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23화 – 숨겨진 뒷이야기 (15권 끝)
숨겨진 뒷이야기
아르티어스가 다크와 함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간 지 20년하고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이런 제기랄! 그 자식은 왜 공간 이동 좌표도 잘 모르는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사는 거야? 덕분에 물어물어 찾아오느라고 힘만 들었잖아.”
사실은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레어에 있는 엘프들을 족쳐서 공간 이동 좌표가 기록된 책을 강탈한 것이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로서는 아르티엔이 있을지 도 모르는 대공 관저의 상공에 공간 이동할 배짱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치레아 공국의 수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나타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친구인 아르티어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이곳에 온 것 이다.
“그건 그렇고, 설마 어르신이 그놈과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
한참을 수도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수십 명의 말 탄 병사들의 행렬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행인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열심히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러 대고 있었 다.
“흥! 무슨 개선식이라도 하는 모양이군. 호비트라는 것들은 도대체가 자기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이때 옆에서 개선식을 지켜보고 있던 행인들이 두런두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후작 각하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야. 엄청나게 많은 오크들을 한번에 토벌하셨다고 하더군.”
“저 오우거같이 우람한 덩치를 봐. 그딴 오크들 따위 한주먹이면 끝장나지 않겠어? 하여튼 이 일대에 몬스터들이 씨가 마른 것도 다 이해가 가는 일이지.”
“이 사람아, 후작 각하만 굉장한 줄 아나? 저것 봐. 후작 부인의 덩치도 만만치 않지? 예전에는 여자의 탈을 쓴 오우거라고 불렸다고 하더라구. 저 모습만 척 봐도 그 무서운 마도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셨다는 게 이해가 간다구.”
행인들의 대화를 듣던 브로마네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도 전쟁? 웃기고 있네. 무슨 얼어 죽을 마도 전쟁이야. 발록이라도 한 마리 튀어 나왔나 보지?”
비웃음을 흘리며 발길을 돌리던 브로마네스는 병사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골드 드래곤 두 마리가 어깨를 나란 히 하고 히벌쭉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허참, 그놈 취향 한번 희한한 놈일세. 자신을 저렇게 그려 놓고 싶을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던 브로마네스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니지, 어르신이 계신데 감히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저 둘 중에 하나는 어르신임이 분명한데 말이야.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아르티어스의 성격이 어디 서 왔겠어?”
주변을 살피며 조심조심 수도 안으로 들어간 브로마네스는 감히 대공 관저에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술집에서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냥 돌아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던 브로마네스는 이윽고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더 이상 레어에서 시간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엘프들을 쥐어박으며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르티엔을 기다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르티어스 있나?”
으리으리한 대공 관저에 도착한 브로마네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문에 서 있는 병사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 말에 병사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대를 살펴봤다. 주위를 기웃거리는 것이 꼭 범죄형인 듯했지만, 아무래도 저 우람한 몸매에 귀족적인 얼굴, 게다가 화려한 의상을 걸친 상대를 함부로 대하기는 힘들겠다 고 결론지었다.
“아르티어스? 이름만 말해서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는 것이 확실하오.”
“이런…. 저런 말단 병사 놈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어쩐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브로마네스는 한 가지 이름이 더 생각난 듯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 다크라는 사람은 있나? 다크 폰 치레아라는 계집 말이야.”
그 말에 병사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찼다. 감히 대공 전하께 계집이라는 상스러운 용어를 사용하다니…….
“이런 무엄한 놈! 네놈을 당장 체포하겠다.”
브로마네스는 황당했다. 이놈의 버릇없는 병사를 한주먹에 박살 내 버린다면 속이 다 시원하겠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다간 어쩌면 어르 신에게 들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혹시나 여기에 어르신이 계실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힘든 것이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브로마네스는 짐짓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라서 무심결에 버릇처럼 말한 것뿐일세.”
“예? 설마…….”
잠시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던 병사는 뭔가 생각이 난 듯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상관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잠시 후 기사 하나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대공 전하를 뵈려고 오셨습니까? 저는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케빈 패터슨이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대공 관저의 거대한 응접실에 안내된 브로마네스는 열심히 주위를 살피며 혹시라도 아르티엔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때, 한쪽 문이 활 짝 열리며 근엄한 모습의 늙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치레아 공국의 궁정을 맡고 있는 카르토 백작이라고 합니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전하를 뵈러 오셨다구요?”
“그렇소. 아, 그리고 혹시 아르티어스라고 알고 있소?”
“아, 르, 티어스!”
잠시 생각하던 카르토 백작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급히 반문했다.
“호, 혹시 골드 드래곤이신 아르티어스 어르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토 백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브로마네스가 가만히 보니까 낮에 개선식에서 앞장서서 말을 타고 가던 바로 그 사내였다.
“저는 현재 치레아 공국의 임시 총독을 맡고 있는 팔시온 폰 엘마리노라고 합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친구라네.”
그 말에 팔시온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치, 친구란 말씀이십니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위, 위대한 분이시여.”
팔시온은 곧장 뒤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카, 카르토 백작! 당장 최고급 포도주와 음식을 준비하라고 이르시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브로마네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팔시온은 그를 귀빈실로 안내했다. 그 후 음식들이 줄줄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브로마네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작 부인께서 영애와 함께 드십니다.”
