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22화 – 그 후, 2년 뒤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 재건)

그 후, 2년 뒤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 재건)

마왕의 주력 부대 침공을 받았던 알카사스가 군사적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크라레스는 수도였던 크라레인시가 전쟁의 주 무대가 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대마왕 크로네티오와 최강의 드래곤이었던 아르티엔이 격전을 벌이면서 수도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수도 재건의 구심 점이 되어야 할 황제 또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크는 루빈스키 대공에게 다음 대를 이을 황제가 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대신 그는 황제의 유일한 혈족인 아리아스 폰 그래지에트 황자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선황제의 모습과 체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아리아스를 황제로 삼 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결정이었다. 제1황위 계승자였던 엘리안 황자가 크루마에 세뇌를 당해 황위 계승권을 잃어버린 후, 새로이 황위 계승권을 이어받 은 건 둘째인 아리아스가 아니라 황제의 먼 친척이었던 타일러와 데이비드였다. 타일러는 수도에 남아 있었기에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고, 데이비드는 아리아 스와 함께 타이렌 제국으로 피난 가 있었기에 명백히 제1황위 계승권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도 심약한 탓에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했던 아리아스를 다음 황제로 선택한 루빈스키의 결정은 조금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은 문제점을 지니 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빈스키가 아리아스를 다음 황제로 결정했고, 또 다크가 그 결정에 찬성했다. 이제 크라레스에 단 둘만이 남아 있는 대공들이 아리아스를 밀고 있는데, 어 떻게 데이비드가 자신에게 제1황위 계승권이 있다고 깝죽댈 수 있겠는가.

아리아스가 황제가 된 후, 크라레스는 두 명의 대공들을 주축으로 해서 눈부신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치레아 대공의 도움이 아주 컸다. 물론 그녀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크라레스 제국은 파괴된 크라레인시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수도를 방어할 만한 초대형 방어 마법진도 건설해야 했다. 황궁은 물론 도로, 병원, 공장 등등 별의별 것들을 모두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에 걸쳐 코린트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고, 마지막에는 대마왕 크로네티오와 전쟁을 벌이면서 수도까지 통째로 날아가 버린 크라레스에 그럴 만한 여력 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겨우 2년 만에 수도 건설 작업을 대충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실 속사정을 알고 나면 전혀 기적이 아니었다.

수도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아르티엔의 레어에 쌓여 있던 엄청난 금은보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걸 꿀꺽하고 싶었던 아르티어스 어르 신이 다크의 부탁 때문에 피눈물을 삼키며 포기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황궁의 내부 장식을 담당할 우수한 장인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솜씨 좋은 드워프들을 잡아 오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리 고 수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데는 수백 명의 우수한 마법사들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 또한 아르티어스 어르신 혼자서 간단히 발동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없었다면 2년 만에 수도를 어느 정도 재건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집무실은 작업 효율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만큼 넓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의 1백여 명에 가까운 관료들이 저마다 책상에 앉아서 꽁지가 빠지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아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책상 에는 서류 더미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기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정면에서는 아예 볼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언제든지 훔쳐볼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책상 옆에 또 다른 책상 하나를 놔두고 거기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단 말씀이야.”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편안하게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에서 포도주를 즐기며 작업 감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책상에 는 다론이 앉아서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호비트는 쥐어짜면 짤수록 일을 열심히 한다는 진리 말이지. 그걸 치레아에서 미리 깨달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가 이걸 모두 혼자서 처리해야 할거아 냐? 역시 늙으나 젊으나 인생을 편안하게 즐기려면 배워야 한다니까.”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며, 황궁 앞의 거대한 정원에서부터 짙은 꽃향기를 실어 오고 있었다. 할 일도 많았지만, 스트레스를 풀 대상도 많았다. 수틀리면 한 번씩 쥐어짰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영 굼뜬 움직임을 보이던 호비트들도 이제는 눈빛까지 완전히 달라졌지 않은가? 잠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왠지 공포를 수반 한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바로 그때,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리며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이, 이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후다닥 일어섰다. 그런 다음 자신의 널찍한 책상으로 달려가더니 그곳에 앉아 있는 다론의 멱살을 다짜고짜 움켜잡았다.

“헉! 왜 그러십니까, 어르… 으아악!”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다급한 김에 다론을 창밖으로 집어 던진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는 척했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다 크가 안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적인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다크는 쓱 들어오더니 아르티어스 옆에 서서 방글거리며 말했다.

“비교적 한가하신 것 같네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분개한 목소리로 따졌다.

“뭐야? 네 눈에는 내가 한가한 것처럼 보이냐? 이렇게 많은 서류 더미가 쌓여 있는데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크에게 그런 잔꾀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거 글씨체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아빠가 글씨를 이렇게 못 쓰지는 않잖아요.”

아르티어스가 당황해서 다크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한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서류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얘야, 그건 그렇고, 이것 좀 봐 주겠냐? 하수도를 건설하는데 말이다. 이걸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하는 안이 올라와 있거든. 내 생각에는 조금 돈이 많이 들더라 도배관을 곧바로 강에다가 연결할 것이 아니라, 그사이에 작은 늪지대를 만들고 그리로 연결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말이다. 그렇게 하면 강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 을 수 있지.”

