때문이잖아.”

미네르바는 마지막에 그 책임을 슬그머니 다크에게로 밀어붙였다. 다크도 일단 지은 죄가 있었기에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추궁하지는 않았다. 미네르바의 변명 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네 부하들에게도 공간 이동할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고 해. 아르곤에서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공간 이동할 거니까 말이야.”

“알았어. 그런데 용케도 아르곤을 끌어들였군. 그 녀석들은 타국의 일에 절대 참견을 않기로 유명한데 말이야.”

“글쎄,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별로 어렵지 않았어. 마왕이 나타났으니 병력을 좀 보내 달라고 했더니, 그쪽에서 쾌히 승낙했거든.”

“그래? 이상한 일이군.”

이때 루빈스키가 앞으로 쓱 나서면서 말했다.

“아르곤의 성기사단이 도착하면 그 즉시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아무래도 지금 대략적인 작전을 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키에리는 탐색하듯 루빈스키의 표정을 바라보며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좋은 작전이라도 있소?”

“예, 마왕이 끌어 모은 마물들의 수가 얼마나 엄청난지는 알 수 없지만, 알카사스에 구원차 달려가 본 제 경험으로 미루어 말씀드리지요.”

여기까지 말한 루빈스키는 모여 있는 각국이 자랑하는 기사들을 둘러봤다. 로체스터나 미네르바의 경우 아직까지 직접 마물들과 싸워본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물들은 대단히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 또한 엄청나지요. 그런 적들을 향해서 무모한 싸움을 벌여 봐야 득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 만큼 속전속결이 가장 우선일 것입니다. 마왕군과 접촉하는 그 순간, 그들을 돌파하여 마왕과의 접전을 시작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마왕은 황궁의 지하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최단시간에 그곳까지 돌진해 들어가는 것이지요.”

키에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지하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없지만, 그건 아주 무모한 작전이요. 타이탄의 크기 때문에, 지하 같은 좁은 공간에서 적과 싸운다는 것은 무리요.”

“하지만 그에 따른 이점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마물들의 덩치는 웬만한 타이탄보다도 큽니다. 그런 만큼 좁은 공간이 우리 쪽에만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겁 니다.”

여기까지 들은 미네르바는 눈치 챘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어받았다.

“그러니까 좁은 지역이 방어에는 유리하다는 말이로군요. 일단 침투해 들어간 후, 소수의 기사들이 마물들을 막고 있는 동안 나머지 기사들이 지하로 내려가서 마 왕을 해치우자는 말이죠?”

“바로 그렇습니다.”

루빈스키 대공이 이런 작전을 짠 것은 황제의 구출에 대한 목적이 더 컸다. 다크와 다른 기사들이 마왕을 상대하고 있을 때, 자신은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황제를 구출할 수 있는 것이다. 루빈스키에게는 마왕 토벌보다도 황제의 구출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니, 일단 그렇게 작전을 수행하기로 합시다.”

일단 간단한 작전 토의를 끝낸 후, 그들은 아르곤에서 도착할 기사단을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도착할 것 같았던 아르곤의 기사단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 았다. 그렇기에 기다리다가 짜증이 난 다크는 키에리에게 투덜거렸다.

“이 자식들 혹시, 무서워서 꽁무니를 빼 버린 거 아냐?”

포도주를 마시며 다크가 투덜거리자 키에리는 그녀를 달랬다.

“그건 아닐 걸세. 아르곤은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 마법사가 없으니까 말이야. 아마도 그 때문에 도착이 늦어지는 것 같군.”

“마법사가 없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이동한다는 말이야? 설마 여기까지 말을 타고 오거나 달려서 온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물론 그건 아닐세. 아르곤 제국은 아주 부유한 국가지. 그들은 그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와이번을 사 모으고 있지.”

“와이번? 아, 그 드래곤 닮은 도마뱀?”

키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부터는 그것들을 기사단에 대량으로 배치해서 부족한 기동력을 보충한다고 들었네. 아마도 날아서 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조금 만 더 기다려 보기로 하지.”

“그걸 잘 알면서 왜 아르곤 제국에 미리 마법사를 보내지 않은 거야?”

“이쪽에도 준비할 것이 많아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네.”

“지금이라도 아르곤에 마법사를 보낸다면?”

“글쎄…, 와이번 타고 날아오는 중일 텐데, 지금 마법사를 보내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

다크는 신경질적으로 포도주를 잔에 따르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렇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바로 그때, 카렐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뭐지? 뭔가 엄청나게 많이 날아오는 것 같은데…

다크가 시선을 돌렸을 때, 동쪽 하늘 위에는 수백 개의 점들이 찍혀 있었다. 아직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 그것이 뭔지 알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전투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겠군. 마왕이 눈치 채고 부하들을 보낸 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다크의 말에 키에리가 일어서며 말했다.