브로마네스가 보니 웬 오우거 찜쪄 먹을 만큼 등발이 좋은 계집 둘이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들어왔다. 워낙 우람한 그녀들이었기에 한 발씩 움직일 때마 다 드레스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짙게 화장을 한 그녀들의 얼굴은 너무 급하게 화장품을 처발랐는지 차마 보기조차 끔찍했다. 브로마네스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차라리 오우거를 보는 게 낫겠군. 이건 고문이야.”
“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제 사랑하는 아내인 미디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들의 귀염둥이인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팔시온의 소개에 따라 오우거 두 마리가 인사를 건넸다. 브로마네스는 차마 그녀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술만 연신 들이켰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브로마네 스는 그제야 기회를 잡고,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혹시 아르티어스는 어디에 있나?”
“아르티어스 어르신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거든. 그런데 설마 여기에 아르티엔 어르신이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
브로마네스가 못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하자 팔시온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마도 전쟁 때 일을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내가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레어에 처박혀 있었거든.”
그 말에 팔시온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서 모르셨군요. 얘기를 하자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그때…….?
콰콰쾅!
갑자기 치레아 공국 대공 관저의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브로마네스는 팔시온과 미디아, 그리고 그 오우거 같은 계집을 먼지 나게 두들겨 팬 후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아르티엔이 세상을 떠난 지금, 더 이상 자신을 핍박할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공간 이동을 하지 않고,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낸 채 자유롭게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것이 다.
치레아의 대공 관저에서 그 거대한 몸집이 날아올랐기에 밑에 있던 수많은 호비트들이 자신을 보고 환성을 질러 대는 것이 보였다.
“응? 이곳은 다른 도시들과 달리 호비트들의 반응이 조금 특이하군. 드래곤을 보고 저렇게 좋아할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야.”
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드래곤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존재였다. 밑에 있는 호비트들이 수호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아우성을 치며 구 경하는 가운데, 브로마네스는 그 거대한 몸집으로 점점 더 하늘 높이 올라갔다.
얼마나 오랜만에 이렇듯 마음껏 날아 보는 것인가? 그놈의 포도주 아홉 병 때문에 무려 30년을 레어에서 벌 받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브로마네스였 다.
미네르바의 가슴은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흥분 때문에 폭발할 것만 같았다. 발밑으로 보이는 거대한 엘프리안시의 위용. 아직까지 주민들을 입주시키지 않았기에 빈집들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과거 그 번영을 누렸던 엘프리안시의 전성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대마법사 안피로스의 도시 방어 마법진의 설계도대로 외곽에 초대형 방어 마법진을 갖추는 데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금이 소모되었던가. 그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 새로운 황궁은 얼마나 웅장하고 멋진가. 모든 사람들이 서쪽 대륙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황궁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서 30년이라는 시 간 동안 공들여 건설한 것이다.
이제 일주일 후면 대 무도회를 시작으로 황제는 프루니아에서 이곳 엘프리안의 황궁으로 이주하게 된다. 황궁과 초대형 방어 마법진의 건설을 위해 그 어떤 시민 들의 이주도 아직까지 허용되지 않았지만, 천도와 동시에 주민들의 이주도 시작될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흥청거리는 엘프리안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엘프리안시의 한쪽에는 드넓은 공업 지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곳의 가 장 핵심에는 타이탄 생산 공장이 들어설 것이다.
여태껏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예 기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었다. 주변 국가들이 정예 기사들의 상당수를 마도 전쟁에서 잃었 지만, 크루마는 아니었다. 이제 10년만 더 고생하면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할 것이다. 10년만… 그것 때문에 강력한 군대와 기사단을 갖춘 서쪽 대륙 최강의 제국 크루마의 수도에 어울리게 엘프리안의 건설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참 상념에 잠기던 그녀는 밤하늘에 뭔가 이상한 그림자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했다. 새?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도가 너무 높았다. 그리고 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브로마네스는 오랜만에 찾은 자유를 만끽하며,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르티어스 때문에 이제는 사라져 버린 엘프리안 옆에 건설되어 있는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
이제 더 이상 호비트들이 내는 신경 거슬리는 소음은 들려오지 않겠지. 그때 브로마네스는 보고야 말았다. 저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말이 다. 그리고 그 방어 마법진의 중앙에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궁전. 아스라한 달밤에 보는 것이라서 그런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후후, 내가 처박혀 있는 동안에 건설한 것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또다시 슬금슬금 들볶아서 금은보화라든지, 최고급 포도주 따위를 마음껏 빼앗을 수 있겠는데?” 흐뭇한 마음으로 황궁을 바라보던 브로마네스의 눈에, 발코니에 나와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호비트 계집이 보였다. 그 계집을 보자마자 순간 브로마네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 저년은! 이런 망할 계집. 저년이 준 불량품 때문에 내가 30년씩이나 그 고생을 했는데. 딴 놈은 다 용서해도 저년만은 도저히, 아니 절대로 용서 못 해!’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대로 날씬해 보이던 브로마네스의 몸집이 한순간 돼지처럼 뚱뚱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그의 입에서 폭발적인 붉은 광채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30년 동안 쌓이고, 쌓이고 또 쌓였던 수많은 울분과 함께.
『<묵향16 – 묵향의 귀환>에서 계속』