“아빠 좋을 대로 하세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다급히 다크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다크는 간단하게 대답하면서 창가로 걸어갔다. 그런 다음 창밑을 바라봤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집무실 은 2층에 있었기에 아래쪽으로 아름답게 꽃이 핀 황궁의 주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창밑에는 큰 대자로 뻗어 있는 다론의 뒤통수도 보였다.

“저 녀석은 누구죠?”

“누, 누구 말이냐?”

아르티어스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이어 정색을 하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밑을 내려다보니 다론이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짐짓 화가 난 듯 외쳤다.

“아니, 저 녀석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저기 숨어서 낮잠을 퍼자고 있었군. 내 이놈을 당장…

“아빠가 집어 던진 거잖아요. 그리고 간이 붓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저기서 낮잠을 자겠어요?”

“…..”

아르티어스가 아무 말도 못하자, 다크는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아랫사람들 교육도 대충 끝나지 않았어요? 아빠가 없어도 모두들 열심히 일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글쎄, 하지만 내가 감독을 안 하면 모두들 꾀를 부리니까 하는 말이지.”

“꾀 안 부릴 거예요.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안 그래도 뭔가 약점을 잡힌 것 같았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물어봤다.

“뭔데?”

“저쪽에 앉아 있는 가스톤 있잖아요.”

다크는 저 뒤쪽에서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스톤을 가리켰다.

“저놈을 빼달라고? 안 그래도 인력이 모자라는데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잘 교육시켜 놓은 녀석을 빼 가면 나보고 어떻게 일하라는 거냐?”

“안 되면 젊고 튼튼한 놈으로 한 명 더 뽑아 드릴게요. 그건 그렇고 저 가스톤에게 마법 교육 좀 시켜 주세요.”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하다가 곧이어 생각을 고쳐먹고 희번득이는 눈빛으로 가스톤을 쏘아보며 음흉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르티어스의 눈길을 슬쩍 훔쳐본 가스톤은 부르르 떨더니 재빨리 서류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제자? 아르티어스는 절대로 호비트를 제자 따위로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가 아니라 공인된 스트레스 발산 대상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원래가 수련이라는 것은 약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니까.

“마법 교육이라……. 흐흐흐, 알겠다. 누구 부탁인데 내가 거절하겠느냐? 단기간에 호비트들이 말하는 대마법사라는 것으로 만들어 주지.”

그가 의외로 간단하게 승낙하자, 다크는 믿어지지 않는지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누구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냐? 걱정 마라. 확실하게 교육시켜 주지.”

“그럼 부탁드려요. 저는 그동안 팔시온과 미디아의 검술 교육을 좀 시켜야겠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내가 직접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고 말이죠. 철저하게 단련시켜서 마스터 정도로 만들면 홀가분하게 여행이라도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물론이지.”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마음잡고 가스톤과 팔시온, 미디아를 교육시키기 시작한 지 5년이 흐르자, 다론은 여태까지 숨겨 놓고 있었던 마법책을 다크에게 건네줬다. 다론은 처음에는 조국의 안위를 생각하다 보니 다크에게 그 책을 건네줄 수가 없었다. 다크가 떠나 버린다면, 약체화된 크라레스를 코린트나 크루마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에르 대신 수석 궁정마법사가 된 다론은 다크에게 마법서를 건네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에게 허구 한 날 두들겨 맞는 것도 참기 힘든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선뜻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국의 안위도 문제였지만, 대마왕과의 격전 때 수도가 통째로 파괴

되면서 마법서는 소멸되었다고 다크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뒤늦게 그 책을 건네줬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마음을 모질게 먹고, 다크에게 마법서를 건네줬다. 제국도 안정기에 들어간 상태였고, 두 명의 마스터가 새로이 추가되었기에 조국의 미래는 이 애물단지들이 없어도 밝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에게 쥐어 터지는 것도 이제 한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면, 그래도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책을 건네준 그날 다크에게 밤새도록 두들겨 맞았지만…….

“드디어 떠나는구나.”

“응, 그동안 즐거웠어. 그런데 가스톤은?”

“이상하네. 어제 말했는데… 어, 저기 오는군.”

다크는 가스톤을 보면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옛날부터 살이 별로 없었지만 5년간 못 본 사이 가스톤은 아예 미라처럼 깡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독기가 서린 듯 불을 뿜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다크는 가스톤의 교육을 아빠에게 부탁한 것이 잘한 일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한동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간단하게 작별을 나눈 후, 아르티어스는 마법서를 들여다보며 뭔가 궁리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음을 정한 듯 쓱쓱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주문을 외우기에 앞서 옆에 서 있는, 자 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이별이로구나, 아들아.”

아르티어스는 눈물 어린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다크를 바라봤다. 그 모습 하나하나까지도 머릿속에 기억해 두려는 듯. 그러다가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크를 와락 안으며 사정했다.

“제발 나도 같이 가자, 응? 아버지도 돌아가신 지금, 나한테는 너밖에 남아 있지 않잖니.”

다크는 자신을 안은 채 슬픔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자기 때문에 아르티엔이 죽은 것은 빼놓고라도, 여태껏 이렇게 정이 든 아르티어스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크는 손을 내밀며 다정스럽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려요, 아빠.”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눈물에 젖은 채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새하얀 빛이 번쩍이며 서서히 그들의 모습을 감춰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