“마왕군이라면 북쪽에서 내려올 가능성이 크겠지만, 뭐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 준비해 둬서 나쁠 것은 없겠지.”

코린트, 크루마, 크라레스의 연합군이 전투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늘 위의 점들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확실하게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단이다!”

로체스터 공작이 상대의 복장이나 문장을 보고 외치자, 모두들 꺼냈던 타이탄들을 돌려보냈다. 그런 와중에 수백 마리나 되는 와이번들이 서서히 착륙을 시작했 다. 와이번 위에는 두 명씩 타고 있었는데, 그런 와이번 4백여 마리가 일제히 착륙하자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대부분 와이번들이 등에 메고 있는 안장이 가죽에 금실이나 은실 따위를 써서 멋을 낸 정도였지만, 그중 몇 마리는 아예 도금을 했는지 안장 전체가 금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금색 안장이 달려 있는 와이번에서 내린 유려한 외모의 남자가 천천히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다가오자, 그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본 듯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으 로 인사했다.

“안녕하시옵니까, 교황 성하!”

“오오, 로체스터 경. 경이 보낸 공문을 받자마자 10개 성기사단을 이끌고 서둘러서 달려왔다네. 짐이 직접 성전에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될 줄이야, 이것도 다 샤이하드 님의 은혜로다.”

말을 하던 교황은 마음의 격동을 참기 어려운 듯 감격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언제 출발할 건가? 아직 다 안 온 것 같은데…….’

“다 도착했사옵니다, 교황 성하. 기습을 통한 단기 결전을 노리고 있기에 각국의 최고 정예 기사단들만 모여 있사옵니다.”

“이게 다라고? 신성한 성전에… 겨우 이게 다라고?”

허탈한 듯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교황은 이윽고 결심한 듯 외쳤다.

“이렇게나 마왕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다니…, 어쩔 수 없군. 짐이 직접 지휘하는 수밖에. 경들은 빨리 출발 준비를 서두르라. 내 직접 마왕에게 신께서 존재하심을 알리겠노라.”

그런 다음 교황은 자신과 함께 온 성기사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 신의 뜻을 펼친다는 자신의 기분에 도취해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광기에 어려 있었고, 그것을 듣 고 있는 성기사들의 태도 또한 광신도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교황의 뒷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다크가 로체스터 공작에게 소곤거렸다.

“저 멍청한 녀석은 뭐야?”

“아르곤의 지배자, 즉 교황이오.”

“그런가? 나는 교황이라고 해서 상당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저건 겨우 그래듀에이트를 통과했음직한 형편없는 놈이잖아.”

다크의 말에 로체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교황은 검술 실력 같은 객관적인 자료로 뽑는 것이 아니오. 신앙심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선출되는 것이지요.”

다크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 신앙심. 그래서 저 모양이군. 이쪽 기사들의 실력도 한눈에 못 알아보는 주제에 숫자만 믿고 까부는 것을 보니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않소. 전쟁터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아 주길 바라오. 마법사들의 일이 좀 더 늘어나겠군. 그건 그렇고, 저 많은 와이번들도 공간 이동을 시켜야 하 나?”

로체스터 공작은 미간에 줄을 그으며 중얼거렸다.

마왕 정벌대는 크라레인시 외곽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저마다 타이탄들을 꺼냈다. 아르곤에서 교황과 법왕 두 명이 더해진 10개 성기사단이 가세한 상태였기에 타이탄의 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교황은 자신의 전용 타이탄 ‘아르곤’을 꺼냈다. 아르곤은 실전용이라기보다는 교황을 위한 의전용으로 제작된 너무나도 아름다운 타이탄이었다. 어깨까지의 높이가 5.6미터나 되는 이 타이탄은 출력은 1.5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드래곤 본과 와이번 본을 대량으로 사용했기에 무게는 67톤밖에 나가지 않았다. 교황은 타이탄의 검을 높이 빼 들며 외쳤다.

“샤이하드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천천히 아르곤의 검이 크라레인시를 향해 세워졌다.

“신의 뜻을 받들어 모두 돌격하라!”

4백여 명의 성기사들이 오라 소드를 뽑아 들고 괴성을 질러대며 와이번에 탄 채 하늘을 날아서 돌격하는 가운데, 3백여 대의 타이탄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 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다크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군. 영광은 무슨 얼어 죽을 영광.”

“신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저런 믿음이 생기는 것이겠지. 마왕이나 마족 같은 미지의 적에게 생기는 두려움도 저런 믿음이 희석시키는 거야. 저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신념이 굳게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키에리가 빙그레 웃으며 다크에게 말했다.

“하지만 승리는 신념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